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너 내가 스타로 띄어줄게-124화 (124/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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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4] 12월, 가장 바쁜 시기(6)

보통 비욘세의 ‘Listen’을 부르는 사람들은 흑인 특유의 긁는 듯한 목소리를 중간중간 섞어가며 고음을 지른다. 특히 하이라이트 부분은 막힌 변기를 뚫어버리는 것처럼 시원하게 내지르는 것이 중요한데 그 맛을 제대로 살리기 위해서는 그게 필요하기도 하다.

[I don't know where I belong

But I'll be moving on

If you don't,

If you won't

Listen, to the song here in my heart

A melody I started But I will complete]

혜수는 유니의 노래에 놀랐는지 리듬을 타는 몸을 잠시 멈칫하며 박자를 놓치고 말았다.

유니는 처음부터 깨끗하게 그 높은 고음을 쭉쭉 내질렀다. 자연스레 따라오는 바이브레이션 같은 잔재주도 없었다. 이렇게 되자 모창처럼 비욘세의 노래를 그대로 따라하던 혜수와 너무나 비교됐다. 특히 가사를 외우지 못해 노래 부르기 전에 후다닥 한글발음으로 써놓은 가사를 보며 부르는데도 이 정도의 퀄리티를 보인다는 게 믿기지 않는 것 같았다.

노래가 끝나자마자 혜수가 묻는다.

“비욘세 ‘Listen’ 정도는 가사를 외우고 있어야 하지 않겠어? 보통 수십, 수백 번은 불러보잖아.”

“저도 몇 번 불러보긴 했는데 그렇게까지 많이 불러보지는 않았거든요. 발음이 많이 이상했죠? 연습 많이 해서 고칠게요.”

“팝송 많이 안 듣니?”

살짝 무시하는 듯한 발언이지만 유니는 대수롭지 않게 생긋거리며 말한다.

“자주 듣기는 하는데 많이 부르지는 않아요. 제가 영어 발음으로 노래를 하면 왠지 모르게 위축이 들어서… 헤헤.”

“흥! 임자 만났네?”

혜수의 의도와는 무색하게 여전히 활기찬 유니를 보며 최민지가 이죽거렸다.

“됐고, 연습이나 하자. 유니야 나랑 파트 조정 좀 할까?”

혜수는 유니를 한 쪽 구석으로 데리고 가더니 유니와 자신의 파트를 바꾸자고 했다. 사실 처음에는 유니에게 조금 더 어려운 파트를 줘 기를 죽이려는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이렇게 되면 무대에서 너무 비교가 될 거라고 생각한 것이다.

혜수가 유니보다 못 부른다는 게 아니라 맑고 깨끗한 고음을 내지르는 유니와 흑인 소울이 가미된 자신과는 극단적인 호불호가 갈릴 거라는 생각이 들었을 거다. 게다가 가장 하이라이트 부분도 유니가 부르면 유니가 더 빛나 보일 거다.

“좋아요. 그렇게 해요.”

생각보다 쿨한 반응.

“그, 그럴까? 고마워. 다음에 맛있는 거 사줄게. 아니다, 다음에 내가 친한 예능 피디한테 너 섭외해 달라고 얘기해줄게.”

“진짜요? 고마워요.”

“뭘 이정도 가지고, 하하.”

혜수는 순진하게 나오는 유니가 어리석다고 생각했지만 유니는 보이는 것처럼 맑고 순수하기만 한 아이는 아니었다. 누구보다 똑똑하고 눈치가 빨랐다. 단지 회사가 작고 후배이기 때문에 일부러 져주는 것인데다 자신이 어느 파트를 부르든 누구보다 잘 부를 자신이 있기 때문이었다. 한 마디로 혜수를 자신의 상대로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에 뭘 하든 원하는 대로 해줄 생각이었다.

“그럼 연습할까?”

이후 연습은 굉장히 순조롭게 진행됐다.

우현네 회사에서 연습을 함으로써 예상보다는 빨리 연습이 마무리되었다. 그리고 각 방송사 음악프로그램 마다 한 해의 결산으로 진행하는 1위곡들의 무대에 출연하느라 유니는 또 바빴다. 새벽부터 준비해서 하루 종일 몇 번의 리허설과 대기시간 끝에 녹화 또는 생방을 하는 게 보통 일이 아니다. 스페셜 스테이지라며 평소 무대와는 다른 무대를 연출해야 하기 때문에 각 프로그램마다 다 다른 요구 사항들을 소화해내야 한다.

또한 연말에 몰려있는 대형 가수들의 콘서트. 유니는 아직 단독 콘서트를 개최하지는 못하지만 게스트로는 아주 안성맞춤이다. 솔로 여가수가 드물거니와 히트곡이 나오는 건 더 드물기 때문에. 그래서 몇 번 선배 가수들의 콘서트에 게스트로 등장해야 했다. 바쁘고 피곤하다고 다 거절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렇게 이미 녹초가 된 상태에서 12월말 시상식 시즌이 시작된다.

“지상파 3사 시상식 중에선 K사 ‘가요축제’가 제일 먼저 시작이네. 유니야, 이제 준비는 다 됐니?”

“네, 저 나름대로는 다 됐다고 생각하는데, 아무래도 생방은 항상 걱정이 돼요.”

“그래, 그렇지. 여기 자양강장제 사왔다. 마셔.”

우현은 자양강장제 뚜껑을 열어 같이 산 앰플을 붓고 알약과 함께 유니 손에 쥐어주었다.

“크으… 쓰다, 어우 써.”

“젊으니까 약빨도 잘 받을 거야. 피로회복제 같은 거도 잘 좀 챙겨 먹구. 요즘 스케줄이 많아서 또 자주 학교를 빠졌는데 괜찮니?”

“네, 어차피 수능 끝나고 논술 준비하는 친구들만 할 일 있지, 나머지들은 노느라 바빠요. 괜찮아요.”

“그래, 네가 대학 안 간다고 해서 결정에 따라주긴 했지만 혹시라도 마음 바뀌면 꼭 얘기해. 나중에 평생 후회할까봐 조금 걱정된다.”

유니 정도의 재능에 인기가 뒷받침 된다면 굳이 대학에 가지 않아도 충분히 스타가 되기에 모자람이 없다. 게다가 요즘은 아역스타들이 종종 대학을 포기하는 경우가 많기에 대학을 포기하는 유니가 별스럽게 보이지도 않는다.

“네, 학교 가고 싶으면 바로 말씀드릴 게요. 걱정하지 마세요.”

유니는 귀엽게 검지손가락을 좌우로 흔들어보였다. 그 모습이 귀여워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아, 참 ‘가요축제’ 때 ‘선후배가 함께하는 무대’ 연습은 잘 했고?”

“네, 저번에 조관욱 선배님 연습실에서 2시간 했어요. 두 분 다 베테랑들이시라 오래 안 하시더라구요. ‘꽃밭에서’ 부를 때 주의해야할 점 설명해주시고 바로 파트 나눴어요. 저는 그냥 선배님들이 시키는 대로 했죠, 헤헤. 그러고선 한 번 불러보고 몇 마디 의논하고, 그렇게 세 번 더 불러보고 땡! 끝났어요. 진짜 빠르죠?”

“어, 그래. 네 노래 들어보고 선배님들이 뭐라 하시든?”

“아이구, 잘 하네. 귀엽다고 하시던데요, 하하. 제가 너무 어리니까요.”

“그래, 연습 잘 마무리해서 다행이다. 역시 선후배가 확실해야 진행이 빠르다니까. 내일 아침 ‘가요축제’ 리허설이지? 새벽부터 준비해야하니까 빨리 들어가서 일찍 자. 나는 내일 오후에 그쪽으로 갈게.”

“네, 오늘 저녁에 스케줄 없는 게 어찌나 다행인지. 그럼 저 먼저 들어 가보겠습니다요.”

유니를 보내고 날씨를 확인했다. 야외무대가 있기 때문에 조금 덜 추웠으면 하는데.

“아유… 리허설 때부터 춥겠는데?”

요즘 보통 영하 5도 전후의 기온을 보이는데 하필 내일 바람이 많이 불거라 체감기온이 더 떨어질 거라는 예보였다. 세동에게 전화를 걸어 유니 옷 잘 챙기고 마스크에 귀마개까지 하고 있으라고 말해두었다.

다음 날, 저녁시간 때쯤 K사 ‘가요축제’ 유니 대기실에 들렀다. 뜨끈한 국물과 든든한 밥을 먹이고 싶어 방송국으로 감자탕을 배달시켜 셋이서 배불리 먹었다.

“아, 배부르고 땀난다. 잘 먹었어요, 대표님. 배 나오겠는데요?”

유니가 배를 퉁퉁 치며 웃는다.

“체중조절은 평소에 해. 이렇게 추운 날 밖에서 노래를 해야 하는데 차마 부실하게 먹이고 내보낼 수가 없다. 그리고 의상에 재킷 만들었으니 오늘은 살짝 가려.”

“흐흐흐. 사실 재킷 있어서 걱정 않고 많이 먹을 수 있었어요. 그나저나 저녁이 되니까 바람이 더 많이 부는 것 같아요.”

“리허설 때 추웠니?”

“아니요. 이 패딩 입고 목도리 두르고 있어서 별로 안 추웠어요. 근데 있다가 방송 때는 춥겠죠?”

유니는 발목까지 오는 긴 패딩을 들어보였다.

“당연히 춥겠지. 아까 들어오면서 보니까 야외무대라고 해봤자 엄청 작던데. 보는 사람도 거의 없을 것 같고. 그거 왜 하는지, 쯧.”

세동을 마음에 들지 않는지 불만을 잔뜩 늘어놓았다.

“야외무대를 해야 영상이 다양하게 나온다고 어쩔 수 없다고 하니 별수 없지. 아마 밖에서 찍는 카메라 감독이랑 스태프들도 춥고 신경 써야 할 것도 많아서 싫을 거야. 그래도 뭐 위에서 시키니까 별 수 있나.”

우현이 손가락으로 위를 쿡쿡 찌르는 제스처를 했다.

“야외무대 배경이라고 해봐야 K사 본관 건물인데, 그게 뭐가 예쁘다고. 그렇다고 무대가 예쁜 것도 아니고. 솔직히 말해 카메라를 잘 찍는 것도 아니면서.”

잠시 후 ‘가요축제’가 시작되었다. 의상을 갈아입은 유니는 재킷을 입고 있다고 해도 역시나 추워보였다.

“스타킹 신은 거 맞아?”

“그럼요, 보세요. 괜찮아요, 한 곡이니까. 걱정 마세요, 이런 일 다반사죠. 제가 요새 행사 좀 뛰어 봤잖아요? 프로행사걸이라고 불러주세요. 헤헤.”

“그래, 내가 핫팩 더 사왔어. 올라가기 전까지 몇 개 더 쥐고 있어.”

대기하기 위해 밖으로 나왔는데 너무 춥고 휑했다. 본관 앞마당에 조그마한 간이 무대만 덩그러니 있고 촬영 스태프 몇 명이 다였다. 구경하는 사람도 없고. 관객 없이 정말 카메라에 담기 위해서만 설치한 무대인 거다.

“유니 씨, 스탠바이 할 게요.”

걸치고 있던 패딩을 벗고 짧은 치마에 얇은 재킷 차림으로 무대에 올라가 대기하는데, 순서상으론 본관 안에서 아직도 두 팀이 무대를 더 해야 한다. 밤이 되니 체감온도가 영하 11도까지 떨어졌는데 저 상태로 20분가량을 더 대기하다 노래를 해야 할 판이다.

“아유, 옷을 껴입고 있어도 이렇게 추운데 애를 저렇게 미리 올려놓으면 입이 얼어서 노래나 제대로 하겠나? 굳이 필요하지도 않은 야외무대를 왜 해서는…”

세동은 추위에 부르르 떨며 재차 불만을 늘어놓았다.

“그러니까. 야외무대라서 더 일찍 세우는 것 같네.”

패딩을 껴입고 있는 우현과 세동도 추워서 발을 동동 구를 지경이었다. 하지만 유니가 저러고 있으니 두 사람은 춥다고 모자를 덮어 쓰지도, 안에 들어가서 기다릴 수도 없다. 덜덜 떨고 있는 유니를 보자니 욕지기가 치밀어 오르지만 스태프들한테 뭐라 할 수도 없는 일. 본인들도 마지못해 한다고 하니.

드디어 큐싸인이 떨어지고 유니는 전혀 춥지 않은 듯 온화한 표정을 지으며 노래를 시작했다. 하지만 역시나 추워서인지 목소리가 평소만큼 완벽하게 나오지는 않는다. 하지만 프로답게 무대를 마무리하고 내려오는 유니에게 패딩을 덮어씌워주고 핫팩을 쥐어주었다.

또 다시 대기 시간. 2부에 있을 ‘선후배가 함께하는 무대’ 때까지 다른 가수들의 무대를 보면서 기다려야 한다.

“으응? 쟤 목소리가 왜 저래?”

“그러게요. 목 상태가 너무 안 좋은데요?”

평소에 노래 잘 한다는 평을 받는 가수 화희가 노래를 하는데 누가 듣더라도 노래를 부를 수 없는 목 상태였다. 본인도 목소리가 갈라지고 고음이 안 나와 온갖 인상을 쓰며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보고 있기가 안쓰러울 만큼. 그런데 본인의 무대가 끝나고 잠시 후 다른 후배 가수와 듀엣 무대에 또 올라왔다. 아까 무리를 해서인지 이번엔 더 심각했다.

“보는 내가 조마조마하다.”

그때, 세동이 들어왔다.

“화희 노래 또 해요? 아까 무대 내려와서 화내던데.”

“그래? 목이 완전 엉망이더라.”

“요즘 콘서트 중이래요. 목을 많이 써서 ‘가요축제’ 섭외 거절을 했대요. 그런데 방송국 측에서 안 된다고 꼭 나와야 한다고 했다네요. 안 된다고 계속 거절을 했는데도 뭐, 가수가 방송국을 이길 순 없으니… 오늘 낮 공연까지 하고 오는 거라, 그러면 후배 가수와의 무대는 빼달라고 했는데 그것도 안 된다고 했대요.”

화희는 정말 발악하다시피 노래를 했다. 본인의 노래 부분이 끝나자 얼마나 화가 났는지 표정에 그대로 드러나고 아직 반주가 완전히 끝나지도 않았는데 인사도 없이 뒤돌아 나가버렸다. 남은 후배는 너무 황당해 하면서도 생방이라 어쩔 수 없어 반주가 끝날 때까지 무대에 혼자 남아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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