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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3]< 인생은 타이밍이다(2)
“감독이 누군데요?”
“유정완 감독.”
대한민국 액션 영화계를 이끌어가는 가장 흥행력 있는 감독 중 한 명인 유정완 감독이다. 그 감독이 만드는 영화의 주연이라면 누구라도 탐낼 것이 분명하다.
“아이고 유정완 감독 작품인데 그렇게 꽁꽁 숨겨두셨던 거예요? 당연히 좋죠.”
“인마, 너도 알다시피 액션 영화가 네가 좋다고 오케이가 나냐? 유 감독 성격 알지? 어설픈 액션 안 해. 그걸 유지나가 하겠다고?”
양수찬 대표가 어이없어 하는 것이 이해된다. 지금까지 정통 멜로를 위주로 필모를 쌓아오던 유지나가 단 한 번도 해본 적 없는 액션연기를 하겠다는 말은 그의 입장에서 받아들이기 힘든 말일 것이다.
여배우가 액션을 촬영한다는 건 남자배우와는 다르다. 기본적으로 운동신경이 남성보다 떨어질 수밖에 없기에 본인이 원해서 촬영하지 않으면 백프로 사고가 나거나 촬영 못하겠다고 도망쳐버린다. 그렇기에 액션에 도전하는 여배우는 가장 먼저 작품에 임하는 자세부터 준비돼야 한다.
“이번에 작품 하겠다는 자세가 남다르다니까요? 그렇지 않으면 제가 미쳤다고 액션인데 이렇게 들이대겠습니까? 생각해봐요. 제가 언제 하지도 않을 작품 들이댄 적 있습니까?”
눈을 크게 뜨며 큰소리를 치자 양 대표가 움찔하며 우현의 기색을 바라보았다.
“그렇긴 하지. 그런데 진짜 유지나가 액션 하겠데? 이거 힘들 건데?”
“우리 지나 몸 튼튼합니다. 그리고 이번에 액션도 마다하지 않고 하겠다고 했어요.”
물론 이야기 된 건 없었지만 그 때 그녀의 분위기가 그랬기에 그냥 밀고 나갔다. 여기서 ‘아마’라는 전제를 깔았다가는 실없는 놈이 될 게 분명하기 때문이다.
“이거 들어가기 전에 액션스쿨만 최소 석 달은 다녀야 해.”
짐작은 했지만 어쩔 수 없다.
“일단 시나리오가 어떻게 돼요?”
“한국판 킬빌.”
“오호…”
다른 것 필요 없이 ‘한국판 킬빌’이라는 말만으로도 강한 임팩트가 왔다. 그 잔혹하고 거침없는 여성의 액션을 과연 유지나가 얼마나 보여줄 수 있을까? 생각만으로도 가슴 떨리는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어때? 확 오지?”
“복수극이겠네요?”
“당연하지. 그런데 진짜 이걸 유지나가 할 수 있을까? 너도 알잖아. 남자들의 액션은 대충 손으로 치고 박아도 느낌이 살지만 여자들의 액션이 그러면 애들 장난이 돼버린다는 거.”
그의 말처럼 여배우들이 본시리즈처럼 액션을 하면 아무리 열심히 한다고 해도 느낌이 제대로 살지 않는다. 그렇기에 여자들의 액션은 피가 튀어야 한다. 비명이 난무하고 시퍼런 칼이 사방에서 휘몰아쳐야 맛이 난다.
“알고 있죠. 분명 잘 할 거니까 일단 시나리오나 주세요. 무슨 말이 그렇게 길어요? 형님도 갈수록 간이 작아지는 것 같아요.”
“야, 인마! 너도 놀아봐. 자꾸 놀고 싶어지지. 영화 하나 휘청거릴 때마다 내가 간이 철렁철렁 해요. 더 이상 못 놀까봐.”
“걱정 말아요. 내가 유지나로 한 1년 놀게 해드릴게. 그러니까 일단 시나리오나 내놔 봐요.”
다짜고짜 손을 내미는 우현의 태도에 양 대표가 골프채를 한 쪽에 세워 두고 서랍에서 A4 용지 한 묶음을 내밀었다. 제목은 ‘붉은 여우’. 앉은 자리에서 시나리오를 다 읽어버렸다.
시나리오는 이름 대신 붉은 여우라고 불리는 북한 특수부대 출신인 주인공이 가족과 함께 탈북해 한국으로 들어오려고 한다. 그러던 중 거대 조직폭력배와 같은 특수부대 인물들의 소행으로 가족들이 모두 죽어버리자 이에 주인공이 단신으로 거대 조폭을 무너뜨리는 내용이다.
그녀의 주 무기가 단검이고 주석으로 어떤 식으로 죽이는지 상세하게 첨부되어 있는데 이렇게 잔인한 시나리오는 공포영화를 제외하고 태어나서 처음 보았다.
“어때?”
양수찬 대표가 호기심 어린 표정으로 은근히 물어온다.
“아… 이거 유정완 감독 스타일이 아닌데?”
피가 튀는 잔혹한 액션이라고는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유정완 감독 스타일이 있으니 뭔가 치고 박는 스타일의 액션이 나올 것 같았는데 시나리오를 읽어보니 최소 19금 버전의 잔인한 액션영화가 나올 것 같다.
“그렇지? 이거 우리 쪽에서도 말이 많았어. 우리나라에서 이게 통할지는 확신할 수 없는데다가 이 정도 액션을 소화해줄 여배우가 없을 것 같았거든. 그래서 사실 오디션을 보려고 준비 중이었어.”
“오디션이요? 액션 되는 여배우로?”
“응. 그래야 맛이 살 것 같아서. 그런데 유지나가 만약 진짜로 이 정도로 해준다면… 진짜 물건 하나 나올 것 같지 않냐?”
“오케이. 알겠습니다. 오늘 내로 확답 드릴게요.”
“빠른데? 우리야 한시라도 빨리 액션스쿨 다닐수록 좋지. 사실 석 달로도 부족해.”
“일단 급하니 먼저 일어나겠습니다.”
“그래그래, 오늘 저녁까지 연락 줘. 그래야 우리도 진행 시작하지.”
양 대표의 ‘필름나라’를 나와 곧장 유지나 매니저인 진명에게 지나와 같이 당장 사무실로 나오라고 했다. 무슨 이야기냐고 물었지만 일단 나오라는 말만 하고 이야기해주지는 않았다.
우현이 사무실에 도착하고 두 시간쯤 지났을 때 진명과 지나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대충 츄리닝을 입고 온 진명과는 다르게 유지나는 깔끔한 아이보리색 블라우스와 청바지로 몸매를 뽐내고 풀 메이크업을 하고 있었다.
“오늘 어디 갔다 왔어요?”
“아… 집에만 있으면 축축 쳐지니까 안 그래도 밖에 나가려고 했어요. 그러다 대표님이 찾는다는 말에 혼자서 메이크업 좀 했죠.”
“혼자서도 잘 하네요. 어쨌거나 앉아요.”
인스턴트커피가 앞에 하나씩 놓이자 우현이 재차 입을 열었다.
“오늘 ‘필름나라’ 갔다가 시나리오 하나 받아왔어요.”
“정말요? 대표님 마음에 들었으니까 저를 부르셨다는 건데… 어떤 영화예요?”
그녀가 반짝반짝 눈을 빛내며 몸을 앞으로 숙인다.
“유정완 감독 차기작이에요.”
“유 감독님이요? 그럼 어떤 배역인데요?”
조금 실망한 표정. 액션 영화이기에 조연이라고 생각한 것이 분명했다.
“북한 특수부대 출신으로 가족과 함께 탈북해서 한국으로 들어오다가 거대 조직에 의해 가족이 몰살당하자 혼자서 복수하는 내용이에요. 당신이 주인공이고.”
“제가요? 유정완 감독님이 이걸 만든다구요?”
아무리 액션 영화라고는 하지만 주인공이 남자가 아닌 건 흔치 않다. 그녀가 놀라는 건 당연했다.
“그래요. 여기 시나리오 있으니까 읽어봐요.”
그녀도 우현처럼 앉은 자리에서 시나리오를 순식간에 읽어 내렸다. 그녀가 다 읽고 나서 진명에게 건네주자 그도 빠르게 시나리오를 훑어 내렸다.
“어때요?”
우현의 물음에 그녀가 한쪽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후… 이거 생각지도 못한 작품인데… 한 가지만 물을게요. 이 영화 잘 될 것 같아요?”
“무조건 성공합니다. 19금인 게 조금 아쉽긴 하지만 최소 5, 6백만은 무조건 넘을 거예요.”
“정말요?”
“유정완 감독 자체만으로도 상당한 팬덤을 가진 감독인데다 다른 액션 감독들과는 다르게 스토리도 괜찮게 끌고 가는 힘이 있어요. 무엇보다 관객들이 영화를 볼 때 무엇을 원하는지 알고 있다고 할까? 영리한 감독이에요.”
“그렇긴 하죠. 천만 영화는 아무나 만드는 게 아니니까요.”
“게다가 시나리오도 나쁘지 않아요. 사실 액션 영화의 시나리오라고 해봐야 다들 별다를 게 없지만 중요한 건 관객을 영화관으로 오게 할 수 있는 소재인가가 중요한데 이 작품은 충분히 가능하다고 봐요.”
“어떤 점을 봐서요?”
“유지나 씨가 있잖아요?”
“네? 그게 무슨…”
“생각해봐요. 지금껏 정통멜로와 로코를 넘나들었던 유지나가 쫙 달라붙는 가죽옷을 입고 피비린내 나는 복수를 하는 영화예요. 아니, 내용은 내버려 두고 그런 섹시한 장면을 영화관에서 보고 싶지 않겠어요?”
“아…”
자신에 대한 칭찬이라 그런지 표정이 애매해진다. 부담감 때문일 것이다.
“문제는 하나죠. 그런 액션을 어설프게 한다면 실망만 가득할 겁니다. 관객이 액션 영화를 보러 극장에 갈 때는 예고편만으로도 충분해요. 만약 킬빌의 우마 서먼처럼 굉장한 연기를 보여준다면, 어쩌면 헐리우드도 가능하지 않을까요?”
헐리우드라는 말 때문일까? 유지나는 더 이상 입을 열지 않고 입술만을 깨물고 생각에 잠겼다.
“대표님, 이 시나리오 진짜 먹힐까요?”
옆에 있던 진명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다시 물어본다. 한번 결정하면 되돌릴 수 없고 일단 시작하면 굉장히 고통스러운 여정이 있기 때문에 그로서는 안심이 안되는 게 당연할 수 있다.
“너 ‘킬빌’ 봤지? 내용이 뭐야?”
“킬러 조직에 있던 주인공이 사랑하는 남자를 만나고 조직을 떠나면서 조직원들에 의해 가족이 죽었죠. 그래서 복수하는 내용이요.”
“지금 너한테 그 시나리오 들어오면 하겠냐?”
“어…”
“나라면 해. 왜? 그의 전작인 ‘펄프 픽션’, ‘저수지의 개’는 분명 명작이었거든. 물론 그렇게 잘 찍어놓고 이번 작품에서는 망할 수도 있겠지. 하지만 ‘킬빌’에는 관객들이 좋아할만한 클리셰 적인 요소가 가득했어. 어떻게 보면 내가 어렸을 때 보던 무협지들과 다를 게 없는 내용이지만 그만큼 잘 먹힌다는 거지. 이런 내용의 시나리오면 무조건 해야 되는 거야.”
“그렇네요.”
“그리고 내가 오로지 시나리오 때문에 이걸 들이밀겠어? 이 시나리오를 만드는 게 유정완 감독이니까 들이미는 거지. 지나씨, 유정완 감독, 천만 감독이에요. 만약 다른 영화였다면 지나 씨한테 이런 기회가 오지 않을 겁니다. 이런 역할이기에 기회가 온 건지도 몰라요.”
그녀도 잘 알거다. 얌전하고 예쁘기만 하면 되는 역이면 자신에게 차례가 돌아오지 못할 것이었다는 걸. 그래서인지 그녀는 작고 하얀 주먹을 꼭 쥐며 고개를 끄덕였다.
“할게요.”
“진짜 할 수 있겠어요? 확정되면 당장 액션스쿨부터 최소 석 달은 다녀야 해요. 그리고 유 감독 성향을 봤을 때 어설프게 하면 중간에 배우 교체할 수도 있어요.”
드라마나 영화 촬영 중에도 배우가 교체되는 일이 종종 있다. 생각했던 것보다 연기가 너무 부족하거나 사고를 치면 교체되는 일이 생기는데 이건 배우 입장에서는 상당히 치명적인 일이다.
“할 수 있어요. 말씀은 안 드렸지만 어렸을 때는 태권도도 했었어요. 물론 큰 도움은 안 되겠지만 그래도 운동신경이 떨어진다는 생각은 해본 적 없었거든요.”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액션이 너무 안 된다고 생각하면 그 쪽에서 배우 교체할 수도 있어요. 진짜 자신 있는 거예요?”
“그런 말 안 나오게 할게요.”
지나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바로 양수찬 대표에게 전화를 걸었다.
“대표님, 저 우현입니다.”
“빠르네? 유지나가 뭐래? 하겠데?”
“네, 제가 뭐라고 했습니까? 미팅 잡으시죠?”
“진짜 합의 된 거지? 김 대표, 약속까지 잡아놓고 다른 말하면 나 다시는 김 대표 안 봐.”
아무리 노는 것을 좋아한다고는 하지만 양 대표가 지금 저 자리에 있는 건 다 이유가 있다. 한 번 진행한 일은 불도저처럼 밀어붙이는 뚝심과 어떤 약속이든 반드시 지키는 신용 때문이다.
“제가 언제 한 입으로 두 말한 적 있습니까?”
“좋아, 내일 저녁. 청담동 동해도 알지?”
“회 좋죠.”
“유 감독 스타일 알지? 카메라 돌기 시작하면 여자라고 봐주지 않아. 마음 단단히 먹고 오라고 해. 아, 그것과는 별개로 내가 유지나 씨 팬이라고 좀 말해줘.”
“하하하, 알겠습니다. 가서 셀카 한번 찍어주라고 할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