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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5] 작품을 만든다는 것(5)
“아, 정말 좋았어요. 꼭 해보고 싶었다니까요? 저 정말 작가님 팬이에요. 전에 했던 드라마 빼놓지 않고 다 봤구요. 저만큼 작가님 드라마 좋아하는 사람 없을 거예요.”
아주 작정을 하고 나왔는지 영혼까지 바칠 것처럼 윤 작가에 대한 아부가 장난이 아니다. 옆에서 듣고 있는데도 가슴이 막힐 지경이다.
“어머, 너무 띄워준다. 신민주 씨가 이렇게까지 적극적인 성격인 줄 전혀 몰랐네. 그런데 시놉시스 어디가 마음에 들었어요?”
윤해연 작가는 그 와중에도 날카롭게 잽을 날렸다.
“로맨틱 코미디에 의외로 민폐 여주가 많이 나오잖아요. 이번 작품은 민폐 여주가 아니라서 좋았어요.”
설마 그게 끝일까 해서 조금 기다려봤지만 그녀의 눈빛은 뭐가 더 필요하냐는 의문이 담겨 있었다.
“아, 그렇군요. 저도 그런 여주인공은 그리고 싶지 않아서… 하하.”
신민주가 의욕은 앞섰지만 결코 해서는 안 될 말을 했다. 왜냐하면 윤해연 작가 초창기 작품 중에 ‘미련’이라는 드라마가 민폐 여주로 등극하면서 한동안 윤 작가를 곤혹스럽게 만들었던 경험이 있기 때문이다.
윤 작가는 기분이 언짢았을 게 분명하지만 티는 내지 못하고 애매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슬쩍 우현의 눈치를 보는 것이 괜히 미팅을 잡은 것 같다고 느꼈나 보다.
“아, 그런데 이거 사전제작이잖아요? 제가 사전제작이 처음이라 이번에는 정말 여유 있게 진행했으면 좋겠어요. 정말 드라마 하나 할 때마다 10년씩 늙는 기분이 든다니까요?”
“그렇지? 우리 민주가 좀 어리광이 많습니다. 이해 좀 해주세요. 그래도 막상 촬영 들어가면 누구보다 프로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하하하.”
박영철 실장이 분위기를 다잡기 위해 신민주의 말을 받아주며 윤해연 작가와 지여울 피디의 눈치를 살폈다. 그 모습에 지 피디가 얼른 말을 받았다.
“그럼요. 신민주 씨 성실한 거야 이 바닥에서 모르는 분 없잖아요. 솔직히 신민주 씨 정도 되는 톱스타들 일 년에 작품 하나도 찍을까 말까 한데 저는 민주 씨가 작품 쉬는 걸 거의 본적이 없거든요. 얼마 전에 영화 촬영 끝난 걸로 알고 있는데 맞죠?”
“어머, 어떻게 아셨어요? 호호! 맞아요. 지금은 촬영 끝나고 후반부 작업하고 있는데 아마 이 작품 끝날 때쯤 되면 제가 찍은 영화도 개봉 시기 조율하고 있을 것 같네요. 생각해보니까 상황이 너무 절묘하지 않아요? 어쩜 이렇게 시기가 딱 맞아 떨어지는지… 아무래도 이 작품이 제게 운명인 것 같아요.”
“정말 인연은 인연인가 봐요. 그렇게 스케줄이 맞아 떨어지기도 쉽지 않은데…”
“게다가 제가 사극이 처음은 아닌 거 아시죠? 우리 회사 사람들이 사극이라서 조금 부담스러워 하긴 했는데 저는 전에도 사극을 한번 해봤기 때문에 괜찮다고 생각하거든요. 그렇죠, 선생님?”
느닷없이 돌아오는 질문에 당황한 윤 작가가 먹던 커피를 쏟을 뻔했다.
“아, 그럼요. 저도 봤어요. ‘이방과 나’는 정말 재밌었거든요.”
옆에서 듣는데 하마터면 웃음이 나올 뻔했다. 그 때 신민주의 연기는 사극이 아니라 그냥 현대극의 발음과 발성을 해서 그 때도 논란이 있었을 정도였다. 뭐, 지금도 여대생 역이라 문제될 건 없지만 그렇다고 저렇게 자랑스러워 할 정도는 아닐 것인데…
“어머, 선생님도 보셨어요? 어때요? 이 작품과 정말 잘 맞을 것 같지 않아요? 성격이나 말투도 비슷할 것 같아서 완전 편할 것… 어머, 편한 게 아니라 잘 어울릴 것 같다는 말이죠. 오홍홍!”
윤 작가의 표정이 서서히 굳어지는 걸 느꼈는지 황급히 말을 바꿨지만 이미 쏟아진 물이다.
“네, 잘 알았네요. 제작진과 상의해서 결정하도록 할게요.”
“그냥 이 자리에서 결정하시죠. 캐스팅을 빨리 끝내야 투자도 빨리 들어오고 제작도 원활하게 되는 거 아니겠습니까? 우리 민주가 중국에서도 상당한 인기몰이 중인 거 아시죠? 민주가 캐스팅 됐다고 하면 투자금은 밀려들어올 겁니다.”
이 자리에서 도장 못 찍으면 안 된다고 느꼈는지 박 실장이 황급히 윤 작가에게 얼굴을 들이밀었다. 이에 윤 작가는 등을 의자에 바짝 붙이며 어색하게 웃었다.
“하하. 그게, 상의해야 할 분들이 많다 보니까 이 자리에서 당장 결정하기는 어렵네요.”
“작가님하고 제작 피디님이 오케이 하면 오케이 되는 거 아니에요?”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물어오는 신민주의 말에 지 피디가 윤 작가 대신 답했다.
“제가 죄송해요. 전에 캐스팅 실수를 한번 한 적이 있어서 이번에는 꼭 회사와 상의하라고 지시가 있었거든요.”
“아… 지 피디님 때문에 그런 거예요? 그럼 어쩔 수 없네. 그래도 꼭 저 뽑아주실 거죠?”
“저야 당연히 민주 씨와 같이 하고 싶죠. 제가 얼마나 팬인데요.”
“그런데 꼭 팬이라고 하면 날 까더라. 뭐, 이번에는 아니길 바랄게요.”
“네? 네. 하하.”
막무가내로 말하는 것 같지만 정말로 상대하기 까다로운 타입이다. 저렇게 대놓고 물어보면 대답하기가 난감하기에 답하는 입장에서 자칫하면 말려들 수 있다.
“오늘 즐거운 시간이었습니다. 저희로서도 좋은 결과 있으면 좋겠습니다.”
우현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박 실장에게 손을 내밀었다. 괜히 더 앉아서 말을 나눠봤자 좋을 게 없다고 판단해서였다. 윤 작가와 지 피디도 같이 일어서며 장단을 맞추자 박 실장과 신민주도 어쩔 수 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번에 꼭 선생님과 같이 해보면 좋겠어요. 꼭이요!”
끝날 때까지도 부담을 팍팍 안겨주며 떠난 신민주의 말 때문에 윤 작가의 이마에 주름이 잔뜩 새겨졌다.
“미안해, 김 대표. 설마 시놉시스 보고 캐릭터 분석도 제대로 안 해왔을지는 생각지도 못했지.”
작가와 미팅이 있기 전에 캐릭터 분석을 하는 건 기본이긴 하지만 그것조차 안 해가지고 오는 톱스타들이 꽤나 많다. 그것에 대해 까다롭게 구는 작가도 있고 아닌 작가도 있지만 일부러 작가 기를 죽이기 위해 안보는 경우도 상당하다.
“아니에요. 사실 지금까지 신민주 씨가 맡았던 역할이 대부분 가벼운 로코물이었기 때문에 캐릭터 분석이라는 게 필요 없었을 거예요. 지금 윤 작가님 작품도 남자 주인공이 어렵지 여자 주인공은 그리 어려운 편은 아니잖아요.”
“그래도 중후반 넘어가면 대신들하고 맞서는 장면도 있어.”
“아, 그렇겠구나. 어쨌거나 잊어버리고 쉬세요. 이따가 한여름 만나야 하니까요.”
“혹시 은하한테는 물어 봤어?”
“은하요? 에이… 우리 별이가 하는데, 또 은하랑 같은 작품을 하기가…”
별이가 한다고 하면 은하가 거절할 게 분명하다. 바로 전작에서 만난 사람과 다시 붙는 건 은하도 싫어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설마 별이를 빼고 자기를 넣어달라고 할 것도 아니기에 당연히 은하에게는 말하지 않았던 거다.
“에이, 어쩔 수 없네. 그런데 은하가 자기한테 대본 안 줬다고 기분 나빠하지 않을까?”
“제가 한번 물어볼게요.”
“오호… 이제 그 정도 사이야?”
“크흠… 무슨 그런 소리를 하세요. 지 피디, 오해하지 말아요.”
“전혀 하지 않으니까 걱정하지 말아요.”
오해하지 않는다는 말과는 다르게 눈을 커다랗게 뜨며 우현의 얼굴을 뚫어지게 바라본다. 마치 연예부 기자라도 된 것 같은 집중력이다.
“정말 아무 사이도 아니에요. 너무 오래 앉아 있었네요. 사무실로 가실까요? 저녁시간까지 계속 이러고 계실 거 아니죠?”
우현의 사무실에서 작품에 관해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며 시간을 때우다 저녁시간이 되자 약속된 장소로 이동했다. 강남에 있는 고급 일식집인데 이곳은 한여름 측에서 예약한 곳이다. 다음날에 보자는 걸 이미 예약까지 잡아놨다며 기어코 미팅 확답을 받았다고 한다.
약속한 룸으로 들어서니 이미 그곳에는 일남일녀가 자리에 앉아 있었다.
“오셨어요?”
“안녕하십니까? 키웨스트 유진용 상무입니다.”
한여름에게 확실히 힘을 실어주려는지 회사 임원급까지 나왔다. 유진용 상무는 얼굴만 봐서는 40대 중반으로 보이는데 갈색으로 염색한 머리에 깔끔하게 정돈된 수염, 그리고 재킷에 청바지를 입어 상당히 세련돼 보였다.
“반갑습니다. 파인 엔터 김우현입니다.”
“아이고, 언제고 만나 뵙고 싶었습니다. 윤해연 작가를 데리고 있으신 회사라니… 기사를 접하고 부러워서 한동안 잠을 못 잤습니다, 하하하.”
“한여름이에요. 우리 전에 봤었죠?”
가죽 스키니에 가죽 재킷, 게다가 실내인데도 벗지 않은 선글라스. 그리고 아주 고가로 보이는 오렌지색의 퍼 목도리가 명품백 위에 얹혀있었다. 인사를 나누게 되자 그제야 선글라스를 벗는다.
“네, 에르클레르에서 뵀던 기억이 있네요.”
“그 때는 제가 무슨 상황이었는지 잘 몰라서 실수한 것 같더라구요. 늦었지만 미안했어요.”
“아니요. 한여름씨가 잘못한 건 없죠. 그 때는 에르클레르 측이 잘못한 거였으니까요. 어쨌거나 생각지도 못하게 이곳에서 뵙게 되는군요. 반갑습니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경쟁 상대였는데 인생이 참 웃기긴 하네요. 안녕하세요, 선생님. 평소 선생님 작품 아주 좋아했어요. 솔직히 ‘그 양반 같은 자식’은 별로 보고 싶지 않았는데 미팅 정해지고 한번 봐볼까 해서 보기 시작했다가 16부작을 다 몰아서 보고 한나절을 잤다니까요? 저래서 시청률이 잘 나왔구나 싶었어요.”
한여름은 우현에게서 윤 작가로 시선을 옮기더니 깍듯하게 인사하며 전작에 대해 극찬했다.
“어머, 정말요? 호호호. 이거 경쟁 드라마를 찍었던 한여름씨가 그렇게 재밌게 봤다니까 기분이 정말 좋네요.”
“일단 식사부터 하시죠.”
차분한 분위기에서 식사가 이루어졌고 간혹 전작에 대한 의견을 주고받으며 상대를 살폈다.
솔직히 신민주나 한여름이나 그닥 마음에 들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하나를 고르라면 한여름이다. 마음에 걸리는 건 역시 별이와의 시너지가 어떻게 날 것이냐는 것.
“그나저나 신기하기도 하고 부럽기도 하네요. 제가 알기로 김 대표님이 전에 유은하 씨 매니저였다고 들었는데, 어째서인지 하는 작품마다 대박 아니면 중박 이상은 꼭 치는 것 같아서요. 아, 물론 윤 작가님 작품은 정말 괜찮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생각해보니까 정말 운이 좋으신 것 같네요.”
앞에 놓인 회를 몇 점 들지도 않고 물어오는 한여름의 질문에 급히 입 안에 있는 회를 삼켰다.
“원래 이 바닥에서 운 좋은 사람 못 이기잖아요? 하하. 사실 그게 저의 가장 큰 강점이죠. 제가 강운을 타고 났거든요.”
“그럼 이 작품을 하게 되면 저도 이익이 되겠네요. 강운을 타고 나신 김 대표님과 같이 하는 거니까요.”
“그럼요. 물론입니다.”
“하… 그럼 조금 재미없는데… 작품이 잘 나가도 나 때문이 아닌 것 같잖아요.”
한숨을 쉬며 차를 한 모금 마시는 한여름. 이건 생각지 못한 전개다. 단 한 번도 이런 식의 반응을 보인 배우는 없었기 때문이다.
“어차피 사람들은 저 김우현이라는 사람 존재 자체를 모를 겁니다.”
“내가 모르는 사람들 생각은 신경 쓰지 않아요. 내가 아는 사람들 생각이 신경 쓰이지.”
의외의 곳에서 까칠함을 보이는 그녀의 태도에 유진용 상무가 더 당황했다.
“좋은 자리에서 왜 그래? 아이고, 죄송합니다. 우리 여름이가 좋은 작품을 한다는 생각에 벌써부터 열의를 보이네요. 혹시 술 하십니까? 이렇게 좋은 회에 술이 빠지면 안 되죠.”
그가 술을 시켜 분위기를 가라앉혀 보려고 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다른 쪽에서 불길이 옮겨 붙었다.
“전 운 좋은 사람 옆에 있으면 좋던데, 여름 씨는 생각이 다른가 봐요. 솔직히 운 나쁜 사람하고 같이 작품하게 되면 신경이 쓰이긴 하던데…”
윤해연 작가가 젓가락을 내려놓으며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