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097] 계약, 그리고 오디션(1)
“너무 무례한 행동 아닙니까? 이게 뭐 하는 겁니까?”
유진용 상무가 화가 나서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이에 지 피디는 화난 것도, 미안한 것도 아닌 애매한 표정을 지으며 같이 일어섰다.
“죄송하지만 일단 상황 좀 정리되고 다시 연락드리겠습니다.”
지 피디가 나가버리자 남은 사람은 한여름과 유진용 상무, 그리고 우현 이렇게 셋이었다. 남은 우현에게 화살이 꽂히는 건 당연했다.
“지금 무슨 일을 한 건지 아십니까?”
“아무리 윤해연 작가님이라고 하지만 너무 한 거 아닌가요?”
우현은 둘의 비난에 태연히 회를 집어먹으며 말했다.
“그러게 좀 적당히 하지 그러셨어요? 우리 작가님이 자꾸 웃어주니까 핫바지로 보였나 봐요? 윤해연이에요. 감히 윤해연 작가 모셔놓고 타이틀롤로 해달라니 뭐니… 솔직히 까놓고 물어봅시다. 한여름 씨 아니면 우리가 드라마 못 할 줄 알았어요?”
“지금 말 다했어요?”
찻잔을 쥐고 부들부들 떠는 한여름을 향해 한 번 더 비웃어 줬다.
“이봐요. 당신이 이 바닥에서 얼마나 파워 있는지는 지나가는 개도 알아. 그래서 지금까지 그냥 받아준 거지.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최소한 작가한테는 선을 지켜야 하지 않겠어? 솔직히 말해봐. 상대가 김은선 작가여도 그랬을 거야?”
김은선 작가였다면 간이라도 빼 주었을 게 분명하다. 윤해연 작가가 치고 올라오고 있다고는 해도 로맨틱 코미디계에서 김은선의 존재는 신이나 다름없으니까.
“아니었겠지. 윤해연 작가 정도면 적당히 비벼볼 수 있다고 생각했을 거야. 그럼 당연히 이 정도 반응은 예상한 거 아닌가?”
“당신, 지금 큰 실수 하는 거야.”
낮게 가라앉은 유진용 상무의 목소리에는 적의가 가득 담겨 있었다.
“상무님, 제가 이 바닥 후배 된 입장으로 한 말씀만 올리겠습니다. 지금 상황이 이렇게까지 온 건 여기 이 친구 때문입니다. 그럼 말리셨어야죠. 왜 안 말리셨습니까? 제가 만약 상무님 자리에 있었다면 전 따귀를 때려서라도 다시는 그런 행동을 못하게 했을 겁니다. 하지만 그렇게 못 하셨죠. 이 자리에서 가장 실수하고 있는 건 제가 아니라 상무님입니다. 아시겠습니까?”
유진용 상무는 아무 말 없이 우현의 눈을 노려보았다. 우현은 태연히 회를 한 점 더 집어먹고는 차로 입가심을 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잘 먹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한여름 씨, 다음에는 이렇게 얼굴 붉히면서 보지 맙시다. 거 예쁜 얼굴 가지고 그렇게 쓰면 되겠어요?”
룸을 나오는데 등 뒤에 남은 두 명의 시선이 내리 꽂히는 걸 느꼈다.
“후우…”
속이 후련하긴 했지만 이건 우현의 스타일이 아니다. 그럼에도 이렇게까지 한 건 윤해연 작가를 위해서였다.
윤 작가가 저렇게 나갔는데 우현이 발을 빼고 책임을 윤 작가에게 돌릴 수는 없지 않은가? 그래서 화살을 자신에게 돌리도록 일부러 크게 한방을 날리고 온 거다. 뭐, 무섭지는 않다. 이 바닥에서 시청률 20% 넘기는 작가 이기는 회사와 배우는 없다.
방송국도 설설 기는데 제깟 것들이 무슨 발악을 한대도 흔들릴 리는 없겠지만 그래도 이건 우현의 방식은 아니다. 적당히 타일러서 다음을 기약하는 게 우현의 스타일인데… 이제는 엎어진 물이니 담을 수 없다.
“좋게 생각하자, 좋게…”
밖으로 나와 지 피디에게 연락하니 윤해연 작가와 같이 곧바로 사무실로 올라갔다고 했다. 얼른 따라 올라가니 사무실의 빈 회의실에 있는 모습이 보였다.
“호호호.”
“하하하.”
둘의 웃음소리가 투명한 유리창 밖에까지 들린다. 어지간히 기쁜가 보다.
“그렇게 좋으세요?”
“어, 김 대표 왔어? 어떻게 됐어? 막 씩씩거리고 난리 났지?”
“그럼요. 불구대천지원수로 보던데요.”
“그래서 어떻게 했어?”
“달래서 보내려다가 저도 짜증이 나서 한 대 먹여줬죠.”
“왜 그랬어? 그냥 적당히 달래서 보내지. 괜히 김 대표만 욕먹겠네.”
“작가님이 욕먹는 게 제가 욕먹는 겁니다. 그럴 바에야 차라리 저 혼자 욕먹죠.”
“괜히 미안하네?”
“미안하실 거 없어요. 미안해야 할 건 쟤들이죠. 그러게 왜 속을 긁어요? 그냥 작품 열심히 찍으면 되지. 하여튼 작가 기죽여 보겠다고 저러는 거 보면 이해가 안 돼.”
“결혼할 때도 서로 초반에 기싸움 하잖아. 초반에 꺾어줘야 이후가 편하니까. 그래서 그런 거지.”
“그러니까 그게 이해가 안 된다는 거죠. 살면서 서로 맞춰가는 거지. 뭘 자꾸 이기려고 그러는지…”
“오호… 은하가 왜 그랬는지 조금은 이해가 되네.”
“거기서 유은하 이야기가 왜 나옵니까? 크흠… 어쨌거나 한지애 언제로 미팅 잡혔어요?”
급히 화제를 돌리기 위해 지 피디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오늘 저녁이요.”
“그런데 도대체 왜 이제야 연락이 됐다고 합니까?”
“저희도 정확히는 잘 모르겠어요. 일단 방금 전에 직원한테 들은 내용은, 소속사에서 어제 시놉을 메일로 전송했고 비행기 도착해서 오케이 싸인을 받았대요. 지금 집에서 짐 풀고 바로 저녁에 만나기로 한 거예요.”
“극적이었네요.”
“그러니까요. 1시간만 늦게 연락 왔어도 한여름이랑 같이 드라마 할 뻔했으니까요. 윤 작가님은 대본 쓰다 화병 났을지도 모르죠.”
“한여름 그 친구, 원래 저래요?”
유은하를 데리고 있을 때도 같이 작품을 찍어본 적이 없었고 스태프로부터 안 좋은 소문을 듣지는 못했기에 이번에는 우현도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조금 그래요. 스태프들과는 아예 이야기를 나누지 않아요. 감독과 작가와만 몇 마디 대화를 나눌 정도니까요. 그 것도 그리 심하지는 않았는데 이번에는 윤 작가님한테 크게 물 한번 먹었기 때문에 욱한 게 있었던 것 같네요. 왜, 그럴 때 있잖아요? 한번 크게 데이고 나면 복수해주고 싶은 거. 윤 작가님한테 복수해주고 싶었나본데 너무 나간 거죠.”
“에휴… 어쨌든 한지애와 잘 됐으면 좋겠네요. 전 일이 있어서 먼저 가보겠습니다. 미팅 자리에 저 참석 안 해도 되죠?”
“안 돼. 그 자리에서 또 무슨 일이 있을 줄 알고. 일단 자리에는 참석해.”
윤 작가는 절대로 안 된다며 황급히 손을 휘저었다.
“알았어요. 그럼 문자로 주소 찍어줘요.”
“어디 가는데?”
“별이 촬영장에도 한번 가보고, 유지나 촬영장에도 가 보려구요.”
“바쁘네? 대표 정도 되면 굳이 소속 배우 촬영장에 일일이 가 볼 필요 없잖아?”
“그렇긴 한데, 아직 중간 관리자도 없고, 제가 가면 배우들이랑 매니저들이 힘이 나니까요.”
“부담스러워 하지 않을까? 김 대표는 너무 자기애가 강해.”
“하하하, 그런가요? 그래서 잠깐 얼굴만 비치다 올 겁니다.”
그가 이렇게 촬영장을 직접 돌아다니는 건 회사가 작기 때문만은 아니다. 소속 대표가 배우 촬영장에 드물게라도 얼굴을 비춰주면 배우들이 감독에게 어필을 해도 조금 더 강하게 할 수 있고 자신감도 더 가지게 된다고 믿기 때문이다.
별이 촬영장은 세종문화회관으로 몇 달 전부터 오늘을 위해 대관한 곳이다. 평생 클래식 음악과 동떨어진 인생을 살았기에 처음 와봤는데 꽤나 근사한 것이 나중에라도 한 번쯤은 다시 와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몇 번째야?”
“어, 대표님! 언제 오셨어요?”
멀찍이서 현장을 바라보는 상준에게 슬쩍 다가가니 그가 놀란다. 오늘 온다고 말을 안했기 때문에 아마 별이도 오늘 우현이 온다고 생각하지 않고 있을 거다.
“방금, 몇 번째 찍는 거야?”
“아, 이제 세 번째 촬영이에요.”
별이가 무대 위 근사한 피아노 앞에 긴장된 표정으로 앉아 있었다. 오늘 촬영은 영화의 클라이맥스에 해당하는 장면으로 콩쿨의 마지막 경연을 하는 장면이다.
“분위기는 어때?”
“나쁘지 않았어요. 오전에 유은하씨 촬영이 생각보다 빨리 끝나서 오후 촬영은 조금 더 느슨해진 분위기예요.”
“그걸 오전에 다 끝냈다고?”
중요한 장면인데 오전에 모두 마무리 지었다니 믿을 수가 없었다. 임찬규 감독 성향을 봤을 때 마음에 들지 않으면 몇 번이고 다시 가는 감독이니만큼 더더욱 그렇다.
“저도 보고 깜짝 놀랐어요. 원래 콜타임이 12시긴 하지만 오늘 중요한 날이라서 오전부터 와 있었거든요. 그런데 유은하 씨 연주하는 거 보니까 완전 진짜 피아니스트 같던데요? 정말 놀랐어요.”
“허… 참. 별이 긴장할지도 모르는데 왜 일찍 왔어? 괜히 보여준 거 아니야?”
“저도 말렸는데 별이가 우겼어요. 꼭 가서 은하 씨 연기 하는 거 보고 싶다구요. 그런데 막상 보니까 연주도 연주지만 피아니스트들이 연주하면서 막 음악을 느끼듯이 치는 거 있잖아요? 와… 그게 진짜 대박이었어요.”
“괜히 봤네.”
“아니에요. 지금 긴장하긴 하는데 막상 슛 들어가니까 전처럼 막 얼지는 않았어요. 그래서 분위기도 괜찮았던 거구요.”
“그래? 진짜?”
“네. 이제는 긴장하는 게 아니라 감정을 잡는 것 같다니까요? 원래 별이가 맡은 역할이 그거잖아요? 음악 엘리트지만 즐기지 못하고 표정도 항상 어두워서는…”
무슨 말인지 알 것 같았다. 듣고 보니 표정은 굳어 있지만 손을 떨지는 않는다. 그새 또 성장한 것 같다.
“김별 씨, 감정 잡으시고, 윤석아, 마이크 더 올려봐! 좋아, 자, 갑니다. 하이, 큐!”
별이의 손이 유려하게 피아노를 오간다. 영상에 나가는 장면은 단 30초 정도. 그 짧은 시간을 위해 수많은 연습을 했다. 특히 리스트의 파가니니 연습곡 6번은 실제 피아니스트들도 힘들어하는 극악의 난이도를 자랑하는 어려운 곡.
30초의 시간이 순식간에 지나갔다. 그 짧은 시간만큼은 진실로 별이가 배우가 아니라 피아니스트가 된 것 같았다.
“컷! 오케이! 좋았어!”
임찬규 감독이 헤드셋을 벗으며 환하게 미소 지었다. 그 이후로 몇 차례 재촬영이 있긴 했지만 마음에 안 들어서라기보다 여러 가지 장면을 따기 위해서였다.
마음 편히 별이의 촬영장을 떠나 유지나의 촬영 현장에 들러 그녀와 잡담 겸 작품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다 약속 장소로 향했다.
그가 도착했을 때는 이미 한지애 측과 윤 작가, 지 피디까지 모두 모인 상태였다.
“뭐야, 왜 이렇게 늦었어?”
역시나 윤 작가가 웃으며 타박한다.
“미안합니다. 이거 차가 좀 막혀서요. 그래도 5분밖에 안 늦었잖습니까? 안녕하십니까? 파인 엔터 대표 맡고 있는 김우현입니다. 늦어서 미안합니다.”
“아닙니다. DH 엔터의 오정준 실장입니다.”
“안녕하세요. 한지애예요.”
톱스타임에도 우현을 보자 자리에서 일어서서 인사하는 걸 보니 역시 소문대로 착하고 예의바르기 이를 데 없었다.
“앉으시죠.”
자리에 앉아 한지애의 얼굴을 보니 감회가 새로웠다. 처음 연예계에 발을 디딜 때 팬의 입장에서 한지애에 대한 안타까움을 가지고 있었다. 외모로 보나 연기력으로 보나 뭐 하나 떨어질 것이 없음에도 자신의 대표작이라고 할 만한 작품을 아직도 만나지 못했으니 말이다.
“외국에 있는데도 불구하고 이렇게 좋은 작품 보내주셔서 뭐라 감사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사실 드라마를 하는 게 저에게 있어서 일종의 모험이나 같아요. 다들 아시다시피 하도 성적이 좋지 않아서요. 그래서 일부러 영화 쪽만 찾았는데… 시놉을 보니 욕심이 나더라구요.”
머뭇거리는 한지애의 말에 윤해연 작가가 식탁을 탕! 치며 호탕하게 말했다.
“잘 생각했어요. 내 입으로 이런 말하기 그렇지만 시놉보다 상태 안 좋은 대본 뽑은 적은 없었거든. 그리고 걱정할 필요가 없는 게, 여기 강운을 타고난 남자가 있거든요. 아무리 악운을 가진 배우라고 해도 여기 김 대표 운을 못 이겨요.”
우현의 어깨를 툭툭 치는 윤 작가를 보며 한지애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