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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9] 내 생각, 네 생각(3)
“안녕하세요. 오랜만에 뵙네요.”
상욱의 바로 옆에 앉아 있던 이는 전에 사무실로 찾아 왔던 민재원이었다. 새벽부터 일어나서 준비했는지 한껏 멋을 내고 왔는데 그게 더 꼴 보기 싫었다. 그리고 사실 우현의 눈은 처음부터 그를 향하고 있지 않았다. 그걸 깨달은 민재원이 머쓱하게 옆을 쳐다보자 민재원의 옆에 앉아 있던 남자가 입을 열었다.
“허허. 며칠 전에 봤지? 일단 앉아.”
여유있는 웃음을 보이는 이는 강진벽 사장. 그는 이제 완전히 병색을 털어버리고 까맣게 염색까지 한 채 나타났다.
“몰라보게 달라지셨습니다?”
“요즘은 참 그… 뭐라 그러더라? 아! 맞아. 서비스! 서비스가 참 좋아. 뭐든지 의지만 있으면 이렇게 다시 일어날 수 있다니까? 너도 그래서 지금 이렇게 일어났잖아, 응? 흐흐흐.”
“맞는 말이네요. 얼마 전까지만 해도 모든 걸 버리고 낙향하신다던 분이 눈에 욕심이 그득하니 말이에요. 외모만큼이나 생각도 젊어 지셨다면 좋았을 텐데.”
우현의 가시 돋친 말에 그는 미간을 한껏 일그러뜨렸다.
“흥! 배운 것도 없이 대리운전이나 하던 놈을 먹이고 재워줬더니 그새 좀 컸다고 살쾡이 새끼마냥 눈을 부라려?”
“그러고 보면 저는 사람 보는 눈은 있다고 자부해왔는데 그게 사람의 본질을 보는 게 아니라 오직 상품성만 봐왔나 봅니다. 당신 같은 사람을 믿고 따랐다는 게, 참…”
“뭐 인마?”
“사람이 바뀐 건지… 아니면 원래 그런 사람이었는지는 좀 궁금하네요.”
상욱은 자신들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불꽃을 튀기는 우현과 강 사장의 대화에 차마 끼지 못하고 눈치만 보았다.
“그래, 뭐, 대충 눈치는 챘는데 정식으로 얘기해 보자. 원하는 건?”
항상 웃음 띤 얼굴로 말하던 우현이 안면을 싹 바꾸고 정색하며 물어보자 상욱도 조금 당황했는지 어물거렸다.
“아니, 그… 아무래도 계약에 있어서… 조금…”
어물거리는 상욱을 보다 못 한 재원이 나서서 말한다.
“야! 됐어, 내가 말할게. 상욱이가 아직 사회생활을 잘 몰라서 전속계약 체결할 때 실수했더군요. 제가 나중에 알아챘기에 망정이지 아니었으면 큰 손해를 볼 뻔했습니다. 계약을 수정하시든가 아니면 파기 하시죠.”
“말이 안 된다는 건 그쪽이 더 잘 아시겠고… 소송을 하겠다는 거죠?”
“정 안 된다면 전속계약효력부존재확인 소송을 진행하도록 하겠습니다.”
“뭐, 미리 준비해놓고 오셨으니 더 말할 필요는 없겠네요. 승소는 장담하시나 봐요?”
“계약기간 5년에 출연료 배분이 6:4면 우리 상욱에게 큰 손해죠. 아니 아이돌 그룹도 아니고 5년이면 너무한 거 아닙니까? 이런 계약을 법원에서 인정해줄 거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죠?”
솔직히 누가 신인배우를 데뷔시키면서 3년 단기 계약으로 맺겠는가? 하지만 6:4로 5년이면 애매하긴 하다. 보기에 따라서 해석의 차이가 있는 정도의 계약이라는 것이고, 이 정도면 어떤 변호사를 쓰느냐에 따라 결과는 달라진다고 생각됐다. 하지만 그 생각을 드러낼 수는 없는 노릇.
“씨도 안 먹힐 이야기를 하시네. 그럼 상욱이를 톱스타 대우하라는 말입니까?”
“아이돌 데뷔시키는 것도 아니고 들어간 돈도 없는데 못 할 거 없죠. 솔직히 회사에서 뭘 했다고 그렇게 많이 떼어 갑니까? 그 정도면 불로소득이죠.”
“그럼 그럼. 재주는 곰이 부리고 돈은 되놈이 가져간다드만…”
옆에 앉아 있던 강진벽 사장이 고개를 끄덕거리며 중얼거린다. 그런데 앞에 놓인 찻잔을 집어가는 손이 가늘게 떨리는 걸 보니 아직 수술의 후유증이 남아있는 것 같다. 생각해보니 그렇게 큰 수술을 하고 멀쩡한 것도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러게요. 재주는 곰이 부리고 돈은 누가 가져가겠죠. 어떻게… 연기하는 거 보니 재주 잘 부리고 있는 것 같으신가요?”
아직 정상적인 몸 상태가 아니라는 걸 알자 신기하게 마음에 여유가 생겼다. 어쩌면 처음으로 당해보는 배신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아니, 예전 은하 이후로 두 번째인가? 그가 예전만 못하다는 생각을 하니 그에 대한 미움보다 안쓰러운 마음이 들었다. 강진벽 사장 역시 재주 부리는 곰에 불과하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지금 내가 재주나 부리고 있다는 말입니까?”
화살은 강 사장을 향해 쐈는데 애먼 민재원이 흥분한다. 그러거나 말거나 여전히 시선은 강 사장에게로 향한 채 다시 입을 열었다.
“뭐, 소송 진행하는 거야 이미 예정된 일일 테고… 누굽니까? 당신 뒤에 있는 사람이.”
“내 뒤에 누가 있다고? 허, 인마 이거, 감이 마이 떨어졌네. 내가 바로 스카이 엔터테인먼트 사장이다.”
강 사장은 품에서 멋들어진 명함케이스를 꺼내 명함 하나를 던지듯이 탁자에 올려놓는데 누가 보면 탁자에 앉은 파리를 내려치는 줄 알았을 거다.
“누가 사장 시켜줬어요? 돈 없는 거 다 아는데? 바지 사장인 거 모를 것 같아요?”
강진벽 사장은 아주 잠깐 움찔 했지만 곧 신색을 회복하곤 고함을 질렀다.
“누가 바지라 카나! 내 돈으로 세운 내 회사다!”
그럴 돈이 있었으면 쓰러져 가는 파인 엔터를 그대로 두지는 않았을 거다. 마지막 순간, 돈 1억만 있었으면 주주들이 그렇게 매몰차게 마음을 돌리지 않았을 것이고 주축 배우 한둘은 그대로 남아서 이어갔을 테니까. 그랬다면 우현도 그 때 폐인이 되지는 않았을 거다.
우현이 회사를 세울 수 있었던 건 별이와 유니를 영입하는데 돈이 들지 않았기 때문이지만 강 사장은 민재원을 영입하면서 계약금으로 최소 1억 이상은 줬을 거다. 과연 그 돈이 어디서 났을까? 가장 먼저 떠오르는 건 우현에게 투자 받으라며 접근해 왔던 우주창투의 한석민 사장이었다.
연예계를 제법 아는 우주창투이니 만큼 소속사 하나 만들어 바지사장 세우는 것쯤은 일도 아닐 터였다.
“알았어요. 흥분하시면 몸에 안 좋습니다. 송장 치우고 싶지 않으니까 그만 하시고 어쨌든 소송 하는 걸로 알고 있겠습니다. 상욱이 너는 당연히 ‘승냥이’ 이후로 어떤 작품도 못하는 건 알고 있지? 얼마 전에 3억짜리 CF 들어왔는데 못 하겠네.”
“CF요?”
상욱은 CF라는 말에 눈을 동그랗게 뜬다. 벌써 그런 제의가 들어왔을 줄은 몰랐던 거다. 하지만 오히려 계약을 파기하는 게 더 좋은 선택이라는 듯 웃으며 말한다.
“와… 벌써 CF가 들어오는 걸 보니 그렇게 조급하게 생각하지 않아도 되겠네요. 감사합니다, 하하하.”
“그래? 뭐, 그럼 어쩔 수 없지.”
아주 오래전에 ‘아들래미와 딸래미’라는 드라마가 있었다. 그 때 예상치 못하게 여주인공도 아니었던 종말순이라는 캐릭터가 빵 터졌다. 당연히 그 배역을 연기했던 여배우는 단번에 톱스타급 대우를 받았다.
잠자고 일어나니 스타가 되어있던 거다. 한 순간 인기에 도취됐던 그녀는 드라마가 끝나고 쉬고 싶다는 생각에 이곳저곳에서 밀려드는 작품들을 모조리 거부했다고 한다. 쉬고 나서 다시 시작하면 된다는 생각이었던 거다. 그런데 막상 복귀했지만 그 많던 러브콜들은 씻은 듯이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종말순이라는 캐릭터의 이미지가 시간이 지나면서 희석되니 예전과 같은 큰 인기를 끌지도 못했고 그 사이에 또 다른 톱스타가 생겨나니 당연히 잊히게 된 것이다.
이것 말고도 이와 비슷한 일들은 이 바닥에서 무수히 많다. 그렇기에 20대 초반의 남자 배우들이 어떻게 해서든 군대를 미루려고 하는 거다. 잠깐 눈에서 보이지 않는 순간 잊히기 쉽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과연 이걸 강 사장이 모를까? 당연히 알 거다. 그런데도 이렇게 무식하게 일을 밀어붙이는 이유는 하나밖에 생각나지 않는다. 바로 자신의 능력을 아는 몇 안 되는 사람이라는 것. 조금 늦다고 하더라도 상욱이 톱스타가 된다는 확신을 가지고 있는 거다.
처음에는 그런 생각을 했기 때문에 영입했지만 지금에 와서는 생각이 바뀌었으니 당신도 생각을 달리 해보라고 얘기할 수는 없다. 그러니 어쩌겠나? 또 망해서 다시 쓰러지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뿐.
“그럼 열심히 해 보세요.”
우현은 자리에서 일어나 앞에 앉아 있는 셋을 향해 손을 흔드는 여유를 보이며 자리를 떴다.
“이상한데…?”
강 사장은 떠나는 우현의 뒷모습을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그러세요? 잘 된 거 아닙니까? 구질구질 하지 않아서 좋은데…”
민재원이 잘 된 거 아니냐면서 커피를 호로록 빨아 마시자 강 사장은 고개를 절레 흔들며 파르르 떨리는 손으로 차를 집어 들었다.
“돈 계산은 몰라도 사람 계산, 작품 계산은 틀린 적이 없는 놈이다. 그런데 너무 쉽게 물러서는 게 도통 이해가 안 간단 말이지… 심지어 화도 안내. 너 같으면 네 품에 있는 금덩이를 다른 놈이 채 간다는데 화 안 나겠나?”
“나겠죠. 에이, 진짜 화가 안 날까요? 표정관리 한 거죠.”
“그럴까?”
“뻔한 건데 너무 어렵게 생각하시네. 됐고, 출출한데 밥이나 먹으러 갑시다. 먹고 나서 골프 어때요?”
“나는 이제 손이 떨려가 골프는 못 친다.”
“에이, 재미없네. 그럼 회장님한테 치러가자고 해봐야겠다.”
강 사장은 민재원의 투덜거림에 차를 마시며 여유롭게 미소 지었지만 그 눈빛만은 서늘하게 가라앉았다.
한가한 그들과는 반대로 경수는 차에 오르자마자 우현에게 걱정을 한 바가지 쏟아냈다.
“진짜 저대로 보내실 거예요? 대표님도 알다시피 이제 뜨기 시작했지만 광고도 들어오고 반응도 좋은데 그냥 저대로 보내버리면 아깝지 않겠습니까? 민재원의 꼬드김에 넘어가서 저러는 건데 잘 설득하면 다시 마음을 바꿀 겁니다. 상욱이 형이 사람이 나쁘지는 않았어요. 배강석 그 인간과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라니까요.”
우현은 한 손으로 핸들을 잡고 한 손으로는 경수의 머리를 투박하게 쓰다듬으며 그를 진정시켰다.
“비즈니스에선 좋은 사람과 나쁜 사람은 없는 거야. 나에게 이익이 되는 사람과 아닌 사람이 있는 거지. 뭐, 네 말대로 아깝기는 해. 큰 투자는 하지 않았지만 내가 발굴해서 막 뜨기 시작할 때 남에게 줘야 한다니 억울하기도 하고. 그래도 아닌 건 아닌 거야. 게다가 난 불편한 사람들과는 일 못 해. 설사 우리가 소송 이긴다고 해도 다시 내보낼 거야.”
“그럼 이대로 상욱이 형과 끝나는 건가요?”
“관계가 끝난다고 하는 게 맞겠지. 그리고 저쪽이 소송 이길 때까지는 충분히 괴롭혀주려고. 혹시 상욱이 나간다고 너 회사 그만둬야 할까봐 그러는 거 아니지?”
“아, 아뇨.”
어물거리며 눈길을 피하는 걸 보니 내심 그게 걱정됐나보다.
“걱정하지 마, 인마. 우리 회사 앞으로 더 커갈 거구. 상욱이 없어도 좋은 배우 더 많이 들어올 거야. 당분간 회사에서 나를 좀 도와줘. 안 그래도 온갖 곳에서 걸려오는 전화 다 내가 받을 수 없어서 경리인 민주가 받아주고 있긴 한데, 솔직히 민주가 할 일은 아니지. 할 수 있겠어?”
“물론입니다! 하하.”
“그래. 그럼 이제 신경 꺼.”
솔직히 강 사장을 아까 그 자리에서 봤을 때 상당히 놀랐다. 자신과의 인연이 끊어질 듯, 끊어질 듯하다가 결국 다시 이어지는 것에 결국 진정한 악연은 바로 강진벽 사장이었음을 절감했다.
문제는 앞으로다. 상욱이를 보낸 정도로는 악연이 마무리될 것 같지 않았기 때문이다. 우주창투에서 들여온 자금 때문에 빵빵해진 스카이 엔터가 앞으로 더욱 확장을 시도할 것이고 분명 자신들과 부딪히는 일이 생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