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너 내가 스타로 띄어줄게-102화 (102/301)

=======================================

[102] 인생은 타이밍이다(1)

“아이구 머리야…”

머리가 깨질 것처럼 두통이 밀려왔다. 비틀거리며 걸음을 옮긴 우현은 냉장고를 열어 생수를 집어 들어 벌컥벌컥 들이마셨다.

“아우 죽겠다.”

머리를 부여잡으며 샤워를 하는데 계속 웃음이 실실 새어나왔다. 어젯밤 일이 계속 머릿속을 맴돌았기 때문이다.

차 안에서의 그 일 이후 우현은 도저히 그냥 잠을 청할 수가 없어서 냉장고 안에 있던 맥주를 꺼내 마셨는데 그 캔이 하나, 둘 쌓여가다 결국 다섯 개의 빈 캔을 만들어낸 후에야 잠이 들 수 있었다. 지금 머리가 깨질 듯이 아픈 것도 전부 그것 때문이다.

회사 근처 콩나물해장국집에서 시원하게 한 그릇 들이키고 출근한 우현은 비몽사몽한 상태로 하루를 보냈다.

“대표님, 무슨 좋을 일 있으셨어요?”

“응? 왜요?”

“하루 종일 멍 때리면서도 중간 중간 실없이 웃음을 보이셔가지구요. 꼭 아침에 여자 팬티라도 본 것 같은 표정이잖아요? 오늘 바람도 별로 안 불었는데?”

“민주씨는 무슨 말을 그렇게 아저씨처럼 해요? 결혼하면 다 그렇게 됩니까?”

“이게 아저씨 같은가? 흐음… 그러고 보니 얼굴도 조금 붉어진 것이, 무슨 일이 있긴 있으셨나 봐요?”

“크흠… 아닙니다. 아무 일도 없었어요.”

“알았어요. 그렇게 숨기고 싶다면야…”

“아니라니까요.”

“괜찮아요. 그리고 오늘 오후에 사무실 보러 가는 거 잊지 마세요.”

회사 통장으로 들어오는 매출이 상당해지면서 사무실을 옮기기로 했다. 별이와 유니로 시작했던 회사에서 윤해연, 이주희 작가를 영입하고 A급 배우인 유지나와 신인배우인 민상욱을 키우기 시작하면서 이 작은 사무실로는 힘들다고 판단한 것이다.

“네. 아무래도 청담동 쪽으로 옮길 것 같은데 최대한 역에서 가까운 곳으로 구해 볼게요.”

“그랬으면 좋겠어요. 그 동네는 워낙에 뚜벅이들이 가기 힘든 동네라… 연예인들은 왜 다들 그 동네에 있는지 몰라.”

“원래 청담동이 그런 동네잖아요. 비싸고 허세가 가득한 곳. 유동인구도 별로 없고 차가 없으면 가기 힘든 동네인데 임대료는 엄청 비싸죠. 그래도 연예 소속사라면 청담동에 있어줘야 하는 게 당연시 되니까요. 그리고 사실 다른 동네에 소속사가 들어가면 애들이 피곤해질 수 있어서…”

청담동을 선호하는 이유는 고급스러운 이미지도 있지만 일단 그 동네에서는 연예인을 봐도 난리법석을 떨지 않는다는 게 또 다른 이유다. 다른 동네라면 커피 하나도 못 사먹을 텐데 하도 지나다니는 연예인들이 많다보니 그냥 그런가보다 하고 지나간다.

“알고 있어요. 어쨌든 건물 깨끗하고 넓은 데였으면 좋겠네요.”

“그건 저도 바라는 겁니다.”

점심을 먹고 어느 정도 술이 깬 우현은 오후 내내 부동산 중개업자를 따라 다니며 사무실을 구했다. 별이 촬영도 끝났고 당분간 우현이 처리해야 할 일도 없어 며칠 내내 사무실을 구하는데 집중했다.

물론 유지나의 마지막 촬영날에는 수고했다고 그녀의 매니저인 진명과 함께 회식을 가졌다. 어차피 종방연에서 한껏 술을 들이킬 그들이지만 그 때는 다른 사람들과 같이 마시는 거라 분위기도 다르고 의미도 다르다.

시청률이 좋게 나온 드라마여서 그런지 그들과의 술자리는 내내 웃음이 끊이지 않았다.

“아하하! 어쨌든 민유리 선생님께서 다음 작품에도 꼭 저랑 하고 싶다고 하셨다니까요?”

“그 꼬장꼬장한 분이 웬일이래요?”

“웬일이긴요? 제가 마음에 들었던 거죠. 그나저나 영화 시나리오는 찾고 계시는 거예요?”

전에 유지나와 대화하면서 차기작으로 영화를 하고 싶다는 말을 들었기에 계속해서 그녀를 위한 시나리오를 찾고 있었다.

“네, 당연히 찾고 있죠. 그런데 진짜 드라마 끝나고 바로 영화 들어가도 괜찮겠어요? 체력이 돼요?”

“그럼요. 그리고 사실 돈이 급하기도 해요. 주변에 워낙 사고치는 인간들이 많아서요. 제가 아니면 해결이 안 돼요.”

그녀의 사정을 대략적으로는 알고 있었지만 드라마 끝나고 곧바로 다시 작품을 해야 할 만큼 어려운 줄은 몰랐다. 진명의 눈치를 슬쩍 보니 속이 쓰리는 지 맥주만 들이켰다.

“얼마나 필요한데요?”

“왜요? 빌려 주시려구요? 됐어요, 저 능력 되잖아요.”

“그거야 그렇지만, 급하면…”

“아니요. 작품으로 돈 벌게요. 돈 함부로 빌렸다가는 정말 힘든 일을 겪을 수 있다는 걸 알았거든요. 특히 여자는 그래요. 능력 있으니까 제가 스스로 해결할게요. 대신 괜찮은 작품은 우리 대표님께서 잘 골라 주시리라고 생각해요.”

사실 별이와 은하 때문에 지나의 다음 작품 시나리오를 찾는 작업은 그리 열심히 하지 못했다. 이런 사정을 알았다면 유지나를 윤 작가 작품에 넣어보는 건데… 드라마이긴 해도 분명 괜찮았을 거다.

“걱정 마세요. 최고로 좋은 작품 가지고 올 겁니다.”

일단 유지나에게 큰소리를 떵떵 치긴 했지만 은근히 걱정이 됐다. 충무로 판에서 여배우에게 좋은 작품은 흔치 않다. 특히 무조건 흥행성을 잡고 가야하는 지나의 상황을 비춰봤을 때 당장 머릿속에 떠오르는 작품이 없었다.

“그럼 다음 작품을 위해 건배할까요?”

“아직 마지막 방송도 안 나갔는데 벌써 다음 작품입니까?”

“앗! 그렇네요. 그럼 마지막 회 시청률을 위해 건배할까요?”

“좋죠!”

그들과의 술자리가 있고 난 후, 유지나의 다음 작품을 찾기 위해 사무실을 찾는 시간을 많이 줄였다. 별이의 차기 영화를 찾기 위해 몇 달 전에 모아두었던 시나리오를 다시 검토하고 영화 제작사를 돌며 현재 기획중인 영화에 대한 정보를 모으기 시작했다.

일이 끝나고 은하를 만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이미 스케줄이 잡혀 있는 그녀를 따로 불러내기에는 위험부담이 따라 그만두었다.

주말에는 은하가 두바이로 떠났다. 공항에 가서 얼굴이라도 보고 싶었지만 은하는 주변 시선 때문에 인사말 한번 건네기 어렵다는 이유로 오지 말라고 했다. 괜히 그녀에게 피해가 갈까봐 우현도 그저 기사로만 그녀의 모습을 지켜보았다.

화보 촬영과 회사 내 친한 여배우와의 여행이라고 한 달 정도 걸린다고 했으니 그녀가 한국에 돌아왔을 때는 별이의 드라마 촬영이 시작됐을 수도 있을 거다.

별이는 영화가 끝나고 며칠 쉬다가 이번에 들어가는 드라마 때문에 연기학원에 틀어박혀 나오지 않는다고 한다. 첫 사극에다가 한지애가 맡은 여대생도 아닌 실제 안순왕후가 될 한씨로 나올 것이기에 발성부터 다시 연습해야 하기 때문이다.

물론 다음주에 CF관련해서 광고제작사와 미팅이 잡혀있다. 연기 연습 중간에 광고 촬영이 잡힐지도 모른다.

주말이 지나고 주중에 접어들면서 하나 둘씩 일이 진행되었다. 유지나의 종방연이 끝나고 청담동에 이전할 사무실도 계약했는데 그 와중에 스케줄이 많이 줄어든 유니가 오랜만에 사무실에 등장하며 활력을 불러 일으켰다.

“완전 오랜만인 거 알아요?”

차 타고 전국을 돌아다니며 행사 뛰는 것이 힘들었는지 얼굴 살이 조금 빠진 것처럼 보였다.

“고생했어. 살이 좀 빠진 것 같은데?”

“진짜요? 헤헤. 하루 내내 김밥만 먹은 적도 있어요. 토할 뻔했다니까요? 에휴… 저 맛있는 것 좀 사주세요.”

“그럼, 당연하지. 이제 시간 좀 생겼으니 다음 앨범 준비 시작해야지?”

“이얏호! 진짜죠? 진짜?”

“진짜야. 그 동안 짬짬히 작곡해 놓은 것 있으면 정리해서 한번 들어보도록 하자.”

“꽤 되는데?”

“양이 많으면 더 좋지. 아, 가사는 적지 마. 너는 가사 쓰면 곡이 이상해지더라.”

“힝… 저 시 잘 써요.”

유니가 울상을 짓는데 마치 장화신은 고양이의 그 눈망울을 떠올릴 만큼 귀여웠다.

“그래, 그럼 따로 시집 내자. 작사는 안 돼.”

“시집은 필요 없는데…”

“그럼 일단 작곡에만 신경 써. 작사가는 좋은 사람 붙여줄 테니까 일단 만들어진 곡을 완성도 있게 다듬는 데만 집중하자.”

“디지털 싱글은 아니죠?”

“응, 이번에 10곡정도 들어가는 정규 앨범 형식으로 낼 거야. 많은 돈이 들어가는 만큼 준비도 전처럼 번갯불에 콩 구워먹은 것처럼 후다닥 진행하지는 않을 거니까 너도 차근차근 준비하도록 하자.”

“넵! 철저히 준비 하도록 하겠습니다!”

TV에서 봤는지 살짝 어설픈 거수경례를 하는 유니의 머리를 쓰다듬어주고는 민주와 몇 마디 잡담을 나누다 사무실을 나왔다. 유지나의 차기작을 위해 영화사를 방문하기 위함이다.

“김 대표, 요즘 자주 보이네? 이제 대표도 됐고 김별이랑 유지나까지 있는데 밑에 직원 두고 나랑 같이 골프나 치러 다니는 거 어때?”

영화 제작사 중에 국내 탑을 달리는 ‘필름나라’의 양수찬 대표는 50대 초반의 나이에 배불뚝이 아저씨지만 입고 있는 옷은 상당한 명품이다. 그는 소파에 앉은 우현을 앞에 두고 기다란 골프채를 든 채 퍼팅연습을 하고 있었다.

예전부터 우현에게 반말을 했었지만 이제 우현이 회사의 대표가 된 이후로는 항상 김 대표라며 직함을 붙여준다.

“이제 막 시작한 회사예요. 직원이야 당연히 두겠지만 아직 골프 치러 다닐 때는 아니죠.”

“아직 젊잖아. 그럼 놀아야지. 이 바닥이 말이야, 꼭 열심히 일한다고 보상이 따라주는 건 아니거든. 김 대표도 알잖아. 내가 어떻게 이 자리까지 왔는지 말이야.”

그의 말처럼 양수찬 대표는 바닥을 전전하며 힘들게 버텨오다 흥행은 생각지도 않았던 작은 작품이 대박이 터지면서 일어설 수 있었다. 그렇기에 그는 언제나 흥행은 신이 점지해준 것이며 잘 나갈 때 놀아야(?) 된다는 독특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대표님은 너무 노시는 경향이 있어요.”

“크크큭. 내가? 아니야. 난 더 놀아야 돼. 아직 부족하다고.”

“그러면서도 출근은 꼬박꼬박 하시는 게 참 신기하네요.”

“마누라한테 맞아 죽지 않으려면 출근은 해야지. 그리고 사실 그게 제일 힘들어.”

“그래도 회사가 잘 돌아가니까 다행입니다.”

“그럼, 내가 얼마나 똘똘한 놈들을 데려 왔는데… 오히려 내가 뭐라도 해보겠다고 배 내밀고 다니면 걔들이 싫어해. 나는 가만히 결재나 해주면서 놀러 다니는 게 회사 도와주는 길이라니까.”

신기한 것은 어느 정도 자리를 잡아가니 못해도 일 년에 최소 한두 작품은 대박이 터져 나오며 이 자리까지 올라올 수 있었다는 것이다.

“직원들 도와주는 김에 저도 좀 도와주세요.”

“내가 안 도와줘도 잘 크면서 엄살은… 그 때 시나리오 건네줬더니 별로라며?”

김별 차기작을 위해 이곳에 들렀던 그는 양수찬 대표에게 받은 시나리오가 별이에게 어울리지 않아 포기했었다.

“그때는 별이랑 맞지 않아서 그랬죠.”

“지금은 유지나랑 맞는 게 있을 까봐? 나는 너 잘 알아. 분명 시나리오 몇 번 훑어보다가 또 깔 거지?”

“딱 맞는 게 있을지도 모르잖습니까?”

“유지나한테 맞는 거 없어. 아니, 유지나를 떠나서 일단 여배우 위주로 된 시나리오는 힘들다는 거 알잖아. 투자를 받기 힘든데 누가 여주인공 위주로 된 영화를 만들겠어?”

“꼭 여주인공 위주가 아니더라도 괜찮은 시나리오 있을 것 아닙니까?”

“그거 다 김 대표 줬잖아.”

“아이고 형님, 아시면서 그러세요? 그거 뜨기 힘듭니다.”

결국 형님이라는 말까지 나왔다. 아주 거부하는 것도 아니고 애매한 표정을 보니 뭔가 있긴 있는 모양인데 도무지 입을 열지 않으니 사적으로라도 부탁하는 것이다.

“너 또 그 버릇 나온다. 네가 무시한 그 시나리오도 그 감독들은 엄청나게 고민해서 만든 거야.”

“압니다, 알죠. 그렇지만 냉정하게 보자구요. 영화 찍는데 한두 푼 들어가는 것도 아니잖습니까? 뭔가 있죠? 그렇죠?”

“유지나랑은 안 맞아. 안 하려고 할 거야.”

“그러니까 뭔데요?”

한참을 머뭇거리던 양수찬 대표가 입을 열었다.

“액션.”

“액션영화요?”

“응, 화끈한 거야. 어설픈 CG나 장난 같은 거 아니라고.”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