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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6] 흑룡영화상 시상식(1)
별이의 첫 사극 출연작인 ‘예종의 여인’이 한창 촬영중이어야 할 시기에 그녀는 하루를 통째로 쉬어야 했다. 흑룡영화상에 참가해야 하기 때문이다. 때문에 우현은 그 어린 친구를 만나는 것을 하루 미뤄야 했다.
"우와, 정신없어요."
"오늘이 보통 날은 아니잖아."
시상식이라 그런지 한미홍 뷰티페이스는 점심때부터 연예인들로 북적였다.
“어머, 자기 오랜만이다. 회사가 잘 되니까 신수가 훤해졌네?”
한 원장이 우현을 반겼다.
“하하, 누님은 더 젊어지셨네요.”
“오호호! 빈 말이라도 좋네. 별이 씨, 옆방에 최지유 씨 있고, 저 쪽에는 송혜연 씨도 와있어.”
“별아, 가서 인사하고 와. 오늘은 하루 종일 인사할 각오해야 할 거야.”
“아, 네. 인사하고 올게요.”
별이가 선배들에게 인사를 하러 가고 상준이 그 뒤를 따랐다. 인사 끝내고 나오는데 배우 이성진이 막 도착했다. 들어오는 이성진에게도 인사를 하고서야 별이도 준비를 하러 메이크업룸으로 들어왔다.
“오늘 우리 별이 최고로 예쁘게 해주셔야 합니다. 미모로 압도해버리게.”
“아유, 당연하지. 내 실력 몰라? 드레스 가져왔지? 보자.”
“민정 씨, 드레스 보여드려요!”
별이 코디인 민정이 커버를 열고 드레스를 펼쳐보였다. 우현도 오늘 별이가 입을 드레스를 처음 보는 거라 궁금했다. 민정이 5개를 픽했고 그 중 하나를 오늘, 그리고 다른 하나를 드라마대상 때 입을 예정이다.
펼쳐진 드레스는 옅은 핑크빛 색상으로 가슴이 깊게 브이자로 파인 스타일이다. 허리 아래로 치마는 하늘거리며 길게 펼쳐져, 별이가 입으면 여신 같다는 찬사가 나올 것 같다.
“지금 머리 길이가 적당하니까 약간의 웨이브만 줘야겠네. 드레스가 옅은 핑크색이니까 메이크업이 너무 튀면 이상하겠어. 자연스럽게 가야지. 대신 너무 밋밋해 보일 수 있으니 머리 양쪽에 한 가닥씩만 잡아서 핑크색 끈으로 감으면 예쁘겠다.”
“네, 잘 부탁드려요.”
거울로 별이를 쳐다보며 헤어를 만지는 한 원장을 향해 별이가 씽긋 웃었다.
“일단 지유 씨랑 혜연 씨 봐줘야 하니까 기초 받고 있어. 마무리는 내가 해줄 테니까.”
직원이 화장솜으로 별이 얼굴을 만지기 시작했다. 역시나 메이크업은 기다림의 연속이다. 한 원장도 오늘 같은 날은 굉장히 바쁘다. 그리고 당연히 톱급 선배들을 먼저 신경써줘야 한다.
메이크업과 헤어를 하고 드레스를 갈아입은 후 손에 들 앙증맞은 클러치백을 고르는데 3시간이 넘게 걸렸다. 샵을 나와 우현이 렌트해둔 벤츠 차량에 올라탔다. 카니발을 타고 레드카펫 앞에 설 수는 없으니.
평화의 전당 앞에 도착해 차량 안에서 잠시 대기했다. 앞서 입장하는 배우들의 레드카펫 행진과 포토존에서의 시간 때문이다. 별이는 긴장되는지 연신 거울을 들여다봤다가 창밖을 봤다가 산만했다.
“밖에 바람이 많이 부는 것 같은데 치마가 날리지 않을까? 머리도 마구 날려서 산발되면 어떡하지? 치마가 길어서 밟힐 것 같기도 하고, 갑자기 화장실도 가고싶구…”
“들어가서 화장실 꼭 들러라. 계속 긴장 상태로 앉아있다 보면 참기 힘들 수 있어. 나랑 상준이는 사람들 뒤쪽으로 돌아가서 포토존 옆에 대기해 있을게. 우리 안 보인다고 당황하지 말고.”
우현의 말이 들리는지 안 들리는지 별이는 계속 창밖을 두리번거렸다.
“어? 앞 차에서 송민기 선배님 내리는데요? 송혜연 선배님이랑 같이 오셨나 봐요. 같이 내려요.”
두 사람은 작년에 함께 작품을 하고 지금까지 친분을 이어오고 있는 듯 보였다. 두 명의 톱스타가 내리자 취재진과 팬들은 그야말로 난리가 났다. 카메라 플래쉬가 너무 많이 터져 눈이 아플 지경이었고 S방송사의 리포터는 두 사람을 인터뷰하기 위해 레드카펫 앞까지 달려 나갔다. 송민기와 송헤연은 팔짱을 끼고 입장하며 양옆의 팬들이 건네는 장미꽃을 받아 손을 흔들어주었다. 수많은 취재진들의 요청에 포토존에서도 한참동안 서서 포즈를 취해야 했다.
“하아… 저 다음에 입장하면 난 보이지도 않겠네.”
“그러거나 말거나 기죽지 말고 당당하게 입장해. 아직 신인이니 어쩔 수 없는 거다. 자, 내릴 차례다. ‘여신 김별’ 되는 거야!”
별이는 두 주먹을 불끈 쥐어 보인 후 손에 들고 있던 작은 손거울을 클러치 안에 넣었다. 벤츠가 스르륵 미끄러져 들어가 레드카펫 앞에 섰다. 깔끔한 블랙 슈트를 입은 진행 요원이 뒷좌석 문을 열어주자 별이가 진행 요원의 손을 잡고 조심스레 차에서 내렸다. 잠시 서서 드레스 매무새를 빠르게 정돈하고 걸어 들어간다.
“우리도 내리자.”
별이가 몇 걸음 나아가자 우현과 상준은 차에서 내려 포토존으로 달려갔다. 가면서 보니 걱정과는 달리 사람들이 많이 알아보고 반긴다.
“우와, 언니 너무 예뻐요!”
“실제로 보니까 진짜 예쁘다.”
별이는 킬힐에 드레스가 밟히는 참사를 방지하기 위해 천천히 입장하며 팬들에게 손을 흔들어주었다. 바람이 불어 별이의 치마가 뒤로 날리는데 그 모습이 정말 여신처럼 우아했다.
지상파 대표 연예 프로그램인 연예가 현장의 여성 리포터가 영화상 축제의 흥을 북돋워주는 힘찬 목소리로 별이의 입장을 알린다.
“아! 지금 ‘밀실’의 김별 씨가 입장하고 있습니다. 어우, 정말 여신이 따로 없네요. 김별 씨, 오늘 신인상 후보에 올랐는데 기분이 어떠신가요?”
“생각지도 못했는데 신인상 후보에 올랐다고 해서 너무 놀랐구요, 후보에 오른 것만으로도 너무 감사합니다.”
“네, 그렇군요. 오늘 흑룡영화상이 처음이시죠? 와보니까 어떠신가요?”
“호호, 사실 지금 너무 떨리는데요. 이 자리에 함께 할 수 있게 되어서 너무 기쁩니다. 모든 영화인들의 축제를 즐기다 가겠습니다.”
“네, 앞으로 계속 흑룡에서 뵙고 싶습니다. 김별 씨였습니다!”
리포터와의 인터뷰가 끝나고 옆에서 팬이 건네는 장미꽃 하나를 받아든 별이는 드레스를 살짝 들어 올린 다음 계단을 올라갔다.
카메라들은 계단을 올라가는 모습도 열심히 찍어댄다. 왜냐하면 여배우들이 드레스를 입고 계단을 오르면서 실수가 많기 때문이다. 긴 치마를 밟거나 가끔 휘청거리며 넘어지는 경우도 있고. 또 짧은 미니드레스를 입은 경우엔 계단 아래에서 바라보는 컷이 꼭 나온다. 참 짓궂다는 생각이 들면서도 그런 사진이 클릭 수가 많으니 어쩌겠나.
“김별 씨 이쪽이요!”
별이는 포토존에 서서 일명 ‘여배우 포즈’라 불리는, 서서 손을 살짝 들어 흔드는 포즈로 사진 촬영을 했다. 잠시 후 다음 배우가 입장한다며 카메라가 일제히 돌아가자 자연스레 별이의 레드카펫 입장이 마무리됐다.
“나 잘했어요?”
“여신 같더라. 잘 했어. 들어가자.”
우현은 엄지손가락을 치켜든 후 상준과 별이와 함께 안으로 들어가려는데 카랑카랑 울리는 리포터의 목소리에 걸음을 멈췄다.
“유은하 씨가 차에서 내리고 있습니다! 멀리서 봐도 눈이 부시네요. 빨리 가서 만나보겠습니다!”
우현은 고개를 돌렸지만 여기서는 은하가 보이지 않는다. 위쪽 전광판에 은하가 커다랗게 잡힌 모습이 보였다.
“대표님, 안 들어가세요?”
“어, 잠깐만. 먼저 들어가 있어. 바로 따라 들어갈게.”
상준이 의아한 듯 쳐다보다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별이를 데리고 들어갔다. 우현은 전광판에 뜬 은하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내 눈으로 먼저 보고 싶었는데 전광판으로 보게 되네.’
“은하 씨, 반갑습니다. 정말 아름다우시네요. 오늘 신인상 시상을 하러 오신 걸로 아는데요, 혹시 어떤 분이 받을지 짐작이 가시나요?”
“글쎄요. 응원하는 후배가 있기는 하지만 어떤 분이 수상하게 될 지는 잘 모르겠네요. 후보에 오른 분들이 다들 너무 쟁쟁하더라구요.”
“어떤 분을 응원하는지 궁금하네요. 유은하 씨는 흑룡에서 이미 신인상과 여우조연상을 다 수상해보셨잖아요? 이제 여우주연상만 남았는데요. 올 해 영화를 두 편이나 촬영한 걸로 알고 있는데 내년에 기대해 봐도 괜찮을까요?”
“호호, 저도 그랬으면 좋겠는데요. 하지만 저의 개인적인 상을 떠나서 저희 작품이 좋은 평가를 받는 것이 더 기쁠 것 같아요.”
“우와, 얼굴만큼이나 말도 예쁘게 하는 유은하 씨였습니다!”
헛웃음이 나왔다. 물론 작품이 좋은 평가를 받는 것도 중요하지만 본인의 상이 중요하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저 정도의 인터뷰는 봐주자. 대중 앞에 서는 사람은 말도 예쁘게 할 줄 알아야 하는 법이다. 천연덕스럽게 인터뷰를 하고 계단을 올라오는 은하가 보였다. 우현의 눈에는 그 모습이 너무 귀여웠다.
은하는 오늘 베이지색 바탕에 금색 자수가 들어간 시폰이 겹겹으로 이뤄진 드레스를 입었다. 헤어는 긴 머리에 약간의 웨이브만 준 상태다. 그냥 여신이다. 다른 말이 필요 없다.
“유은하 씨, 이쪽이요!”
“여기도 좀 봐주세요!”
포토존에서 기자들의 요청에 따라 이리저리 방향을 바꿔 포즈를 잡다가 옆에서 바라보고 있던 우현과 눈이 마주쳤다. 우현은 살짝 웃어주었다. 은하는 순간 움찔 놀란 듯하다가 이내 다시 천사 같은 미소를 지으며 기자들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우현은 아쉽지만 몸을 돌려 별이 대기실로 왔다.
“별아, 대기실 돌면서 선배님들한테 인사하러 가자. 요즘 이런 거 안 하는 신인들도 많은데 해서 나쁠 건 없어. 인사하고 다니는 걸 자존심이 상한다 생각하고 굽히고 들어가는 거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거 아닌 거 알지? 배우의 값어치는 연기로, 작품으로 매겨지는 거야. 자신의 프라이드는 스스로 세우는 거야. 인사한다고 깎이는 거면 그건 진짜 프라이드가 아니지.”
“네, 알아요. 준비하고 있었어요. 가요!”
별이는 벌떡 일어나 앞장섰다. 우현은 그녀의 뒷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며 상준과 함께 뒤따랐다. 먼저 오늘 함께 시상하게 된 대선배인 안영기 선생님 대기실부터 들렀다.
“안녕하십니까, 신인 배우 김별입니다.”
“하하, 그래. 네가 김별이구나. 반갑다. 오늘 잘 해보자.”
“만나 뵙게 되어서 너무 영광입니다.”
스크린에서 보이는 인자한 느낌 그대로다. 손녀딸 대하듯 반갑게 맞이해준다.
“안녕하십니까, 신인 배우 김별입니다.”
워낙 많은 선배들과 감독 등의 영화관계자들이 모이는 자리라서 쉴 새 없이 고개를 숙여야했다. 그러다 한 대기실 앞에 멈춰 섰다.
“황재연?”
“별이 너는 잘 모르지? 네가 아기일 때 데뷔해서 활발히 활동하다가 한동안 뜸했어. 내가 은하 데리고 있을 때도 활동을 쉬고 있던 분이라 나도 실제로는 처음 보네. 옛날에 인기도 많았어.”
“아, 그렇구나.”
똑똑.
“들어오세요.”
“안녕하십니까, 신인 배우 김별입니다.”
“…”
별이는 문을 열면서 고개를 숙이고 인사를 했다. 그런데 답이 없다. 쳐다보니 황재연은 거울을 보고 앉아있다. 힐끗 별이를 보더니 아주 천천히 돌아본다.
“김별? 신인… 배우?”
30대 후반의 황재연은 관리를 꾸준히 받아왔던 탓에 그 나이처럼 보이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무수한 젊은 여배우들에 비해 미모가 조금 떨어져 보이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네, 안녕하십니까, 선배님.”
약간 뻘쭘했던 별이는 한 번 더 고개를 숙이며 인사를 했다.
“배우라… 연기는 어디서 배웠니?”
우현은 저 짧은 물음만으로도 앞으로 벌어질 일들이 환상처럼 지나가는 것을 느꼈다. 어디에나 꼰대짓 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이 바닥에도 간혹 그런 경우가 있다. 연극영화과나 연극무대를 거치지 않고 연기를 하는 사람들을 마치 이단의 무리처럼 생각하는 사람들. 은하를 신인부터 키워오면서 숱하게 겪었던 일이다.
“네? 아… 연기 학원에서…”
당황한 별이 목소리가 기어들어간다. 학원에서 연기를 배웠다는 대답이 참 민망해서이리라.
“푸훗. 연기 학원? 요즘 애들은 이래서 안 돼.”
황재연이 별이를 위아래로 훑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