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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7] 내 생각, 네 생각(1)
“뒤에서는 싸워도 다들 프로니까 무대에서는 또 잘 할 거예요. 걱정 마세요.”
“그래, 그래야지. 2부 일산까지 이동하는 데 무리는 없을까?”
세동이 유니 의상을 정리하며 답한다.
“오전에 일산에서 리허설하고 상암으로 넘어오는 데는 괜찮았어요. 상암에서 무대가 앞 순서고 밤이니까 가는데도 괜찮을 겁니다. 1부 마지막쯤에 하고 일산으로 넘어가야하는 가수 몇 팀은 퀵서비스 예약해뒀대요, 시간 못 맞출까봐. 아, 최민지도 퀵으로 올 건가봐요.”
“우린 차로 이동할 수 있어서 다행이다. 추운 날 애 혼자 오토바이에 태워 보내는 거 너무 불안해.”
“그렇죠. 그냥 상암에서 실내랑 야외 이렇게만 해도 될 텐데, 참 일부러 일을 어렵게 하는 것 같아요.”
“에휴… 그러게나 말이다. 이렇게 상암 실내, 외랑 일산까지 세 군데 쪼개서 한다고 해도, 내가 보니까 MWMA 실내 한 군데에서만 하는 거 반도 못 쫓아가겠더만.”
유니가 팔짱을 끼고 크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야외무대를 앞두고 뜨끈한 저녁을 먹인 후 대기하고 있는데 유니보다 앞서 야외무대를 준비하는 걸그룹이 보였다.
“어이쿠, 지금 기온이 영하13도인데 저거는 너무 심했다. 지금 구경하는 사람들도 옷을 저렇게 껴입고도 추워서 발을 동동거리는데…”
한 여름에나 입을 법한 핫팬츠에 끈나시. 실내무대라면 또 이해가 된다. 걸그룹 멤버 5인에다 시상식이라고 화려한 무대를 위해 함께 준비한 댄서들까지 열 명이상이 헐벗다시피 하고 서서 오들오들 떨고 있다.
“시청자들도 매년 야외무대 보고 싶지 않다고, 보는 것만으로도 춥고 심지어 애들 불쌍해 보인다고 하는데도 기어코 한다니까요.”
잠시 후 무대가 시작되자 헐벗은 아이들이 코와 입에서 하얀 김을 내뿜으면서도 전혀 춥지 않은 듯 활짝 웃으며 춤을 추기 시작했다.
“어우, 바람 불어서 더 춥다. 저 애들 담요 덮어주고 싶네.”
유니 등에 핫팩을 더 대주며 바람이 잠잠해지기를 바랐다.
이윽고 유니의 무대. 하필 바람이 더 세졌다.
유니는 바람에 날리는 치마와 머리카락이 신경 쓰이는지 계속 정리하기 바빴다. 노래가 시작되자 바람 때문에 표정도 자연스럽지 않게 나온다.
“아휴, 짜증나서 안 되겠다. 내년 연말에는 무조건 실내에서만 할 수 있도록 앨범 꼭 히트 시켜야지.”
“진짜 그래야겠습니다. MBS가 야외무대를 없앨 것 같지는 않으니 우리 유니가 더 뜨는 수밖에 없겠어요.”
우현과 세동은 잔뜩 인상을 구긴 채 무대가 끝나기를 기다리는데 바람이 더 세게 분다.
‘거지같네, 진짜. MBS 폭삭 망해버려라!’
마음속으로 욕을 퍼부어준 뒤 노래를 끝내고 뛰어내려오는 유니에게 패딩을 덮어주었다.
얼른 짐을 챙겨 차를 타고 핸드폰으로 다른 가수들의 무대를 보면서 일산으로 이동했다.
“오오, 다음 무대 방탄보이즈예요. 아까 리허설 봤는데 장난 아니에요. 완전 멋있는 무대 준비했더라구요. 시작한다!”
유니의 말에 우현도 집중해서 핸드폰을 들여다봤다.
“응? 멋있는 거 하나도 안 나오는데? 그리고 카메라 왜 저러냐? 노래 부르는 멤버가 아니라 계속 다른 멤버를 비추네.”
“진짜 카메라가 계속 엉뚱한 거 비추네요. 방금 전에 지나간 부분 안무 엄청 멋있던데 무대 뒤편 찍고 있었어, 헐.”
“참나, 지금 댄서들 다리는 왜 찍는 거야?”
“발카 대박이네요. 보는 내가 다 허탈해. 준비한 거 하나도 안 나왔어.”
일명 ‘발카’. ‘발로 찍은 카메라’의 줄임말이다.
“시청자들은 결국 카메라에 찍힌 장면만을 보는 건데, 화면에 저렇게 나올 거면 가수들이 열심히 시상식 특별무대를 준비할 필요가 없지. MBS는 무대를 세 군데나 설치해놓고 촬영을 발로 하네.”
“아무리 그래도 너무 심했어. 엄청 공들여 준비한 게 딱 보였는데…”
“제대로 하는 게 없구나.”
일산에 도착하자마자 정신없이 뛰어 들어가서 헤어와 메이크업을 수정했다.
그 때, FD가 뛰어 들어온다.
“유니 씨, 준비 다 됐어요? 아직 최민지 씨가 도착을 안 해서 잠시만 대기해주셔야 할 것 같아요!”
“네? 지금 무대 4개 밖에 안 남았는데 아직 도착을 안 했다구요?”
“퀵 태워서 보냈다고 통화됐으니 기다려 보자구요. 밑에서 직원이 기다리고 있으니 도착하면 바로 데리고 올 겁니다.”
말을 하고선 또 잽싸게 달려 나간다.
“뛰어와서 노래가 제대로 되려나 걱정이네. 무대를 조금 뒤로 미룰 순 없나?”
순서 조정을 건의해볼까 하고 대기실 밖으로 나왔다. 하지만 그 문제로 이미 저 앞에서 실랑이 중이다.
“‘여자보컬 4인의 무대’ 다다음이 우리 ‘뷰티스’ 무댑니다. 의상도 갈아입어야 하고 헤어도 다시 만져야 하는데, 4인 무대를 한 번 뒤로 미루면 혜수가 어떻게 뷰티스 무대를 바로 합니까? 안 됩니다. 지금 순서대로 올라가야 해요.”
“최민지가 도착을 제 시간에 하면야, 순서를 왜 바꾸겠습니까? 그런데 지금 시간이 이미 촉박한 상황에서 도착한다고 해도 헐떡거리면서 무대에 올라갈 수는 없지 않습니까? 게다가 늦으면 미뤄야 할 수밖에 없구요.”
멀찍이서 팔짱을 끼고 FD와 매니저의 대화를 듣던 혜수는 짜증이 나는지 대기실로 들어가며 욕설을 해댔다. 하지만 퀵 타고 오고 있다는 최민지를 욕해서 무엇하랴. 무대를 세 군데나 벌려놓은 MBS를 욕해야지.
일단 혜수, 유니, 제니는 무대 뒤에서 대기하기로 했다. 최민지가 도착하면 바로 올라가기 위해서. 제일 마음이 급한 혜수는 계속 짜증을 내며 발을 탁탁 굴려댔다. 하지만 2개 무대가 남은 상황에서도 최민지가 도착하지 않아 결국 제작진에서 ‘여자보컬 4인의 무대’를 미루기로 했다. 4인의 무대가 끝난 후 ‘뷰티스’ 무대에 혜수는 조금 늦게 등장하는 걸로 했지만 어쨌거나 혜수는 연달아 무대를 해야 하고 초스피드로 의상을 갈아입고 스타일링을 해야 할 것이다.
“아, X발! X같네, 진짜. 최민지 그 X년 때문에 왜 내가 피해를 보냐고! XX년, 가만 안 둬!”
혜수가 욕을 해대자 분위기는 더 얼어붙었다. ‘뷰티스’ 멤버들도 본인들의 무대가 피해를 본다는 생각에 혜수 옆에서 같이 최민지 험담을 한다.
마침 최민지가 도착했다고 미뤄진 순서에는 맞춰서 등장할 수 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바뀐 순서의 앞 무대가 상암에서 시작되고 세 명은 무대에 올라가서 이제나저제나 최민지를 기다렸다.
앞 무대가 끝나기 직전 최민지가 달려와 모습을 드러냈다.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미안해!”
유니와 제니는 안도의 한숨을 쉬며 활짝 웃었다. 혜수는 최민지를 쳐다보지도 않는다. 엄청 화가 났을 테지만 곧 이들의 무대가 시작되기 때문에 일단 참는 거다.
최민지가 도착하고 몇 초가 지나지 않아 ‘여자보컬 4인의 무대’가 시작됐다. 역시 다들 프로라서 능숙하게 무대를 한다. 다만 혜수와 최민지는 서로 눈길도 주지 않은 채. 그렇게 웃으며 무대를 마무리하고 혜수는 의상을 갈아입으러 뛰어갔다.
무대를 내려오며 최민지는 유니와 제니에게 다시 한 번 사과했다. 퀵 아저씨가 빨리 달리는데도 자신이 자꾸 재촉해서 사고가 날 뻔했다는 얘기도 한다. 최민지가 고의로 늦은 게 아니라는 건 모두 알기에 오토바이 사고도, 방송사고도 나지 않아 다행이라며 대기실로 돌아왔다.
‘뷰티스’의 무대가 이어지는 동안 유니는 의상을 갈아입고 엔딩을 위해 다시 스타일링을 했다. 그런데 밖에서 큰 소리가 난다.
“야!”
우현, 유니, 세동은 일제히 문밖으로 빼꼼 머리를 내밀었다.
“…”
“허! 당당한 거봐. 너 때문에 이게 뭐야? ‘뷰티스’ 무대까지 엉망이 됐잖아!”
“내가 언제 당당했어? 사과하면서 들어왔잖아. 그리고 내가 일부러 늦었어?”
“더 빨리 나왔어야지! 너 혼자 하는 무대도 아닌데 시간 약속은 지켜야 하는 거 아냐?”
“어떻게 더 빨리 나와? 내가 늦게 나오는 거 봤어?”
“아니, 그런데 이 XX년이 계속 당당하네?”
“뭐? XX년? 너 지금 나한테 욕했어?”
“그래. 했다, 왜?”
그러면서 혜수가 최민지에게 성큼 다가서는데 혜수의 덩치에 최민지가 살짝 부딪히면서 뒤로 밀려났다.
“이 년이 진짜 미쳤나!”
최민지가 혜수의 머리칼을 움켜쥐었다. 그러자 혜수가 가만있을 리 없다. 혜수도 최민지의 머리카락을 잡고선 당겼다.
순식간에 싸움이 벌어지며 ‘뷰티스’멤버들까지 뒤엉켜 대기실 복도가 아수라장이 되었다. 우현과 세동이 달려갔지만 여러 명이 뭉쳐있어 떼어내기가 쉽지 않았다. 그녀들의 매니저들이 몸을 날려서야 둘을 갈라놓을 수 있었다.
“자! 2017년을 시작하는 카운트다운 들어갑니다. 모두 함께 외쳐봅시다. 10! 9!…”
잠시간의 정적에 2016년이 가고 2017년이 시작되었다.
‘2017년 시작이 엄청 소란스럽네!’
갈라 선 혜수와 최민지의 꼴은 처참했다. 예쁘게 단장했던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머리는 산발이 되고 최민지의 얼굴과 목에는 손톱에 긁힌 상처들이 보였다. 아무래도 혼자서 ‘뷰티스’ 멤버 여럿을 상대했기 때문이리라.
두 사람의 싸움은 한동안 가요계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렸다. 정신없던 12월이 지나고 1월에 들어서면서 소속 연예인들도 마음의 여유가 조금 생겼다.
유니는 차기 앨범 작업에 박차를 가할 수 있었고 지나는 여전히 액션스쿨에서 땀을 흘리고 있었다. 상욱은 케이블 드라마 ‘승냥이’의 막바지 촬영에 매진하고 있었는데 회가 거듭될수록 높아져가는 그의 인기에 우현은 물론 제작진도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가장 선호하는 영화채널인 ACN에서 방영하는 장르 드라마 중 가장 높은 시청률인 6%를 돌파하며 센세이션을 일으켰고 주인공인 이동운과 더불어 민상욱의 주목도는 나날이 올라가고 있었다.
특히 이런 선량한 마스크의 악역은 지금껏 없었다며 충무로에서도 그를 주목하고 있었다. 때문에 새해가 밝으면서 상욱에 대한 캐스팅 문의가 가장 활발하게 들어왔는데 놀라운 것은 그를 원하는 수많은 광고주들이었다.
“김 대표도 알다시피 이제 덮어놓고 스타만 쓰지 않는다고. 광고주들도 항상 새로운 마스크를 찾고 있거든.”
대한민국 최고의 광고사인 최고기획의 최호선 팀장은 광고 컨셉 시안을 보여주며 히죽 웃음 지었다.
“흐음… 과자 광고라…”
“고민하는 척 하지 마.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나는 김 대표 스타일을 좀 알지.”
“거, 내가 무슨 스타일이 있다고 바람을 넣으세요.”
“흐흐, 내가 유은하 때 물 먹는 바람에 우리 회장이 지 엄마보다 믿는 종로 아기동자 말은 안 믿어도 김 대표 안목은 철썩 같이 믿거든. 시작부터 너무 높게 보지 말자고. 계단도 차근차근 밟아가야지 두세 걸음 한 번에 내딛다가는 넘어져요.”
“뭘 또 그렇게까지 생각하십니까?”
“어라? 또 아닌 척 의뭉 떨기는… 보아하니 여기서 엉덩이 들썩하게 만들고 작품하나 더 띄운 다음에 통신사 같은 대세 광고 찍으려고 하는 거잖아. 몸값 올리려고 하는 거 빤히 보이는구만.”
“크흠… 전혀 그런 생각 없습니다.”
별이었다면 그런 생각을 했겠지만 진심으로 상욱을 가지고는 그런 생각을 하지 않았다. 제작발표회 때 보여준 그의 연기가 아직까지 가슴에 남아있기 때문이었는데 굳이 최호선 팀장 앞에서는 그런 티를 내지 않았다.
“자, 김 대표! 1년 계약에 촬영 두개 찍고 3억, 이제 신인인데 너무 튕기면 그것도 보기 안 좋지 않겠어?”
“흐음… 좋습니다. 오케이 하죠.”
“흐흐흐, 좋아. 아, 그리고 유니 건은 아직도 고민 중인가? 언제까지 고민만 할 거야?”
“아이고, 유니 아버님이 주류 광고는 절대 안 찍겠대요. 그건 어렵겠습니다.”
“거 참, 잘 좀 설득해보지. 김 대표가 의외로 그런 부분에서 좀 약한 것 같아. 그래, 그건 어쩔 수 없다고 쳐야지. 그건 그렇고, 계약은 민상욱 불러서 할 거지?”
“그럼요. 당연한 소리를 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