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너 내가 스타로 띄어줄게-122화 (122/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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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2] 12월, 가장 바쁜 시기(4)

“그래요?”

어차피 급하게 처리해야 할 업무도 없으니 느긋하게 앉아 윤 작가가 건네준 대본을 읽기 시작했다. 한참을 읽어내려가니 윤 작가가 왜 그런 이야기를 했는지 알 것 같았다.

“이거 진짜 작가님이 쓰신 거 맞아요?”

“응, 이상하지?”

“그건 아닌데…”

윤 작가의 장기라면 예상치 못한 곳에서 터져나오는 톡톡 튀는 대사와 쫄깃한 남녀 사이의 줄다리기, 그리고 남녀 주인공을 현실적으로 그려 시청자에게 공감을 준다는 점이다. 그런데 점차 분위기가 변해가고 있었다.

“작가님이 이렇게도 쓸 수 있었구나.”

왕과 대신들 간의 치열한 암투가 극에 달하는 9회는 처음부터 끝까지 한시도 긴장을 놓을 수가 없었다. 이런 느낌은 아주 잘 만들어진 스릴러 영화에서나 받을 수 있는 건인데…

“어때? 이상하지 않아? 로맨스 드라마인데 너무 나간 거 같기도 하고.”

“이거 어디까지 작가님이 쓰신 거예요?”

“설정은 공동집필하는 그 친구가 넘겨준 거고, 나는 거기에 살을 붙였지. 이효상이라고 전에도 사극을 썼는데 그 친구도 내가 쓴 내용을 보고 엄청 놀라더라니까? 자신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잘 나왔다고하는데, 그거야 그 친구는 이런 장르를 좋아하니까 그런가보다 할 수 있지만 주 시청자 층이 원하는 전개가 아닐 것 같아.”

적당히 긴장하다가 로맨스로 풀어줘야 하는데 너무 힘을 준 거 아니냐는 말인데, 윤 작가 입장에서는 충분히 할 법한 생각이긴 하다. 만약 내용이 어설펐다면 우현도 그녀의 말에 동의했을 거다. 하지만 그냥 버리기에는 짜임새가 너무 좋았다.

“아니에요. 이대로 가요. 9회의 분위기가 극에 올랐을 때 10회에서 더 크게 터뜨릴 수 있을 거예요.”

“그러다 9회에서 퍼져버리면 어떡해?”

시청자들은 내용이 너무 무겁고 힘들면 지쳐서 따라가지 않는 경향이 있다. 애초에 장르 드라마를 내세웠다면 걱정할 필요가 없지만 로맨스 물에서 이러면 작가 입장에선 겁먹을 수 있다.

“걱정 마세요. 보니까 10회에서 통쾌하게 터뜨리던데요.”

“10회 마지막이었어. 게다가 완전히 다 나온 것도 아니었고.”

“그 정도만 해도 괜찮아요. 맛은 보여줬으니까요. 난 또, 큰 문제가 생겼다고… 흐음… 이 드라마 쓰기를 잘 하셨네요. 지금까지와는 다른 문체가 나왔다는 건 더 발전하고 계시다는 증거니까요.”

“퇴보하는 건 아니겠지?”

“하하하! 하여튼 우리 윤 작가님, 은근히 간이 작다니까.”

“이걸로 벌어먹고 사는데 간 크게 막 써 제낄 수 있겠어? 하여튼 김 대표가 괜찮다니까 마음이 놓이네. 난 그럼 눈 좀 붙일게. 저녁 먹을 때 깨워 줘.”

“예, 한숨 푹 쉬세요.”

윤 작가를 빈 사무실에 보내고 돌아와 탁자에 놓인 대본을 다시 집어 들었다.

“흐음… 위험한데…”

윤 작가 앞에서는 티내지 않았지만 사실 걱정이 된다. 아무리 대단한 투수라고 해도 던질 때마다 자세를 바꾸진 않는다. 공을 놓는 지점도 항상 동일해야 한다. 그래야 자신의 루틴이 무너지지 않기 때문이다.

작가도 마찬가지다. 문체가 너무 확 바뀌면 균형을 잡지 못할 수 있다. 한창 성장하는 시기라면 모르겠지만 이미 정점에 다다른 작가의 문체가 바뀐다면 슬럼프에 빠질지도 모른다는 신호다.

결국 24회 종영 때까지 일일이 대본을 보고 검토해야 할 수밖에 없을 것 같다. 혹여 중간에 헛발질이라도 하게 된다면 바로바로 지적해줘야 하기 때문이다.

윤 작가와 저녁을 먹으며 적당히 핑계 삼아 그녀의 대본을 바로바로 보고 싶다고 의견을 냈고 그녀는 별다른 말없이 흔쾌히 승낙했다.

12월 첫째 날, 유니와 세동, 우현은 다음 날 있을 MWMA에 참석하기 위해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이미 연예기사란에는 MWMA에 참석하기 위해 출국하는 가수들의 사진이 계속해서 올라오고 있었다.

[유니, MWMA 참석 위해 홍콩으로 출국]

[잘 다녀올게요. 유니, MWMA 출국길 화사한 눈인사]

“으흐흐, 너무 좋다. 진짜 MWMA에 나가다니! 아차차, 이거 별이 언니가 준 거예요. 오래 걸리진 않지만 그래도 비행기 안은 건조하다고 메이크업 위에 바르라고 언니가 줬어요. 루루루루…”

유니는 콧노래를 부르며 별이에게서 받았다는 크림을 꺼내 얼굴에 바르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금세 또 쫑알거린다.

“그런데요 대표님, 우리는 하루 일찍 가잖아요. 그럼 오늘 밤에는 뭐해요? 홍콩 구경하고 쇼핑도 하고 뭐… 맛있는 것도 먹고, 그래도 돼요?”

“그 소리 왜 안 나오나 했다. 그래, 그러자. 하지만 혼자 나가면 안 돼. 알았지?”

“옛썰! 여부가 있겠습니까요?”

도착하자마자 공연 장소인 ‘홍콩 아시아 월드 엑스포’로 향했다. 곧바로 유니의 리허설 시간이 잡혀있기에. 확인을 거쳐 STAFF카드를 목에 걸고 들어가는데 공연장이 커서 대기실 가는 길도 헷갈린다. 미로 같은 길을 뚫고 유니의 대기실을 찾자마자 가방을 내리고 유니는 목을 풀기 시작했다.

“아아아아아아아아아… 아아아아…”

“대표님, ‘코리아 스타 K’ 친구들도 이미 도착했다고 하구요. 앞 팀 리허설이 아직이라고 조금 더 기다리라합니다. 그럼 저는 나가서 간식 거리 좀 사오겠습니다.”

“그래, 길 잃지 말고.”

“아유, 별 걱정을…”

“너나 나나 외국어 안 되잖아, 인마. 크크.”

세동은 우현을 쏘아보고선 보아둔 맛집이라도 있는지 쏜살같이 달려 나갔다.

“대표님, 우리 리허설 구경 가요.”

“그럴래? 그래, 다른 팀은 무대 어떻게 하는지 좀 보자.”

우현과 유니는 대기실을 나와 어슬렁 걸으며 공연장 구경을 했다.

“우와! 진짜 크다! 으아아아 떨린닷!”

“나도 같이 떨리는 것 같다. 예전에 은하한테 MWMA에서 시상 섭외가 왔었는데 스케줄 때문에 거절했거든. 그런데 이렇게 오게 되네. 무대도 엄청난데 음향이 얼마나 받쳐주려나?”

“오, 저기 저기, ‘지쿠’ 선배님 나와요!”

리허설을 보니 음향도 괜찮다. 잠시 후 유니와 ‘코리아 스타 K’ 우승, 준우승자들과의 리허설이 시작됐다. 무대 뒤편에서 아주 큰 초승달 모양의 조명이 비춰지는 한 가운데에 그네를 타고 등장한다. 무대가 워낙 커서 유니가 그네를 타고 떠있는 높이가 아파트 2층 정도 되었다.

“안전장치는 확실한 거죠?”

카메라에는 안 보이지만 유니 몸에 따로 안전 줄이 달려있긴 하다. 하지만 우현은 걱정이 되어 스태프에게 몇 번이나 확인을 했다. 노파심에 생방송 중에도 눈을 떼지 못할 것이다. 노래 중간에 그네에서 내려온 후 나머지 두 사람과 함께 무대를 하는 것은 크게 어려울 것은 없었다. 다만 무대가 워낙 커서 앞에까지 한참을 걸어 나가야 한다는 게 조금 익숙하지 않은 정도.

몇 번의 연습으로 리허설을 마무리하고 세 사람은 숙소인 호텔에 짐을 풀고 바로 나왔다. 그 동안 열심히 일했던 유니의 소원대로 오늘 밤엔 여행 온 듯이 시간을 보내기로 헸기에.

“대표님, 저기 쇼핑몰부터 가요! 으흐흐흐, 저 오늘 마구 쇼핑할 거니까 말리지 마세욧!”

“그래도 아직 미성년자니까 적당히 해.”

우현의 말은 허공에 흩뿌려지는 소리 없는 외침에 불과했다. 3시간 동안 온갖 상점을 돌아다니며 하나씩 산 것이 우현과 세동의 손에 잔뜩 들려있었다. 그렇다고 뭐 굉장히 비싼 걸 산 건 아니다. 역시 아직 어려서인지 큰돈을 쓸 줄은 몰랐다.

우현과 세동은 따라다니는 것만으로도 녹초가 되었건만 유니는 아직도 팔팔하다.

“저쪽으로 조금만 더 가면 아주 유니크한 슈즈들을 파는 가게가 나온대요!”

“유니야, 거기까지는 도저히 안 되겠다. 거기는 내일 일 끝나고 가자. 대표님이랑 나랑 발이 부르텄어.”

“그러게 두 분도 쇼핑을 좀 하시라니까. 쇼핑을 계속하게 하는 원동력은 쇼핑을 하는 거라구요. 아무것도 안 사니까 벌써부터 발이 아프죠.”

“벌써부터라니, 벌써 3시간째야.”

“세상에! 벌써 3시간이나 됐어요? 아직 살 게 많이 남았는데 어떡하지?”

“이렇게 사고도 뭘 또 사려구? 난 도저히 못 걷겠다.”

여자들은 쇼핑 때 지칠 줄 모르는 지름신을 몸에 받는다. 어찌나 신빨이 강한지, 그저 한낱 인간인 남자들이 신과 동등할 수는 없는 법. 남자들은 나가떨어지게 되어있다. 유니를 진정시키고 생과일음료 한잔씩을 마신 뒤 호텔로 돌아올 수 있었다.

다음날 오전, 잠시 엑스포에 들러 바뀐 무대 장치와 동선에 대해서 듣고 헤어와 메이크업을 하기 위해 다시 나왔다. 6시부터 레드카펫 행사가 있는데 유니는 레드카펫으로 입장한 다음 이후 본 방송 무대에 오를 예정이다. 본 방송에 나오지 못하는 레드카펫 행사 무대도 있는데, 그곳에는 보통 신인들이 선다.

유니는 핑크색 미니드레스를 입고 레드카펫을 걸었다. 입장 도중 360도 카메라에 예쁘게 포즈를 취해준 뒤 진행을 맡은 선배 가수 문형준과 인터뷰를 가졌다.

“어우, 유니 씨 실제로 처음 뵙는데 너무 깜찍하고 예쁘시네요. 유니 씨는 오늘 MWMA가 처음인데 레드카펫 행사 무대를 거치지 않고 바로 본 방송 무대에 오르게 됐어요. 소감이 어떠신가요?”

“너무 감사하게도 본 방송 무대에 나가게 됐는데요, 모두 팬분들 덕분이라고 생각해요. ‘유니콘’ 고마워!”

“하하, 이렇게 귀엽게 하트를 날릴 수도 있군요. 오늘 의상이 정말 유니 씨다운데요, 무슨 컨셉인가요?”

“요정? 하하하하. 제가 말하고도 쑥스럽네요.”

“아, 핑크 요정이군요, 하하. 오늘 우리 핑크 요정 유니 씨의 본 방송 무대 기대해보겠습니다. 인터뷰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유니는 발랄하게 인터뷰를 마치고 내려왔다. 신인이기에 1부에 무대가 있으므로 들어와서 메이크업과 헤어를 수정하고 의상을 갈아입었다.

“어이쿠, 드레스가 엄청 기네?”

오늘 입을 드레스를 처음 본 우현은 깜짝놀랐다. 의상이 뒤쪽으로 4, 5미터 가량이나 길게 펼쳐지는 드레스였기 때문이다. 유니가 높은 그네를 탈 것이기에 그네 아래로 치마가 길게 늘어지는 모습을 연출하기 위해 제작된 의상이란다.

“무대 세팅될 때까지 제가 치마를 계속 들고 있을 겁니다.”

세동이 드레스 치마를 팔에 둘둘 감아 유니 옆에 섰다. 유니가 무대를 끝내고 의상을 갈아입을 때까지 오늘 세동은 저러고 있어야 할 거다.

“오늘 저는 ‘달의 여신’이 되는 거죠. 이쁘겠죠?”

긴 치마 탓에 불편하게 앉았으면서도 오늘의 컨셉이 아주 마음에 드는지 연신 싱글벙글이다. 여신답게 헤어는 길게 웨이브진 머리를 한쪽으로 넘겨 늘어뜨리고 작은 꽃잎 넝쿨 같은 것으로 장식을 했다. 오밀조밀한 유니의 얼굴 탓에 우아한 여신이라기 보다는 귀요미 여신이라고 해야 맞을 듯싶다.

드디어 MWMA가 시작되고 일찍 무대를 해야 하는 유니는 대기하라는 전달이 왔다. 세동은 다시 한 번 팔에 감긴 치마를 정리하고 유니와 함께 무대 뒤편 2층으로 올라갔다. 시청자의 눈에는 잘 안보이지만 2층에 무대로 나가는 출입문이 여러 개 있다. 티비로 볼 때는 공중에 떠있는 듯이 보인다.

무대는 크지만 뒤편 준비 공간은 협소해 유니와 세동과 진행 스태프가 올라가고 우현은 아래에서 지켜보았다. 조심하라고 다시금 주의를 주고 무대장치도 재차 확인했다. 유니는 몸에 안전 줄을 묶고 대기하다가 공연장이 암전되고 싸인이 떨어지자 잽싸게 무대로 나가 그네에 앉았다. 세동이 팔을 풀어 치마를 아래로 늘어뜨려주고선 다시 무대 뒤로 들어왔다.

잠시 후 잔잔하게 음악이 흐르고 유니의 청아한 목소리가 공연장에 가득 울렸다. 역시 노래 하나는 일품이다. 무대가 너무 커서 우현의 눈으로는 무대 전체의 모습을 볼 수 없다. 조명이 비춰지자 카메라에 비친 모습이 정말 ‘달의 여신’ 같았다.

“무대 진짜 예쁘네. 음향도 좋고.”

유니의 목소리와 무대가 아주 잘 어울렸다. 다행히도 사고 없이 그네에서 잘 내려와 ‘코리아 스타 K’ 친구들과 앞 쪽 무대로 걸어 나가 멋지게 마무리했다. 무대가 끝나고 선배들 무대를 조금 더 보고 내려와서 짐을 싸기 시작했다.

“그럼 우리 어제 못 다한 쇼핑을 마무리하러 가는 건가요?”

“바로 비행기 타야하는데?”

“에? 바로 가야 한다구요?”

“서울에도 유니크한 슈즈 파는 곳 많아. 다음에 사러 가자.”

뾰로통해진 유니의 어깨를 다독여주고 공항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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