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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2] 내 생각, 네 생각(6)
스카이 엔터 이혜윤 상무는 우현의 말에 코웃음을 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뭐, 시간이 답을 해주겠죠. 그럼 잘 해봐요.”
자리에서 일어난 그녀는 늘씬한 몸매에 딱 달라붙는 짧은 원피스를 입고 있어 회사원이라기보다는 피팅모델에 더 어울렸다. 그녀의 자신감이 외모에서 오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녀가 가게를 나가자 진명이 쪼르르 다가왔다.
“웃기는 년인데요? 도대체 어렸을 때부터 뭘 먹고 자라면 저렇게 건방져진대요?”
“겉으로만 보면 금수저로 태어나서 실패 한번 안하고 곱게 큰 것 같기는 한데, 사람 일은 모르는 거니까.”
딱 한 가지 걱정되는 게 있다면 그녀가 자신과 같은 능력을 가지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부분이다. 물론 아닐 거라고 생각하고 있지만 그게 아니라면 뭘 믿고 저리 자신감을 보이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가죠. 그나저나 우리 지나 믿음직하죠? 하하.”
“그래, 고맙다.”
너스레를 떨어대는 진명의 엉덩이를 툭 치며 가게를 나서 체육관으로 향하니 유지나가 아직 건물에 들어가지 않고 있었다. 주차장 옆에 있는 간이 정자의 그늘에 앉아서 다가오는 우현을 빤히 보며 기다리는 것이 할 말이 있는 것 같다.
“기다리고 있었어?”
“네. 앉으세요.”
우현이 그녀의 반대편 나무의자에 앉자 잠시 생각을 정리하던 그녀가 우현을 직시했다.
“솔직히 기분이 안 좋았어요. 대표님이 오셨다는 건 저를 믿지 못해서라고 생각 되거든요.”
“어… 그건 아니야. 혹시라도 이런 일이 있을까봐 미리 얘기해주러 온 건 맞지만 너를 못 믿기 때문이 아니라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는 알아야 너도 대응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거든.”
생각지도 못한 지나의 반응에 식은땀이 흘렀다.
“흐음… 미안해요. 제가 오해했나봐요. 사실 그래요. 별이나 유니처럼 개국공신이 아니다보니까 괜히 차별받는 게 아닌가 생각한 적이 있거든요. 일종의 피해의식이랄까? 하핫. 웃기지만 그래도 은근히 신경 쓰였던 건 사실이에요”
지나는 우현의 말에 수긍하며 도리어 미안한 얼굴을 했다.
“에이, 그런 생각 하지 마.”
설마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지는 전혀 몰랐다. 평소 그런 생각을 해 왔다면 오늘 우현이 찾아온 것이 섭섭할 수는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솔직히 말할게요. 아까 흔들리긴 했어요. 대표님이 오시기 전까지 얼마나 사람의 마음을 흔들던지… 표정관리 하느라 굉장히 힘들었어요.”
“그, 그래?”
그녀의 말은 가슴을 철렁이게 했다.
“2년만 고생하면 일 년에 수십 억 수입을 보장하는 것처럼 말하는데, 아마 혹하지 않을 사람 없을 거예요. 음… 만약 내가 당장 돈이 급하지 않았다면 대표님한테는 미안하지만 꽤나 진지하게 고민해봤을지도 몰라요.”
그 얘기는 진지하게 고민하지 않을 만큼 확고한 결심이 섰다는 뜻이니 참으로 다행이다. 유지나는 민상욱과는 차원이 다른 배우다. 그녀가 넘어간다는 건 회사와 우현 입장에서 꽤나 아픈 일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네가 상황이 안 좋다는 게 나에게는 다행스러운 일인 거네. 이거 참… 좋아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좋아해도 돼요. 민유리 작가님과 드라마 하면서 출연료도 들어왔고 이제 곧 있으면 ‘붉은 여우’ 크랭크인 들어가니까 고비는 넘긴 거나 다름없거든요. 그리고 많이 배웠어요. 배우로서 작품을 한다는 게 얼마나 소중한지도 깨달았고 좋은 사람들과 같이 일한다는 게 큰 복이라는 것도 알았어요. 그래서 아무리 좋은 조건을 걸어도 안 갈 테니 걱정할 필요 없어요.”
“하하, 고맙네.”
“제가 대표님을 기다린 건 제가 아니라 다른 친구들 때문이었어요. 별이와 유니는 대표님과 각별한 사이라 문제가 없을 테지만 아직 어리기 때문에 부모님의 영향력을 무시할 수 없어요.”
“저쪽이 별이와 유니 부모님을 공략할 거라는 말이지?”
“네, 저 역시 바로 그런 경우였어요. 항상 사고만치는 아빠를 윤재우 실장이 꼬드겼거든요. 나중에 들어보니 글쎄 현금으로 계약금 1억에 외제차를 아빠가 받았다고 하더라구요. 그리고 그게 전부 제가 받을 수당에서 빠져나갔죠. 물론 아빠는 관심도 없었겠지만. 하여튼 그래요. 특히 마음이 약한 아이들은 결국 부모님이 하자는 대로 하게 되어 있거든요.”
이건 우현도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부분이다.
“그래, 그럴 수 있겠다. 고마워. 생각하지 못했었는데.”
“전 이만 들어갈게요. 오늘 해야 할 운동량을 생각하면 많이 늦었거든요.”
우현의 감사인사를 받기 쑥스러운지, 아니면 한순간이나마 흔들렸던 마음 때문에 미안했는지 지나는 손을 흔들고는 이내 체육관으로 들어갔다.
우현은 진명에게 지나를 맡기고 사무실로 복귀했다. 그리고 곧바로 유니와 별이 부모님께 보낼 선물세트를 검색해 꽤나 금액도 높은 것을 골라 주문을 완료했다. 뿐만 아니라 별이와 유니 부모님께 전화를 걸어 저녁 약속도 잡았다.
“미리 연락도 드리고 했어야 했는데요. 워낙에 바쁘다보니 이제야 저녁이라도 할 수 있겠네요, 하하하. 그럼요, 별이 촬영 잘 하고 있고 이번 드라마가 마무리 되면 앞으로는 주연배우로 나서게 될 겁니다. 네, 그럼요. 그럼 그 때 뵙겠습니다.”
“아이고, 유니는 소주 광고 절대 안 찍겠다고 했잖습니까? 그럼요. 주류 광고 말고 요즘 게임 광고도 꽤나 수입이 괜찮습니다. 현재 그 쪽으로 협의 중에 있으니까 곧 답이 올 겁니다. 이번에 앨범 준비하는 게 잘 되면 광고는 지금보다 더 폭발적으로 밀려들어올 겁니다. 하하, 네. 당연히 제가 대접해야죠.”
전에는 유니 아버지의 퉁명스러운 말투에도 별 생각이 없었지만 이제는 조금이라도 기분이 상할까 염려되는 걸 느끼니 참 사람 마음이 간사하다. 어쨌거나 그렇게 부모님들과 만나 친목을 다지고 앞으로의 계획을 차근차근 이야기해주니 그냥 밥이나 얻어먹으러 왔던 부모님들도 우현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확실히 지나의 조언이 도움이 된 게 분명했던지 일주일이 지나 별이가 우현에게 문자를 보내 자신의 부모님께 스카이 엔터에서 만나자고 했었다는 말을 전했다. 하지만 부모님은 별이의 의견을 듣고 이내 그들과는 만나지 않았다고 하니 그제야 비로소 가슴을 쓸어내릴 수 있었다. 급한 불은 껐으니 당분간은 별일 없을 것이다.
또 다시 시간은 빠르게 흘러 유니는 1월까지 이어지는 몇 개의 시상식에 더 참석해 여러 개의 트로피를 추가했다. 별로 보내기 싫었던 ‘골든마이크’ 참석차 중국도 다녀왔고. 유니와 별이가 받은 트로피 중 몇 개는 회사에 비치해두었다. 역시 트로피를 세워두니 회사가 테가 나는 것이 보기 좋다.
유니는 시상식 참석 이외의 시간에는 앨범 작업에 몰두했다. 우현이 앨범 수록곡으로 정한 10곡을 수정하는 데에만 1월이 다 지나가고 있었다.
유니가 좋아하는 떡볶이와 스무디를 사서 녹음실에 들렀다. 뜨겁고 매운 음식과 차갑고 달달한 음료는 최고의 궁합이지, 아무렴. 예상대로 유니는 격하게 반긴다.
“역시 대표님 센스 짱!”
“그래, 내 손에 이 게 들려있어야 하겠지.”
테이블 위에 간식 봉지를 놓자마자 유니는 잽싸게 꺼내 능숙하게 뜯는다.
“오오, 역시 ‘떡튀순’이 진리죠.”
“호준 씨가 뭐 좋아하는지 몰라서 일단 유니 좋아하는 걸로 샀어.”
“저도 분식 좋아합니다.”
“떡볶이 싫어하는 사람은 없죵. 우리 일단 먹으면서 얘기해요.”
유니는 긴 이쑤시개로 오징어튀김을 쿡 찍어서 떡볶이 국물에 담갔다가 눈치를 본다.
“눈치 보지 말고 먼저 먹어. 너 먹으라고 사온 거니까.”
“크큭, 그럼 먼저 한입 하겠습니다요.”
유니는 먹는 것도 참 귀엽다. 복스럽게 잘 먹기도 하고. 저렇게 잘 먹다가 컴백할 때가 되면 또 다이어트 한다며 쫄쫄 굶어대겠지.
“그래, 앨범 작업 해보니까 어때?”
“잘 안 되고 막힐 때는 힘들기도 한데, 재미있어요. 그럴수록 더 잘하고 싶은 거 있죠.”
조금 전에 튀김을 넣은 것 같은데 떡이 또 들어간다. 그새 다 삼킨 건지 같이 먹는 건지. 그래도 또 말은 잘 한다.
“그래, 욕심 많으면 좋지. 아참, 졸업식은 언제니?”
“2월 14일이요.”
“음, 기억해둬야겠다.”
“오시려구요?”
“그럼 가야지.”
“헤헷, 이런 관심은 참… 감사합니다.”
장난기 어린 얼굴로 꾸벅 고개를 숙인다. 귀여워서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간식 타임이 끝나고 스무디를 하나씩 입에 물고 수정된 10곡의 곡을 다 들어보았다. 느낌이 애매한 멜로디들을 조금 더 선명하게 수정한다고 하더니 확실히 더 좋아졌다.
“음… 곡들의 색깔이 확실히 정해진 것 같네. 좋아. 타이틀 곡은 생각해봤어?”
호준이 스무디를 한 모금 삼킨 다음 답한다.
“처음 세 곡 중 하나를 타이틀로 하면 좋을 것 같아요. 봄 느낌도 물씬 풍기고 유니한테 어울리기도 하고 무엇보다도 귀에 와 닿는 멜로디니까요.”
“그래, 나도 그렇게 생각해. 특히 난 세 번째 곡이 확 와 닿던데. 호준 씨 생각은 어때?”
“네, 저도 세 번째 아니면 첫 번째 곡이 좋을 것 같네요.”
“저는 첫 번째 곡이 좋아요.”
유니는 벌써 애플망고 스무디를 거의 다 비운 채 생글거린다.
“그래? 두 곡을 나한테 줘. 여러 번 더 들어보면서 고민해봐야겠다.”
호준이 우현의 핸드폰에 곡을 옮겨주었다. 그 때 마침 세동이 들어온다.
“대표님, 오셨어요?”
연말이 지나고 나니 푸석했던 세동의 얼굴도 조금 폈다. 유니만큼이나 세동도 피곤했으리.
“그래, 밥은 먹었어?”
“네, 먹었습니다. 컴백 팬싸인회 장소 섭외됐습니다. 서울, 부산, 대전, 광주, 그리고 마지막에 서울 한 번 더.”
“그래, 수고했다.”
우현과 말을 하다 뒤에 놓인 떡볶이 봉지를 발견한 세동의 눈이 가늘어진다. ‘이놈 잡았다’라는 표정으로 유니를 쳐다본다.
“조금밖에 안 먹었어. 대표님이 사오셨는데 그럼 안 먹나?”
유니는 빠져나가긴 힘들다고 판단했는지 묻기도 전에 먹었다고 인정은 하되 일단 우현의 핑계를 댄다.
“그러면서 스무디 컵은 왜 슬쩍 밀어놓는 거냐?”
“아니, 뭐…”
누구의 편도 들어줄 수 없는 상황. 괜히 사왔나 싶기도 하고. 다이어트식으로 사올걸 그랬나, 흠흠. 이런 건 대표인 우현도 세동의 눈치가 보인다. 이럴 땐 시선을 돌려주는 게 좋지.
“유니, 시집 읽어?”
유니 가방 위에 있는 시집을 집어 들었다. 놓칠세라 우현의 구조 손길을 잡는다.
“아, 그거 작사의 영감을 얻기 위해 읽고 있어요. 이렇게 좋은 시가 있더라구요.”
얼른 세동의 눈길을 피해 우현의 옆으로 와서 붙는다. 시집을 넘기며 몇 개의 시를 펼쳐보였다. 마침 세동에게 전화가 걸려와 세동이 밖으로 나가자 유니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벌떡 일어났다.
“먹고 나서 바로 치웠어야 했는데, 이런 멍청이!”
역시, ‘안 먹었어야 했는데’가 아니라 ‘바로 치웠어야 했는데’가 나온다. 유니답다. 부랴부랴 떡볶이 봉지와 스무디 컵까지 챙겨서 버리러 나가는 유니와 같이 녹음실을 나와 우현은 사무실로 향했다.
내근직으로 바뀐 경수가 민주와 같이 앉아있다. 잠시 경수와 티타임을 가지기로 해 경수와 둘이 대표실로 들어왔다.
“일은 할 만해?”
“그럼요, 어려운 게 뭐가 있다구요. 민주 씨한테 하나씩 배우고 있습니다. 그런데 뭐 하나 물어봐도 됩니까?”
슬쩍 눈치를 보는 걸 보니 평소부터 묻고 싶었던 게 있던 것 같다.
“그래, 뭔데? 말해봐.”
“대표님 혹시 연애하십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