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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9] 재능과 노력(1)
“안녕! 여기서 볼 줄은 몰랐네?”
“안녕하세요! 저 완전 긴장되니까 잘 부탁드려요, 헤헤.”
긴장될 텐데도 제법 의연하게 카메라 위치를 확인하고 동선을 확인하는 모습을 보니 무대에서의 경험이 확실히 도움이 된 것 같다. 평소 무대에서 십여 대의 카메라를 홀로 받아왔던 만큼 시선 처리에도 불안함이 없다.
“대사는 잘 외웠니?”
“넵!”
“그럼 한 번 맞춰볼까?”
상욱은 멋들어진 수트를 입고 깔끔하게 정돈된 머리를 하고 있어 어떤 여자가 봐도 호감을 가질 만한 훈남이었다.
엘리트 출신으로 유력 정치인의 어두운 일을 도맡던 그는 평소 그가 가진 사이코패스적인 기질을 숨기고 은밀히 살인 행각을 즐기는 악마 같은 인간이다. 하지만 꼬리가 길면 밟힌다고 실수로 아주 조그만 흔적을 현장에 남기고 이를 이동운이 추적하면서 벌어지는 내용이다.
상욱이 처음으로 살인하며 실수를 남기는 대상이 바로 유니가 맡은 여대생 역이다. 그녀의 싱그러운 아름다움에 그만 마음이 흔들리게 되는 씬이다. 그러니 살인자와 피해자의 만남이지만 서로 간에 주고받는 대사는 평범하면서도 화기애애했다.
“둘이 대사 맞춰봤지?”
강 피디가 다가오며 유니의 기색을 살폈다.
“네, 아주 잘 하던데요?”
“그래, 카메라 위치 체크 하고 한번 가봅시다. 파이팅!”
“넵! 파이팅이욧!”
앙증맞은 주먹을 들어 올려 파이팅을 외치는 유니를 보며 모든 스태프들의 얼굴에 웃음기가 어렸다.
“자, 카메라 신경 쓰지 말고, 준혁아! 반사판 좀 더 가까이 대봐! 오케이! 카메라 잘 받네. 긴장하지 말고!”
잠시 후 큐싸인이 떨어지고 대사가 이어졌다. 감독 뒤에서 모니터를 통해 지켜보는 우현도 유심히 유니와 상욱의 연기를 살펴보았다.
상욱이야 전에도 한번 봤기 때문에 연기력에 대한 걱정은 하지 않았다. 긴장 때문에 대사나 몸짓, 손짓에 어색함이 있을까 걱정했는데 상당히 안정적인 연기라 안심이 됐다. 특히 카메라를 통해 뿜어지는 선한 마스크는 진짜 그가 싸이코패스라는 걸 상상할 수 없게 만들었다.
유니는 역시나 처음 그녀를 봤을 때의 느낌과 같았다. 분명 그녀가 가진 마스크는 가수를 하기에는 귀엽고 깜찍한 느낌을 주었지만 이렇게 클로즈업 된 카메라로 보니 확실히 여배우가 주는 포스를 보여주지는 못했다.
반면에 그녀가 가진 특유의 생기발랄함과 상큼함, 귀여움은 더욱 두드러져 보여 그녀에게 호감이 있는 사람이라면 더욱 좋아할 수밖에 없게끔 만들었다.
“생각보다 좋은데?”
귓가에 슬쩍 들리는 스태프의 목소리. 연기력이 영 엉망이라면 대사를 줄이고 줌 아웃으로 표정연기에 대한 부담감을 줄여주려 했었는데 이 정도면 충분히 까메오 역할을 하고도 남음이 있어 보였다.
“컷! 상욱이 빠지고 유니 씨만 촬영할게요. 그 자리 그대로 서서 아까처럼 하면 됩니다!”
“네!”
유니의 얼굴에 살짝 홍조가 어렸다. 전에 단막극을 찍으며 아주 조금 연기를 해봤다고는 하지만 한참 시간이 지나 제대로 대사를 치는 역을 맡게 되자 조금 흥분한 것 같은데 오히려 그것이 호감어린 남자를 보는 여성의 두근거림을 표현하는 것 같아 더욱 좋아 보였다.
처음에는 까메오라고 들어서 대사 몇 마디 하고 끝나는 줄 알았는데 무려 세 개의 씬을 찍어야 한다는 말에 당황했다. 그 정도로 많은 대사를 처리하기 힘들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는데 생각보다 잘 하는 모습에 드라마가 나가고 나면 왠지 다른 곳에서 섭외 요청이 들어올 것 같은 느낌이 든다.
무려 하루내내 그녀와 상욱의 촬영이 계속됐다. 씬은 세 개지만 마지막에 죽임을 당하는 씬이 밤이기 때문에 한동안 다른 이들의 연기를 지켜봐야 했고 결국 8시가 넘어서 마지막 씬을 촬영했다.
“살려줘요. 제발… 엄마가 기다리고 있어요. 우리 엄마, 나 없으면 못 살아요.”
“…”
바닥에 넘어져 뒤로 주춤거리며 물러서려는 유니. 허벅지까지 말려 올라간 스커트와 공포에 질린 그녀의 표정이 묘한 조화를 이루며 공포영화의 한 장면을 떠올리게 했다.
그런 유니에게 무표정하게 다가가는 상욱. 그의 손에는 날이 길고 좁은 회칼이 들려 있다. 그 서슬 퍼런 예기에 유니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려 있었다.
“제발요. 무슨 짓이든 다 할게요. 살려주세요. 살려… 아윽.”
두 손을 빌며 살려달라는 그녀의 복부에 서슴없이 박혀드는 칼, 곧바로 버둥거리던 그녀가 오래지않아 움직임을 멈췄다.
“오케이! 수고했어요!”
“수고하셨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산발된 머리와 복부와 입가에 피를 흘리는 유니가 벌떡 일어나 스태프들에게 90도로 인사하는 모습이 참으로 귀여웠다.
“너 연기연습 언제 그렇게 했냐?”
“헤헤. 쫌 잘했죠? 내가 생각해도 좀 잘한 것 같았어요. 아니다, 조금 더 고통스러운 표정을 지을 걸 그랬나요? 너무 예쁘게 보였나?”
스태프들에게 인사하고 차에 탄 유니는 혼자서 손거울을 보며 장난스레 다시 심각한 표정을 짓는다.
“연기 하고 싶어?”
우현의 말에 유니가 고개를 갸웃하며 입을 오물거리더니 피식 웃었다.
“막 하고 싶은 건 아닌데요. 그래도 해보니까 재밌기는 해요. 그런데 노래와 연기, 둘 중의 하나를 고르라면 무조건 노래예요. 연기는 그냥, 간식 같은 거?”
“하하, 밥만 먹고 살 수는 없다 이거지?”
“그럼요. 그리고 제가 그냥 가수도 아니고 싱어 송 라이터 아니겠어요? 줄여서 ‘씽쏭라’ 알죠? 으흠! 그러면 다양한 경험을 통해 영감을 받아야죠, 히히.”
“그래, 그래. 너 하고 싶은 거 다 해라.”
하루 뒤 우현은 CD 하나를 들고 ‘승냥이’를 제작하는 제작사인 ACN을 찾아갔다. 그냥 경수에게 쥐어주고 보내도 되지만 그러면 진짜 CD만 달랑 건네주고 올까봐 직접 갔다.
“안녕하세요. 혹시 ‘승냥이’ 제작팀이 어디에 있나요?”
“어디서 오셨어요?”
“아, 네. 저는 파인 엔터의 대표 맡고 있는 김우현이라고 합니다. 민상욱이 저희 배우죠.”
“아, 그러셨구나. 그럼 이쪽으로 오시겠어요?”
우현을 맞은 이는 20대 중반으로 보이는 여자인데 딱 봐도 사회 초년생 같아 보였다. 허둥지둥하며 우현을 안내해 간 곳은 빈 회의실이었는데 회의실 한쪽 벽에는 ‘승냥이’에 관한 홍보기사가 가득했다.
“어떤 일 때문에 오셨어요?”
“저희 회사에서 우리 상욱이에게 맞는 테마를 하나 만들어봤는데 한번 들어봐 주셨으면 어떨까 해서요.”
“아… 잠시만요. 잠시만 기다려주시겠어요?”
그녀는 갑자기 OST를 들고 나타난 우현 때문에 당황하며 도망치듯이 빠져나갔다. 그리고 얼마 후 40대 초반의 한 여성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
“안녕하세요. 김 대표님이시라구요?”
“네, 전에 계약할 때는 못 뵌 분 같은데…”
“제가 음악감독을 담당하고 있어요. 안혜진입니다.”
“아, 반갑습니다. 어떻게 음악감독님이 제작 사무실에 계셨네요.”
“방송국이나 다름없잖아요. 당연히 여기서 작업하죠. 그나저나 상욱 씨 테마를 작업해서 가지고 오셨다구요? 살인자 테마는 생각해본 적이 없는데…”
“네, 일단 한번 들어보시죠.”
아마 경수가 왔다면 그냥 CD 두고 가라고 했을 거다. 그나마 우현이 왔으니 음악감독이 직접 나와서 응대해주는 것일 터다.
“그럼 같이 가실까요?”
그녀는 우현을 편집실로 이끌었다.
“이왕 테마곡으로 들으려면 직접 넣어보면 바로 알겠죠?”
맞는 말이다. 괜히 음악만 듣고 이러쿵저러쿵 하는 것보다 직접 그 상황에 넣어보면 비전문가라고 해도 딱! 감이 오게 돼있다.
“흐음… 좋은 시도였으면 좋겠어요.”
상당히 사회생활을 잘하는 사람인지 보통 이런 경우에는 귀찮은 티를 역력히 내는 것이 보통인데 그녀는 전혀 그런 티를 내지 않았다.
화면을 빠르게 넘기다 마침 상욱이 유니를 죽이려 하는 장면이 딱 걸렸다. 잠시 화면을 멈춘 그녀가 시디를 드라이브에 넣고 재생시키며 멈췄던 화면을 다시 천천히 재생시켰다.
시골 한적한 곳에 위치한 낡은 창고. 해가 져서 어둑한 그곳에 일남일녀가 서 있는 것만 보더라도 긴장감이 드는데 상욱의 테마가 깔리기 시작하자 분위기가 더욱 가라앉았다.
특히 호준이 의견을 넣어 어제 급하게 바이올리니스트를 구해 다시 녹음한 그것은 살인현장의 느낌을 더욱 감각적으로 느낄 수 있게 했다.
“호오…”
안혜진 음악 감독의 입에서 나직한 감탄사가 흘러나왔다. 그 순간 일이 끝났다는 걸 알았다.
“어때요?”
“좋네요. 이거 누가 만들었죠? 흐음… 이런 식의 진행은 들어본 적이 없는데… 그리고 이거 바이올린이죠? 기타와 바이올린의 조합인데 이걸 이렇게 긴장감 있게 풀었네.”
“그렇죠? 저희 쪽에서도 이상했으면 더 이상 진행 안했을 텐데 버리기 아깝더라구요. 그래서 한번 찾아와봤습니다.”
“버리기 아까웠다구요? 그럼 다른 거 만들다가 이게 튀어나왔다는 건가요?”
“그런 건 아니고, 우리 애 앨범 준비하다가 나온 트랙인데 이번에 까메오로 출연하면서 대본 받아보고 영감이 떠올라 만들었다고 하더라구요.”
“그게 누군데요?”
“유니요. 이번에 앨범 준비하고 있어요.”
“그럼 이걸 그 친구가 만들었다는 건가요?”
“뼈대는 그 친구가 만들고 엔지니어랑 같이 편곡했죠. 거기에 바이올린을 추가하는 아이디어도 엔지니어가 낸 것이긴 한데…”
“그럼 유니라는 그 친구가 만든 거나 다름없네요. 유니라는 친구 어리지 않아요?”
“이제 몇 달 지나면 고등학교 졸업이죠.”
“하하하. 역시 예술이라는 게 참 웃겨요. 누구는 평생 음악을 만져도 안 되는데 누구는 이런 걸 손쉽게 만들어내죠.”
질투라기보다는 감탄하는 느낌이다. 사실 예술하는 사람들 치고 재능에 관해 이런 생각을 해본 적 없는 이들은 드물 것이다.
“공평한 것 같으면서도 한없이 불공평하죠. 또 그게 인생이지 않습니까?”
“맞아요. 어렸을 때는 그걸 인정하는 게 참 힘들었는데… 어쨌거나 좋은 음악 감사해요. 그 친구에게도 따로 고맙다고 해주세요. 잘 쓸게요.”
가사를 붙인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기분 좋은 멜로디도 아니니 돈이 되는 건 아니다. 그래도 이렇게 드라마에 OST를 입힐 수 있는 음악을 만들었다는 건 유니에게 있어 엄청난 커리어를 제공해 줄 것이다. 아마 내년쯤에 발매할 앨범에도 상당히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게 될 것이다.
사무실에 돌아와 업무를 하는데 민주가 문을 열고 얼굴을 빼꼼히 내밀었다.
“CS에서 연락 왔는데요?”
“연결해줘요.”
무슨 일인가 해서 전화를 받아보니 영화도, 드라마도 아닌 CS가 가지고 있는 음악채널인 m.met의 사람이었다.
“그런데 무슨 일로…”
단순히 섭외 전화라면 매니저인 세동에게 먼저 연락이 왔을 테니 직접 사무실로 전화온 것이 궁금할 수밖에 없다.
“이번에 ‘MWMA’ 스케줄이 12월에 잡혔습니다. 당연히 유니 씨도 참석하시는 거죠?”
한국에서 가장 큰 시상식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MWMA’이니 당연히 참석해야 한다.
“올해는 어디에서 하는 겁니까?”
“홍콩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