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너 내가 스타로 띄어줄게-96화 (96/301)

=======================================

[096] 작품을 만든다는 것(6)

“그런가요? 제가 조금 자존심이 센가보죠.”

회 한 점을 집어 작은 입으로 가져간 여름은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오물거리며 씹었다.

“그렇군요.”

표정을 보진 않았지만 윤 작가가 빈정이 상했음을 알았다. 한여름의 몇 마디 말로 순식간에 자존심도 없는 작가가 됐으니 누구라도 빈정이 상할 만했다.

“저녁은 맛있었어요. 그럼 나중에 연락드리죠.”

이후 별다른 말없이 식사를 마치자 윤 작가가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에 우현과 지 피디도 따라서 일어설 수밖에 없었다.

“후식이라도 하고 가시죠. 아니면 커피라도 한 잔…”

“아니요. 오늘 너무 많이 먹었네요. 시간도 늦었으니 다음에 뵙도록 하죠. 여름씨도 만나서 반가웠어요.”

“제가 실수한 건 아닌지 모르겠네요. 아무쪼록 이번 작품에 꼭 같이 하기를 바랄게요.”

여름은 언제 윤 작가의 속을 긁었냐는 듯 웃으며 말했다.

“그래요. 꼭 그랬으면 좋겠네요.”

가게를 나온 우현 일행은 그대로 헤어지기로 한 일정 대신 가까운 치킨집으로 향했다. 이대로 헤어지기에는 가슴에 화가 남아있었던 탓이다.

“크으… 어째 하나같이 다 그 따위야?”

맥주 한 모금을 들이켠 윤 작가가 잔을 거칠게 내려놓으며 신경질을 부렸다.

“진정하세요. 제가 다른 쪽 알아볼게요.”

지 피디의 말에 문득 궁금증이 일었다.

“시놉 돌린 곳이 어디어디인데요?”

“일단 송해연 쪽 하고 한지애 쪽도 보냈어요.”

이쯤 되니 진짜 은하를 생각해야 하는 거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결국 화장실 가는 척하며 윤 작가와 지 피디 몰래 전화를 걸었다.

“촬영 중이야?”

“아니야, 방금 끝났어. 왜?”

“너, 혹시 영화 끝나고 스케줄 있어?”

“무슨 스케줄 말하는 거야? 일단 물어보는 목적이 뭔데?”

“아니… 사실 윤해연 작가 차기작이 이번에 사전제작으로 들어가는데 오늘 신민주랑 한여름 미팅했거든. 그런데 영 별로여서…”

“흥! 뭐야, 날 건너뛰고 거기에 먼저 시놉을 줬다 이거지?”

어째 잘못 건드린 느낌이 나지만 이미 쏘아 보낸 화살이다 싶어 재차 말했다.

“그게 아니라, 사실 별이가 ‘피아니스트’ 촬영을 끝내고 여기 조연으로 출연하기로 잠정 결정했거든. 그런데 은하 너도 같이 하게 되면 두 번 연속으로 붙는 거라…”

“칫! 그래도 말은 해줬어야지.”

“미안해. 내 마음 알지?”

“개뿔, 알기는… 그래서 뭐? 스케줄 없으면 같이 하자고?”

“응.”

“안 돼. 오빠 말대로 별이랑 두 번 연속으로 붙는 건 싫단 말이야. 그리고 나도 이제 좀 쉬고 싶어. 영화 끝나고 두바이에서 화보 촬영 있는데 촬영하는 김에 여행 좀 해볼까 생각 중이었어. 그리고 화보 촬영 때문이라도 힘들어.”

“아, 그래? 알았어.”

“미안해.”

평소 미안하다는 말을 잘 하지 않는 그녀이기에 우현은 말을 꺼낸 게 더 미안해졌다.

“미안하기는… 너 힘든 거 다 아는데 뭘. 내가 미안하지. 그래, 오늘 촬영 일찍 끝났으니까 술 마시지 말고 일찍 자.”

“누가 들으면 내가 알콜 중독이라도 있는 줄 알겠네. 알았어.”

전화를 끊고 피식 웃었다. 분명 말 안했으면 혼자 와인 한 병 깠을 게 분명하니까.

일행이 있는 좌석으로 돌아오니 지 피디는 어디 갔는지 안 보이고 윤 작가 혼자만 남아 있었다. 홀로 맥주를 들이키던 그녀가 우현을 슬쩍 흘기며 말한다.

“표정 보니까 알만하네. 은하도 안 한다고 하지?”

귀신이다.

“어떻게 아셨어요?”

“척하면 척이지. 원래 나이 들면 눈치만 늘거든. 그래서 뭐래?”

“영화 끝나면 화보 촬영 있대요. 촬영 끝나면 여행 좀 하면서 쉬겠다고 하네요.”

“하긴, 걔는 좀 쉬긴 해야 해. 원래 김 대표 아니었으면 영화도 안 하고 쉬었을 텐데 말이지.”

괜히 뜨끔해져왔다. 모른 척하며 맥주를 마시는데 지 피디가 오더니 인상을 팍 쓰며 앉았다.

“회사에 물어보니까 송해연 쪽에서 어려울 것 같다고 연락 왔데요. 이미 영화 스케줄 들어갔다네요. 그리고 한지애 쪽은 아직 연락이 없다고 하구요.”

“아… 한지애가 제발 우리를 구원해줘야 할 텐데.”

윤 작가의 푸념이 진하게 와 닿았다.

“일단 조금 기다려 보죠. 괜찮은 배우 구할 수 있을 겁니다. 일단 시놉시스 더 돌려보면서 일주일만 더 기다려보죠.”

우현이 말한 그 일주일이 순식간에 지나갔다. 그 사이에 경수가 찾아와 민상욱 로드매니저가 됐다. 상욱과 인사시키고 중고 카니발 차량을 얻어주어 당분간 학원과 집을 태워주도록 했다.

일주일 동안 우현의 대부분 스케줄은 상욱을 위한 것들이었다. 전에 찍었던 프로필 사진으로 방송국을 돌며 상욱을 소개시키거나 연기연습을 봐주었다.

시간이 충분이 흘렀기에 지여울 피디에게서 연락이 왔을 때는 좋은 소식이겠거니 생각했다. 하지만 세상 일이 마음대로 돌아가지 않았다.

“아… 정말 죽겠어요. 진짜 은하 씨 안 한다고 하던가요?”

“안 될 거예요. 정 그러시면 소속사 통해서 정식으로 문의해 보시죠?”

“에휴. 이제 와서 물어볼 수는 없어요. 유은하에게 이미 다 돌았던 시놉을 건네면 소속사에서도 좋게 보지 않는단 말이에요.”

당연한 일이다. 유은하 정도의 톱스타에게 신민주, 한여름, 송해연 등을 거친 시놉을 준다고 하면 당장 소속사에서 지 피디에게 날을 세울 것이다.

“그럼 전부 안 되는 겁니까?”

“현재 유은하, 송해연 급의 톱 여배우들은 전부 연락해봤는데… 다들 스케줄이 겹쳐서 어렵다고 해요. 남은 건 한지애 쪽인데…”

“그런데요?”

“아프리카로 봉사활동을 떠났던 한지애씨가 곧 돌아올 시기이긴 한데 아직 소속사랑 연락이 안 되고 있대요. 그래서 뭐라 확답을 줄 수가 없다고 하네요.”

“아이고… 처음에만 해도 물밀듯이 밀려들던 여배우들이 갑자기 약속이라도 한 듯이 뚝 끊기네.”

“원래 쉽게 시작하는 작품 없잖아요. 하여튼 이제 어떡할까요?”

한정 없이 기다릴 수만은 없으니 결국 선택해야 한다.

“일단 우리 회사 측에서는 한여름으로 가자고 계속 푸시하고 있어요. 지금까지는 어떻게 해서든 막고 기다려보자고 했는데 왜 아직까지 결정 안하냐고 난리예요. 한여름이면 당장 투자금에 편성까지 확정인데 뭐가 문제냐는 거죠.”

지상파였으면 사전제작 드라마에 캐스팅 확정됐다고 편성을 주지는 않지만 종편이기에 가능한 상황이다. 제작사 입장에서는 리스크 관리차원에서 굉장히 중요한 문제이기에 예민하게 반응할 수밖에 없는 것은 이해하지만 작가 입장에서는 저렇게 목이 뻣뻣한 상대와 일하게 되면 어떤 난관이 있을지 가늠하기 어렵다.

“어쩔 수 없겠네요.”

우현으로서는 항복 선언이나 마찬가지다. 문제는 윤해연 작가가 한여름과의 작업을 받아들이냐인데…

“윤 작가님도 말 몇 마디로 계속 거부하기엔 너무 속 좁은 사람 같다면서 오케이 하셨어요. 그럼 저는 오케이로 알고 있을게요. 한지애 씨가 내일까지는 한국에 들어와야 한다고 하니 딱 그때까지만 잡아둘게요. 만약 그 때 한지애 씨가 연락 안 되거나 안 한다고 하면 한여름으로 기사 낼게요.”

이상하게 한여름의 그 도도한 표정이 자꾸 마음에 걸렸다. 그래서 한 가닥 희망을 한지애에게 걸었다.

역시나 나쁜 예감은 틀린 법이 없다. 다음날이 돼서 윤해연 작가가 사무실로 직접 찾아왔는데 어찌나 화가 났는지 벌겋게 상기된 얼굴에 콧김을 뿜어내는 게 보이는 것 같았다.

“걔 미친 거 아니니? 나 참 어이가 없어서…”

“왜요? 무슨 일 있어요?”

“걔가 제목을 타이틀롤로 해달란다.”

“누가요?”

“누구긴? 한여름이지. 지가 뭔데 제목을 바꾸라 마라야?”

원래는 제목을 확정짓지 않은 상태였다. 100% 사전제작으로 제작될 것이기 때문에 가제로 붙인 이름을 대본에 적다가 마지막에 제목을 확정짓기로 했는데 한여름이 당장 제목을 타이틀롤이 들어간 이름으로 짓자고 나오니 황당한 거다. 예를 들어 제목이 ‘예종의 암살사건’이라면 ‘예종의 그녀’처럼 자신의 배역이 제목으로 나오게끔 바꿔 달라는 말이다.

이와 비슷한 일이 예전에 ‘파리의 애인’으로 유명한 여배우가 김무로와 새 드라마 들어갈 때 있었다. 그 때도 제작진에 제목을 타이틀롤이 들어가게끔 요구했고 결국 그 여배우와 김무로 모두 하차하며 드라마가 엉망이 되고 말았다.

“벌써부터 이런데 카메라 돌기 시작하면 장난 아니겠는데요?”

“분명히 분량 더 늘려달라고 떼쓸 거고, 의상 조금 별로면 안 입겠다고 지랄할 테고, 사극이라 대사 좀 많으면 쉽게 써달라고 하겠지. 또 뭐 있지?”

“자기 촬영시간 몰아서 해달라고 하겠죠.”

“맞아. 그거 깜빡했다.”

“엔딩 절반 이상을 자기 얼굴로 나가게 해달라는 것도 있겠네요.”

“그것도 있었지!”

그렇게 몇 번 한여름을 씹다가 윤 작가가 조금 진정된 듯하자 차분하게 물었다.

“그래서 이제 어떡하실 거예요?”

“뭘 어째, 송민기 쪽이랑 상의해봐야지.”

제작사 측에서 저렇게 강하게 한여름을 밀고 있으니 결국 져줄 수밖에 없다. 제작사 임원 입장에서는 그깟 제목 좀 바꾸면 어떠냐는 말이 나올 테니까.

“좋게 생각하세요. 이왕이면 송민기랑 한여름 둘 다 타이틀롤로 밀고 가도 괜찮을 것 같은데요. 요즘은 눈에 확 들어오는 직감적인 제목이 유행이잖아요. 예종에 대해 조금 어필할 필요도 있구요.”

“기분이 나쁘잖아! 기분이! 하여튼 조금만 덜 예뻤어도 까고 가는 건데…”

“하하하. 조금 덜 예뻤으면 저렇게 안 하겠죠. 이왕 제목 변경해주는 거 시청률 30% 이상 나올 정도로 좋은 걸로 지어 보자구요.”

“난 몰라. 지 피디한테 알아서 지으라고 넘길 거야. 물론 나한테 검수는 받아야겠지만.”

“당연하죠. 식사 하셨어요? 저녁이나 같이 드실래요?”

“뭐 먹을 건데?”

“당연히 작가님 좋아하시는 거 먹어야죠. 초밥 좋아하시잖아요?”

“하여튼 김 대표는 이래서 싫어할 수가 없다니까?”

다음날, 결국 한여름과 다시 한 번 미팅 자리를 마련했다. 제작사인 ‘도마뱀 미디어’ 근처 식당 룸을 잡고 만났는데 식사가 마무리되고 계약을 진행하기 위해서였다.

계약이 끝나면 제작사에서 정식으로 기사를 배포할 예정이다. 이미 몇몇 연예부 기자가 윤해연 작가의 차기작에 한여름이 캐스팅 됐다며 기사를 내보냈지만 아직까지는 확정이 아니라고 보도한 상황이다.

“빨리 만날 줄 알았는데 너무 오래 걸렸네요. 전 기다리는 거 별로 안 좋아하는데.”

“아무래도 저희 회사 측에서 고민이 많아서요. 사전제작이다 보니까 정말 신중하게 결정해야 하거든요.”

“그렇게 신중하게 결정하시면서 송민기 오빠는 하루 만에 결정을 내시던데…”

“하하하. 그건 기자들이 확정되기도 전에 기사 낸 거예요. 결국 송민기 씨로 결정 나기는 했지만 진짜로 그 때는 확정이 안 됐었어요.”

지 피디는 지금쯤 속으로 기자들을 향해 쌍욕을 퍼부을 게 틀림없다.

“제목은 제가 타이틀롤로 갈 수 있게 만드는 게 맞죠?”

“아, 그 부분은 송민기 씨 측과 상의중이긴 한데 큰 무리는 없을 것 같아요.”

“그래요. 믿을게요.”

윤 작가는 내심 그녀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것을 피력하고 싶었는지 식사를 하는 내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한여름은 그런 분위기를 즐기는 듯 오히려 윤 작가에게 계속 깍듯하게 말을 거니 누가 보면 윤 작가가 속 좁은 사람처럼 보일 터였다.

“어?”

그 때, 지 피디의 핸드폰으로 문자 하나가 도착했는데 그것을 보자마자 곧바로 식탁 아래로 윤 작가에게 슬쩍 핸드폰을 건넸다.

윤 작가는 그 문자를 보자마자 생전 본적 없는 환한 미소를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늘 식사 맛있었어요. 그리고 이번 작품은 어렵겠네요.”

“네? 그게 무슨…”

황당한 표정을 짓는 한여름과 유진용 상무의 얼굴을 잠시 뿌듯한 표정으로 바라보다 나가버리는 윤 작가. 급히 지 피디에게 시선을 돌리니 그녀가 소리 내지 않고 입모양으로 말했다. 신기한 건 그녀가 하는 말을 단번에 알아들었다는 것? 내용은 이랬다.

[한지애 오케이 싸인 났어요.]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