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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3] 작품을 만든다는 것(3)
“왜? 불안해?”
“불안하기보다는… 윤 작가님 대사치는 스타일이 조금 감각적으로 현대적이잖아요? 작가님 최대 장점이 그건데 사극에서는 그 장점이 조금…”
“빛이 바랠 것 같다 이거지?”
“그렇지 않을까요?”
“조금 섭섭한데?”
윤해연 작가는 입을 삐죽이며 삐친 듯이 고개를 돌렸다.
“아유, 작가님, 그냥 그렇다는 거죠. 제가 작가님 실력을 못 믿어서 그러겠습니까? 괜히 차, 포 떼고 장기 두면 손해니까 하는 말이죠.”
“난 장기 잘 모르지만 하여튼 좋은 뜻이지?”
“그럼요. 하하하.”
“원래는 자기 생각처럼 판타지를 기반으로 한 작품을 생각하고 있었는데 확! 와 닿는 소재가 없더라구. 그러던 차에 도마뱀 측에서 사극 한번 해보는 건 어떠냐고 하니까 뭔가 느낌이 팍! 하고 오는 거야.”
“사극이라는 말에 느낌이 팍! 왔어요?”
“그래. 사실 여자들에게 있어서 사극이라는 소재는 굉장히 매력적이거든. 특히 왕과 여자. 이건 지금도 수많은 로맨스 소설에 단골처럼 등장할 정도야.”
“그렇긴 하네요. 그런데 왕과 얽힌 여자와의 로맨스 물은 너무 흔하지 않아요?”
“왜 흔하겠니? 잘 먹히니까 흔하지. 김 대표도 은근 새로운 것만 찾으려고 해.”
뜨끔했지만 시선을 돌리며 표정 관리를 했다.
“그건 아니구요. 크흠… 그래서 내용이 뭐예요?”
“사극에 판타지를 넣을 거야. 남자 주인공은 예종. 단종을 폐위시키고 오른 세조의 아들이야. 죽은 형을 대신해 19세에 왕위에 올라서 20세에 의문의 죽임을 당하는 비운의 왕이지.”
나쁘지 않다. 역사적으로도 그의 죽음에 의문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많은 만큼 이야깃거리는 많이 나올 거다.
“여주는요?”
“여기서 판타지, 평범한 여대생인 여주는 어느 날 자신의 집 뒤에 있는 의문의 구덩이를 발견하고 실수로 빠져버리고 말아. 그리고…”
“조선 시대로 갔다, 이거죠?”
짝!
“맞아. 바로 그거지!”
윤 작가가 손뼉을 치며 맞장구를 쳤다. 그리고 재차 말을 이었다.
“이러저러한 상황을 겪고 난 뒤에 결국 예종과 만난 여주는 그의 죽음을 막기 위해 동분서주하며 로맨스를 이뤄 나가는 거지. 어때?”
“나쁘지 않네요.”
그냥 예의상 하는 말이 아니라 정말 괜찮다고 생각했다. 훈신세력들과 종친들 간의 세력다툼, 그 속에서 자신의 정치적 목적을 이루지 못하고 떠난 비운의 왕을 돕기 위해 애쓰는 여주, 극의 긴장감이 살아있을 것이고 목숨이 오가는 상황에서 로맨스는 더욱 애틋해질 거다. 대본과 연기만 따라준다는 가정 하에 설정만 보면 합격점을 주고 싶다.
“그렇지? 그냥 하는 말 아니지?”
“아니에요. 진짜 좋아요. 시놉은 나왔어요?”
“그래, 아직 첫 회 대본은 쓰지 못했어.”
윤해연 작가가 자신의 명품 가방에서 시놉시스를 꺼내 우현에게 건넸다.
“흠… 그래요?”
“뭐야, 내 대사를 못 믿겠다는 거야?”
“아뇨. 그런 게 아니라, 아무래도 1회 대본을 보면 감을 더 쉽게 잡을 것 같아서요.”
“흥! 어물쩍 넘기긴…”
“크흠… 잠시만 좀 볼게요.”
읽어보니 확실히 윤해연은 윤해연이다. 여주가 과거로 가서 예종과 만나는 과정이 재밌으면서도 억지스럽지가 않았다. 또한 많은 피를 보며 왕위를 찬탈했던 아버지에 대한 감정과 힘없는 왕으로 언제 죽을지 모르는 두려움이 복합적으로 얽힌 남주의 내면을 상당히 매력적으로 그리고 있었다.
그런 그의 내면을 치유해가며 죽음으로부터 그를 구원하고 사랑을 이뤄갈 여주에 대한 매력도 아주 좋았다.
“좋네요. 제가 뭐라고 보태지 않아도 될 만큼 아주 좋아요.”
자신도 모르게 앞에 놓인 차를 단숨에 들이켰다. 욕심이 났다. 하지만 이걸 누구에게 준단 말인가?
“솔직히 말해봐. 욕심나지?”
마치 우현의 마음을 읽은 것처럼 윤 작가가 눈을 반짝인다. 우현은 즉답하지 않고 지 피디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이거 제가 처음인가요?”
“시놉시스 읽으신 거요? 맞아요. 사실 저도 최종본은 아직 보지 못했어요. 그래서 마음 같아서는 당장 대표님 손에 들린 그거, 뺏어서 읽어보고 싶은데 억지로 참는 중이에요.”
“음… 일단 보세요.”
우현은 자신의 손에 들린 시놉시스를 지 피디에게 건넸다. 그녀가 다 읽을 때까지 아무 말 없이 혼자만의 생각에 잠겼다.
별이에게 주고 싶지만 솔직히 투자자 입장에서 반대하고 나올 것 같다. 그렇다고 쿨하게 다른 이에게 준다는 건 너무 아까운 일 아닌가? 자선 사업하는 것도 아니고 엄연히 배우를 키우는 매니지먼트 회사에서 이런 좋은 작품을 놓친다는 건 직무유기나 다름없다. 아마 이게 대박치면 억울해서 땅을 치고 울지도 모른다.
“남자 주인공 캐스팅은 누구를 생각하고 있어요?”
“내 바람을 말하는 거야?”
“그렇죠. 아직 시놉도 안돌았다면서요. 작가님 심중에 누가 들어있어요?”
“솔직히 마음 같아서는 송민기로 하고 싶지. 워낙에 동안에다가 은근히 카리스마 있는 연기도 되거든. 마스크도 그만하면 더 바랄 것도 없고. 오히려 왕치고는 너무 잘생겼지.”
“송민기가 하려고 할까요?”
“모르지. 그래도 아마 땡기지 않을까? 사전제작인데?”
사전제작이 위험이 높기는 해도 배우 입장에서는 자기 돈 나가는 게 아니기 때문에 당연히 사전제작을 더 원한다. 한번 사전제작으로 드라마를 찍으면 쪽대본 드라마를 찍기 힘들다는 말이 나오는 것이 그만큼 보통의 드라마 제작환경이 열악하기 때문이다.
“캐스팅 하는데 얼마나 걸릴까요?”
“왜? 별이 영화 최대한 당겨 보려고?”
훅 치고 들어오는 윤 작가의 말에 순간 대답을 하지 못했다. 속이 너무 들여다보인 것 같다.
“크흠… 좋은 작품이니까 욕심이 생기네요.”
“하하하. 좋아 좋아, 김 대표가 그렇게 나오니까 너무 기분이 좋은 거 있지? 잘 될 것 같지 않으면 그렇게 나오지도 않을 거 아냐? 일단 김 대표가 보스니까 여주 캐스팅은 킵 해놓을게. 오케이?”
“역시… 윤 작가님은 제 천사님인가요?”
“뭐, 그렇다고 해두지 뭐. 지 피디도 괜찮지?”
“솔직히 말하면 톱 여배우를 쓰지 않으면 저희야 제작비 부담이 덜하니까 좋긴 한데…”
지여울 피디가 망설이는 건 당연하다. 아직 지상파 여주를 한 번도 못해본 별이가 이 큰 작품에 여주로 들어간다는 건 어렵다.
“꼭 여주가 아니라도 괜찮습니다. 작중 한명회의 여식이 돼서 여주와 연적이 되는 것도 괜찮으니까요.”
어차피 서브 여주가 필요하다. 꼭 여주가 아니더라도 그 정도 비중의 서브 여주면 해볼만하다고 생각했다.
“진짜 서브로도 괜찮아?”
“지금은 부족하다는 인식이 있을 수 있으니까요. 다음에 노려보죠.”
아쉽지만 미련을 접기로 했다. 욕심 부리다가 서브 자리도 날아가 버리면 죽도 밥도 안 되기 때문이다.
“고마워, 김 대표. 이번에도 잘 되면 다음 작품에는 내가 무조건 별이 주인공으로 쓸게.”
“안 그러셔도 됩니다. 그 때가 되면 우리 별이 이제 지상파 여주 정도로 급이 올라가 있을 거니까요.”
“내 작품이 그 계단이 됐으면 좋겠다.”
윤 작가와의 식사 자리를 끝내고 오피스텔로 돌아왔을 때는 이미 10시가 지난 시각이었다. 별이에게 오늘 있었던 이야기를 할까 하다가 그만두었다. 한창 영화 촬영 중에 다른 배역에 대한 이야기를 해봤자 좋을 게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씻고 누워서 TV를 보는데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걸려왔다. 왠지 느낌이 왔다.
“여보세요?”
“네, 안녕하세요. 형님, 저 경수예요.”
“경수? 인마, 너 왜 연락 안했어? 배강석 밑에서 계속 있기로 한 거야?”
“사실 조금만 더 버텨보려고 하다가… 결국 안 될 것 같아서요.”
“그래, 잘 생각했다. 너 안와서 로드 새로 뽑으려고 했어. 그 때 돼서 온다고 했으면 받지도 못할 뻔했잖아.”
“죄송합니다, 형님.”
“그래, 그럼 내일 아침에 회사로 와. 거기는 잘 정리 된 거야?”
“아직… 형님 회사에 입사 확정 되면 그만두려구요.”
“잘 생각했어. 그럼 일단 그 회사 정리하고 바로 사무실로 와. 문자로 주소 찍어줄게.”
안 그래도 다음 주 초에 민상욱에게 사무실에서 보자고 미리 말해두었다. 못해도 다음 주 주말까지는 로드가 필요했기에 조금만 늦었다면 경수와는 같이 일할 수 없을 뻔했다.
시간이 흘러 월요일 아침이 되었다. 우현이 사무실에 도착했을 때 상욱이 먼저 와 있었다. 민주에게 물어보니 자기보다 더 빨리 와서 문 밖에서 한참 기다렸다고 한다.
훤칠한 키에 선량한 미소를 짓고 있는 상욱을 불러 그 동안 배운 연기를 시켜보았다. 그는 갑작스런 우현의 말에 당황하긴 했지만 지금껏 배워온 대로 연기를 해 보였다.
그의 성격으로 보아 조금 쑥스러운 표정으로 어설프게 할 수도 있다고 생각했는데 의외로 괜찮은 연기가 나왔다. 물론 아직 발성이 안 돼 있어서 목소리가 작게 들리는 경향이 있긴 하지만 그거야 차차 나아질 문제다.
“됐어요. 그럼 오늘 오라고 한 이유를 말할게요.”
“네.”
잔뜩 긴장한 상욱은 소파에 앉아 굳은 표정으로 우현의 입에 온 신경을 집중하고 있었다.
“오늘 프로필 촬영 스케줄을 잡아놨어요. 연기를 보고 취소할지 아니면 촬영을 할지 결정하려고 했는데 보니까 조연 정도는 충분히 할 수 있을 것 같네요. 물론 카메라 앞에서 떨지 않는다는 가정 하에.”
“하하, 정말요?”
그제야 잔뜩 굳어 있었던 그의 얼굴에 밝은 미소가 그려졌다. 카메라에 잘만 잡히면 여성 팬들이 그의 매력에 빠져들 거라고 확신했다.
“네, 생각보다 괜찮았어요. 일단 바쁘니 이동할까요?”
그를 데리고 청담동의 한 스튜디오에 들어섰다. 미리부터 예약한 상태였기에 사진작가와 조명팀이 모두 준비된 상태였다.
“의상은 어떤 거로 하시겠어요?”
카메라를 목에 걸고 물어오는 이는 요즘 이 바닥에서 한창 뜨는 케네스 윤으로 본명은 윤지수라고 했다. 170 정도의 키에 짧은 머리지만 수염을 멋들어지게 다듬어서 누가 봐도 패션 쪽 일을 하는 사람처럼 보였다.
“저희가 준비한 게 있습니다.”
‘그 양반 같은 자식’ 때문에 갤러리아 백화점 직원과 안면을 텄던 우현은 이월 상품 중에 남성 의류 몇 벌만 빌려달라고 부탁해 미리 준비를 해왔다. 그래서 상욱이 스튜디오에 들어설 때는 그의 어깨에 수십 벌의 의류가 걸린 행거가 걸쳐져 있었다.
“아, 굉장히 많네요. 잘 됐어요. 의류가 많으면 다양한 컨셉이 가능하거든요.”
케네스 윤은 상욱이 들고 온 의류를 하나하나 꼼꼼하게 살펴보며 자신이 생각한 컨셉을 우현과 상욱에게 찬찬히 설명해주었다.
“어때요? 이해했어요?”
“괜찮네요. 저는 지켜보고 있을 테니까 둘이 편한 대로 해 봐요.”
“하하. 대표님이 뒤에서 지켜보고 있는데 이 친구가 긴장하지 않겠어요?”
“이 정도로 긴장하면 카메라 앞에서는 입도 안 떨어지겠네요. 아무렇지도 않지?”
“물론입니다.”
우렁차게 답한 상욱은 첫 사진 촬영인데도 의외로 능숙하게 자세를 잡았다. 아무래도 형과 같이 다니며 눈으로 봤던 게 있어서 그럴게다.
“좋아요! 굿! 아주 좋아요!”
연신 좋다고 말하는 케네스 윤의 고함소리에 상욱도 더욱 얼굴에 철판을 깔고 다양한 포즈를 취했다. 원래 촬영할 때는 항상 칭찬소리가 끊이지 않는다. 어지간히 못하지 않는 이상 저렇게 잘한다고 칭찬해줘야 모델도 과감한 포즈를 취할 수 있기 때문이다.
마초적인 컨셉부터 젠틀한 느낌과 부드러운 느낌을 지나 섹시한 포즈에 이르렀을 때는 얼굴에 철판을 깔던 상욱의 얼굴도 붉게 물들어갔다. 그 모습이 웃겨서 빙그레 웃으며 바라보는데 윤해연 작가에게서 연락이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