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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1] 내 생각, 네 생각(5)
촬영장에서 깜짝 생일파티 이후 무사히 촬영을 마무리한 그들은 별이 집 근처에서 다시 한 번 조촐한 생일파티를 했다. 생일파티라고 해서 별다르게 준비한 건 아니고 그냥 간단한 맥주파티였는데 스케줄이 없던 유니도 참석했다.
“생일 축하해.”
우현이 내민 것은 예쁜 거울로, 미리 백화점에서 구입한 것이다. 거울을 자주 봐야하는 연예인이니 예쁜 거울에 얼굴을 비춰보면 기분까지 좋아질 것 같았기 때문이다. 별이는 우현의 선물을 받아들고 감격한 듯 눈물을 글썽거렸다.
“고마워요. 대표님 아니었으면 제가 지금 이 자리에 있지 못했을 거예요.”
“그럼 그럼, 당연하지. 하하! 고마우면 더 열심히 해서 돈 많이 벌어라.”
“걱정 마세요. 제가 돈 많이 벌어서 빌딩 올려드릴게요.”
“무슨 말씀! 빌딩은 제가 올려드릴게요. 강남에다가 아주 근사한 걸루.”
별이와 유니가 서로 자기가 빌딩을 올려주겠다며 목소리를 높였다.
“누가 올려주면 어떠냐? 어쨌거나 회사 사옥 올려준다니 건배하지 않을 수 없네. 자, 새로운 사옥을 위하여!”
“위하여!”
유니는 1월이 지나며 스무 살이 됐지만 괜히 술을 줬다가 아버지에게 안 좋은 인상을 줄 것 같아 그냥 콜라로 대신했다.
그렇게 몇 차례 술이 돌고나자 오늘 아침에 있었던 일에 대해 말을 꺼냈다.
“말도 안 돼…”
“상욱 오빠 그렇게 안 봤는데 사람이 왜 그런대요? 웃기는 오빠네? 아니, 오빠란 말도 쓰면 안 되겠다. 그 인간 아주 웃기네! 지가 우리 대표님 아니었으면 카메라 앞에 설 수 있었을 거라 생각하나? 얼굴도 연예인처럼 생기지도 않은 것 같은데 주제도 모르고… 아, 짜증나!”
이런 반응을 보면 둘의 성격이 이렇게나 다름을 알 수 있다. 항상 차분한 별이와는 달리 유니는 가끔 보면 불 같은 데가 있다.
“진정 좀 해라. 그리고 콜라 그만 마셔. 살찐다.”
유니의 매니저인 세동이 말렸지만 그녀는 손을 휘저으며 콜라를 쭈욱 들이켰다.
“열불 나잖아요. 그리고 아직 앨범 마무리 하려면 몇 달 걸리니까 괜찮아요.”
“그럼 이제 어떻게 되는 거예요?”
별이도 걱정스러운 표정이었지만 별거 아니라는 듯 말했다.
“뭐, 상욱이랑은 이제 일 못하는 거지, 다른 건 없어. 너는 너대로 계속 연기하면 되고 유니 앨범 작업은 계속 진행하면 돼. 어차피 상욱이가 회사 매출에 영향을 미치는 건 별로 없었으니 타격이라고 할 만한 게 별로 없다. 다만 걱정인 건 앞으로 그 쪽에서 너희들에게 분명 접근해 올 거라는 거지. 그러니 혹시 다른데서 연락 오면…”
“걱정 말아요. 말도 못 꺼내게 할 테니까. 어디, 내 앞에서 그런 헛소리를 지껄이면 정강이를 걷어 차줄게요.”
“너는 쓸데없이 흥분 하지 마. 인기가 많아져서 그런가? 어째 갈수록 더 겁이 없어지는 것 같아.”
“이게 원래 내 성격이에요. 오빠는 화도 안 나요? 그 인간이 우리 대표님한테 배신을 때렸는데?”
“당연히 나도 화나지. 그래도 혹시 그런 인간들이 오면 내가 처리할 테니까 너는 그냥 가만히 있기나 해.”
“싫어요. 내가 직접 얘기 해야지.”
흥분한 유니에게 세동이 면박을 주었지만 그녀는 꿈쩍도 하지 않는다.
“저도 마찬가지니까 걱정 마세요, 대표님. 그런데 지나 언니는…?”
“지나는 내가 따로 이야기할 거야.”
이후 몇 차례의 술이 오가고 자리는 마무리되었다. 날이 지나 우현은 아침부터 지나가 훈련하는 액션스쿨로 향했다. 너무 급박하게 움직이는 것 같아 스스로도 웃겼지만 혹시나 하는 생각 때문에 걸음을 늦출 순 없었다.
“혹시 유지나 씨 훈련하는 데가 어딘가요?”
커다란 체육관 같은 곳에서 훈련받는 지나를 찾기 위해 가장 먼저 보이는 건장한 체격의 남성을 붙잡고 물었다.
“아, 그냥 문 열고 들어가시면 됩니다. 바로 보일 거예요.”
“감사합니다.”
따로 훈련받지 않고 다 같이 훈련하는 중인 것 같다. 큰 농구장만한 체육관 문을 열고 들어가 보니 수십 명쯤 되는 사람들의 고함소리가 귀를 때렸다.
“다시! 옆구리가 비잖아!”
“늦어! 조금 더 빠르게!”
“하나! 둘! 하나! 둘!”
문을 열자마자 바로 보일 거라던 그 남자의 말과는 달리 유지나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한참 주변을 둘러보다 액션스쿨의 얼굴인 정문진 대표가 보였다.
“안녕하세요. 파인 엔터 김우현 대표라고 합니다.”
“아! 안녕하세요. 유지나 씨 사장님 되시죠? 하하, 처음 뵙겠습니다.”
그는 화면에서 종종 봤었는데 가까이서 보니 키도 크고 체격도 상당했다. 액션을 오랫동안 해서 그런지 뭔지 모를 카리스마도 느껴져 호감이 들었다.
“지나를 맡겨 놓고 한 번도 들르지 못했네요. 인사라도 드리는 게 예의인데… 제 잘못입니다.”
“아이고, 무슨 말씀입니까? 그렇게 따지면 우리 액션스쿨에 방문객이 너무 많아져서 훈련도 못할 겁니다, 하하. 그나저나 지나 씨 찾아 오셨죠? 방금 전에 누가 찾아 오셔서 나갔는데요.”
“누가 찾아 왔다구요?”
“네. 저도 직접 보지는 못했고 우리 애 하나가 밖에서 누가 찾는다고 불러서 매니저랑 나가는 건 봤습니다. 전화 한번 해보시죠? 여기 근처가 휑해서 별로 갈 데가 없으니 찾는 건 쉬울 겁니다.”
왠지 보지 않았음에도 짐작이 간다. 너무 서두르는 것 아닌가 하며 속으로 웃었었는데 더 빨리 움직여야 했었나 보다.
“그렇군요. 감사합니다.”
그에게 감사를 표하고 나오며 진명에게 전화를 걸었다.
“너, 어디냐?”
“네? 저요? 저 지나랑 액션스쿨이죠.”
“아니, 나 액션스쿨 왔어. 누가 찾아와서 나갔다며?”
“어? 어쩐 일이세요? 저희 지금 체육관 나오면 바로 맞은편에 편의점 보이시죠? 그 편의점 길 따라 조금만 가면 검은색 건물로 된 커피숍 있습니다. 거기에 있어요.”
“누가 찾아왔어?”
“모르겠습니다. 지금 저는 나와있구요. 지나랑 따로 이야기하고 싶다고 해서…”
“야! 모르는 사람이 와서 따로 이야기하자는데 그냥 나와?”
“아니, 지나도 그렇게 하자고 해서요.”
“그래도 인마, 그렇게 두고 나오면 안 되지. 알았어. 조금만 기다려.”
진명이 말한 장소로 달려가니 밖에 서 있는 그가 보였다. 자신의 실수를 깨달았는지 우현을 보자마자 고개를 숙이며 사죄를 표했다.
“죄송합니다.”
“됐어. 들어가 보자.”
커피숍 안으로 들어가 보니 30대 초반으로 보이는 긴 머리의 미녀가 유지나 앞에서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그걸 보니 어째서 진명이 둘만 있게끔 허락했는지 알 것 같았다. 같은 여자니 큰 위협을 끼칠 것 같지 않아 무심결에 허락해준 것일 터였다. 아마 엔터 회사라는 말도 안 했을 거다.
“어? 대표님이 여기 어쩐 일이세요?”
유지나는 운동하기 편한 옷차림에 머리를 고무줄로 질끈 동여 메고 있었는데 그래도 그녀의 미모를 감추지는 못했다. 오히려 몸에 달라붙는 의상이 묘하게 섹시하기까지 했다.
“만나서 이야기 좀 하려고 했는데 먼저 찾아온 분이 계셨네? 누구셔?”
“스카이 엔터라는데요?”
앞에 놓인 명함을 들고 멋쩍은 듯 웃음을 보이는 지나는 슬쩍 맞은편에 앉은 여자의 얼굴을 살폈다. 분명 민망할 상황인데도 지나 맞은편에 앉아 있는 그녀는 눈썹하나 깜짝하지 않는다.
“업계 관행이란 것도 있는데 개념이 없으시네. 지금 유지나 씨가 FA도 아니고 멀쩡히 계약해서 잘 지내는 여배우에게 접근하는 경우 없는 짓은 뭡니까?”
“미안해요. 제가 이곳 관행을 잘 몰라서요. 하지만 중요한 건 배우님 스스로의 생각 아닐까요? 초특급 대우를 받아야 할 지나 씨가 이 정도 대우밖에 못 받고 있으니 이건 보기 좋지 않네요.”
솔직히 유지나가 초특급 스타는 아니다. 따라서 그녀의 말이 경우에 맞지 않다는 건 알고 있지만 그렇다고 이 자리에서 유지나가 무슨 초특급이냐고 따질 수는 없다. 그래도 가만히 있을 수는 없어 항변하려는데 유지나가 한발 앞서 입을 열었다.
“괜찮아요. 나는 내가 특급 대우를 당당히 원할 만큼 대단하다고 생각하지 않거든요. 그리고 지금 회사에서 해주는 정도의 대우면 충분히 만족해요.”
“어머, 지나 씨. 지나 씨는 지금 충분히 초특급! 대우를 받을 수 있어요. 자신을 너무 낮게 보지 말아요. 저는 정말 안타까워요. 지금 대한민국 연예계에 지나 씨만큼 관능적인 아름다움을 가진 여배우가 있나요? 저는 유지나 씨 같은 분이 왜 이렇게 힘든 배역을 맡았는지도 이해할 수 없어요.”
“힘들지만 보람 있어요. 그리고 여배우라고 언제까지나 꽃처럼 하하호호 하는 역할만 맡는 것도 지겹지 않아요? 그런 면에서 스카이 엔터는 저랑 별로 안 맞는 것 같네요.”
이건 뭐 우현이 커피숍에 오지 않아도 괜찮을 뻔했다. 분위기를 보니 우현이 찾아왔다고 일부러 오버하는 것 같지도 않다.
“와… 유지나 씨는 정말 매력적인 분이시네요. 제 예상보다 더요. 처음에 회사에서 꼭 유지나 씨가 필요하다고 했을 때, 회사와 어울리지 않는 대우를 받는 분이라서 당연히 모셔오려는 생각밖에 없었는데 이렇게 멋진 생각을 하고 계신 걸 아니까 더욱 욕심나네요. 지나 씨는 큰 회사가 필요해요.”
“아하하! 고맙네요. 그런데 그렇게 말씀하시니까 솔직히 더 믿음이 안 가네요. 어쨌든 좋은 말씀 잘 들었어요. 다음에는 안 찾아오셔도 돼요.”
유지나는 더 들을 게 없다는 듯 자리에서 일어났다. 맞은 편의 젊은 여성은 그제야 다급한 얼굴로 일어섰지만 지나는 인사도 받지 않고 가게를 나가버렸다. 그 서늘함에 당황했는지 미처 따라가지도 못했다.
자리에 남아 씁쓸한 웃음을 지은 그 여성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다시 자리에 앉아 앞에 놓인 커피를 마셨다. 이에 우현이 지나가 앉아 있던 자리에 앉아 지나 대신 남은 커피를 마시며 입을 열었다.
“내가 이 바닥에 오래 있었던 건 아니지만 그래도 한번 본 사람은 거의 잊은 법이 없는데 그쪽은 처음 보네요.”
그녀는 지갑에서 명함 한 장을 꺼내 우현의 앞으로 내밀었다.
“스카이 엔터 이혜윤 상무라… 강진벽 사장과 무슨 인연이라도 있나요? 그 나이에 이 바닥에서 상무정도 달려면 보통 능력 가지고는 안 되는데.”
“코딱지만한 회사에 그깟 상무 타이틀이 뭐라구요. 그냥 달면 다는 거지. 뭐, 능력을 물으시는 거라면 나중에 알게 될 거예요.”
대단한 자신감. 그녀에 대한 호기심이 들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아무리 호기심이 돈다고 적이나 마찬가지인 그녀에게 술이나 한잔 하자고 할 수도 없는 노릇.
“기대하겠습니다. 그리고 강 사장님께 전해주세요. 헛짓거리 하다 팽 당하지 마시고 시골 내려가서 편안히 노후 보내시라구요.”
“참견이 과하시네요. 그리고 난 도대체 강 사장이 당신을 왜 그렇게 대단하게 보는지 이해를 못하겠어.”
점점 목소리를 낮추며 상체를 우현에게 바짝 들이대는 그녀는 짙은 향수 냄새를 풍기며 재차 입을 열었다.
“난 내가 원하는 건 못 이룬 것도, 못 가져본 것도 없어. 이곳도 마찬가지야. 얼마나 걸릴까? 석 달? 1년?”
이쯤 되니 자신감이라는 말보다는 진지하게 정신병이 있는 건 아닌지 의심이 된다.
“주식을 하다보면 말이야, 상한가를 몇 번 잡는 경우가 있어. 그러면 말이야, 착각을 하게 되거든. 내가 주식을 굉장히 잘 하는 거 아닌가 하면서 말이야.”
“흥! 내가 운 좋게 상한가 잡아본 개미라는 말인가?”
“글쎄, 그건 모르지. 그런데 나는 왜 당신 자신감이 웃기기만 할까? 한 가지 충고하자면, 당신이 어떻게 그 자리에 앉았는지는 모르지만 강 사장 말 잘 듣는 게 좋을 걸? 적어도 난 이 바닥에서 실패라는 걸 경험해본 적이 없거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