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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3] 12월, 가장 바쁜 시기(5)
‘MWMA'를 끝내고 며칠 뒤, MBS 이규창 피디에게서 직접 연락이 왔다. 연말 가요대상에서 4명의 여성 보컬로 무대를 꾸미기로 했는데 스케줄 문제로 지금까지 연습일 스케줄도 잡지 못한 상태였다.
“저희 사무실에서 하자구요?”
어처구니없던 우현은 혹시 잘못 들었나 해서 다시 물었다.
“글쎄, 서로 상대방 회사에서 연습하는 걸 꺼리는 분위기입니다. 수차례 스케줄 조정하면서 슬쩍 떠보니까 유니야 다른 세명과 다 친하니까 괜찮다는 반응이었구요. 그래서 김 대표님 회사가 어떤지 해서 연락드렸는데… 어떻게 안 되겠습니까?”
“아니, 그렇게 좋은 회사 연습실을 놔두고 조막만한 우리 연습실에서 4명이나 연습을 하면…”
전부 대형기획사에서 키워진 아이돌이기에 유니의 연습환경과는 많은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다.
“이번에 사무실 이전하셨다면서요? 장소는 그렇게 크지 않아도 됩니다. 일단 4명을 한 자리에 모이게만 하면 되니까요. 실력이야 4명 다 원체 뛰어나니까 모이면 뭐라도 나올 겁니다. 좀 부탁드릴게요. 아, 그리고 원래 세 곡 부르기로 한 걸 한 곡으로 바꿨습니다. 도저히 세 곡은 무리라고 판단되어서요.”
와서 연습하는 건 문제가 없다. 단지 작은 사무실을 보여주기 꺼려졌을 뿐. 왜 그렇지 않은가? 집이 가난하면 친구를 데려오기 싫은 것처럼 말이다.
“알겠습니다, 한 곡. 그럼 스케줄 잡아 보죠.”
며칠 뒤 우여곡절 끝에 MBS 무대를 꾸미기로 한 아이돌 무리들이 우현의 사무실로 모였다. 까무잡잡한 피부에 탄력 있는 몸매를 자랑하는 ‘뷰티스’의 메인보컬 혜수는 롱부츠에 현란한 무늬로 프린트 된 노란 티셔츠와 퍼재킷을 입고 왔다.
“어머, 윤정! 회사 아담하고 좋은데? 쓸데없이 넓고 삭막한 우리 회사보다는 훨씬 좋다. 그리고 녹음실 엄청 좋던데?”
“하하, 그런가요.”
유니의 어깨에 팔을 척 올리고 다정스럽게 말하는 혜수에게 유니가 어색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평소 서로 별다른 대화를 나누지 않았던 사이였기에 당황한 것이다.
“거긴 녹음실이 좋을 필요가 없잖아.”
옆에 서 있던 최민지가 무심하게 한 마디 툭 던졌다. 그녀는 상체를 강조하는 브이자로 푹 파진 티셔츠에 찢어진 청바지를 입고 있었는데 어느 남자라도 그녀의 가슴을 힐끗 쳐다 볼 정도로 대단했다.
“남의 회사에서 시비 걸지 말지?”
혜수가 가시 돋친 말투로 최민지를 노려보았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혜수가 소속된 레인보우 엔터는 소속 작곡가가 만들어 내놓는 노래마다 망하기 때문에 타이틀곡을 항상 사가지고 온다.
소속사 디스이긴 해도 사실 친한 사람들끼리 이 정도 이야기는 서로 웃어넘길 정도의 대화다. 하지만 둘의 사이가 워낙 안 좋기에 발끈한 것이다.
“아, 미안. 워낙 유명한 이야기라 기분이 나쁠 줄 몰랐어. 내 잘못이야.”
쿨하게 사과했지만 내용이 더 기분 나쁠 만했다. 역시나 혜수의 눈에서 불길이 뿜어져 나온다. 분위기가 험악해질 듯하자 아이돌 그룹 ‘플로리스’의 보컬 제니가 최민지의 팔을 잡아끌었다.
“우리 물이나 마시고 연습 시작하자. 시간 없잖아. 응?”
우연찮게도 유니를 제외하고 나머지 셋은 나이가 같고 데뷔시기도 몇 달 차라 선배라고 부르기도 민망하다. 그래서 더 사이가 안 좋은 건지도 모른다.
그렇게 연습실의 분위기가 한겨울 논바닥처럼 얼어붙어 있을 때 우현을 비롯해 몇 사람이 들어섰다. 혜수와, 최민지, 제니의 매니저들이다.
“잘 하고 있어요?”
우현이 밝게 웃으며 물었지만 다들 어색한 웃음만을 지었다. 그걸 보는 매니저들도 고개를 돌리며 딴청을 피운다. 수습이 힘들 거라는 걸 알기에 회피해 보려는 것이다.
“아닌가 보네. 뭐, 솔직히 지금껏 맞추지 못하다가 갑자기 잘 화합해서 할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으니까… 자, 시간 없으니까 후딱 끝냅시다. 각자 원하는 것들 있죠?”
“제니가 팝으로 하자니까, 그럼 가요 말고 팝으로 해요. 전 비욘세의 ‘Listen’ 했으면 좋겠어요.”
‘뷰티스’의 메인보컬인 혜수가 먼저 치고 들어왔다. 이에 최민지가 눈을 크게 뜨고 혜수를 어처구니없다는 듯 쳐다보았다.
“이분이 하자고 하면 해야 하는 거야?”
“왜? 유니네 대표님이면 조정해줄 수 있는 거 아냐? 웬 꼰대짓?”
이번에는 최민지가 한 방 먹었는지 입술을 깨물고 부들부들하더니 입을 열었다.
“전 그 노래 싫어요.”
“아, 맞다. 민지 얘 고음이 안 될 텐데… 미안, 미처 네 생각을 못했네.”
우현이 답하기도 전에 혜수가 그녀를 비꼬았다. 정말 숨 쉴 틈 없는 티키타카에 정신이 어지러울 지경이다.
“그럼 ‘Listen’은 하지 않기로 할까요?”
“아니요. 힘들겠지만 노력하면 되지 않겠어요?”
저 깜찍한 얼굴로 천연덕스럽게 말하는 걸 보니 정말 보통 성격이 아니다.
“노력이고 자시고 ‘Listen’은 제 스타일 아니에요. 정 팝으로 할거면 엘리샤 키스의 ‘if i ain`t got you’가 좋은 것 같아요.”
제니는 자기가 팝을 원했으니 의견은 내지 못하고 눈치만 살폈고 유니는 아예 한 걸음 물러서 있었다.
“다른 의견은?”
짜증이 난 우현이 얼굴에 웃음기를 지우고 둘러보았지만 더 이상 나오는 말은 없었다.
“매니저들 생각은 어때요?”
“저는 우리 혜수 생각에 동의합니다.”
“저는 우리 민지 말대로 했으면 좋겠네요. 엘리샤 키스 노래가 고음이 안 나오는 것도 아니고…”
제니의 매니저는 어깨만 으쓱했다. 뭐가 되든 상관하지 않겠다는 뜻이다. 이에 제니가 얼른 나섰다.
“저는 고음 파트는 빼주세요. 그러면 비욘세 노래도 괜찮아요.”
“유니는? 뭐가 되든 상관없니?”
“상관없어요.”
“오오…”
혜수가 유니를 돌아보며 놀란 표정을 짓는다. 비욘세의 ‘Listen'은 가수라고 하더라도 상당한 내공이 필요한 노래이기 때문이다.
“그럼 가위바위보 합시다.”
“네?”
혜수와 최민지가 동시에 의문을 표했다. 자신들로서는 절대로 양보하지 못할 문제를 너무 쉽게 결론 내려 하기 때문이다.
“싫으면 MBS 이규창 피디한테 한 명 빼고 한다고 할게요. 이 피디도 정 안되면 그렇게 하라고 했으니까 그렇게 억울한 표정 지어도 어쩔 수 없어요. 가위바위보 해요, 지금.”
“싫어요. 나 이렇게 못해요.”
최민지가 단박에 거부하고 나섰다. 그녀의 매니저는 그녀를 말리려했지만 도통 들어먹지 않았다.
“그럼 그렇게 해요. 나 원망하지 말아요. 이 피디가 그렇게 하라고 해서 그러는 거니까.”
“전화해 봅니다?”
“그러세요.”
최민지의 매니저가 핸드폰을 들고 전화할 듯이 말하자 우현이 쿨하게 답하며 손을 내밀어 얼른 전화 하라는 제스처를 취했다. 그러자 그 매니저는 호랑이 같은 눈빛을 쏘아 보내는 최민지의 기세를 못 이겨 바로 이 피디에게 전화를 걸었다.
“지금 선곡을 가위바위보로 정하자고 하는데요. 싫으면 관두라고 했답니다. 진짜입니까? 네. 네. 피디님, 저희 사정도 생각해 주셔야죠. 우리 민지가 괜히 그러는 게 아니잖습니까? 네. 아휴… 알겠습니다.”
솔직히 이규창 피디와 어떤 상의도 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자신 있게 전화를 걸어보라고 한 이유는 여기서 다시 어그러지면 시상식 준비가 완전히 어그러지기 때문이다. 이 피디는 그걸 알기에 어쩔 수 없이 우현의 편을 들어주었을 거다.
“할 거예요? 말 거예요?”
전화를 끊고 머뭇거리는 매니저에게 우현이 재촉했다.
“아이씨, 알았어요. 가위바위보 해요.”
결국 자신의 매니저가 졌음을 눈치 챈 최민지가 잔뜩 인상을 구기고 투덜거리며 앞으로 나섰다. 이미 기사까지 나갔는데 여기서 진짜 안 한다고 뻐기다간 싸가지 없는 애로 찍히고 나중에 기사까지 나올 수 있기 때문이다.
혜수도 가위바위보로 정하는 게 좋을 리는 없겠지만 최민지가 이렇게 면박을 당하는 장면을 보니 기분이 좋아졌는지 가위바위보를 하는 것에 토 달지 않았다.
“가위바위보!”
“아싸!”
결과는 혜수의 승리. 비욘세의 ‘Listen’을 부르는 것으로 결론 났다. 최민지의 안색은 더욱 어두워졌고 혜수는 승자의 미소를 지으며 ‘Listen’의 멜로디를 흥얼거렸다. 정말 둘을 보고 있자니 유니가 착한 게 얼마나 고마운지 다시 한 번 느껴진다.
“파트 정리 해보죠.”
“대표님이 파트까지 나누시겠다구요?”
이번에는 혜수도 민감하게 나왔다.
“보아하니 파트 나누는데 오늘 하루 다 소비하고 또 며칠 동안 그걸로 싸울 것 같은데 내가 정리해버리는 게 낫죠.”
유니가 경력도 많고 나이도 많았다면 그녀에게 다 맡겼겠지만 앞으로 준비할 시상식만 최소 세 개다. 교통정리를 제대로 못하면 유니만 더 힘들어지기에 악역을 맡기로 한 것이다.
“그렇게 해요. 설마 대놓고 유니한테 좋은 파트 몰아주겠어요?”
제니도 더 이상 싸우기 힘들었는지 오케이로 나왔다. 이렇게 되니 혜수와 최민지도 반대하기 어려워졌는데 계속 반대만 하다가 나쁜 파트에 배정될까 걱정됐는지 이번에는 최민지가 먼저 승낙했다.
“그래요. 그렇게 해요.”
“흥! 웬일이래. 저도 오케이예요.”
이후 파트 배정은 생각보다 손쉽게 해결됐다. 고음파트가 부담스러운 최민지와 제니를 초반 벌스 부분에 몰아주고 혜수와 유니를 후반부 하이라이트에 나눠주니 누구도 이견을 내지 않았다.
자리 배정도 쉬웠는데 혜수와 최민지를 중앙에 세우고 유니와 제니를 양 끝에 세우니 별 말 없이 수긍했다. 오히려 이번에는 아이들이 넘어가는데 제니 매니저가 우리애가 너무 죽는다며 항의하기도 했다. 제니는 싸우기 귀찮았는지 본인이 나서서 그만하고 연습 좀 하자며 매니저를 연습실 밖으로 쫓아내버렸다.
결국 매니저들은 전부 연습실을 나와 빈 회의실에서 핸드폰 게임이나 하며 시간을 보냈고 우현은 대표실로 올라가 남은 업무를 처리했다.
“시작하자. 너무 무리하지 말고. 연습하다 목 상하면 무대 망치잖아?”
혜수가 주변을 돌아보며 싱긋 웃었다. 내용이야 맞는 말이지만 누군가를 디스하는 거라는 건 이들 중에 모르는 이가 없다. 하지만 최민지도 보통 아닌 게, 생글거리며 받아쳤다.
“맞아. 괜히 오버하다 몸 상할라. 아, 발목은 좀 괜찮아?”
전에 Y대 ‘아카리카’ 축제 때의 일이다. 비가 가늘게 뿌리는 날이어서 분위기가 조금 다운되어 있었는데 그걸 살리겠다고 혜수가 섹시댄스를 추다가 넘어져서 발목을 다쳤더랬다. 그런데 넘어져도 예쁘게 넘어졌으면 좋았을 텐데 보기 흉하게 앞으로 철퍼덕 엎어져서 내내 웃긴 동영상으로 떠돌아 다녔다. 한 마디로 혜수의 흑역사를 콕 끄집어내서 받아치니 다시 분위기는 얼음 동굴에 들어선 듯 서늘해졌다.
“하하, 일단 시작해요.”
여기서 더 말이 길어지면 진짜 싸울 분위기였기에 유니가 얼른 음악을 틀었다. 그리고 벌스 부분을 맡은 제니가 노래를 부르기 시작하자 다들 종이를 돌돌 말아 가상의 마이크를 쥐었다.
[Listen, I am alone at a crossroads
I'm not at home in my own home
And I've tried and tried
to say whats on my mind
You should have know ]
하이라이트 부분이 시작되고 혜수가 최민지 보라는 듯 고음을 쭉쭉 뻗어내며 열창했다. 별다른 표정을 짓지는 않았지만 눈빛이 차가워지는 최민지, 그리고 유니가 다음 부분을 이어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