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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4] 작품을 만든다는 것(4)
“뭐해?”
“아, 제가 아직 말씀 안 드렸죠? 민재원 아시죠?”
“민재원 모를 리가 없지. 이번에 ‘천방지축 그녀’ 땜빵으로 들어갔잖아. 뭐야? 민재원하고 계약했어? 아니지? 걔는 좀 그래.”
“하하, 아니에요. 계약 안 했어요. 그리고 만나보니까 사람 괜찮던데요, 뭘…”
“아무리 이 바닥이 헛소문이 많이 도는 동네라지만 그래도 불어오는 태풍은 피하고 보는 거야. 굳이 정면으로 맞을 이유는 없잖아? 그럼 뭔데? 계약해보고 싶다는 말이야?”
“아니요. 사실 이주희 작가의 ‘천방지축 그녀’에서 남주가 갑자기 펑크나면서 민재원을 대타로 투입할 때 매니저 대신 그 친구 동생이 같이 나왔어요. 그런데 그 동생이 괜찮아 보이더라구요.”
“오호… ‘너 말고 네 동생’, 뭐 이런 거야?”
“하하하, 맞아요. 그거예요. 그래서 얼마 전에 전속 계약 맺고 그 친구를 연기 학원에 보냈거든요. 오늘 연기 하는 거 보니까 괜찮더라구요. 아무래도 형을 따라다니면서 본 게 있어서 그런지 센스도 있구요. 카메라 앞에서 주눅 들지도 않고… 그래서 지금 프로필 촬영하는 중이에요. 이제 팸플릿 한번 돌려보려구요.”
“이번에 내 작품 넣어보게?”
“아니요. 처음부터 사극에 집어넣을 수는 없죠. 현대극부터 차근차근 가야하지 않겠어요?”
“누군지 얼굴 좀 보고 싶은데?”
“이제 곧 보게 될 겁니다. 그나저나 어쩐 일이세요? 남주 캐스팅 됐습니까?”
“응. 미팅 잡혔어.”
“벌써요? 지 피디에게 물어봐야겠는데요, 반응이 어땠는지?”
“별 거 있겠어?”
말은 저렇게 해도 당장 전화해서 물어봐주기를 원한다는 걸 모를 수 없다.
“하하, 알았어요. 누구랑 미팅 잡혔는데요?”
“남자 주인공은 송민기. 여자 주인공은… 신민주와 한여름.”
송민기까지는 아주 좋다고 생각했다. 이보다 더 좋을 수 없다고 생각하던 찰나에 한여름이라니… 게다가 신민주는…
“작가님, 신민주가 톱 여배우로 인정받고는 있지만 그건 오로지 얼굴과 몸매 덕분이라구요. 신민주가 얼마나 국밥인지 알고 계시면서…”
“나도 걔 국밥인 거 알지. 지금까지 말아먹은 것만 영화, 드라마 합해서 몇 개인지 세기도 힘들지. 그래도 이름값은 있잖아.”
“이름값 따지다가 드라마 망합니다. 일단 기운이 안 좋아요. 괜히 드라마 안 좋은 방향으로 흐르면 신민주 탓하게 됩니다. 게다가 아무리 여대생으로 나온다고는 하지만 사극에 어울릴 것 같지 않아요. 그 특유의 어린애 같은 말투로 사극 말투를 한다면… 전 아닌 것 같아요. 그리고 하필 한여름이라니…”
우현의 말에 담긴 거부감을 알고 있는지 그녀의 목소리가 기어들어간다.
“그게… 나도 알지. ‘그 양반 같은 자식’ 했을 때 정면으로 붙었던 거. 그런데 이 바닥에 적과 아군이 어디 있어. 다 같이 잘 되면 좋은 거지. 그리고 그 때는 한여름이 실수한 건 없었잖아.”
“그거야 그렇지만…”
“김 대표, 우리 하루 이틀 장사할 거 아니잖아. 일만 생각하자.”
윤 작가의 말이 맞다. 그 때 별이를 엿 먹이려 했던 것들은 참혹한 피해를 보고 폭망 했으니 한여름까지 색안경을 끼고 볼 필요는 없다. 문제는 한여름이 별이를 어떻게 생각하느냐다. 그게 걸린다.
“그리고 나 윤해연이 이 작품 손에 쥐고 있어. 우리 별이 건드리면 나도 가만 안 있어. 이제 안심할 수 있지?”
역시 우현의 가려운 부분을 알아서 긁어준다. 고맙지 않을 수 없다.
“그럼요. 미팅 잘 하세요.”
“아니야. 김 대표도 같이 가.”
“제가요? 제작진과 작가님이 미팅 하시면 되지 제가 왜 갑니까? 작가님이 이 작품으로 입봉하시는 것도 아니시잖아요. 제가 가면 웃기죠.”
“아는데, 그래도 같이 가. 내가 전에 들어보니까 소속사가 있는 작가는 혼자 움직이지 않는데. 나도 케어 받는다는 걸 보여줘야 기가 안 죽지.”
“알겠습니다.”
그녀와의 통화가 끝나고 프로필 촬영을 무사히 마친 다음 곧바로 ‘도마뱀 미디어’로 향했다. 전화로 이야기할 수 있었지만 이번만큼은 찾아가야 할 것 같았다.
“김 대표님이 어쩐 일이세요? 미팅에 관한 거면 전화로 해도 되는데…”
지여울 제작 피디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놀랐다. 그리곤 황급히 빈 사무실로 우현을 이끌고 인스턴트커피를 타왔다.
“민재원씨는 잘 하고 있나요?”
“네, 현장에서는 준비시간이 짧아서 우려했는데 생각보다 잘 해서 편하게 촬영하고 있다고 하네요. 시청률도 잘 나와서 다들 이번에 사측에서 여행 한번 보내줄 것 같다는 말도 나오구요.”
“잘 됐네요. 윤 작가님 작품 돌려보니 반응이 어떻던가요?”
“아휴, 말도 마세요. 이번에 시놉을 남자배우 세 명 돌리고 여자배우 세 명 돌렸는데 그 중에 가장 먼저 받은 배우가 가장 먼저 미팅을 요청해왔어요. 나머지 배우들도 모두 미팅을 잡자고 해요.”
“와… 그 정도로 반응이 좋아요?”
일단 시놉을 보면 누구라도 좋아할 거라 생각했지만 이건 생각보다 더 하다.
“사전제작이니까요. 체력적인 부담도 없고 쪽대본도 아닌데다가 윤해연 작가님이 쓰시고 시놉시스도 좋으니까 안 하면 바보죠.”
지 피디는 자신이 글을 쓴 것처럼 뿌듯해 했다.
“이런 와중에 제가 괜히 욕심을 부리는 거 아닌가 모르겠네요.”
“아하하! 그게 걱정돼서 오셨구나. 아니에요. 솔직히 윤해연 작가님이 잘 쓰시기는 하셨지만 김 대표님 회사에 들어가면서 뭐랄까… 좀 더 가볍고 쉽게 볼 수 있는 작품을 쓰셔서 저희도 좋거든요. 김별 씨가 연기가 안 된다면 저희도 꺼려지겠지만 그렇지도 않고 마스크도 왠지 사극에 잘 어울릴 것 같아서 나쁘지 않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솔직히 송민기 씨가 남주를 맡게 되면 여주를 김별 씨가 맡아도 저는 전혀 반대하지 않아요. 제작비 세이브 되기 때문에 더 좋죠. 한 가지 걱정은 이거 16부작으로는 안 된대요.”
“그렇겠죠.”
사극은 현대물보다 제작비가 훨씬 많이 든다. 일단 의상비가 어마어마하고 장소협찬에다 촬영시간까지 길어지니 인건비도 올라간다. 그래서 방송사에서는 최소 30회는 내보내려고 한다.
“우리야 회당 2억씩 지원해준다는 말이 나와서 다행이긴 한데 사측에서는 그 정도 지원비에 사극이면 16부작으로 끝내길 원치 않을 거예요. 최소 24부는 가야 해요.”
“게다가 PPL도 제한이 있어서 제작진들도 힘들겠네요.”
“사극이라고 PPL이 안 되는 건 아니에요. 물론 힘들긴 한데 다행히 여주가 과거로 가는 것인 만큼 강하게 임팩트 줄 수 있는 것들로 가야죠. 어쨌거나 그건 저희가 걱정할게요.”
“솔직히 윤 작가님이 우리 별이 생각하느라 굳이 참석 안 해도 되는 저를 끌어들인 것 알고 있습니다. 괜히 민폐 끼치네요.”
“알고 계셨어요? 우리 윤 작가님이 원래 그렇게 자상하신 분이 아닌데 김 대표님을 엄청 챙기시네요. 부러워요.”
“부럽긴요. 남녀 주연배우 캐스팅 마무리되면 촬영은 언제부터 들어갈 예정입니까?”
“다음 달부터 들어가지 않을까요? 스태프들도 구성해야 하고 장소 헌팅도 해야 하니까 늦으면 다음 달 중순정도? 피디가 누가 되냐에 따라 헌팅 때문에 의외로 시간이 좀 더 걸릴 수도 있어요.”
그 정도면 별이가 현재 촬영하는 ‘피아니스트’를 끝내고 준비하는데 문제가 없을 정도의 시간이다. 사전제작이라 확실히 널널하게 진행하는 부분이 있다.
“그렇군요, 알겠습니다. 그럼 내일 미팅 때 뵙도록 하겠습니다.”
다음날 점심 전에 미리 윤해연 작가를 픽업해서 약속장소로 향했다.
“작품 하나 끝내고 바로 준비하는 건데, 힘들지 않으세요? 조금 더 쉬고 하시지 그러세요?”
솔직히 마음에 없는 소리이긴 했지만 40대 중반인 그녀에게 무리가 되는 일정임은 분명하기에 걱정이 안 될 수 없었다.
“나도 쉬어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자꾸 머릿속에 이야기가 맴돌았어. 드라마 작가도 정년이 정해진 게 아니라서 천천히 써도 된다고는 하지만 확실히 나이가 들면 젊은 감각이 떨어져. 이건 어쩔 수 없는 것 같아. 20대 때 한창 글 쓸 때는 지금보다 완숙하지 못하고 자연스럽게 흘러가지 못했지만 지금과는 다른 독특하고 빵빵 터지는 감각이 있었거든. 아마 시간이 지나면 지금 생각했던 느낌을 제대로 표현 못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어.”
길게 말했지만 결국 자신의 이야기가 고리타분해질까봐 조금이라도 젊을 때 많은 작품을 쓰고 싶다는 이야기였다.
“대단하네요. 저 같으면 이때다 하고 쉴 텐데.”
“김 대표도 잘 안 쉬잖아? 제시간에 퇴근하는 적 거의 없다며?”
“그건 또 어떻게 아세요?”
“다 아는 수가 있어.”
“이거 꼬리를 달고 다니는 기분이네요, 하하. 그런데 오늘 송민기랑 누구 미팅이에요? 한여름?”
점심을 먹으며 송민기를 만나는 것까지는 알고 있었지만 어째 여주에 대한 이야기를 못 들었다.
“한여름, 그리고 신민주.”
“네? 둘 다요?”
“오늘 점심 먹고 곧바로 신민주 만나야 해. 그리고 저녁 때는 한여름이고.”
“뭐 이렇게 빠르게 진행한대요? 하루에 한명씩 만나도 되겠구만.”
“우리가 아니라 저쪽이 바쁘게 하자고 했어. 한여름과 신민주 쪽도 알 거야. 오늘 동시에 만난다는 거. 아마 오늘 아니면 까인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
“그런데 진짜 신민주랑 만날 거예요?”
“흠… 난 신민주 좋은데… 김 대표가 하도 싫다고 해서 일단 나는 기권했거든? 그런데 제작진에서 한번 만나보자고 결정했어.”
캐스팅 권한이 없기에 지여울 피디에게 신민주에 관한 이야기를 하지 않았는데 결국 이렇게 돼버리고 말았다. 그럼 남은 건 한여름이냐, 신민주냐.
점심 때 만난 송민기는 TV에서 봤던 그 인상 그대로였다. 얼굴이야 말할 것도 없고 젠틀하며 예의가 발랐다. 윤해연 작가의 시놉시스를 아주 외워 왔는지 작품에 대한 의지를 불태우며 꼭 자신이 예종이 되고 싶다고 피력했다.
우현은 그 자리에서 밥이나 먹으며 지켜보았을 뿐, 말 한마디 거들지 않았다. 끼어들 이유도 없고 송민기의 얼굴이나 감상하며 이후에 있을 한여름과 신민주와의 미팅을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했다.
점심 잘 먹고 미팅을 마무리 하고 송민기 일행을 보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근처 조용한 커피숍에서 신민주 일행과 만났다.
“어머, 선생님! 너무 뵙고 싶었어요.”
“나도 평소에 민주씨 팬이었어요. 너무 예쁘다.”
스키니진에 셔츠만 입었을 뿐인데도 몸매가 좋아서인지 옷태가 남달랐다. 별이의 늘씬한 느낌과 비슷했지만 개인적으로는 별이가 훨씬 아름답다고 생각한다.
“반갑습니다. 화인 엔터테인먼트 박영철 실장입니다.”
화인 엔터는 톱스타인 신민주와 이민혁를 보유한 소속사로 대형이라고 하기엔 뭐하지만 나름 인정받는 회사다. 특히 중국에서 굉장한 인기를 보유하고 있는 이민수를 키워내며 매니저로 시작해 사장으로 성공한 대표적인 케이스라 볼 수 있었다.
“반갑습니다. 파인 엔터테인먼트 김우현 대표입니다.”
“아! 윤해연 작가와 계약한 대박 회사가 바로 파인 엔터였군요. 반갑습니다.”
푸근한 인상을 가진 박영철 실장은 우현의 손을 맞잡고 힘차게 흔들었다.
“일단 자리에 앉으시죠.”
지 피디의 말에 각자 자리에 잡고 앉았는데 윤 작가가 슬쩍 우현의 눈치를 보며 말을 아낀다. 이에 지 피디가 신민주에게 먼저 말을 건넸다.
“시놉시스 보셨죠? 느낌이 어떠셨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