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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2] 작품을 만든다는 것(2)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었지만 별이가 다시 연기에 집중하려는 모습을 보이자 숨을 크게 들이쉬며 인내했다.
과거엔 임찬규 감독이 내놓은 결과만을 봤을 뿐, 작업 스타일이 어떤지는 몰랐기에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 배우를 저렇게까지 몰아붙여서 찍는 것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별이의 고개가 끄덕여지자 스태프의 슬레이트가 떨어지고 임 감독의 고함소리가 촬영장을 울렸다.
“자, 이번에는 한 번에 갑시다! 하이, 큐!”
정말 짜증나게도 확실히 전과는 달랐다. 전에 봤을 때는 분명 최선을 다한 연기였고 충분하다고 생각했었는데 막상 지금 별이의 얼굴을 보자 임 감독이 왜 그렇게까지 했는지 알 수 있었다.
피아노를 바라보는 그녀의 눈빛은 원망에 가득 차있었고 건반을 누르는 그녀의 손길은 거칠고 격정적이었다. 그게 슈만의 피아노소나타 2번곡과 어울려 기묘한 조화를 만들어냈다. 물론 아마추어이기에 진짜 피아니스트와 같은 환상적인 연주는 아니었지만 오히려 아마추어이기 때문에 더욱 느낌이 생생하게 전달됐다.
“오케이! 좋았어! 굿! 베리 굿!”
이제는 임 감독의 목소리마저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그의 실력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감사합니다.”
별이가 임 감독과 김혜진에게 90도로 허리를 숙이며 인사했다. 자신이 생각해도 방금 자신의 연기가 지금까지와는 무언가 달라졌다는 것을 느낀 것 같다.
“그래, 너무 잘했어. 수고했어. 많이 늘었다.”
김혜진이 별이의 어깨를 따스한 눈빛으로 쓰다듬었다. 전에 드라마를 촬영하며 그녀에게 연기를 지도받았기에 어느 정도 정이 쌓였는데 이번에 같이 영화까지 하게 되면서 더욱 애정이 생긴 듯했다.
“선생님 덕분입니다.”
“내 덕분은 무슨… 가봐, 네 대표님 지금 눈에서 불나오겠다.”
눈치 빠른 김혜진이 별이더러 얼른 가라며 손짓했다. 이에 별이가 몸을 돌려 우현을 향해 걸어갔다.
“씬 하나 찍었다고 너무 감독한테 허리 숙이고 그러지 마.”
평소의 우현이라면 하지 않을 말이었지만 임 감독의 태도가 너무 실망스러웠기에 감정이 격해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대표님, 저는 괜찮아요. 처음에는 막 화도 나고, 서럽고, 괜히 한다고 했나 하는 생각도 들고… 별의 별 생각이 다 들었는데 끝나고 나니까 처음으로 제 연기가 만족스러웠어요. 그래서 진짜 괜찮아요.”
“잘 들어. 다음부터 이런 일 있으면 요령껏 회피해. 자꾸 감독의 생각에 맞춰주다 보면 자칫 잘못하다간 큰 부상이나 정신적 충격을 받을 수 있어. 너 작품 찍다가 갑자기 자살하는 배우는 이야기 들어봤지?”
“네? 네.”
그녀는 자살이야기까지 나오자 흠칫했다.
“물론 전부 감독 탓으로 자살까지 하지는 않았겠지. 하지만 배역에 너무 몰입하다보면 자칫 위험해질 수 있어. 특히 이번 하연이라는 역할처럼 어둡고 내면에 갈등과 원망이 공존하는 역이면 깊게 몰입할수록 안 좋아.”
“그렇게까지 위험한가요?”
“그럼. 특히 영화에서 악역을 맡은 사람들은 역에 몰입하면 실제 생활에서도 악역과 비슷한 생각을 하게 된다고 해. 평소에는 아무것도 아니었던 일에도 분노를 느끼고 폭력에 대한 충동을 느끼게 된다고… 무슨 말인지 알겠지?”
“네. 그럼 앞으로는…”
“또 이런 일이 있으면 네가 요령껏 조금 쉰다고 하거나 화장실 핑계를 대고 상준이에게 도움을 청해. 그럼 상준이 알아서 조정해줄 거고, 만약 상준이 해결해줄 수 없는 일이면 지금처럼 내가 와서 처리할게.”
“알겠어요.”
별이가 대기실에 들어가 쉬는 사이 우현이 한창 모니터를 들여다보고 있는 임찬규 감독에게 다가갔다.
“감독님, 잠시 이야기 좀 하시죠.”
“응? 무슨…”
그도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느꼈는지 스태프들에게 다음 씬 준비를 맡기고 조용한 곳으로 들어갔다.
“감독님, 이건 내가 파인 엔터의 대표로서 하는 말이니까 오해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응, 그래. 말해봐.”
“앞으로 우리 별이 연기할 때는 정확한 디렉션을 줘요. 아직 어리고 경험도 부족한데 무조건 다그치기만 하면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많이 힘들어 질 수밖에 없어요. 우리 이번 영화 한 번 찍고 더 안 볼 거 아니죠?”
“흠, 흠. 그럼, 그렇지.”
“별이는 감독님 영화를 위한 소품이 아니에요. 그러니 살살 다뤄줘요. 힘들다는 것 알지만 감독님의 의도에 부합하지 않을 때마다 정확하게 세밀하게 디렉션을 줘요. 그래도 그게 서로 간의 예의라고 생각해요. 솔직히 이 영화 저희 없었으면 만들어지기 힘들었다는 거 아시죠?”
“알아, 내가 미안해. 아까는 더 좋은 장면을 만들 수 있을 것 같아서 그런 거야. 만약 안 될 것 같은 아이였다면 아예 말도 안 꺼내고 바로 오케이 했을 걸? 별이가 워낙 마스크도 좋고 연주도 좋은데 감정을 조금만 터뜨려주면 확! 살 것 같아서 그랬지. 나도 별이 많이 아껴, 진짜야.”
임찬규 감독은 잔뜩 주눅들은 표정으로 말했다. 그도 이 영화가 제작되는데 우현의 도움이 절대적이었다는 걸 아는 것이다.
“고마워요. 우리 별이가 그래도 감독님한테 고마워하고 있어요. 자신이 어디까지 할 수 있는지 알았다고 말이에요.”
“그렇지? 거 봐! 하하하. 나는 그럴 줄 알았어.”
“그래도 저는 걱정이 돼요. 꼭 내말대로 해줬으면 좋겠어요.”
“그럼, 그럼. 내 꼭 김 대표 말대로 할게. 이번에는 미안해, 응?”
그렇게 임 감독과 이야기를 하고 오는데 김혜진이 우현의 어깨를 슬며시 두드렸다.
“김 대표, 임 감독 너무 미워하지 마.”
“아녜요, 미워하는 거… 그냥 조금 의견 차이가 있었을 뿐이니까요.”
“호호. 얼굴 벌게져서 돌아다니는데 의견 차이는 무슨… 나도 임 감독하고는 조감독 시절에 몇 번 맞춰본 것 이후로 감독으로는 처음이야. 그런데 사람이 한번 집중하면 다른 게 눈에 안 들어와서 그렇지, 결과는 괜찮게 뽑잖아? 이게 독립영화 정도면 모르겠지만 상업영화고, 그 무엇보다 결과가 중요하다는 거 알지?”
“그럼요. 알고 있습니다.”
“은하랑 작업했던 감독이 유독 젠틀했었기 때문에 임 감독 스타일이 적응이 안 되는지는 몰라도 꼬장이 심한 감독은 이것보다도 더 해. 예전에는 계약에도 없는 노출을 대놓고 요구하는 감독이나 하루 종일 한 씬도 안 찍고 같은 장면을 찍어대는 감독도 있었어. 불과 몇 년 되지도 않았고.”
“사실 지금처럼 몰아붙여서 찍는 감독은 처음이네요.”
“얼마 전에 죽는 연기를 실감나게 하기 위해서 자동차 안에 번개탄을 피우고 여배우에게 직접 맡아보라고 한 어떤 감독도 있었잖아? 그것도 걔가 얼떨결에 인터뷰에 흘리지 않았다면 그런 일도 있었는지조차 몰랐겠지. 그런데 그런 일이 과연 그 친구 하나한테만 있었을까?”
드라마 하나를 찍을 때도 스태프들과 배우들 다 있는데서 배우를 학생 혼내듯이 혼내는 게 바로 피디와 감독이긴 하지만 은하와 별이는 연기가 평균 이상은 되었기에 당사자가 되어 본 적 없는 게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저라면 그 감독 면상을 후려쳤을 겁니다.”
“호호호, 맞아. 맞아도 싸지. 그래서 스타가 돼야겠지? 아까 똑같은 상황이었더라도 은하를 상대로는 그렇게 못 했을 테니까. 그게 떠야하는 이유지. 김 대표는 잘 할 거야.”
“잘 봐주시니 감사합니다.”
“그래도 성질은 좀 죽여. 그냥 다음에 같이 하지 않으면 되는 거야. 그렇게 대놓고 감정 표현은 하지 마. 예술 하는 인간들 치고 마음씨 넓은 사람 없어. 전부 예민하고 피곤하게 굴거든. 대표적인 인간이 나야.”
“하하하, 잘 알겠습니다. 조언 감사합니다.”
“고마우면 밥이나 사. 맨날 도망가지만 말고.”
“그럼요. 제가 언제 시간 내서 한턱 거하게 쏘겠습니다.”
이후 촬영은 무난하게 진행되었다. 피아노 씬처럼 강한 감정표현을 요하는 장면이 없었기 때문이다.
저녁시간에 다 되어가자 상준에게 별이를 잘 챙기라고 단단히 일러준 다음 약속장소로 향했다. 윤해연 작가가 자신과 연락은 하지 않고 어떤 작품을 만들어 왔을지 기대가 됐다.
약속장소인 그 갈비집은 갈비 한 대에만 무려 십만 원에 달할 정도로 고급 음식점이기에 보통 접대할 때 많이들 찾고는 한다.
“오셨어요?”
구석에 마련된 룸에 들어가니 지여울 제작 피디가 환하게 웃으며 반겼다. 오랜만에 보는 지 피디는 전보다 얼굴이 더 홀쭉해진 것 같았다.
“얼마나 바빴는지 알 것 같네요. 얼굴 살이 쫙 빠진 것 같아요.”
“와하하. 그거 칭찬인가요? 안 그래도 얼굴살이 고민이었는데 다행이네요. 제가 이래서 회사를 못 관둬요.”
“퇴사를 못하는 이유가 특이하네요. 아직 작가님은 안 오셨네요?”
“곧 오실 거예요. 일단 먼저 먹고 계실래요?”
“아니요. 오시면 같이 먹죠.”
지 피디의 말처럼 1분도 되지 않아 윤해연 작가가 모습을 드러냈다. 미용실을 들렀다 왔는지 헤어와 메이크업을 완벽하게 하고 나타난 모습이 이채로웠다.
“아이고, 작가님 오늘 캐스팅 미팅인 줄 알겠어요.”
“후후, 조금 과했나? 그래도 오늘 김 대표한테 검사받는 날인데 조금 격식을 차렸지. 그런데 고기 먹는데는 조금 안 어울리나?”
“에헤이, 이런 비싼 고깃집엔 그 정도는 갖춰 입어줘야 해요. 일단 앉으세요. 작품 이야기는 나중에 하고 일단 먹죠.”
“그래, 괜히 악평이라도 들으면 목에서 안 넘어갈 것 같아.”
“설마 악평 들을 정도로 써 오셨으려구요. 저는 마음 편히 먹겠습니다.”
즐겁게 식사를 마친 그들이 후식으로 나온 차를 마시며 본격적으로 작품에 관한 이야기를 꺼냈다.
“사전제작이라서 제작비랑 투자 문제가 일단 걸리네요.”
“윤 작가님 작품이라서 진행이 안 되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해요. 문제는 편성인데… 지금 KMTC에서 ‘천방지축 그녀’가 잘 되면서 그쪽과의 관계가 좋아요. 그래서 그쪽에 사전제작 드라마에 대한 이야기를 넣은 상태예요. 잘하면 그쪽에서 편성을 잡아줄 수 있을 것 같아요.”
“종편에서 하자구요? 흠…”
아무리 요즘 종편과 케이블이 잘나가고 있다고 하더라도 위험부담이 없을 수가 없다. 지상파는 아무리 망해도 기본 시청률은 깔고 갈 수 있는데 종편, 케이블은 재미가 없으면 바로 2%이하로 주저앉는 일이 흔하기 때문이다.
“저도 윤 작가님이 아니면 이런 말 안 하죠. 사실 KMTC도 이주희 작가의 첫 작품이기 때문에 서슴없이 밀었구요. 그런데 그쪽 관계자하고 이야기를 나눠 보니까 드라마국에 대한 애착이 대단하더라구요. 사측에서 보도와 예능은 잘 나가는데 드라마가 계속 안 좋은 평가를 받다 보니까 어떻게든 살리려고 노력하던 중에 이번 이 작가님 작품이 잘 되면서 계속 흐름을 타보려는 분위기예요.”
“편성이 잡히면 회당 제작비는 어느 정도나 주겠대요?”
“놀라지 마세요. 2억! 무려 2억이에요.”
“오… 확실히 지상파보다는 통이 크네요.”
“그렇죠? 거기에 PPL 붙으면 당대 최고의 톱스타를 넣어도 무리가 아니에요. 유은하, 한여름, 송민기 다 데려올 수 있다니까요.”
과연 이렇게 비싼 곳에서 음식을 먹은 이유가 있었다. 흥분한 지 피디의 얼굴을 보니 마치 자신의 돈인 것만 같다.
“그래서 이번에 ‘도마뱀 미디어’하고 같이 기획한 작품이 어떤 거예요?”
우현의 시선을 받은 윤 작가의 얼굴에 작은 긴장이 어렸다.
“사극. 나 사극 해볼 거야.”
“사극이요? 윤 작가님 사극 한 번도 안 해봤잖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