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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7] 흑룡영화상 시상식(2)
“너 혹시 가수 하다가 배우 하는 거니?”
“네? 네에…”
이제 별이 목소리는 들릴락 말락 해지고 죄 지은 사람마냥 고개는 숙여졌다. 오라고 하지도 않은 곳을 인사한다며 제 발로 찾아 들어갔으니 황재연의 말이 끝나기 전에 나와 버릴 수도 없는 노릇. 뒤에 서 있는 우현과 상준은 당장은 어떻게 할 수가 없는 상황에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하여튼 개나 소나 다 배우 한다고 설쳐대지. 연기가 뭔 줄이나 알고? 보니까 드라마에도 나오던데, 신인 주제에 주조연 들어간 거 보니… 어디서 스폰이라도 받았니?”
“거 말씀이 너무 지나친 거 아닙니까?”
우현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저 정도까지 말이 나올 줄은 몰랐다. 별이가 아무리 어리다고 한들 사람을 앞에 세워두고 할 말, 못 할 말이 있지. 말하는 꼬락서니를 보니 어려서부터 인기를 얻고 떠받들어줘서 예의라는 걸 모르는 사람이다.
“훗, 나가봐.”
우현의 화난 목소리 따위는 신경 쓸 거리도 아니라는 듯 이죽거리며 말을 하고선 태연하게 다시 돌아 앉아 거울을 들여다본다.
우현은 속에서 천불이 났지만 내리눌렀다. 시상식에 와서 갓 데뷔한 신인 배우가 경력 20년차 선배에게 대들고 싸울 수는 없지 않은가. 별이를 데리고 나왔다.
“하아… 방금 저 사람 한 대 칠 뻔했습니다!”
상준이 울그락불그락해서는 씩씩댄다. 사실 우현도 그렇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같이 동조했다가는 별이의 첫 시상식을 망칠 거다. 별이를 쳐다보았다. 참담한 표정이다.
“별아, 크게 마음 쓰지 마. 이 바닥에 저런 인간들 한둘이 아니다. 더 심한 놈들도 많아. 저런 사람들 하나하나 다 신경 쓰면 이 일 못해. 그냥 막돼먹은 개념 없는 인간이라고 생각하고 넘겨버려.”
두꺼운 메이크업에 가려져 얼굴색은 보이지 않지만 귀가 벌게진 걸 보니 별이 기분이 짐작이 간다. 별이는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인사는 이쯤하고 대기실로 돌아가서 마음 가라앉히자. 시상식장 들어갈 때는 웃으면서 들어가야지?”
역시나 고개만 끄덕이고는 풀이 죽어 대기실로 향했다. 별이는 목이 탔던지 상준이 건네주는 생수를 벌컥벌컥 들이키고 상준은 옆에서 별이에게 손부채질을 해줬다. 우현은 다시 대기실을 나왔다.
‘저 싸가지 없는 년은 몇 년 만에 갑자기 왜 나타난 거야?’
세월이 흐르면 이런 일, 저런 일 겪으며 자연스레 단단해지기 마련이지만 아직 어린 나이에 설레는 마음으로 참석한 첫 시상식에서 저런 일을 겪게 하고 싶지는 않았는데. 갑자기 나타난 이유나 알아보자.
누구에게 물어보면 알 수 있을까 생각하며 어슬렁거리는데 누군가 우현의 어깨를 탁 짚는다. 돌아보니 최철성 감독이다.
그도 시상식에 참석한다고 검은색 벨벳 정장을 쫙 빼입고 나타났는데 어울리지도 않게 턱수염은 덥수룩하게 길러 와서 누가 보더라도 예술 쪽에 발을 담근 사람임을 알 수 있었다.
“별이 수상 소감은 준비해왔어?”
“아, 별이는 설마 자기가 받겠냐면서 괜히 실망할까봐 미리 준비하지 않겠다하네요.”
“허허, 그래도 기대는 좀 해보라고 해. 혹시 또 알아?”
“하하, 받으면 좋죠.”
“그래. 있다가 같이 입장할까?”
“네, 그러시죠. 그런데 감독님, ‘황재연’이라고 예전에 인기 있었던 배우 아시죠?”
“당연히 알지. 옛날에 ‘대학병원’이라는 의학드라마 했었잖아. 그 때 인기 엄청 많았지. 그런데 왜?”
“아까 별이 인사 도는데 황재연이 와있더라구요. 꽤 오랫동안 안 보였는데 갑자기 시상식에 나타나서 무슨 일인가 하구요.”
“결혼하면서 활동을 안 했지. 아 참, 얼마 전에 어디 엔터테인먼트더라? 아무튼 어느 회사에서 황재연이 다시 활동 시작할거라고, 좋은 역할 있으면 써달라고 홍보하러 왔더라. 시상식에서 얼굴 비추고 다시 시작하려나보네.”
“아, 그렇군요. 이제 슬슬 입장해야 할 시간이네요. 별이 데리고 나오겠습니다.”
대기실로 돌아가다가 은하의 대기실 앞을 지나가게 되었다. 아까 황재연이 그러지만 않았어도 별이가 인사한다는 핑계로 은하를 볼 작정이었건만. 아쉽다.
“쩝.”
별이는 메이크업을 다시 매만진 후 최 감독의 팔짱을 끼고 시상식장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우현과 상준도 옆쪽으로 들어갔다. 핸드폰을 손에 쥐고 있을 수도 없기에 만약을 대비해서 지켜보고 있어야 한다.
식장 안은 이미 사람들로 꽉 들어차있었다. 팬들은 스타가 입장하는 모습까지도 보고 싶어 하니 한 명씩 들어올 때마다 플래카드를 흔들고 소리를 질러댔다. 아쉽지만 아직 별이의 플래카드는 보이지 않는다. 곧이어 은하도 입장하는 모습이 보였다. 은하와 별은 반갑게 인사를 하고 앉았다.
식이 시작되고 흑룡의 안방마님인 김혜서와 유준성이 진행을 보았다. 1부에선 거의 스태프들에 관한 시상이 진행된다. 오프닝이 시작되고 얼마 안 있어 진행 요원이 별이에게 다가가는 모습이 보였다. 각본상 시상을 준비하라는 전달일 것이다. 별이와 안영기 선생님이 식장 뒤편으로 나오는 모습이 보이자 우현과 상준도 다시 나왔다.
“앉아있으니까 어때?”
“사람들도 너무 많고 정신이 하나도 없어요. 시간이 어떻게 흘러가는지도 모르겠구요.”
별이는 가슴에 손을 얹고 숨을 몰아쉬었다.
“후후, 그래. 무대 나가서 떨지 말구.”
“아흐… 그래도 떨려요.”
별이는 잠시 메이크업을 손보고 물을 한 모금 들이켠 후 안영기 선생님의 팔짱을 끼고 무대로 나갔다. 우렁찬 박수소리가 들린다. 우현과 상준은 긴장된 표정으로 안쪽에 있는 티비를 바라보았다.
“안녕하십니까, 안영기입니다.”
“안녕하십니까, 김별입니다.”
“김별 씨가 ‘밀실’이라는 작품으로 데뷔를 했죠? 저도 ‘밀실’ 봤습니다.”
“아, 정말요? 감사합니다. 대선배님께서 봐주셨다니 너무 영광이에요.”
“정말 좋은 작품이더군요. 우리 배우들이 이렇게 좋은 작품을 만나기 위해서는 좋은 각본이 있어야겠죠?”
“네, 맞습니다. 배우에게 좋은 각본을 만나는 것만큼 큰 행운은 없을 텐데요. 그래서 오늘 저희가 시상하는 부문이 바로 ‘각본상’입니다.”
“그럼 ‘각본상’ 후보부터 보겠습니다.”
별이는 차분하게 큐카드를 넘기며 말을 이었다. 안영기 선생님과 한 화면에 잡히는 모습도 괜찮았다.
“생각보다 잘 하는데요?”
“별이가 약해보여도 깡이 있다니까. 떨지도 않고 잘 하네.”
상준과 우현도 차분하게 진행하는 별이의 모습에 한결 마음을 놓을 수 있었다.
“모두 대단한 작품들인데요. 발표는 예쁜 김별 씨가 할까요?”
“호호, 그럼 수상자를 발표하겠습니다. ‘제 47회 흑룡영화상 각본상’, ‘오늘의 너와 나’에 이수진 님! 축하합니다!”
환하게 웃으며 수상자를 호명하고 안영기 선생님과 함께 무대 중앙으로 나가 수상자에게 트로피와 꽃다발을 전달했다. 그리고 들어오자마자 드레스를 휘날리며 달리듯 다가와서는 눈을 커다랗게 뜨고 물어온다.
“저 어땠어요? 잘 했어요?”
“너 떨린 거 맞아? 전혀 안 떨던데?”
“어후, 떨려서 죽을 뻔했어요!”
“엄살은…”
“진짜예요! 그래도 이제 제가 할 일은 다 끝났으니 앉아서 보기만 하면 되겠죠?”
“혹시 또 알아? 신인상 탈지.”
“에이… 후보들 보세요. 어떻게 제가 돼요? 제 생각에는 ‘1919년, 우리의 그 날’에 최미라 씨가 받을 것 같아요. 작품 자체가 워낙 무게감이 있어서.”
“그래, 그 친구도 잘 했지. 얼른 들어가자. 이렇게 예쁘게 하고 왔는데 카메라에 자주 잡혀야지.”
다시 식장 안으로 들어갔다. 화면에 종종 비치는 별이 모습이 예뻤다. 그리고 신인인 별이 보다 더 자주 화면에 비치는 은하도 예쁘고.
‘자꾸 보이니까 진짜 보고 싶잖아.’
진행 요원이 은하에게 다가가는 모습이 보인다. 공교롭게도 은하가 별이가 후보로 오른 신인상 시상을 맡았다. 보통 톱급 스타들은 단순 시상만을 위해서 참석하는 경우는 없다. 본인이 수상 후보에 올랐을 때나 참석해서 겸사겸사 시상도 한다. 혹은 전년도 대상 또는 주연상 정도의 큰 상을 받은 경우엔 시상만을 위해서 참석하는 경우도 간혹 있다.
그런데 올해 수상 후보에 은하는 없다. 집계 기간 동안 개봉한 영화가 없기에. 그럼에도 그녀가 시상만 하기 위해서 참석한 건 아마도 개봉을 기다리고 있는 두 편의 영화 때문일 것이다. 이렇게 얼굴을 비추며 간접적으로 홍보를 하는 거다. 게다가 별이와 함께 ‘피아니스트’를 찍었으니 신인상 후보에 오른 별이와 함께 이름이 오르내리는 효과까지 이중의 홍보 효과를 노렸으리라.
‘그리고 뭐… 별이가 내가 키우는 배우니까 도와주려는 마음도 있을 것이고. 후훗, 기특한 녀석.’
말 안 해도 다 안다. 어쩌면 콕 찍어서 신인상을 시상하겠다고 했을 수도 있다. 은하를 생각하니 흐뭇해져 입가에 미소가 그려졌다.
“신인상 시상에는 유은하 씨와 김도현 씨께서 수고해주시겠습니다. 박수로 맞이해주시죠.”
김혜서의 목소리가 들리고 은하가 김도현의 팔짱을 끼고 등장했다.
“와아아! 여신 유은하!”
“유은하! 유은하!”
은하의 팬들이 굉장하다. 은하는 걸어 나오며 여유롭게 팬들을 향해 손을 흔들어주었다. 은하보다 후배이고 인기가 적은 김도현 팬들의 목소리는 거의 들리지 않는다. 우현은 은하를 보기 위해 목을 쭈욱 뺐다.
“안녕하세요, 유은하입니다.”
“안녕하세요, 김도현입니다.”
“유은하 선배님 굉장히 뵙고 싶었는데요. 이렇게 흑룡영화상에서 뵙게 되네요. 팬입니다.”
“호호, 감사합니다. 저도 ‘그녀의 보스’라는 작품에서 김도현 씨를 보고 굉장히 인상 깊어서 꼭 한번 뵙고 싶었습니다.”
“아유, 감사합니다. 방금 말씀하신 ‘그녀의 보스’라는 작품은 제 데뷔작인데요. 데뷔작에서 관객에게 인상 깊은 연기를 선보인다는 것은 참 어렵고도 기쁜 일일 것입니다.
“네. 올 해, 데뷔작에서 인상 깊은 연기를 보인 신인 연기자들이 많다고 하더라구요. ‘신인상’은 평생에 한번 밖에는 받을 수 없는 상이기 때문에 더 의미가 큰 것 같아요.”
“맞습니다. 여러 명의 후보가 있는데요, 혹시 유은하 선배님께서는 어떤 후보가 수상을 할지 짐작이 가시나요?”
“호호, 아… 사실 후보 중 김별 씨와 곧 개봉할 ‘피아니스트’라는 영화를 함께 촬영했거든요. 그래서 응원을 하고는 있는데요. 후보들이 모두 너무 쟁쟁해서 어떤 분이 수상하게 될지는 전혀 모르겠네요.”
“하하, 그렇군요. 저도 시상하면 미리 알려주는 줄 알았는데, 아니더라구요. 정말 궁금합니다. 그럼 ‘신인남우상’ 후보들을 먼저 만나보시죠.”
아마도 은하가 후배인 김도현에게 저렇게 질문해달라고 요청했을 거다. 별이와 ‘피아니스트’를 언급하기 위해 오늘 참석했으니까. 이로써 은하의 소기의 목적은 달성한 셈이다.
여섯 명의 후보가 영상으로 소개되고 김도현이 수상자를 발표했다. 트로피와 꽃다발을 전달한 후 다시 자리로 돌아와 ‘신인여우상’ 후보를 소개한다. 영상으로 다섯 명의 후보가 소개된 다음 한 화면에 다섯 명의 얼굴이 떴다. 한 명은 참석하지 않았고 긴장한 채 앉아있는 네 명의 얼굴이 카메라에 잡혔다. 별이도 기대하지 않는다지만 어색한 미소를 띤 채 무대를 바라보고 있다.
“그럼 유은하 선배님께서 ‘신인여우상’을 발표해주실까요?”
“네, 제가 다 떨리네요. 발표하겠습니다. ‘제 47회 흑룡영화상 신인여우상’ 수상자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