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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5] 사극 촬영 돌입(2)
“뭔데요?”
“한지애한테 밀리지 말 것.”
“선배님한테 밀리지 말라구요? 저한테는 대선배님이나 마찬가지인데, 무슨 싸움을 하는 것도 아니고…”
“대선배는 촬영장 바깥에서나 대선배다. 카메라 돌면 선배고 뭐고 없는 거야. 너는 네 연기를 해야 해. 선배니까 양보하거나 기죽을 필요 없다. 오히려 잡아먹어야 해.”
별이는 우현의 말이 이해되지 않는 것 같다.
“굳이 그렇게까지 해야 할 필요가 있어요?”
“이번 한 작품 하고 끝날 거라면 그러지 않아도 돼. 하지만 그렇지 않을 거잖아? 여배우들이 촬영장에서 왜 기싸움을 하는지 알아? 그네들이 성격이 전부 개차반이라서? 아니야. 상대방을 잡아먹을 만큼 압도적인 존재감을 보여야 카메라에서 그나마 조금이라도 존재감을 어필할 수 있어. 연예인은 존재감을 보이지 못하면 그대로 끝이야.”
그제야 별이도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요. 최선을 다할게요.”
“그래, 넌 깡이 있으니까 잘 할거야.”
아무리 강한 카리스마를 보이는 존재 앞에서도 자신의 연기를 보일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건 전에 강소연과 대사를 치는 모습을 보며 알 수 있었다. 타고난 배짱이 두둑한 녀석이니 이번에도 잘 해낼 거라고 믿는다.
“그리고 이번에 흑룡영화상 신인상 후보에 올라가면서 극본상 시상을 해줬으면 한다고 연락 왔거든.”
“시상이요? 우와… 드레스 열심히 고른 보람이 있겠네요. 누구랑 시상하는 건데요?”
“안영기 선생님이랑 하게 됐어. 딱히 준비할 건 없지만 그래도 알고는 있어야 할 것 같아서 말해주는 거야.”
“안영기 선생님이요? 우와… 제가 태어나기도 전부터 엄청난 배우셨잖아요. 저 예전에 영화 ‘고래사냥’ 봤었는데 재밌더라구요, 헤헤. 가서 깍듯하게 잘 할게요.”
별이의 첫 촬영 현장은 용인에 있는 한국민속촌이다. 주연급 배우는 참여하지 않고 오직 그녀와 그녀의 아버지가 오늘 촬영의 주인공들인데 한지애와 송민기 같은 경우는 그제부터 촬영에 돌입한 상태다. 아무래도 주연보다는 비중이 떨어지는 배역이기에 조금 늦게 시작하는 거다.
“김별 씨 도착했습니다!”
별이의 차량을 알아본 스태프의 고함소리가 차 안까지 들렸다. 시계를 보니 콜타임 1시간 전이다.
“안녕하세요!”
별이는 차에서 내리자마자 사방에 대고 인사하며 분장팀을 찾았다. 의상과 머리까지 하기에 1시간은 빠듯하기 때문이다.
특히 촬영장 한 가운데에서 스태프들을 지휘하는 중년의 남자에게 90도로 허리를 굽히며 인사하는 모습은 누가 보더라도 그녀가 예의 바른 사람임을 인식하게 했다.
“어, 왔어요. 시간 얼마 없으니까 빨리 준비하세요.”
40대 초반의 정강현 피디는 다듬지 않아 거친 턱수염에 선글라스를 끼고 중후한 목소리로 무심하게 말했다. 모르는 사람이 봐도 상당히 카리스마 있는 모습이다.
이래서 많은 피디들이 일부러 수염을 길러 예술가적인 모습을 보여주거나 촬영을 하지 않을 때는 선글라스를 껴 눈동자를 보여주지 않으려나 보다. 처음에는 왜 그런지 이해할 수 없었는데 곰곰이 생각해보니 기 센 배우들에게 밀리지 않기 위함이기도 하고 너무 아름다운 여배우들에게 가는 눈길을 감출 수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 별이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아이고, 김 대표님이시죠? 원래는 계약할 때 뵀어야 하는 건데, 촬영장을 제외하면 원체 배우들이랑 얼굴 맞대는 걸 싫어해서 말이죠.”
보통 소속사 대표랑 말을 나눌 때면 으레 좋은 말을 해주기 마련인데 이 사람은 그런 게 없다. 그만큼 실력으로 인정받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하하, 그러실 수 있지요. 작품 생각하기도 힘든데, 기 싸움 하기 싫으신 거 충분히 이해합니다.”
“기 싸움이라기 보다는 기가 빨린다고 보는 게 맞겠습니다. 아휴, 거기서 한 시간만 앉아있으면 늙는 것 같아, 아주.”
“우리 별이는 그런 일 없는데 안타깝네요. 즐겁게 식사라도 할 수 있었을 텐데요.”
“됐습니다. 저로서는 연기만 잘 해주면 다른 건 바라지도 않습니다. 물론 그 자신감만큼 준비는 충분히 해왔겠죠?”
비록 선글라스에 가려져 있지만 자신을 쏘아보는 눈길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었다.
‘쉽지 않겠네.’
첫 느낌은 그랬다. 물론 능력 있는 양반이니 쉽지 않다고 해도 나쁠 것은 없다. 단, 별이가 준비를 많이 했다는 가정이 뒷받침 될 때의 이야기지만.
“인생 쉽게 사는 친구 아닙니다. 걱정 마시죠.”
“호오… 기대하겠습니다.”
이후 다른 스태프들에게 캔커피를 하나씩 돌리며 별이를 잘 봐달라고 인사하고 돌아다녔다. 상준이도 이제는 이런 일에 익숙한지 우현이 말하지 않아도 미리 커피를 들고 돌아다녔다.
“언제부터 시작이야?”
“10분 뒤부터 시작할 것 같던데요?”
“잘 해야 할 텐데…”
“잘 할 겁니다. 걱정하지 마세요.”
우현의 걱정 어린 혼잣말에 상준이 웃으며 말했다.
“걱정이 안 될 리가 있나. 별이 첫 촬영이라서 정 감독이 여기에 온 거지만 앞으로는 2팀 감독이 올 거 아니야? 그럼 지금 강 감독의 눈에 들어야 해.”
“어차피 나중에 보게 될 거 아닙니까? 게다가 어차피 피디가 아무리 잘 봐준다고 해도 작가가 분량을 정하게 될 텐데요.”
“어허… 그렇게 쉽게 볼 수 없지. 배우가 마음에 들면 감독이 얼마나 예쁘게 나오게 할 수 있는데. 특히 사극은 이마를 다 까고 나오기 때문에 자칫 이상하게 잡아주면 아줌마처럼 나온다고.”
“아…”
“그래도 우리 별이가 이마가 예뻐서 5:5 머리를 해도 안 이상하니 다행이야.”
“전에 보니까 어떤 여자아이돌이 사극을 찍는데 영 이상하게 나오더라구요. 노래 부를 때는 진짜 예쁘다고 생각했는데 머리스타일이 바뀌어서 그런가? 엄청 이상하게 나오는 걸 보고 나중에야 이마가 좁아서 사극하고 안 어울린다는 걸 알았습니다.”
“하하. 누군지 말 안 해도 알겠다. 원래 아이돌들이 그런 경우가 종종 있어. 아무래도 표정도 자연스럽지 못하니까 더 그렇게 보일 수 있지. 물론 여배우들이 보통 더 예쁘기도 하고.”
“그런 면에서 별이가 참 특이한 경우네요. 차라리 배우로 데뷔했으면 지금쯤 그 소속사에서 훨씬 더 잘 됐을 수도 있었을 텐데요.”
“아이돌 가수를 키우니까 다른 건 생각하지 못한 거야. 나도 그랬어. 뭐 하나에 꽂히면 다른 건 생각하지 못했지. 만약 라라걸즈가 제대로 된 히트곡 딱 하나만 있었더라도 나랑 계약하는 일은 없었을 걸?”
“그럼 대표님이 봤을 때, 지금 밑바닥을 전전하는 걸그룹 중에 정말 괜찮다고 생각하는 친구 있습니까? 여배우 시키면 딱 좋겠다는 그런 친구요.”
“있긴 한데, 연기를 본 적이 없어서 확신은 못하겠어. 그래서 민상욱도 마지막에 연기를 봤잖아. 연기만 평타 칠 수 있는 실력이면 배우로 키우고 싶은 친구들이 몇 있기는 해.”
“아… 아쉽네요. 그런 친구들이 우리 회사로 와야 하는데…”
“그 친구들도 배우보다는 걸그룹이 하고 싶어서 그랬을 텐데 뭘. 그리고 그런 친구들이 온다고 해도 아직 회사가 받쳐줄 역량이 안 된다.”
“혹시 걸그룹 키워볼 생각은 없으십니까? 아니면 보이그룹이라두요. 사실 돈은 가수가 많이 벌지 않습니까? 물론 완전 톱급 스타 배우도 많이 벌지만 세계를 돌면서 공연을 하고 다니는 그룹에 비해서는 조금 떨이지는 게 사실이니까…”
“그렇긴 하지. 그런데 말했다시피 아직 내가 그 정도까지 역량이 안 된다. 그런데 혹시 모르겠다. 유니가 잘 되고, 직원도 많이 뽑아서 제대로 지원을 해줄 수 있으면 걸그룹 말고 보이그룹으로 하나 키워보고 싶은 마음도 있어.”
“역시… 걸그룹 말고 보이그룹이 더 잘 나가서 그런 거 아닙니까?”
상준이 검지와 엄지로 동그라미를 그렸다. 한마디로 돈 때문이 아니냐는 말이다.
“크흠… 당연하지 인마. 걸그룹은 아무리 잘 나가도 보이그룹만한 매출이 나오기 힘들어. 가수들 굿즈 판매량을 봐라. 보이그룹이 압도적으로 많지. 이왕 고생해서 키울 거면 보이그룹이 훨씬 낫다.”
사실 상준에게 말하지 않은 이유가 하나 더 있는데, 안 그래도 여배우 위주로 회사를 운영하는데 가수까지 걸그룹으로 하면 은하에게 상당한 오해를 받게 될 것 같기 때문이다.
시커먼 남자들보다 걸그룹 키우는 게 솔직히 더 재미있고 기분도 좋지만 은하가 있으니 그 정도는 깔끔하게 포기할 수 있다.
이후 시작된 촬영은 저녁 9시까지 계속 이어졌다. 별이는 생각보다 준비를 많이 했는데, 사극 톤이 몸에 배어있어 우현은 물론 전 스태프들의 감탄을 불러 일으켰다. 특히 그 많은 대사를 실수 한번 없이 내뱉는 장면에서는 정 감독도 흡족한 듯 고개를 끄덕이기까지 했다.
“이렇게 보니까 영락없는 사극이네요.”
로맨스의 대가 윤해연 작가의 작품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을 만큼 경직된 분위기였는데 우현은 그래서 더 좋았다. 무거울 때는 무거워야 가벼운 부분이 더 살아나는 법이다.
촬영이 막바지에 이르자 우현은 촬영장에서 시선을 떼고 멀찍이 물러서서 상준과 이야기를 나눴다.
"송민기랑은 언제 만나지?“
“음… 나흘 뒤 촬영에서 만납니다.”
“그 때, 잘 봐주고… 혹여 애가 떨 수 있으니까 챙겨줘.”
“하하. 별이가 설렐까 봐요?”
“인마, 설레겠지. 송민기랑 대사를 주고받으면서 설레지 않으면 그게 이상한 거 아니냐? 걱정하는 건, 그러다가 자기 연기가 안 나올까봐 그래. 그 때는 정 감독이 찍을 건데, 여배우가 주인공이랑 대사 치다가 얼굴 빨개지면 감독이 뭐라고 생각하겠어?”
“알겠습니다. 그럼 그 때는 안 오시는 겁니까?”
“언제까지 따라다닐 수는 없지. 오늘은 첫 촬영 날이라서 온 거야.”
그렇게 상준에게 주의를 주고 먼저 자리를 떠나려 하는데 뾰족한 고함소리가 들려왔다. 무심코 시선을 돌리니 한창 주막씬을 촬영하고 있는데 이제 초등학교를 갓 졸업했을 것 같은 남자 아이가 눈을 부릅뜨고 큰 체구의 남성을 쏘아보고 있었다.
거리가 멀어서 어떤 대사를 하는지는 잘 들리지 않았는데 자신도 모르게 그 현장으로 걸음을 옮겼다.
“어? 대표님, 어디가세요?”
“잠깐만…”
가까이 다가가는 순간, 정 감독의 가래 끓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컷! 오케이!”
“수고하셨습니다.”
아쉽게도 그 작은 친구의 목소리도 듣기 전에 촬영이 끝나버리고 말았다.
“어? 대표님, 아직 안 가셨어요?”
의상을 갈아입고 온 별이 ‘여기서 뭐하냐?’는 표정을 지어보이자 우현도 고개를 돌렸다.
“응? 아냐, 갈 거야. 그 머리에 그 옷을 입으니 영 이상하다.”
“호호호. 어때요? 개화기 현대 여성 같지 않아요?”
종아리까지 오는 긴 스커트에 갈색 재킷을 입고 머리를 땋아놓으니 정말 20세기 초에나 있을 법한 모습이다.
“예쁘네. 일단 가자.”
“그런데 아까 누굴 보는 거였어요?”
“아니야. 별거 아니었어.”
말해줘도 무방했지만 아직 생긴 것만으로는 확신할 수 없었기에 더는 언급하지 않았다. 괜히 먼저 말했다가 나중에 대사 치는 걸 들어보고 실망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의아한 건 그 어린 친구는 누가 봐도 잘 생긴 아이는 아니었다는 것이다. 아역이라고는 하지만 미래를 생각한다면 그래도 마스크가 어느 정도는 돼야 주연급 배우로 성장할 수 있는데 그 어린 친구는 잘 생겼다기 보다는 동그란 체형의 귀여운 인상이었다.
‘뭐였지?’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친구의 눈빛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다는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