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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 술은 마음을 부르고(1)
점심때부터 그렇게 술을 진탕 마신 강병석 피디는 할 일이 있다며 어디론가 가버리고 우현 혼자 방송사 드라마제작실로 향했다. 먼저 와서 기다리고 있던 상욱과 경수가 함께 출연 계약을 맺었는데 회당 400만 원이라 조금 박하다고 느꼈다.
“우하하! 내가 드라마 출연이라니!”
물론 상욱은 출연료는 자신의 소관이 아니라는 듯 출연하게 된 것만으로도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대본은 나왔냐?”
“네, 안 그래도 드리려고 했는데, 여기…”
경수가 두툼한 A4용지 두 뭉치를 건넸다. 표지에 커다랗게 ‘승냥이’라고 쓰여 있는데 제목만 보더라도 진한 장르물의 향기를 풍겼다.
“상욱이 볼 것은 따로 있지?”
“그럼요. 대표님 드린 것은 제가 따로 말해서 받아온 겁니다.”
“잘했다. 나도 한번 볼 테니까 상욱이는 대본 읽고 또 읽어서 이번 작품 제대로 준비하도록 해.”
“물론입니다!”
군대에 온 것처럼 단단히 기합을 넣는다. 첫 출연을 앞두고 의욕이 넘치는 모양이다.
“촬영은 언제 시작한대?”
“다음 달 초부터 시작한다고 합니다. 아직 주연 캐스팅도 해야 되고 스태프들도 인선 마무리해야 한다고 하니까요.”
“주연보다 상욱이가 먼저 캐스팅 됐구나.”
“조감독을 슬쩍 떠보니까 이번에 상욱이가 맡아야 할 캐릭터를 가장 고심했다고 하더라구요. 그런데 생각보다 빨리 캐스팅하게 돼서 본인들도 의외라고 하던데요?”
“그래, 하여튼 고생했고 가서 연습하고들 있어. 첫 촬영 때 팍팍! 밀어줄 테니까 그렇게 알고.”
의욕에 가득 찬 상욱 일행을 보내 놓고 우현은 사무실이 아니라 인천국제공항으로 향했다. 오늘 별이의 마지막 촬영일이기 때문이다.
별이가 콩쿨에서 은하에게 밀려 2위를 하고는 마음을 다잡고 새로운 시작을 하기 위해 유학을 떠나는 것이 오늘 씬의 내용이다. 너무 고리타분하다고 생각했지만 임찬규 감독은 그런 뻔한 내용이 대중에게 더 어필 된다며 자신의 생각을 밀어붙였다.
사실 그의 말도 일리는 있다. 그런 CS 엔터 감성이 대한민국 국민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것이 통계로도 입증됐기 때문이다.
공항 한 편에 온갖 촬영 장비와 수십여 명의 사람들이 몰려있는 것이 보였다.
“어? 대표님 오셨어요?”
“별이는?”
“지금 임 감독님하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스태프들에 가려 보이지는 않지만 상준이 그렇다고 하니 그런 거겠지 싶었다.
“은하는 왔어?”
“네, 사람들 너무 몰려들까봐 현재는 밖에서 대기중입니다. 딱 필요할 때만 등장해서 빠르게 찍고 빠지려구요.”
“그렇게 하는 게 맞지. 다칠지도 모르니까. 오늘 끝나고 술이나 하자. 별이도 고생했는데 바로 드라마 들어가야 하니 오늘 밖에 시간이 안 나겠다.”
“좋죠. 별이 요즘이 너무 힘들다고 살이 더 빠졌대요. 그래서 고기 먹여도 될 것 같습니다.”
“네가 먹고 싶은 게 아니고?”
“흠흠… 물론 저도 먹고 싶지만 이건 모두 별이를 위한 거예요.”
“알았다, 훗”
스태프들이 돌아다니며 너무 몰려드는 사람들을 뒤로 물렸다. 저것도 잘못하면 구경하거나 지나다니는 사람들한테 욕 엄청 먹는다. 네가 뭔데 가라마라 하느냐고 말이다.
“촬영 중입니다. 조금만 물러나 주세요.”
사람들이 한참 더 물러난 뒤에야 다시 촬영을 시작했다. 스태프들에 가렸던 별이의 모습이 드러나고 곧바로 임 감독의 큐 싸인이 들렸다.
멀어서 들리지는 않지만 혼잣말을 하며 공항을 둘러보는 별이의 촬영이 끝나고 어느샌가 다가온 은하와 다시 촬영이 시작했다. 유은하가 현장에 나타나자 사람들이 급격히 몰리기 시작했고 무려 1시간여를 촬영과 중단을 반복한 끝에 겨우 공항 씬을 마무리 지을 수 있었다.
별이는 마지막 촬영이지만 은하는 아직 내일까지 촬영이 남았다. 그래서 별이를 차에 태워놓고 은하가 대기하는 차를 두드렸다.
똑똑!
“누구세요?”
낯선 여자의 목소리, 아마도 은하의 코디일 것이다.
“김우현입니다.”
잠시 후 문을 열고 두 명의 여성이 빠져나왔다. 코디와 메이크업 아티스트인 것 같은데 우현의 얼굴을 슬쩍 보며 애매한 표정을 짓는 것이 보였다. 아마도 유은하와 독대하는 남성이기에 궁금했으리라.
“금방 갈 겁니다.”
긴장된 마음에 굳이 하지 않아도 될 말을 하며 차에 올라 문을 닫았다. 은하는 여대생답게 원피스 위에 아이보리색 코트를 입고 있었다.
“고생했다.”
“나 많이 고생했어, 알아?”
“그럼, 알지. 네 성격에 피아노 연주 완벽하게 하겠다고 며칠 밤을 새서 연습했을 거고 후배한테 행여 못해 보일까 죽도록 대사 외웠겠지. 그래놓고도 밤샘 티내기 싫어서 피곤한 척은 절대 안 했을 거고.”
“칫! 알긴 아네.”
“고맙다. 이 영화 투자해준 것도 고맙고, 주연으로 와준 것도 고마워.”
“됐어. 별이 다음 드라마는 어떻게 됐어? 잘 처리 된 거야?”
은하는 괜히 오글거리는지 화제를 돌렸다.
“응. 한여름이 할 뻔한 걸 한지애가 받았어. 그 사이에 조금 트러블이 있었지. 그래서 너한테 도움 좀 청했던 건데 다행히 잘 해결 됐어.”
“그 언니 이상하네? 나는 이상한 소문 듣지 못했는데… 워낙에 제작진들하고 말을 섞지 않아서 굉장히 조용하다던데?”
“저번에 별이랑 윤 작가한테 제대로 물 먹었잖아. 그래서 힘 한번 줘 봤겠지. 그러다 오버한 거구. 만약 한지애가 받지 않았으면 너랑 이렇게 이야기할 시간도 없었을 거야. 제대로 진상 피우려고 작정한 것 같았거든.”
“하여튼 잘 됐네. 지애 언니도 이제 괜찮은 작품 하나 했으면 했는데…”
“푸하하! 누가 보면 연기 인생 30년쯤 된 걸로 보인다.”
“칫! 오빠 능력을 아니까 하는 말이지. 됐고, 나 내일이 마지막 촬영날이야.”
“알고 있어. 맛있는 거 사줄까?”
“내일 회식이니까 굳이 안 사줘도 돼. 나 주말에 두바이 가면 이제 한 달 정도는 못 볼 거야.”
“두바이라니… 좋겠다.”
끝없는 사막 한가운데 세워진 찬란한 도시. 물론 파산 직전이니 뭐니 하지만 두바이는 그에게 꼭 가보고 싶은 꿈의 도시다.
“오빠 두바이 못 가봤지? 나도 거기는 처음이야. 칫! 나랑 같이 일했으면 같이 갈 수 있었을 거잖아.”
“나중에 같이 가면 되지.”
어감이 이상했는지 그 이후로 이어진 잠시간의 어색한 침묵. 은하는 우현의 다리를 발로 툭툭 치며 내몰았다.
“이제 됐어, 얼른 가. 밖에서 애들이 수근댈 거야. 그리고 나가면서 쓸데없는 말 하지 마! 더 의심되니까 그냥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무표정하게 가.”
“내가 애냐? 뭘 그런 것까지 하나하나…”
“시끄러! 얼른 가.”
은하의 서릿발에 얼른 몸을 돌려 문을 열고 나갔다. 이에 문 앞에 어정쩡하게 서 있던 그녀들이 웃는 것도 아닌 찡그리는 것도 아닌 미묘한 표정을 지으며 잽싸게 차 안으로 들어가서는 문을 닫았다.
착!
왠지 그 문이 닫히는 소리가 매정하게 들렸다. 들어가서 그네들끼리 무슨 이야기를 하나 궁금해 미칠 것 같지만 엿듣고 싶다고 들을 수도 있는 게 아니니 포기하고 별이가 있는 차로 돌아왔다.
이후 별이, 상준과 함께 고기를 먹으며 지금까지 고생했던 그들을 위로했다.
“끝나니까 어때?”
“후련하기도 하고 아쉽기도 하고 그래요. 조금 더 잘해볼 걸 하는 생각도 들고, 대표님 말처럼 항상 완벽하게 준비한 상태에서 시작할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조금만 더 준비하고 했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도 들어요.”
“그럼, 끝나고 그 생각 들지 않으면 연기자가 아니지. 당연한 거야. 고생했어, 은하랑 붙어서 연기하기 힘들었을 텐데.”
“하하, 맞아요. 언니 진짜 대단해요. 김혜진 선배님과는 다른, 그냥 보고만 있어도 카리스마가 뿜어져 나오는 것 같다니까요. 저도 모르게 막 움츠러드는 걸 몇 번이나 느꼈어요.”
“그건 걔가 성격이 안 좋은 게 얼굴로 나타나서 그런 거야. 그래서 남자 연기자들도 은하랑 연기할 때는 가끔 쫄기도 해. 너는 그러지 마라.”
“하하하. 대표님은 은하 언니 은근 디스 많이 하시더라. 언니가 알면 어쩌려구요?”
“알아도 별 말 안 할 거야. 내가 걔 성격가지고 뭐라고 한 게 한두 번 이래야지. 서른쯤 되면 성격이 바뀌려나? 하여튼 고생 많았다. 상준이가 너 이번 작품 하느라고 얼굴에 살이 쪽 빠졌다고 하더라. 오늘 고기 많이 먹고 원상복귀 해.”
“살찌면 어떡해요?”
“그렇다고 아예 안 먹으면 쓰겠어? 원래 배우는 죽을 때까지 다이어트 걱정하는 거야. 먹으면서 걱정, 안 먹으면서 걱정하다가 결국 그 몸매를 유지하는 게 배우지. 배우 일 오래 하고 싶으면 고기 안 먹으면 안 돼. 체력이 달리거든.”
“그래서 요즘 별이 탄수화물 양을 많이 줄였어요.”
식단까지 챙기는 상준이 별이를 거들었다. 물론 식단 조절 따위는 필요 없는 상준은 진공청소기처럼 고기를 빨아들이고 있었다.
“아, 유지나 씨도 며칠 뒤 촬영 마지막이죠?”
입에 함지박만한 쌈을 우겨넣은 상준이 다 씹지도 않고 우물거리며 물었다.
“응, 다행히도 시청률이 잘 받쳐줘서 나름 성공적으로 복귀했지. 다음 주쯤에는 아마 종방연 할 거야.”
“우리도 내일 회식이죠?”
“그래. 오늘도 고기, 내일도 고기 먹겠다. 상준이 좋겠네?”
“하하하. 저는 좋은데 별이가 문제네요. 여기저기서 술 한잔 받으라고 그럴 텐데.”
“그건 내가 알아서 할게. 이럴 때는 은하처럼 성격이 조금 그런 게 도움이 되긴 하는데…”
“은하 씨는 술 안 마십니까?”
“아니, 잘 마셔. 엄청 잘 마시지. 그러다가 그만 먹어야 될 것 같으면 그냥 술잔을 엎어놓거든. 그러면 아무도 은하한테 술 따라주겠다는 말을 못 꺼내지.”
“아하하, 대단하네요.”
그렇게 쓸데없는 농담이나 하며 그들만의 조촐한 회식을 마친 그들은 참치전문점에서 2차를 하고 10시가 넘어 일어났다. 대리기사를 불러 오피스텔로 돌아온 우현은 씻고 침대에 누워 자려는데 핸드폰에서 불이 반짝였다. 은하일 거라는 생각에 얼른 핸드폰을 확인했는데 놀랍게도 핸드폰에 뜬 이름은 강진벽 사장이다.
순간적으로 받아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했다. 저번 투자회사와 관련해서 분명 이런저런 말을 들었을 거다. 안 받는다고 끝날 관계는 아니기에 일단 통화를 눌렀다.
“안녕하세요.”
“허허. 우현아, 잘 지냈나?”
“네, 잘 지내고 있습니다.”
“그 때, 폐인처럼 지낸다고 내가 얼마나 마음고생이 심했는지 모른다. 그런데 이제 대표님이 되셨다고? 내 들어보니까 아주 대단하던데?”
“아이고 뭘 어떤 이야기를 들으셨어요? 그것보다 몸은 어떠세요? 많이 나아지셨어요?”
“아니다. 이제 몸 좀 가눌 정도다. 이렇게 전화할 수 있게 된 것도 얼마 되지 않는다. 의사도 말한다. 뇌수술 받고 이리 멀쩡한 사람 몇 없단다. 천운을 타고 났다고 한다.”
그래도 뇌수술이라고 전보다는 말하는 게 많이 어눌해졌다. 항상 스마트하게 말하던 사람이 이제는 막걸리 한 잔 걸친 사람처럼 말한다.
“다행이에요.”
“그래, 내 듣기로 아주 잘나간다고? 하기야 나는 니 잘 될 줄 알았다. 그래서 너 잘 되라고 폐인 된 너를 일으켜 세운 거 아니냐?”
“그렇죠.”
“그런데 그러면 안 된다. 내가 너 잘되라고 투자해주라고 했는데 그걸 거절했다면서? 그러면 안 되지.”
이런 식으로 나올 것 같았다. 술을 마셔서 그런지 갑자기 두통이 밀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