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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0] 내 생각, 네 생각(4)
별이의 촬영장으로 향하면서 일단 최고기획 최호선 팀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안녕하세요.”
“뭐야? 김 대표, 안 좋은 일이야?”
최 팀장은 대뜸 굳은 목소리로 물어왔다. 우현의 목소리에 담긴 긴장감에 느낌이 왔나보다.
“귀신이네요. 그거 어떻게 아셨어요? 아니, 무슨 소문이 돌았던 겁니까?”
“아… 그게 진짜였어?”
“그러니까 그게 뭔데요?”
“흐음… 김 대표도 알다시피 광고 회사로서는 찌라시를 신경 쓰지 않을 수 없잖아? 김 대표랑 계약하기 며칠 전에 민상욱을 노리는 소속사가 있다는 이야기가 돌았어. 그런데 소문의 진원지가 룸싸롱 마담이라는 말이 있더라고.”
광고회사로서는 캐스팅할 연예인이 어떤 이미지를 가지고 있는지 정확하게 판단할 수 있어야 한다. 또한 혹시나 모를 리스크 방지를 위해 되도록 해당 연예인의 예민한 사생활까지도 알고 있으려 한다. 때문에 항상 찌라시에 신경을 곤두세울 수밖에 없다.
“룸싸롱 마담이면 술 마시다 흘렸다는 얘기네요.”
“김 대표도 알다시피 찌라시가 반은 맞고 반은 틀리잖아?”
“그렇죠.”
솔직히 찌라시는 전부 가짜라고 언론에서 주입시키듯 얘기해서 그렇지 이 바닥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찌라시를 전부 가짜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실제 언론사에서 나오는 기사보다 더 믿는 이들도 간혹 있을 정도다.
“나도 그래서 긴가민가 했던거지. 소속 연예인을 빼간다고는 하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실익이 없잖아? 미친 놈들도 아니고 그럴 리가 없다고 생각했었어.”
그의 말처럼 소송을 한다고 해도 몇 달 안에 결론낼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그 동안 활동을 못할 걸 생각하면 민상욱을 빼가는 것이 이해되지 않았을 거다.
“스카이 엔터라고 아세요?”
“스카이 엔터테인먼트? 얼마 전에 민재원 영입기사 뜬 데 말하는 거지? 거기가 거기였어?”
“네, 놀랍게도 파인 엔터 전 사장이 사장으로 앉아 있더라구요. 물론 바지사장 같았지만.”
“바지라고? 뭐, 알고 있는 거라도 있어?”
우현은 자신이 알고 있으면서 말해도 무방한 사실을 최 팀장에게 털어놓았다. 발이 넓은 그가 도움을 줄 수 있으리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흐음… 그럼 우주창투가 뒤에 있겠네? 이 양아치들이 안 끼는 데가 없네?”
“뭐예요? 잘 알아요?”
“아, 김 대표가 잘 모를 수도 있겠네. 사실 우주창투가 소유한 매니지먼트 회사가 몇 개 있어. 전부 가수 기획사인데 이제는 배우까지 건드리나 보네. 이런 식으로 연예인 빼가서 망하게 한 다음에 자기네가 키우는 방식인데 생각보다 쏠쏠하게 벌어먹고 있거든. 단지 바지 사장을 앞에 앉히기 때문에 모르는 사람은 모르지.”
“몇 년 동안 아무것도 못하는 아티스트를 다시 궤도에 올렸다는 말이죠?”
“그렇지. 기본적으로 자금이 탄탄하기 때문에 앨범 작업이랑 홍보에 상당한 돈을 때려대거든. 물론 지상파 예능까지도 밀어 넣고 말이지. 그러니 몇 년 얼굴을 안보였다고 해도 다시 띄우는 건 자신 있는 거야. 문제는 그 아티스트 실력과 인기가 받쳐주느냐지만 지금까지는 톱 아이돌을 주로 작업해왔기 때문에 그 팬덤을 고스란히 떠먹어서 쉬운 편이었지.”
결론은 우현의 안목을 보고 톱스타 재목이라고 짐작한 강 사장의 추천으로 일이 진행됐을 거다. 소송에서 이기기만 하면 충분히 띄울 자신이 있을 테고 충분히 남는 장사라고 생각했겠지.
“소송에서 이기기는 힘들걸? 저쪽에서 고용하는 변호사들은 벌써 이런 소송만 몇 차례를 이겨온 베테랑들이거든. 보내준다고 각오해야 할 거야.”
“걱정하지 마세요. 어차피 이미 마음 놨습니다. 민상욱 보낸다고 매출에 문제 생기는 것도 아니구요.”
“지금이야 그렇지. 내가 김 대표, 사람 좋은 거 알기 때문에 해주는 말이야. 소속 연예인들 믿지 마. 철저히 단속하라고. 이 정도로 끝낼 놈들이 아니거든.”
“무슨 말인지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래, 이번 CF는 툭 털어버리고 유니 아버지나 좀 설득해줘.”
“하하하, 알겠습니다. 들어가십쇼.”
최 팀장의 말처럼 이대로 끝낼 것 같지는 않다. 하지만 저들의 정체와 의도에 대해 다 알고 나니 큰 걱정은 들지 않았다. 앞으로 저들이 어떻게 움직일지 대강 알 것 같았기 때문이다.
별이의 촬영 현장에 도착하니 상준이 곧바로 달려나와 그녀의 스케줄에 대해 알려주었다.
오전부터 실내촬영으로 시작해 오후에는 야외촬영까지 별이는 하루 종일 촬영 일정이 잡혀있다. 우현이 도착한 점심시간 이후부터는 별이와 한지애가 처음 만나는 장면을 촬영한다.
“선배님, 안녕하세요.”
“그래, 별아, 오랜만이다. 드디어 같이 촬영하네? 사극은 처음이라 조금 부담되지?”
한지애가 김이 모락모락 나는 아메리카노를 별이에게 건네며 반갑게 인사한다.
“네, 어려워요. 세자빈 역할 때문에 살을 조금 더 빼야했는데 스트레스 덕분에 자연스럽게 살이 빠졌어요, 호호.”
“어머, 부럽다, 얘. 자연스럽게 살이 빠지다니… 호호.”
웃으며 인사를 하고 별이는 의상을 갈아입기 위해 분장실로 들어가고 그 사이 우현과 상준은 스태프들에게 도너츠와 주스를 돌렸다.
한지애와의 촬영으로 정강현 피디가 와있으므로 그쪽에도 눈도장을 찍어야 한다.
“감독님, 안녕하십니까.”
“허허, 또 오셨군요.”
반갑다는 건지, 반갑지 않다는 건지 애매한 말투다.
“오늘도 우리 별이 잘 부탁드립니다.”
“저한테 부탁할 게 있나요. 별이 씨가 잘 하면 잘 나오죠, 허허.”
역시 그답다.
잠시 후 별이와 한지애 모두 스탠바이 완료하고 촬영이 시작되었다.
이전의 스토리는 이렇다.
다연(한지애)은 갑자기 조선시대, 그것도 세조가 임금으로 있던 시대에 떨어진다. 받아들이기 힘든 현실을 자각하고 그곳에서 살아남기 위해 주막에서 일하며 살던 중 음식솜씨가 괜찮다고 소문이 난다. 사실 다연은 요리를 별로 해본 적 없는 그저 평범한 대학생이었다. 그저 TV에서 요리프로그램과 먹방이 대세일 때 종종 봤던 것뿐.
하지만 현대보다 먹을 것이 부족하던 시대에 다연이 기억해둔 것들을 약간씩 접목하자 조선시대 사람들에게는 아주 획기적인 음식이 되었다. 그 소문이 양반네들을 거쳐 지체 높은 정승댁 마님들에게까지 퍼져 그들에게 음식을 선보이게 되었다.
마침 후일 예종이 될 세자의 빈이 죽고 새로 세자빈이 된 후일 안순왕후(김별)가 입맛이 없어 잘 먹지 않는 다는 얘기를 전해들은 그의 어미, 우의정 한백륜의 처가 다연을 데리고 궁을 방문하게 된다.
“마마, 어찌하여 식사를 거르시는지. 잘 드셔야하옵니다. 혹, 수라간의 음식이 입에 맞지 않으시옵니까?”
“글쎄요, 어머니, 맛이 없진 않는데 당기질 않습니다. 그런데 뒤에 앉은 아이는 누굽니까?”
별이가 뒤쪽에 앉아있는 한지애를 흘긋거린다.
“요즘 음식을 맛있게 하기로 한양 바닥에 소문이 자자한 아이라서 제가 한 번 데리고 와봤습니다. 인사드리거라.”
한지애가 바닥에 엎드린다.
“처음 뵙겠습니다. 다연이라고 하옵니다.”
“호호호, 처음 뵙겠습니다라… 그렇지 나를 처음 보는 거겠지, 호호.”
“무례하다!”
“주… 죽을 죄를 지었습니다.”
한지애가 코가 바닥에 닿도록 더 납작 엎드렸다.
“호호, 괜찮다. 어머니가 데려온 아이이니 나도 편하게 얘기하고 싶구나. 이 궁에선 편한 것이 하나도 없어. 그래, 요리를 잘 한다고?”
“저도 이 아이의 음식을 먹어보았는데 여지껏 먹어본 적이 없는 특이한 음식이고 맛도 생소하지만 맛있었습니다. 한 번 시켜볼까요?”
“어머니께서 맛있다고 하시니 저도 궁금하군요. 내 입맛을 돋우는 음식을 한 번 만들어보겠느냐?”
“여부가 있겠습니까요. 성심성의껏 만들어 올리겠습니다, 마마.”
한지애가 조선시대의 말투와 행동을 어설프게 하며 약간의 코믹한 상황을 연출했다.
“컷, 오케이! 좋아. 김별 씨, ‘이 궁에선 편한 것이 하나도 없어’ 할 때 조금 더 쓸쓸한 느낌이 나도록 한 번만 더 해볼까?”
두 번째 촬영에선 쓸쓸하고도 외로운 여인의 느낌이 확실히 더 풍겼다. 아직 어린 별이에게서도 저런 느낌이 나오다니. 역시 대본이 그냥 너덜너덜해진 게 아니다.
두 번만에 첫 씬을 순조롭게 촬영하고 세자빈과 어머니와의 대화씬 촬영이 이어졌다. 짧은 대화씬을 빠르게 마무리하고 송민기와의 야외촬영을 위해 창덕궁으로 이동했다.
“세자빈 마마, 촬영은 어떠하셨는지요?”
“잘 하였느니라. 하지만 피곤하구나. 마실 것을 내오거라. 후훗.”
별이는 우현이 건네는 따뜻한 아메리카노를 홀짝거리며 이동하는 차 안에서도 계속해서 대본을 보았다.
오전 촬영을 빠르게 했다고는 해도 촬영이라는 것이 준비하고 대기하는 시간이 워낙 긴데다 창덕궁까지 이동하니 벌써 5시가 넘었다. 겨울이라 7시쯤 된 것처럼 벌써 노을이 지는 느낌이다.
“해 지기 전에 빨리 합시다! 서두르세요!”
조연출의 고함소리가 들린다. 야외촬영의 내용이 세자와 세자빈이 각자 창덕궁에서 산책을 하다가 만나는 장면이기에 어두워지면 곤란하다.
“하이, 큐!”
세자와 세자빈이 걸어오다 서로를 발견한다.
“빈궁도 나와 계셨구려. 내가 방해를 한 것은 아닌지 모르겠소.”
“방해라니요, 기별을 주셨으면 함께…”
“으음, 아니지요. 사색의 시간을 뺏기는 싫소. 앞으론 내가 이 시간을 피해서 나오겠소.”
“그러실 필요는 없…”
“그럼 난 이만.”
세자 송민기가 세자빈을 두고 냉담하게 가버린다. 그의 뒷모습을 보며 별이 혼잣말을 한다.
“저하께서는 여기 쌓인 눈만큼이나 차갑구나.”
“컷! 좋은데, 입에서 김이 너무 많이 나오네. 김별 씨 얼음 갖다줘!”
겨울 야외촬영은 고통의 연속이다. 특히 사극은 더욱 그렇다. 두꺼운 외투를 입지 못하기에 한복 안에 옷을 껴입어야 하는데, 그게 또 여배우들은 쉽지 않다. 뚱뚱하게 나오면 안 되니까. 그래서 추위에 떨면서 촬영하는데, 자연의 법칙대로 입에서 나오는 입김이 또 방해가 된다. 그래서 촬영 직전에 얼음을 입에 물고 있다가 뱉고 대사를 하곤 한다.
“아, 차가워.”
별이는 오들오들 떨면서 얼음을 입에 물었다. 추위에 빨개진 코가 드러나 메이크업도 다시 손봐야했다.
“별아, 춥더라도 이거 한 번에 끝내버려야 좋은 거 알지? 여러 번 하면 입이 너무 얼어서 대사 다 꼬여. 이번에 제대로 하자.”
별이는 볼 양쪽에 얼음을 하나씩 밀어 넣고 다리를 동동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다시 촬영이 시작되고.
“방해라니요, 기별을 주셨으면 함께…”
“으음, 아니지요.”
“NG! 저거 뭐야? 제대로 통제 안 해?”
멀리서 구경하던 사람 중 한 명이 촬영 현장 사진을 찍으며 플래시가 터졌다. 조연출이 달려가서 양해를 구하고 다시 촬영이 이어졌다.
“컷, 잠시 대기!”
촬영한 장면을 정 감독이 모니터링을 하는데 인상이 구겨진다.
“처음부터 다시 찍어야겠어. 아까 끊긴 부분에서 해가지면서 갑자기 어두워졌어. 두 사람 다시 얼음 물고!”
별이는 다시 얼음을 물고 우현과 상준은 핫팩을 더 뜯어 별이의 등과 어깨에 대주었다.
“에취!”
“아이구, 감기 들겠네. 빨리 끝나야 할 텐데. 입 너무 얼지 않도록 풀고 들어가.”
어둑해져 조명을 더 켜야 했다. 오히려 눈 내린 창덕궁에 어둠이 내려앉으며 조명을 켠 분위기가 세자빈의 얼굴과도 묘하게 맞아떨어지는 것 같아 그리 나빠 보이지 않는다. 다행히 다음 번에 오케이 싸인이 나면서 이번 씬 촬영이 마무리되었다.
“수고했어.”
별이에게 따뜻한 물을 건네고 등을 토닥여주는데.
“생일 축하합니다. 생일 축하합니다.”
스태프 중 한 명이 불을 붙인 케이크를 들고 나오고 모두가 생일 축하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별이 씨, 생일 축하해요!”
“축하해요!”
“어머! 감사합니다.”
별이는 놀라서 눈물까지 글썽였다. 스태프와 송민기, 감독까지 모두가 별이 생일을 축하하고서야 진짜 이번 씬이 마무리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