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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1] 12월, 가장 바쁜 시기(3)
“겁이 없는 건 너 같은데?”
우현도 경계심에 슬쩍 주변을 둘러본 후 배시시 웃었다. 은하가 우현의 손에 깍지를 끼고선 엄지손가락으로 우현의 손을 비비며 만지작거렸기 때문이다. 한참동안 두 사람은 테이블 아래에 한 손씩을 내린 채 손장난을 치며 다른 한 손으로 태연하게 술을 마셨다. 다른 사람들의 시선에선 둘의 손이 교묘하게 가려져 보이지 않는 각도였기 때문에 가능했다.
빈 소주명이 한 병, 두 병, 세 병이 되자 취기가 올랐다. 시계는 새벽 1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은하는 전혀 취하지 않은 건지 아주 멀쩡해 보인다.
“차는?”
“택시타고 왔어.”
“뭐? 이 아가씨가 진짜 겁이 없네. 택시탈 거면 나한테 미리 전화하지 그랬어? 데리러 갈 수도 있었는데.”
“그냥 택시타고 나오고 싶었어.”
“무슨 일 있으면 어떡하려고 그래? 앞으론 나한테 전화해. 데리러 갈 테니까.”
“후후, 벌써부터 단속하는 거야?”
은하는 기분이 좋은지 반달 눈을 해서는 우현 앞에 얼굴을 들이밀었다.
“어? 점점? 멀쩡해 보이는데 취했네, 취했어. 늦었다. 대리 부르자.”
은하는 다시 마스크를 하고 검은색 스냅백을 푹 눌러쓰고선 뒷좌석 오른쪽에 올라탔다. 대리기사 탓에 역시나 고개를 돌려 창밖만 내다보며 간다. 어쩔 수 없지.
‘으응?’
새끼손가락에 뭐다 닿았다. 내려다보니 은하 왼손 새끼손가락이 와서 닿아있다.
“큭.”
웃음이 나오는 걸 애써 참으며 괜히 고개를 홱 돌려 창밖을 보았다. 물론 손은 그대로 둔 채. 아니지, 그대로 두면 안 되지. 슬금 은하 손가락 위로 손을 조금 더 뻗어 그녀의 손가락을 잡았다.
“풉.”
은하도 창밖을 내다보며 나오는 웃음을 참는 중이었다. 우현은 과감하게 은하의 손등을 덮어 깍지를 꼈다가 풀었다가 또 은하의 손가락을 만지작거렸다가 장난을 쳤다.
‘내가 미쳤구나.’
이게 다 술 때문이다.
“여기 있습니다!”
대리기사가 기어를 P에 놓기도 전에 우현이 지갑에서 만 원짜리 두 장을 꺼내 몸을 불쑥 앞으로 내밀었다.
“아, 예… 예.”
움찔 놀란 대리기사가 돈을 받아들고는 급하게 내렸다. 뭐… 알거다. 빨리 내려주길 바란다는 걸. 우현도 예전에 대리기사 일을 할 때 다 알았으니까.
“크크크크큭.”
“아하하하하, 우리 너무 위험한 거 아니야?”
대리기사가 내리자 참고 있던 웃음이 터져 나왔다. 은하는 너무 재미있는지 모자를 벗고 마스크를 풀고서도 끅끅대며 웃었다. 아마 그럴 거다. 이런 ‘미친 짓’이 처음일 테니. 우현과 함께 일하는 동안 우현이 알기론 은하는 연애를 안 했다. 우현의 감시가 워낙 심했던 탓도 있고.
우현도 과거에 잠깐씩 스치듯 만난 인연은 있었으나 상대가 연예인인 적은 처음이다. 그것도 톱스타는.
“내가 아직 은하 너에 대해서 모르는 게 많다는 걸 요즘 새삼 느낀다. 네가 이렇게 스릴을 즐길 줄은…”
“어머머? 시작은 오빠가 했거든?”
“뭐… 누가 시작했든. 기억해둘게. 은하는 스릴을 즐긴다… 크큭”
툭
우현의 장난에 은하가 우현의 팔뚝을 툭 치고선 새침하게 노려본다.
“후훗. 알았어, 알았어.”
은하의 표정이 귀여워 몸을 돌려 양 손으로 은하의 볼을 잡고 비볐다.
“아이, 누가 만지래? 칫.”
새침한 표정에 가만히 있을 수가 없다.
쪽.
은하 이마에 한 번.
쪽.
은하 코에 한 번.
쪽.
은하 입술에 한 번.
“얼마나 만지고 싶었다구.”
우현이 은하의 눈을 바라보자 쑥스럽지만 기분이 좋은 듯 은하는 살며시 웃으며 고개를 숙였다. 우현은 은하의 긴 머리카락을 한 번 쓸었다가 손으로 은하의 턱을 살며시 들어 올려 입술을 빨아들였다.
“흐읍.”
달콤했다. 지난번엔 너무 떨리고 정신이 없어 느끼지 못했던 것들이 느껴졌다. 우현은 은하 입술의 촉촉함과 키스의 달콤함을 오롯이 느끼고 있었다. 은하의 어깨를 감싸자 은하가 우현의 목에 팔을 두르며 안긴다.
그 때 코로 느껴지는 은하의 향기. 샴푸인지 혹은 향수를 뿌린 것인지, 아니면 그냥 은하의 몸에서 나는 체향인지 모를 달콤한 향이 우현을 자꾸 자극해왔다. 은하의 입술을 쪽 빨아준 다음 입술을 은하의 볼로, 그리고 귓불로 옮겼다.
“아이, 간지러워.”
우현이 귓불에 입술을 대고 비비자 은하가 몸을 움츠리며 뺀다. 우현은 두 팔로 은하를 가두어서 몸을 더 빼지 못하게 만든 다음 작고 통통한 귓불을 빨아들였다. 은하는 간지러운지 몇 번 우현의 가슴팍을 툭툭 치더니 우현에게 더 안겼다. 은하의 몸이 더 붙자 우현은 은하를 더 느끼고 싶었다.
“하아…”
심장박동이 많이 빨라졌는지 숨이 찬다. 거친 숨을 내쉬면서도 키스를 멈출 수 없었다. 혀로 귓불을 간질이다가 다시 볼로, 입술로 키스를 퍼부어댔다. 그러다 우현은 은하의 무릎 아래로 팔을 넣어 은하의 몸을 살짝 들어올렸다.
“으응?”
곧바로 은하의 다리를 우현의 허벅지 위에 올려놓으며 허리를 잡아 은하 몸을 더 끌어당겼다. 우현의 허벅지 위에 올라앉은 것 같은 자세가 되자 우현은 은하의 목덜미를 파고들었다. 술이 더 올라오는 건지 은하의 향기에 더 취하는 건지 정신이 혼미했다. 우현의 입술이 목선을 타고 내려갔다.
‘자국이 남으면 안 되는데…’
그 와중에도 톱스타의 목에 키스마크가 남을까 걱정이 된다. 하지만 조심하려고 하는데 잘 안 된다. 자꾸만 입술에 힘이 들어갔다. 은하의 어깨와 쇄골이 느껴진다.
우현은 은하를 더 힘껏 껴안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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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말이 되면 각종 시상식 때문에 정신이 없다. 그 와중에 드라마든, 영화든 뭐 하나라도 진행 중인 게 있다면 배우는 물론이고 회사 측도 스케줄을 조정하느라 혼이 빠질 지경이 된다.
흑룡영화상 신인상을 차지하게 된 별이는 이번 SBC 연기대상에서도 유력한 신인상 후보다. ‘그 양반 같은 자식’이 올해 최고의 시청률을 찍었던 만큼 극본상과 작품상은 따 놓은 당상이다. 추가로 별이의 신인상과 민준기의 남우주연상, 이소은의 여우주연상까지 노리고 있다.
“영화제 신인상과 연기대상 신인상을 동시에 따면? 대박 나는 거지요.”
대표실에 앉아 기사를 클릭하며 혼자 신나서 흥얼거리는데 오랜만에 임찬규 감독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아이고, 고생 많으십니다.”
“허허. 고생하는 줄 알면 종종 와서 고기라도 사지 그랬어?”
“한창 후반작업 하시는데 제가 가서 방해라도 될까봐 그랬죠. 전화 하신 거 보니까 마무리 되셨나봅니다?”
“확실히 유은하가 주연이니까 배급이 이렇게 빨리 결정되네. 이래서 스타를 쓰는 건가봐.”
사실 이명선 감독의 '그녀의 일기' 배급사 결정이 늦어지는 건 상업적인 작품이 아닌 이유가 크다.
“임 감독님 입장에서 유은하가 가장 몸값 비싼 친구 아니었어요? 뭐, 출연료를 준건 아니지만.”
“그렇지. 내가 언감생심 유은하를 데리고 영화를 찍을지는 몇 년 전만해도 꿈도 꾸지 못했으니까. 어쨌거나 우리 김 대표 덕에 유은하랑 영화를 찍었으니 이 은혜를 어떻게 갚아야 하나? 하하하.”
평소보다 들뜬 목소리로 보아 후반작업 결과가 꽤 마음에 들었나 보다.
“배급사가 어디길래 그리 좋아해요?”
“아 글쎄, ‘쇼박수’에서 맡기로 했다니까! 이제 완전히 준비 끝났어.”
“‘쇼박수’요? 상영관 걱정은 없겠네.”
국내 배급사 1, 2위를 다투는 ‘쇼박수’라면 영화 개봉 시 상영관이 적어 관객이 적을까 걱정할 필요는 없을 거다.
“그렇지?”
“그럼 개봉은 언제로 결정됐어요?”
“내년 1월 중순으로 결정됐어. 원래는 시기를 조금 늦춰서 하려고 했는데 배급사 쪽에서 방학 특수 확실하게 누려야 한다면서 조금 빨리 하자고 하네?”
“그럼 ‘스파이더 맨’이랑 붙는 거잖아요? 그건 좀 위험한데?”
“나도 그래서 1월 하순이나 2월에 하려고 했었거든. 그런데 영화를 봤던 ‘쇼박수’ 사람이 맞짱 한번 떠보자고 하더라구. 나보다 더 자신 있나 봐, 허허.”
매출을 위해서라면 뭐든지 한다는 배급사 직원이 한 말인 만큼 우현도 기대가 되지 않을 수 없었다.
“저도 보고 싶네요. 도대체 어느 정도나 잘 나왔길래 그랬대요?”
“확실히 돈 값은 하는 것 같다. 그 외국인 음악감독 있잖아?”
“세바스찬 비욜트요?”
“김 대표는 이름도 잘 외우네. 나는 그거 일주일이 지나도 안 외워지던데. 참, 어쨌든 그 세바스찬이 서울시향의 도움을 받아서 녹음했는데 그걸 씌워놓으니까 확실히 음악의 완성도가 놀랍게 올라가던데? 원래 내 생각은 말이야, 사람들 귀에 익은 클래식 가지고 하는 게 안전하지 않나 했거든. 그런데 본인이 작곡한 음악을 가지고 테마를 깔아주는데 너무 좋았어. 마치 프랑스나 이탈리아 영화 같았다니까?”
“아휴, 그놈의 이탈리아…”
“이건 진짜 좋은 의미의 이탈리아였어. 크흠… 어쨌거나 나도, 배급사도 충분히 만족스러웠으니까 흥행은 한번 기대해 봐도 될 것 같아. 언론시사회 일정은 대략 1월 1일이나 2일쯤 될 것 같으니까 그 때는 스케줄 비워둬.”
“알겠습니다. 그 동안 수고하셨어요. 이제 여유 있으니까 가족들도 보고 하세요.”
“아니야. 아직은 아이들 보기 그래. 내가 이번에 ‘피아니스트’ 대박 나고 나면 그 때 아이들 데리고 영화 보여주면서 화해하려고.”
“괜한 자존심 세우지 말아요. 사람 마음이라는 게 그 한두 달 사이에 수십 번은 바뀔 수 있는데 그 사이에 무슨 일이 생길지 어떻게 알아요? 형수님하고 이혼은 돼있어요?”
“아니지. 이혼 해달라고 하는 걸 아직 안 해줬지.”
“그럼 당장 가서 잘못했다고 빌어요.”
“그래도 될까? 나는 정장도 한 벌 쫙 빼입고, 근사한 곳에서 저녁이라도 사주면서 얘기하려고 했는데…”
“어차피 곧 있으면 개봉하잖아요. 애들도 감독님 보고 싶을 거 아닙니까? 얼른 가서 형수님께 비세요. 앞으로 아이들 안 보고 살 수 있어요? 아니잖아요.”
“흐음… 알았어. 그럼 별이 잘 챙기고, 언론시사회 때 보자고. 그리고 별이한테 신인상 수상 축하한다고 전해주고.”
“네, 꼭 전해줄게요. 그리고 형수님한테 가서 이탈리아 감성이 어쩌고 하는 말은 하지 마세요, 알았죠?”
“알았다니까.”
생각보다 개봉 시기와 시사회 일정이 빠르게 잡혔다. 내년 초라고 예상하고는 있었지만 1월 초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과연 별이와 은하가 어떻게 나왔을지 기대감이 무럭무럭 차올랐다.
똑똑!
민주가 대표실 문을 열고 얼굴을 빼꼼 내밀었다.
“윤해연 작가님께서 오셨어요.”
“어? 윤 작가님이? 들어오시라고 해요.”
짙은 푸른색 계열의 투피스를 입고 온 윤 작가는 고급스러운 차림새와는 다르게 얼굴이 피곤에 찌들어 있었다.
“아이고, 작가님 이러다 죽겠네.”
“나 죽겠어, 김 대표. 나 그냥 수정하지 말 걸 그랬나?”
그녀의 투정 섞인 투덜거림에 미소 지었다.
“뭘 또 그렇게까지 생각해요. 그런데 여기까지는 웬일이세요? 하실 말씀 있으시면 직접 전화하시지. 안 그래도 시간도 없고 피곤하실 텐데.”
“김 대표 보는 김에 햇빛이라도 쏘이려고. 사흘만 더 이러다가는 우울증 걸리겠더라. 오늘 나온 김에 김 대표한테 맛있는 거나 얻어먹을 거야.”
“하하하, 잘 하셨어요. 제가 근사한 곳으로 모실 테니까 좀 쉬세요. 저쪽 빈 사무실에 소파 하나 들여놓은 곳 있는데 제가 종종 낮잠 자요. 가서 눈 좀 붙여요.”
“그 전에 이것 좀 봐봐. 전에 5회 이후부터 수정했잖아. 8회 까지는 제작진에 넘겨줬고 이건 9회부터 대본이야. 8회까지 넘어간 대본은 봤지?”
“그럼요, 당연하죠. 그런데 왜, 문제 있어요?”
“문제가 있다기 보다는 조금… 내 스타일이 아니라고 해야 하나? 분명히 내가 쓴 것 같은데 읽어보면 내가 쓴 게 아닌 것 같단 말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