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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8] 계약, 그리고 오디션(2)
“어머, 정말요? 그런 능력이 있다면 이 바닥에서 가장 몸값이 높겠는데요?”
“하하하. 정말 그렇게 되면 좋겠네요.”
그녀의 농담 섞인 말에 분위기는 더 좋아졌다. 이후 몇 마디 형식적인 이야기가 오가고 난 뒤 본격적인 이야기가 시작됐다.
“시놉시스 보고 어땠어요?”
“음… 조선시대의 수동적인 여인상과 비교되는 여주인공의 발랄함과 대범함, 그리고 일을 진행하는 놀라운 추진력을 볼 때 여느 남자 캐릭터들과 비교해서도 그 카리스마가 떨어지지 않더라구요. 사실 그 부분에서 제일 놀랐어요. 지금까지 대부분의 여성 캐릭터들은 일을 해결할 때도 눈물이나 여성적인 매력을 바탕으로 해결했지, 머리를 쓰거나 가지고 있는 카리스마를 뽐내는 건 ‘미실’ 이후로 거의 본 적이 없었거든요.”
“그렇긴 하죠. 그래서 어려울 수도 있을 거란 생각을 해요. 대사도 많을 거구. 표정이나 감정 연기도 다양하게 표현할 수 있어야 하니까요.”
“그래서 솔직히 부담되기는 했는데 그렇다고 포기할 수는 없더라구요. 저도 아직까지 대표작 하나 없는 배우다 보니까 남들처럼 한지애 하면 뭔가 떠오를 수 있는 작품을 꼭 해보고 싶어서요. 그래서 욕심 한번 내보기로 했어요.”
“잘 했어요. 저도 한지애 씨가 내 작품에 함께 하기를 정말 원했거든요. 한지애 씨만의 안정된 발성과 연기가 여주인공에게 반드시 필요하니까요. 물론 마스크야 더 할 나위 없죠. 호호호.”
“하하, 감사합니다. 이제 서른 넘어서 또 여대생 역할 하려니 조금 민망하긴 해요. 그래서 여대생 부분은 최대한 짧게 해주셨으면 하는 마음이 있네요. 제가 봐도 너무하거든요.”
평소부터 한지애의 팬이던 우현이 급히 끼어들었다.
“무슨 말씀을 그렇게 하십니까? 사실 서른 넘어서 여고생 역할 하는 여배우들 보면 저도 조금 그래요. 그냥 그런 부분 나오면 제 손이 오글거리고 봐주기 힘들어서 채널 돌리거든요? 그런데 한지애 씨는 워낙 동안인데다 여대생 역할이라 충분히 소화 가능합니다. 걱정 전혀 안하셔도 돼요.”
“그렇게 말씀해주시니 감사하긴 하지만 제가 민망해서… 그럼 대본은 언제쯤 나오고 언제 촬영에 들어가나요?”
이건 지 피디가 대답해야 할 문제이기에 그녀가 나섰다.
“시간은 여유 있어요. 일단 지금 촬영장소 헌팅이 거의 끝나가고 있구요. 캐스팅 완료되고 나면 KMTC에서 편성까지 잡아준다고 했어요. 물론 정확한 날짜를 못 박은 건 아니지만요. 대략 월 단위로 편성 잡아준다고 했으니 중간에 엎어질 위험은 없어요. 따라서 늦어도 두 달, 빠르면 한 달 뒤쯤에는 촬영에 들어갈 수 있다고 생각하셔야 해요.”
“한 달에서 두 달이면 아직 시간 여유는 있네요.”
“작가님께서 최대한 시간 여유를 두고 최소 12회 대본까지는 나온 다음에 촬영 시작하길 원하시거든요. 물론 사전 제작치고는 빠른 편이에요.”
“너무 늘어지는 것도 배우 입장에서는 힘든 면이 있어요. 감정 몰입이 길수록 힘들어지거든요.”
“맞아요. 그래서 최대한 준비를 완벽히 해놓고 단번에 몰아치듯이 촬영할 생각이에요. 물론 사전 제작인 만큼 최대한의 휴식시간을 제공할 예정이기 때문에 체력적인 부담은 전혀 없을 거예요.”
“좋네요. 평소 원하던 제작 방식이에요. 이제야 우리나라도 이런 방식으로 드라마를 만드네요.”
“윤해연 작가님이 아니었다면 어려웠을 거예요.”
“나는 왜 걸고 넘어져? 이런 말은 걸러 들어요. 내가 너무 민망해져.”
윤 작가가 지 피디를 핀잔주며 손사래를 쳤다. 하지만 이 자리에 있는 누구도 지 피디의 말에 거부감을 갖는 이는 없었다.
“이번에 작가님께서 아주 칼을 가셨어요. 이번에 보조 작가 말고 공동 작가로 진행하기로 하셨거든요.”
지 피디의 폭탄 발언에 우현도 깜짝 놀라 윤 작가를 바라보았다.
“놀라지 마. 내가 곰곰이 생각해봤는데 미국에서 사전제작 드라마가 당연하게 만들어 지는 건 이유가 딱 하나더라구.”
윤 작가에게 말은 안했지만 이유는 하나다. 재미가 없을 까봐.
“그래서 미국은 작가 군단이 있잖아. 열 명, 스무 명씩 모여서 회의를 하면서 아이디어를 내고 각자 잘하는 부분을 써내니 누군가 중심을 잡아줘서 제대로만 끌어주면 좋은 극본이 나올 수밖에 없는 거지. 뭐, 대신 작가의 특색은 안 나오겠지만 상업적인 면에서는 따라갈 수 없는 것 같아. 그래서 내가 이번에 사극을 하면서 생각을 해봤어.”
“역사물이니까 실수할 수도 있다고 생각하신 거예요?”
“그것도 그렇고, 사극의 말투와 당시의 생활상이나 왕궁의 상황을 정말 잘 표현하면서 로맨스도 잘 엮어보고 싶거든. 그래서 이번에 여기 회사에서 추천해준 작가랑 협업하기로 했어.”
“물론 작가님 이름이 먼저 나가겠죠?”
“그렇긴 하지. 왜, 김은선이 쓴 ‘태양의 후손’도 공동 집필이었잖아. 그거랑 같은 개념이라고 생각해줘.”
“좋네요. 솔직히 작가님이 사극 쓰신다고 해서 저는 조금 걱정이었거든요. 작가님이 부족할까봐 그러는 게 아니라 공부를 많이 하셔야 하니까 체력적으로 부담 될 수밖에 없어서요.”
“나는 일단 나이를 떠나서 머리가 나빠서 그렇게 안 될 것 같더라구. 원래 나 자신을 아는 게 제일 중요한 거야.”
“하하하, 그렇죠. 그럼 이번 작품 정말 대작 하나 나올 것 같은 기대감이 팍팍! 듭니다.”
“김 대표가 그렇게 말해주니 진짜 대박 하나 나올 것 같은데?”
“제 생각에도 이번 작품 느낌이 너무 좋네요. 그럼 대본 나올 때까지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일단 1,2회 대본은 거의 다 만들어가니까 조금만 기다려요. 이번 주 내로 보내줄 테니까.”
벌써 1,2회를 다 썼다는 말에 혀를 내둘렀다. 가히 글 쓰는 기계와 같지 않은가?
“벌써부터 궁금하네요. 어떤 내용이 쓰여져 있을지 막 기대가 돼요.”
기대감으로 초롱초롱 눈을 빛내는 한지애를 사랑스러운 눈으로 바라보는 윤 작가는 그녀의 잔에 술을 따라주었다.
“나는 오늘 정말 기분이 좋아.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이랑 이렇게 일하는 게 세상에서 제일 행복하거든. 이번에 우리 정말 잘 해봐요.”
“네, 저도 열심히 해볼게요.”
그렇게 화기애애하게 자리를 마무리한 그들은 곧바로 사무실로 올라가 정식 계약을 맺었다. 실무자들 간에 금액과 관련해서 몇 차례 말을 주고받긴 했지만 서로간에 얼굴 붉히는 일 없이 수월하게 진행되었다.
“이제 남녀 주인공 캐스팅은 마무리 됐네. 큰 산 하나 넘었어.”
밀린 빨래를 해치운 것 같은 표정의 윤 작가를 보니 웃음이 나왔다.
“수고하셨어요. 그런데 피디는 누가 하기로 된 겁니까?”
“응. 피디는 전에 세종대왕 관련된 드라마로 시청률 20% 넘겼던 드라마 있잖아? 그 피디가 하기로 했어.”
“아! ‘뿌리 깊은 거목’이요? 그 피디 괜찮죠. 좋네요. 그런데 뭐 하길래 캐스팅 하는데 얼굴도 안 보인데요?”
“응, 자기는 캐스팅에 관여하고 싶지 않대. 촬영 전부터 배우들이랑 기싸움 하는 거 정말 하고 싶지 않다네. 나더러 알아서 하라고 하고는 그 친구는 지금 장소 헌팅하러 돌아다니고 있어. 말이 헌팅이지 그냥 놀러 다니는 거지 뭐.”
뻔히 힘든 건지 알면서 괜히 농담으로 하는 말이다.
“나머지 스태프는 다 정해 졌대요?”
“지 피디가 다 정해졌다고 하던데? 그런 건 걱정 말고 나더러 글이나 빨리 쓰래. 이제 캐스팅도 끝났으니 날 말려 죽이려고 하겠지.”
“에이, 작가님 정도로 빨리 쓰면 담당자가 노는 거나 마찬가지죠.”
“그렇지? 역시 김 대표가 잘 알지. 지 피디는 이 바닥을 너무 몰라, 하하하.”
“어쨌든 고생하셨어요. 이제 대본에만 집중하세요.”
“별이 얘기는 내가 지 피디에게 말해 놓았으니까 잘 처리 될 거야. 걱정 하지 마.”
“걱정 안 합니다.”
이미 지 피디와는 별이가 촬영 끝날 즈음에 계약을 맺기로 말을 해놓았다. 아마 별이는 영화 촬영이 끝나고 부분적인 후시녹음 과정에 참여하고 난 뒤 곧바로 드라마 촬영을 시작하게 될 것이다. 그야말로 강행군이다.
윤 작가와 헤어지고 사무실로 온 우현은 아직 작품을 못하고 있는 상욱을 위해 피디와 작가들에게 전화와 메일을 돌리며 어필하는데 시간을 보냈다.
“오디션?”
저녁 늦게 경수와 사무실에 들른 상욱은 우현에게 몇 군데 오디션을 보고 왔노라고 털어놓았다.
“네, 대표님 혼자서 힘드신데 저라도 뭔가 해볼 수 있는 게 없을까 해서요.”
“그래서 지금까지 몇 군데나 봤는데?”
이제는 자연스럽게 반말을 하게 됐다.
“글쎄요. 한… 열 번 넘는 것 같은데?”
“열다섯 군데 봤어요.”
곁에 있는 경수가 수첩을 꺼내들며 말했다. 지금까지 상욱이 봤던 오디션들과 앞으로 볼 오디션 목록을 쭉 적어놓은 것 같다.
우현이 오디션을 보라고 말하지 않았던 이유는 상욱이 힘들지도 몰라서가 아니라 마음에 들지 않는 작품을 할지도 모르기 때문이었다. 마음에 들지 않는 작품에 상욱이 덜컥 합격해버리면 취소할 수도 없고, 난감하기 이를 데 없다.
그럼에도 우현은 훈훈한 마음이 들었다. 혼자서 뭐라도 해보려고 하는 마음이 예뻤기 때문이다.
“많이도 봤네. 작품은 내가 골라줄 테니까 오디션 보러 다니지 않아도 돼. 물론 오디션을 보는 것 자체로 좋은 경험이 될 거야. 그런데 이상한 작품에 들어가서 캐릭터 이상하게 잡혀 버리면 차후에 곤란하게 될지도 몰라. 그러니까 이제 부터는 오디션 보러 다니지 않아도 돼.”
“네? 진짜요? 그럼 지금까지 봤던 오디션들은…”
“그거야 어쩔 수 없지. 어쨌거나 수고 많았어. 고생했으니까 같이 술이라도 할까? 요즘 다이어트 한다고 고기도 잘 안 먹지?”
“하하. 그렇긴 한데…”
머리를 긁적이며 쉽사리 입을 열지 못하는 상욱을 보니 무언가 더 할 말이 있는 것 같다.
“왜? 고기 싫어? 다른 거 먹을까? 아님, 뭐 다른 할 말이라도 있는 거야?”
“그게 아니라…”
슬쩍 경수를 보고 눈빛을 교환하는 걸 보니 무언가 일이 있긴 한가보다.
“무슨 일인데 그래?”
상욱이 아니라 경수를 직시하며 물어보자 슬쩍 상욱의 눈치를 보던 경수가 어렵사리 입을 열었다.
“그게… 오디션에 합격했다고 연락이 와서요…”
“뭐? 오디션에 합격했다고? 무슨 오디션이었는데?”
“타이틀이 ‘승냥이’인데요. 케이블에서 방영하는 형사물입니다. 살인범을 뒤쫓는 특수수사대 이야기인데, 거기서…”
다 듣기도 전에 느낌이 왔다.
“혹시 범인이니?”
“네.”
“하아…”
우현은 소파 깊숙이 등을 기대고 고민에 빠졌다. 장르물에서 범인 역이면 확실히 임팩트가 있다. 문제는 연기력이 뒷받침돼야 한다는 것. 어설픈 연기는 오히려 독이 된다. 반대로 연기력만 제대로 받쳐주면 이 것 만큼 단기적 임팩트를 주는 배역은 없다.
“악역이 하고 싶었어?”
“사실 저희 형도 처음에는 악역으로 데뷔했잖아요? 그래서 그런지 계속 악역이 머리에 맴돌더라구요. 연기 연습도 악역을 위주로 하게 되고…”
“그래?”
굳이 경수에게 묻지 않아도 상당히 좋은 모습을 보여주었을 거라는 건 예상할 수 있었다. ‘승냥이’는 우현도 기사를 접해본 적 있는 작품으로, 장르물을 선도하는 ACN에서 올 하반기에 야심차게 준비하고 있는 작품이라는 말을 얼핏 지나가다 본 적이 있었다.
그런 작품에서 어설픈 연기를 하는 자를 악역으로 뽑았을 리는 없다.
“핵심 배역이야? 지나가는 깡패 원, 투는 아니고?”
“하하, 아닙니다. 그 작품에서 가장 핵심적인 역할을 하는 악역의 오른팔이에요.”
“작가랑 피디는 누구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