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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4] 인생은 타이밍이다(3)
“셀카요?”
전화를 끊고 황당해하는 유지나를 보며 웃음을 지었다.
“아, ‘필름나라’ 양수찬 대표랑 일 안 해보셨구나. 이 양반이 원래 조금 독특해요. 워낙 자유분방하고 남의 눈치를 안 보거든. 보통 이 바닥에 있으면 팬이라느니 이런 말 잘 안하는데 지나 씨 팬이랍니다. 내일 저녁에 미팅 잡았으니까 가서 셀카 한번 찍어줘요.”
“그거야 뭐… 나이가 어떻게 되는데요?”
“쉰 넘었죠. 걱정하지는 말아요. 여자를 만나고 싶으면 룸살롱을 갔으면 갔지 절대로 배우들 어떻게 해보려고 하는 변태 같은 양반은 아니니까. 나름 철학은 확고하거든.”
“아닌 것처럼 하면서 그런 사람들을 워낙 많이 봐서요.”
그녀는 우현의 말을 백프로 신뢰하고 있지는 않은 듯했다. 그런 그녀의 태도도 충분히 이해가 가기에 더 언급하지는 않았다.
“어쨌든 이제는 물릴 수 없으니 지나 씨를 믿을게요.”
“물리고 싶지 않으니까 걱정 마세요. 그럼 저희는 이만 들어갈게요. 내일 저녁에 사무실에서 뵙고 같이 움직이는 게 좋겠죠?”
“편한 대로 해요.”
“그리고 말 놓으세요. 이제는 존댓말 듣는 게 더 부담스러워지거든요.”
유지나는 우현이 연예계에 발을 들여놓기 전부터 지금의 위치에 있었다. 그래서 다른 이들보다 아무래도 조금 어려운 부분이 있었는데 이렇게 나와 주니 참 고맙기 그지없었다.
“하하. 그래, 그러지 뭐. 들어가고 내일 보자.”
지나 일행을 보내 놓고 나니 밀린 숙제를 끝내놓은 것 마냥 후련함이 밀려왔다. 아무래도 스스로가 부담을 많이 가지고 있었던 것 같다. 유정완 감독 작품과 계약이 성사된다면 이제는 그로서도 할 만큼 해준 거니까 내일 미팅만 잘 마무리되면 대략 반년 정도는 유지나의 작품 때문에 고민할 일은 없을 것 같다.
“대표님, ‘채널’쪽에서 연락이 왔는데요? 받아보셔야 할 것 같은데…”
민주가 대표실 문을 열고 얼굴을 살짝 내밀었다.
“핸드폰으로 전화 안 주고… 연결해줘요.”
“넵!”
전화를 받으니 젊은 여성의 목소리가 전화기 너머로 들려왔다.
“안녕하세요. 김우현 대표님 되시죠? ‘채널’의 임지연 실장이라고 합니다.”
“네, 반가워요. 화보 촬영 때문에 연락 주신건가요?”
“맞아요. 대표님, 이번에 화보 촬영 발리로 결정 난 건 아시죠?”
“알고는 있는데…”
‘채널’과 계약한 추가 화보 촬영 스케줄은 이미 몇 달 전부터 계획되어있던 것이다. 문제는 별이의 드라마 준비가 한창인데 하필 화보를 발리에서 찍는다는 게 문제다. 안 그래도 사극을 맡았기 때문에 준비해야 될 게 한두 가지가 아닌데 이 중요한 시기에 나흘이나 한국을 떠나있다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알죠. 별이 씨가 이번에 또 드라마 들어간다면서요? 죄송해요. 하지만 지금 촬영하는 건 아시아판으로 찍는 거라 본사에서 컨트롤하는 거거든요. 저희도 힘이 없네요. 일단 저희가 스케줄은 빡빡하게 해서 최대한 빨리 찍고 다시 인천으로 보내드릴게요.”
“꼭 발리여야만 한답니까? 일본이나 중국은 안 된대요?”
“이번에 신상품 때문에 본사에서 정한 컨셉이에요. 풀빌라랑 리조트, 그리고 해변에서 촬영 진행될 거구요. 그 외에도 몇 가지 추가 촬영이 있을 거예요. 이해 좀 부탁드릴게요.”
“그럼 이렇게 합시다. 모레 밤에 출발해서 일요일 새벽까지 도착하는 거로요. 그렇게 조정 될까요?”
“목요일부터 일요일까지요? 흐음… 어차피 하루 차이긴 한데… 뭐, 좋아요. 제가 밀어붙여 보겠습니다. 그럼 저희는 금요일 오전부터 스케줄 잡을게요. 별이씨가 조금 힘들겠네요.”
“안 그러면 드라마 스케줄과 맞추기 힘들어서요. 그럼 발리에서 뵙겠습니다.”
연기연습을 하루라도 더 많이 하기위해 출발을 하루 늦추고 일요일 오후에 쉬는 일정으로 다시 조정했다. 아무래도 별이가 조금 더 힘들겠지만 아직 젊으니 이 정도는 이겨낼 거다.
다음날이 돼서 작곡에 열중하는 유니와 의견을 나누고 그동안 신경 쓰지 못했던 작가, 피디들을 만나며 친분을 다지는데 시간을 보내고는 약속시간이 다가오자 청담동으로 차를 몰았다.
지나와 진명은 준비할 게 있다며 식당에서 만나자고 해서 따로 가는 중이다. 뭘 준비하려고 하는 지 조금 걱정되긴 하지만 머리가 나쁜 친구들이 아니니 알아서 잘 할 거라고 생각했다.
청담동 유명 일식집답게 들어가는 입구의 인테리어부터 으리으리했지만 연예계에 있으면서 이런 음식점에 방문하는 것은 종종 있는 일이기에 휘적휘적 걸음을 옮겨 준비된 방으로 안내받았다.
“손님 들어가십니다.”
여 종업원의 말이 끝나며 문이 열렸는데 양수찬 대표와 유정완 감독이 벌써부터 술을 마시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안녕하십니까. 벌써부터 한잔 하시는 거예요?”
“어, 왔어? 일단 앉아서 한잔 받아.”
양 대표는 우현을 유 감독에게 인사시키기도 전에 술잔부터 들었다. 잔을 부딪치고 안주로 회 한 점씩 집어먹고 난 다음에야 유 감독을 소개했다.
“여기는 뭐, 알잖아? 천만 감독인 유정완 감독이고 이쪽은 원래 그저 그런 회사에서 유은하를 키웠던 매니저였어. 그러다 회사 세우고 대표 명함까지 파버린 김우현 대표.”
소개도 역시 그답게 한다.
“안녕하세요. 김우현입니다. 지금은 유지나 데리고 있습니다.”
“어이쿠, 반갑습니다. 천만은 운이 좋았고 그냥 액션 좋아하는 유정완입니다.”
30대 후반의 그는 까무잡잡한 얼굴에 작고 단단한 체형의 남자였다.
“지나는 오늘 따로 오기로 해서 제가 먼저 도착했습니다. 제가 약속 시각보다 빨리 왔다고 생각했는데 벌써 오셔서 한 잔 하시네요.”
“우리 온지 1시간 됐어.”
“1시간이요? 왜 그렇게 빨리 오셨어요?”
“그냥, 한잔 빨고 싶어서 왔지. 꼭 시간 맞춰서 와야 한다는 법은 없잖아? 법으로 정해진 것도 아니고… 회로 배 채워도 되고 따로 먹고 싶은 게 있으면 시켜.”
“와… 이제는 화통해지셨네요.”
“김 대표가 나랑 일한 게 벌써 2년도 지났지? 그 때는 은하도 지금 그 위치가 아니었고 나도 지금처럼 여유롭지가 못했지만 지금은 다르지.”
“식사 안 하셨으면 저랑 같이 대구탕이나 드실까요?”
유 감독이 얼큰한 국물이 당기는지 은근한 목소리로 물어온다.
“대구탕 좋죠. 저는 빨갛게 해서 먹겠습니다.”
“저도 얼큰한 걸 좋아합니다, 하하.”
유 감독이 자리에서 일어나자 우현도 따라 일어났다.
“제가 시킬 테니 앉으세요. 전화로 부르면 되니까요.”
방의 한쪽 벽에 달린 전화기를 드는데 밖에서 여종업원의 목소리가 들렸다.
“손님 오셨습니다.”
드르륵 소리와 함께 미닫이문이 열리는데 우현은 너무 놀라 앉으려던 엉덩이를 바닥에 대지 못하고 얼어버렸다.
“아이고, 이게 누구십니까?”
양수찬 대표가 얼굴에 함지박만한 미소를 띠며 박수를 쳤다. 밖에는 파격적인 스타일을 하고 나타난 유지나와 그런 그녀의 뒤에 뻘쭘하게 서 있는 진명의 모습이 보였다.
“안녕하세요. 들어가도 될까요?”
“아이고, 그럼요. 들어오세요.”
유 감독이 들었던 전화기를 내려놓고 얼른 유지나와 진명을 빈자리로 안내하고는 대구탕 두 개를 시켰다.
유지나는 우현의 등 뒤를 돌아 옆 자리에 앉았다.
“멋있네.”
“고마워요.”
유지나는 단단히 결심했는지 갈색 코트 안에 언더월드의 케이트 베켄세일처럼 검은색 가죽옷을 쫙 빼 입었다. 게다가 머리는 단발을 넘어서 선머슴처럼 짧게 자르고 왔는데 당장이라도 품속에서 칼을 뽑아 누군가를 찌른다 해도 이상하지 않을 모양새였다.
“혹시 오면서 누구 만난 건 아니지?”
“아하하! 왜요? 누가 봤을까 봐요? 걱정 마세요. 샵에서도 몇 명밖에 못 봤어요. 뭐… 액션스쿨 들어가면 이 모습이 들통 나겠지만.”
“아니, 아니죠. 절대로 들통 나면 안 되죠. 이 모습 그대로 우리만 간직합시다.”
유 감독이 흥분하며 자리에 앉아 유지나의 얼굴을 향해 휴대폰 카메라를 들이밀었다.
“그래도 홍보가 되려면 어느 정도는 노출하는 게 맞지 않아? 지금 이 모습 그대로 기사 내면 단박에 실검 1위라고.”
“양 대표님, 아직 카메라 돌리지도 않았습니다. 개봉까지는 한참 남았다구요. 설레발이 과하면 관객들도 진 빠집니다. 이 사진은 딱 개봉 전 홍보에 날려주는 게 훨씬 더 효과가 클 겁니다. 첫 미팅 때 이렇게 나온 여배우가 있었어요?”
확실히 유지나는 전작에서 민유리 작가와 미팅할 때 기억이 떠올랐던 것 같다. 그 때 이후로 작품에 임하는 생각이 달라졌는지 이렇게까지 파격적인 연출을 스스로 생각해서 나올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가죽옷도 인상적이지만 그 머리… 머리를 그렇게 선머슴처럼 자른 것은 왜 그랬죠?”
“탈북한 북한 특수부대원이 긴 머리를 하지 않으리라고 생각했거든요. 어디선가 봤는데 머리가 길면 싸울 때 불리하다면서요? 군대에서도 그것 때문에 머리를 깎는다고 하던데? 그래서 자르긴 했는데 너무 짧게 자르면 그것도 이상할 것 같아서 이렇게 까지만 했어요.”
“잘 했어요. 너무 자르면 유지나 씨의 매력이 떨어질 겁니다. 딱 이 정도가 적당해요. 지나 씨만의 섹시한 매력을 보여주면서도 극에서 보여줄 수 있는 캐릭터의 성격에 부합하죠. 일단 제가 액션스쿨 쪽에 연락해서 입단속 시켜놓도록 할게요. 아시겠지만 이번 영화가 굉장히 터프한 편이라 다칠 수도 있어요. 물론 스턴트가 필요한 부분은 대신하겠지만 기본적으로 몸을 많이 부딪쳐야 되는 만큼 철저한 준비가 필요합니다. 석 달간 체력은 물론이고 몸을 최대한 유연하게 만드셔야 해요. 그래야 부상을 덜 입습니다.”
유정완 감독은 마음을 정한 듯 유지나에게 캐스팅에 관한 말은 언급조차 하지 않고 이후 과정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이거 이거 유 감독이 엄청 마음에 들었나보네? 응? 나랑 방금 전에 한잔 할 때는 말이야, 응? 유지나가 너무 선이 고와서 힘들 것 같네, 응? 너무 섹시한 것만 내세우는 B급 영화처럼 보일 것 같네 하는 말을 하더니 말이야.”
살짝 술이 오른 양 대표가 콧김을 씽씽 뿜으며 말했지만 입가에 한 줄기 미소를 그리고 있어 진심으로 혼내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었다. 오히려 유지나가 선이 곱고 글래머러스하다는 걸 칭찬하고 있다.
“아이고 이 아저씨, 또 술 들어가더니 쓸데없는 말 하시네. 회라도 좀 드시고 술 드세요. 지나 씨는 오해하지 마시고, 하하. 사실 지나 씨가 지금까지 하도 여리여리한 역할만 맡다 보니까 조금 선입견이 있긴 했어요. 그런데 지금의 모습을 보니 제 선입견이 한참 잘못된 것 같네요. 일단 술 하시죠? 한잔 받고 이 양반이 한 말은 잊어버립시다.”
“아니에요. 오히려 예쁘다고 칭찬해주시는 거잖아요? 회도 좋아하고 술도 좋아하니 오늘 많이 먹고 열심히 운동해야겠어요.”
“하하하, 그렇죠. 이제부터 빡세게 운동해야 할 겁니다. 그러니 단백질 많이 드세요.”
우현이 뭐라 끼어들 틈도 없이 서로 간에 칭찬으로 말이 오가며 상황을 마무리 지어버렸다.
“이거 제가 끼어들 틈도 없이 캐스팅 확정 지은 겁니까?”
“딱 상황 보면 모르나? 너는 나랑 나중에 돈 얘기만 하면 된다.”
“좋죠. 사실 돈 이야기가 제일 중요한 거 아니겠습니까?”
“가장 재밌기도 하지. 눈에 장난기가 가득한 게 벌써부터 흥분되나 본데 너무 많이 부르지 마라. 나 간 떨어진다.”
양 대표의 엄살에 옆에 앉은 지나의 팔을 슬쩍 건드렸다.
“지나 씨 이따가 양 대표님 셀카 한 장 찍어드려요. 그럼 출연료 많이 주실 테니까.”
“정말요?”
“그럼요. 영 하나가 더 붙을 겁니다. 원체 미인에 약하거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