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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1] 술은 마음을 부르고(2)
“저는 회사 세우면서 투자 안 받기로 해서 안 받았던 겁니다. 사장님 아시는 분이라고 해도 회사의 방침이 그렇습니다. 차라리 돈을 빌려준다고 했으면 받았을 겁니다. 하지만 투자를 빌미로 회사 지분을 요구했습니다. 그건 제가 받을 수 없는 조건입니다.”
“걔들이 회사 지분 가지고 장난 칠 애들이 아니다. 누굴 도둑놈으로 아나?”
급기야 강진벽 사장의 언성이 높아졌다. 예전이라면 진정하라며 급하게 숙이고 들어갔겠으나 지금은 왠지 그러고 싶지 않았다.
“도둑이건 아니건 중요한 건 회사의 방침이 그렇습니다. 그래서 설사 100억을 투자한다고 해도 받을 수 없는 겁니다. 차라리 그렇게 도와주고 싶다고 하면 빌려주라고 하세요. 그럼 제가 이자 쳐서 갚겠습니다.”
“네가 누구 덕분에 그 자리에서 잘 먹고 잘 사는데! 너 인마 그러는 거 아니다! 어! 그러는 거 아니야!”
“죄송합니다. 시간 늦었으니 이제 주무세요.”
“너 인마! 그러…”
더 이상 통화하고 싶지 않아 전화를 끊어버렸다. 언제고 연락이 올 줄은 알았는데 막상 이렇게 통화하고 나니 예전에 알던 강진벽 사장 같지 않았다.
전에는 젠틀하고 성실한 사람인 줄로만 알았는데 수술을 해서 그런 걸까? 아니면 원래부터 가지고 있던 본성이었을까? 어쨌든 신경 쓰고 싶지 않아 핸드폰을 꺼버리고 누웠다.
다음날이 돼서 출근한 우현은 사무실 한 켠을 점점 차지해가는 선물상자들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 선물들은 팬들이 보내준 것으로 별이와 유니, 지나에게 온 것들인데 다들 바빠서 미처 가져가지도 못 한 것들이다.
다행히 오늘은 별이가 저녁 회식 때까지 쉬게 됐으니 상준에게 전화를 걸었다.
“너 오늘 점심까지는 쉬고 점심 이후에 회식 전까지 아무 때나 와서 회사에 쌓인 별이 선물 들고 가라.”
“아… 알겠습니다. 회식 전까지 차에 실어 놓을게요.”
“그래. 그리고 별이가 열기 전에 네가 먼저 열어라. 그냥 주고 오면 안 돼. 무슨 말인지 알지?”
“그럼요. 전에 지나 씨 일도 있는데 그냥 주진 않습니다. 제가 먼저 열어볼게요.”
“그래, 자는 거 깨워서 미안하다. 쉬어라.”
이번 주에 촬영 마무리하는 지나의 물건은 일단 두고 유니의 선물만 하나씩 까면서 시간을 보내고 있는데 민주가 우현을 불렀다.
“대표님, 방금 포털에 ‘승냥이’ 주연 캐스팅 뉴스 떴어요.”
“그래요? 누가 됐대요?”
“주연인 형사역에 이동운이 됐다는데요?”
“이동운? 아…”
얼마 전에 끝났던 ‘도깨비 전설’에서 저승사자 역을 맡아 인상 깊은 연기를 보여주었던 이동운이 마초적인 감성의 장르 드라마 진출이라니…
‘도깨비 전설’을 제외하면 다른 드라마에서 그다지 큰 인상을 주지 못했던 이동운이었기에 상당한 모험을 택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왜요? 별로예요? 저는 완전 좋은데! 지금까지 맨날 로코만 찍다가 이런 남자향기 짙은 드라마는 처음 찍는 거 아니에요?”
“별로라고 생각한 건 아니에요. 그냥 좀 의외라서요. 그리고 솔직히 말하면 그 배우가 흥행운이 별로 없던 친구라서 그런지 막 대박이라는 생각은 안 드네요.”
“그래도 이번에 ‘도깨비 전설’을 찍으면서 탄력을 받았으니 그 기운으로 대박 한번 더 터뜨릴 수 있죠.”
그렇다. 너무 비관적으로만 볼 필요는 없다. 특히 ‘도깨비 전설’을 통해서 여성팬들이 많이 생겨났기에 그가 주연이라면 일단 초반 시청률은 괜찮을 것이다.
“맞아요. 지금까지 감성적인 연기를 많이 했기 때문에 오히려 이런 마초적인 느낌이 더 살 수 있겠네요. 그리구요?”
“악역으로 유준성 씨가 결정 났네요.”
정치인으로 나오게 될 역에 유준성이면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깔끔한 이미지에 나름 악역도 몇 번 해봤기에 잘 해내지 않을까 싶다. 특히 영화 ‘표적자’에서 부패 경찰역을 강렬하게 소화해본 적이 있다. 물론 그 영화에서는 여자 경찰을 맡았던 김성영 씨가 더욱 인상 깊긴 했지만.
유준성과 상욱의 연기 호흡이 기대가 된다. 특히 유준성은 뮤지컬과 연극을 오가며 많은 경험을 해봤기에 상욱에게 많은 도움을 주지 않을까 예상한다.
“나는 유준성 씨 좋던데. 대표님은 어때요?”
“나도 좋아요. 여배우는 캐스팅 없나요?”
아무리 장르 드라마라고는 해도 여배우가 없으면 분위기가 너무 죽는다. 요즘에는 단지 분위기만을 살려주는 게 아니라 주도적으로 움직이며 사건을 해결하는 여주인공이 인기라서 그런 인물이 하나쯤은 있어줘야 시청률에도 도움이 된다.
“아직 여배우 캐스팅 이야기는 없네요.”
“알겠어요. 고마워요.”
다시 선물을 뜯고 업무를 처리하다보니 금방 저녁이 됐는지 별이가 상준의 차를 타고 사무실에 들어왔다.
“늦잠 좀 잤어?”
“어제 고기 먹고 자고 일어났더니 얼굴이 부었더라구요. 오늘 회식자리에서는 자제해야겠어요. 술 많이 먹이면 안 되는데…”
“적당히 알아서 조절해. 상준이는 차에 선물 좀 같이 옮기자.”
“네. 별이 너는 차에 들어가 있어.”
“아니에요. 제 선물인데 저도 같이 옮겨요.”
그렇게 차에 선물을 싣고 회식자리로 출발했다. 가는데 길이 막혀서 그들이 도착했을 때는 이미 판이 거하게 벌어진 뒤였다.
우현은 눈치껏 은하와는 조금 떨어진 자리에 앉았다. 별이와 같이 있기도 하지만 평소에 이렇게 거리를 둬야 사람들이 의심을 하지 않기 때문이다.
2시간 정도의 술자리를 보내고 서서히 일어날 시간이 되어 갈 무렵, 인상을 잔뜩 찌푸리고 통화하는 은하의 모습이 보였다. 무슨 일이 있나 해서 슬쩍 가까이 가니 은하가 언성을 높였다.
“어떻게 운전했길래 사고가 나? 그럼 나 어쩌라고?”
보아하니 장태현이 차를 몰고 오다가 사고를 낸 것 같다. 몇 마디를 더 주고받던 은하는 인상을 쓴 채 전화를 끊었다.
“매니저가 사고를 냈나?”
은하 가까이에 있던 임찬규 감독이 걱정스런 표정으로 다가왔다.
“네. 사람이 다친 건 아니라는데 사고처리는 해줘야 할 것 같아요. 어쩔 수 없죠. 택시타고 가야지.”
“에헤이, 그럴 수야 있나? 요즘 무서운 세상인데… 그러지 말고 김 대표가 데려다주지? 본래 은하 매니저였잖아? 김 대표 말고 믿을 만한 사람이 없네.”
통화하는 은하의 이야기를 듣자마자 데려다주려고 했는데 임 감독이 절묘하게 토스해주니 고맙다 싶었다.
“아, 예. 그렇게 하죠. 상준아, 너는 대리 불러서 별이 먼저 내려주고 집으로 가라.”
별이와 따로 차를 타고 온 것이 다행이었다.
“은하야, 내 차 타고 가. 데려다줄게.”
“그래야겠네. 고마워.”
“고맙긴… 대리 불렀으니까 조금만 기다려.”
은하는 촬영이 끝나고 회식에 오면서 편하게 후드티로 갈아입은 상태였다. 대리기사가 오자 하늘색 후드를 푹 눌러쓴다. 대리기사가 신경 쓰여서겠지. 우현이 왼쪽, 은하가 오른쪽, 그렇게 뒷좌석에 나란히 앉았는데 은하는 차에 타서부터 줄곧 창밖만 내다보고 있었다. 아무래도 말을 하게 되면 유은하임이 들통나고 심지어 남자와 단둘이 집으로 향하는 게 알려지니까.
그런 것쯤은 이미 너무도 잘 아는 우현이기에 역시 아무 말 없이 살짝 살짝 은하의 후드 뒤통수만 흘깃거렸다. 혹시나 대리기사가 백미러로 볼까봐 최대한 은하를 안 보려고 하는데도 술이란 놈이 그렇게 두질 않는다. 자꾸 눈길이 은하에게로 향했다.
‘얘는 모자 쓴 뒤통수도 예쁘다니까… 쓰다듬어주고 싶게…’
촬영용 메이크업을 지우고 간단히 비비크림만 바른 듯한 얼굴. 창밖만 보고 있어서 얼굴이 다 보이진 않지만 살짝 보이는 옆모습만으로도 자꾸 우현의 시선을 끌었다.
은하의 옆모습은 앞모습보다 더 분위기가 있다고 항상 생각해왔다. 살짝 처진 듯한 눈꼬리 때문일 것이다. 크고 짙은 쌍꺼풀이 아닌, 눈 끝으로 가면서 오히려 좁아지는 쌍꺼풀. 그래서 눈이 살짝 처진 듯이 보이고 거기서 청순한 느낌이 나오는 거다. 앞에서 보는 것보다 옆에서 보면 그 눈매가 더 그윽해 보여서 좋다.
게다가 계란형 얼굴에 갸름한 턱선도 한 몫 거든다. 갸름한 턱선 만큼 여성스러움을 돋보이게 만드는 요소도 없을 거다. 아무리 눈코입이 예뻐도 얼굴이 사각형이라면 보호본능을 불러일으키는 여리여리한 느낌이 덜하다. 그런 면에서 은하는 남자의 보호본능을 굉장히 자극하는 얼굴을 가졌다.
‘뭐… 실제 성격은 전혀 보호가 필요 없지만.’
예전에 은하가 화장품 광고를 앞두고 표정 연습을 할 때가 생각난다. 센 조명 아래에서도 완벽한 피부를 뽐낼 수 있어야 하므로 화장품 광고는 여배우의 자존심이라 할 수 있다. 조명판 없이도 빛이 나는 듯한 피부를 자랑하는 은하가 예뻐 보이는 표정을 연습한다며 테이블에 턱을 괴고 우아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나 예뻐?”
“…”
“푸훗…”
카메라 대신 우현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는데 우현은 어벙벙한 채 대답을 하지 못했다. 너무 예쁜 여자가 저러면 순간 그렇게 된다. 그 때부터였을까? 우현이 은하를 마음에 담게 된 것이.
옛 생각을 하며 은하를 보니 잠이 든 건지 눈을 감고 있었다. 우현의 입가에 빙그레 미소가 떠올랐다. 옆에 두고 가까이서 보니 새삼 좋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 보니 금세 은하가 사는 삼성동에 진입해있었다. 새벽 2시에 다다른 시각이라 밖의 불빛들도 많이 사라졌다.
“여기요.”
삼성동 고급 빌라의 주차장에 차가 세워지자마자 우현은 대리기사가 뒤로 돌아볼세라 얼른 5만 원짜리를 꺼내 기사에게 쥐여주고 보냈다.
차 뒷좌석에 둘만 남은 상태. 새벽시간의 차 안은 고요했다. 우현의 침 삼키는 소리가 울릴 만큼.
‘다 왔다고 말할까? 아니야… 살짝 흔들어 깨워볼까? 아니야 아니야…’
그냥 기다려보기로 했다. 사실 기다린다기 보다는 조금 더 이대로 있고 싶은 거다.
약간 고개가 숙여진 채 눈을 감고 있는 은하의 얼굴을 슬쩍 봤다가 다시 창밖으로 시선을 옮겼다. 주차장 전등만 빛을 내고 있어 어둑한데다 둘 외에는 아무도 없어서 누가 뭐라 할 것도 아닌데 은하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보면 안 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괜히 주변을 한 번 살폈다. 역시 아무도 없다.
‘본다고 닳는 것도 아니고… 두바이 가면 한 달 동안 못 본다 했는데…’
이미 우현의 눈동자는 은하의 얼굴에 멈춰있었다.
꿀꺽…
침 삼키는 소리가 원래 이리도 컸던가?
꿀꺽…
왜이래? 침을 삼키려고 하는 게 아닌데 자꾸 마른침이 삼켜진다.
우현의 몸은 은하 쪽으로 살짝 기울어 있었다. 어두운데다 후드에 가려지고 숙어진 고개 탓에 은하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매니저일 때 은하의 자는 얼굴을 자주 보긴 했었지만 지금처럼 가까이서, 배우가 아닌 여자로서의 은하를 보는 건 처음이다.
후드 사이로 흘러내려온 머리카락. 만져보고 싶었다. 살며시 손을 뻗었다.
두근… 두두근… 두근… 두근근… 두두근근…
심장이 제멋대로 뛴다.
‘심장아, 나대지마라.’
이 가까운 거리에 손을 뻗는 데에 몇 번이나 주춤거렸는지 모른다. 그래도… 손가락이 은하의 머리카락에 닿았다. 살며시 쓸어내렸다.
기척을 느껴서인지 은하가 스르륵 눈을 떴다.
“…”
둘의 시선이 교차하는 찰나의 순간, 말이 필요 없는 많은 대화가 오고갔다. 머리카락을 쓸어내렸던 우현의 손은 은하의 후드를 젖히고 머리를 감쌌다. 가까이서 얼굴을 보기까지, 머리카락을 만져보기까지 수없이 망설였지만 이 순간 우현은 망설이지 않았다.
쪽…
그대로 우현은 은하의 입술에 가벼운 입맞춤을 했다. 입맞춤에 잠시 눈을 감았던 은하가 다시 눈을 뜨고 우현을 바라보았다. 은하의 숨결이 우현의 얼굴에 그대로 느껴졌다. 우현은 다른 손을 은하의 허리에 두르고 고개를 약간 틀어 은하의 윗입술을 살짝 빨아들였다가 뗐다. 뒤이어 아랫입술도.
은하가 손으로 우현의 볼을 살짝 쓰다듬었다. 우현은 반대쪽으로 고개를 틀어 예쁜 은하의 입술을 다시 빨아들였다.
흐읍.
순간 은하는 살짝 놀란 듯했지만 우현의 어깨를 살짝 잡았다가 양 팔로 우현의 목을 끌어안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