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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0] 12월, 가장 바쁜 시기(2)
“예? 채택하기로 했다구요?”
제작발표회가 끝난 ‘승냥이’는 얼마 전에 1, 2회가 나갔다. 네티즌 반응이 좋아 기대하긴 했지만 시청률은 케이블 장르 드라마답지 않게 4%를 찍으며 이동운 효과를 톡톡히 봤다.
“네, 위에서 고민이 많았어요. 그래서 이제야 확정됐다고 연락드리네요.”
안혜진 음악감독이 쑥스러운 듯이 말했다.
“이왕이면 첫방부터 나갔으면 좋았을 텐데요.”
“그건 걱정하지 마세요. 앞으로 테마가 쓰일 부분은 많으니까요. 그리고 처음부터 끝까지 한 가지 테마로만 가면 시청자들도 피곤해 하죠. 5회 이후부터 나갈 거예요. 음… 그리고 이거 유니 씨가 만든 곡이라고 하셨죠?”
“네, 편곡은 저희 엔지니어가 손을 대긴 했지만 그것도 유니의 손을 거친 거죠.”
“그럼 그 점을 충분히 홍보하도록 할게요. 이번에 유니 씨가 카메오로 톡톡히 활약해 주신 것도 있는데 OST까지 받아 써서 얼마나 고마운지 몰라요, 참 재주가 많은 친구네요.”
생각보다 깔끔한 연기를 선보인 유니에게 몇몇 드라마에서 러브콜까지 들어오고 있다. 물론, 케이블 쪽의 단편 드라마 쪽이나 지상파 단역으로 연락이 오고 있어 아예 신경을 끄고 있다.
“하하, 그럼 감사하죠. 특히 이번 앨범에 본인 자작곡이 대부분이라 여성 싱어 송 라이터로 많이 부각됐으면 하는 바램이거든요.”
“솔직히 가사를 붙였으면 아무리 멜로디가 좋았다고 해도 선택하지 않았을 거예요. 가사가 들어가면 시청자의 관심이 분산돼서 좋지 않은데 혹시 아셨던 건가요? 매출에 관심이 있었다면 가사를 붙였을 것 같은데, 솔직히 놀랐어요.”
가사 없이 멜로디만 가지고는 음원 매출이나 행사에서 노래를 부를 수 없기에 돈이 되지 않아 어떻게 보면 의미 없는 짓일 수도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럼요, 당연히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매출에 관한 부분은 괜찮습니다. 어차피 유니에게 좋은 경험 시켜주기 위해서 한 것이니까요. 유니도 크게 신경 쓰지 않구요. 오히려 자신이 만든 멜로디가 드라마 주요 테마곡으로 쓰일 수도 있다고 하니까 엄청 기대하더라구요. 이번에 소식 들려주면 상당히 좋아할 겁니다.”
“그럼 다행이네요.”
“기분 좋은 소식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언제 한번 시간 내서 같이 식사라도 하시죠?”
“호호. 빈말이 아니라면 드라마 끝나고 시간 내볼게요.”
“전 빈말 같은 거 안 합니다, 하하하. 그럼 그 때 뵙겠습니다.”
이 좋은 소식을 묵혀놓을 수 없기에 바로 녹음실로 향했다. 유니는 녹음실에서 앨범 작업에 열중이었는데 우현의 얼굴이 문 너머로 비치자 활짝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들어와도 된다는 의미다.
“유니가 잘 하고 있습니까?”
“그럼요. 그 무슨 섭섭한 소리를 하세요?”
엔지니어인 호준이 미처 답하기도 전에 유니가 냉큼 녹음실에서 나오며 생글거렸다.
“그냥 물어본 거지. 그나저나 좋은 소식이 있어.”
“어엇! 설마!”
유니는 양 손으로 입을 가리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흡사 시상식에서 이름이라도 불린 듯한 모습이다.
“뭐야, 눈치 챈 거야?”
“드디어 CF 계약된 거예요? 어떤 거예요? 진짜 소주 광고예요? 막 흔드는 거?”
손에 소주병을 든 것처럼 무언가를 들고 몸을 흔드는 유니의 머리에 가볍게 꿀밤을 한 대 먹였다.
“아얏!”
“인마, 아버지가 말 안 했어? 주류 광고는 안 된다고 하시잖아.”
“칫! 술 광고는 최고의 스타들만 찍을 수 있잖아요. 그리고 나도 이제 몇 달만 지나면 성인이라구요. 게다가 요새 술 광고는 예전처럼 막 섹시한 것만 어필하지 않잖아요? 그러면 괜찮은 것 같은데.”
“어쨌든 아버지가 주류 광고는 안 된다고 하셨어. 그리고 좋은 소식은 CF 계약이 아니고 이번에 ‘승냥이’쪽에 보냈던 음악, OST로 확정됐어.”
“오오…”
고개를 끄덕이며 뿌듯한 표정을 짓고 있는 게 그 정도쯤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 같다.
“그까짓 일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표정이구만?”
“히히. 솔직히 내가 만들었지만 진짜 소름끼치는 음악 아니에요? 그걸 안 쓰면 음악감독이 이상한 거지.”
“요새 자신감이 부쩍 늘었네?”
“다 팬들 덕분 아니겠어요? 이거 보이죠? 이거! 이것두 팬이 선물해준 거예요.”
유니가 조그마한 손지갑과 키링을 흔들어 보이는데 한눈에 봐도 명품이다. 이럴 때는 정말 연예 기획사 사장이 아니라 연예인이 되고 싶다.
“좋겠다. 이래서 다들 연예인 하나보다.”
“저도 데뷔한지 몇 년 만에 처음 받아보는 것들이에요, 헤헤. 어쨌거나 이제 ‘승냥이’ OST에 제 이름도 올라가겠네요?”
“응, 5회 이후부터 네 이름이 올라갈 거야. 홍보도 빵빵하게 때린다고 하니까 다음 네 앨범 홍보효과도 상당할 거구. 이제 앨범만 잘 만들면 된다.”
“그 전에 시상식 준비가 문제죠. 전 진짜 일하면서 기 싸움 같은 걸로 스트레스 받고 싶지 않단 말이에요.”
울상을 짓는 유니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며 달랬다.
“피디가 잘 맞춰본다고 했으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 그리고 협업 할 때는 너무 완벽한 무대를 꾸미려고 하면 안 돼. 너만 스트레스 받거든. 적당히, 완성도 70% 정도를 목표로 하면 너도 스트레스 받지 않고 까탈스럽지 않은 사람이라는 평가 들으면서 좋게 마무리될 수 있어.”
“그건 싫단 말이에요. 이왕이면 잘하고 싶은데 그건 너무 자존심 상해요.”
“자존심은 너 혼자만의 무대를 꾸밀 때 세워. 예술하는 사람들이 이래서 평범한 사람들에게 괴팍하다느니, 꼬장꼬장하다느니 하는 말을 듣는다니까. 적당히 다른 사람들의 기준에 맞춰줄 줄 알면서 어떤 부분에서는 좋게 좋게 넘어갈 수 있어야 남들에게 욕 안 먹고 이 바닥에서 오래 갈 수 있는 거야.”
“으휴… 알았어요. 적당히 맞춰주다가 무난하게 마무리 하라는 말이죠?”
“그렇지, 그렇지. 원래 대학 다닐 때도 혼자 하는 과제보다 조별 과제가 더 힘들거든? 그 때 가장 열 받는 사람이 A 받고 싶은 애들이야. 가장 속편한 애들은 성적에 관심이 없는 애들이고. 사회에서는 A를 받고 싶어하는 애들을 우선으로 하겠지만 이 바닥에서는 특이하게 성적에 관심 없는 척 하는 애가 더 오래가는 경우도 있다는 걸 알아야 해.”
우현은 대학을 안 나왔지만 이런 이야기는 주변에서 많이 주워들었다.
“관심 없는 척?”
“그럼, 인기에 관심 없는 연예인이 어디 있겠어? 너도 그렇고 별이도 그렇지만 항상 누구와 싸우거나 다투는 모습을 보여줘서는 안 돼. 설사 상대방이 잘못했다고 하더라도 말이지. 중요한 건 누가 잘못했느냐 보다 누가 인간적인 매력이 있느냐야. 알겠지?”
“흠… 어렵지만 잘 생각해볼게요.”
마냥 어리게 생각했지만 겪을수록 은근히 까탈스러운 면이 있다. 그래도 똑똑한 아이니 잘 알아들었을 거라 생각하며 대표실로 올라왔는데 그새 문자 하나가 와 있다.
[밤 11시, 오빠네 동네 포차에서 보자.]
드디어 은하에게 자유의 시간이 생긴 것 같다. 휴가(?)에서 돌아온 은하는 차기작과 밀린 CF촬영 때문에 문자로만 안부를 주고받았었다. 그래서 얼굴도 시상식에서 처음 봤는데 오늘에서야 얼굴을 볼 수 있을 것 같다.
업무를 하는 둥 마는 둥 하고 시간아 빨리 가라 노래를 부르며 저녁을 먹고 바로 오피스텔로 퇴근했다. 괜히 하지도 않을 업무 때문에 사무실에서 시간을 보내기 싫었다.
“여기!”
포차 한 구석에 약속시간 30분 전부터 와 있던 우현은 마스크를 쓰고 검은색 모자를 푹 눌러쓴 여성을 보자 손을 흔들었다. 얼굴은 보이지 않았지만 그 체형만으로도 그녀가 은하임을 직감할 수 있었던 거다.
“아주 광고를 하지 그래?”
“뭘, 이정도 가지고… 이모! 여기 소주 하나랑 닭똥집 하나 주세요. 아, 국수도 하나 말아 주세요.”
음식 먼저 주문하고 이미 반쯤 마신 소주를 그녀의 잔에 따랐다.
“저녁은 안 먹고 왔지?”
“오빠랑 만나기로 했는데 먹을 수는 없잖아.”
저녁을 먹고 야식처럼 또 먹는다는 건 체중조절이 필수인 배우에게 있어 금기시 되는 일이다. 때문에 여기서 말한 오빠랑 만나기로 해서 안 먹었다는 건 우현 때문에 안 먹었다는 게 아니라 두 끼를 먹을 수 없다는 게 맞다.
“잘했어. 그리고 흑룡영화상 때 예쁘더라.”
“내가 언제는 안 예뻤나?”
“영화상때 조금 더 예쁘기는 했지, 하하. 그나저나 무슨 일 때문에 그렇게 바빴어? 차기작 벌써 정해진 거야?”
“하자는 곳은 많지. 지금 ‘피아니스트’ 후반 작업이 마무리 되는 시점이라 더 스케줄 뺄 일도 없고, CF 촬영이랑 화보 촬영 제외하면 계속 쉬는 상태나 마찬가지니까. 특히 드라마 쪽에서 많이 들이대네?”
뭐든지 하나 했다 하면 대박을 쳐댔으니 영화나 드라마에서 은하를 노리지 않는 게 이상한 일이다.
“그래서? 생각해 둔 작품은 있어?”
“흐음… 고민 중이긴 한데…”
“어떤 고민?”
“전에 오빠의 의견을 적극 반영해서 이명선 감독의 ‘그녀의 일기’를 찍었잖아. 현재는 배급사 문제 때문에 아직 개봉이 늦어지고 있기는 한데… 솔직히 말해서 그게 작품성과 내 연기력을 조금이라도 더 인정받게 해준다면 이번에는 다시 상업적인 걸 하나 해보고 싶어.”
“아, 그럼 ‘그녀의 일기’가 좋은 평가를 받지 못한 것 같으면 다시 한번 작품성 있는 걸 하고 싶다는 얘기네?”
“응. 그래서 아직 선택하지는 못했어. 그리고 어차피 오빠한테 물어볼 거였으니까 선택 안했지. 상업적인 거든 작품성 있는 거든 다 물어볼 생각이었으니까.”
“회사도 다른데 너무 중요한 일에 써먹는 거 아니냐?”
“칫! 우리가 남이야?”
“흐음… 그건 아니지, 하하. 그럼 그럼, 그런 건 나한테 물어봐야지. 아, 강소연 쪽 분위기는 어때?”
“강소연? 갑자기 강소연은 왜?”
“전에 흑룡영화상에서 보니까 얼굴이 그리 밝아 보이지 않더라구.”
“아… 별이가 신인상 받고 난 후에 본 거지?”
“그렇긴 한데, 설마 별이가 상을 받았다고 그랬을까? 전에 강소연이 ‘밀실’ 같이하게 됐을 때, 흥행에 대한 갈망이 대단해 보였거든. 그런데 막상 대박까지는 아니더라도 충분할 만큼 터졌는데 오랜만에 얼굴을 보니 그리 좋아 보이지 않아서 조금 그렇더라고.”
“흥! 그 언니는 그게 문제야. 연기력이 좋으면 뭐해. 그리 속이 좁아서는… 이번에 여우주연상 못 받을 것 같아서 그런 거야. 영화제 끝나고 우리 회사끼리 뒷풀이 할 때도 그랬어.”
“마이더스끼리 뒷풀이 했어?”
“당연하지. 만약 여우주연상 받았으면 별이가 참석했던 뒷풀이 갔을 걸? 상 못 받았으니까 우리끼리 하는 뒷풀이에 와서는 술 마시는 내내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는데, 술 맛이 뚝 떨어지더라.”
“피곤한 스타일이네.”
“그것뿐이게? 언제부터인지 나한테 들러붙어서는 ‘피아니스트’ 찍은 거 어떻게 될 것 같냐고 물어보는데 눈빛은 대놓고 저주를 퍼붙더라니까.”
“하하하.”
우현은 새침한 표정을 짓는 은하가 귀여워 은하의 볼을 쓰다듬었다.
“헐, 겁도 없이?”
은하는 슬쩍 주변을 훑어보고선 우현의 손을 잡아 테이블 아래로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