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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1] 작품을 만든다는 것(1)
“음… 그건 전화로 말씀드리긴 그렇구요. 오늘 저녁 시간 괜찮으세요? 윤해연 작가님이랑 같이 식사해요.”
“좋죠. 그럼 그때 보겠습니다.”
전화를 끊은 지 얼마 안 돼 문자로 강남의 고급 소고기 전문점 위치가 전송되었다.
“대표님, 지금 바쁘세요?”
한창 촬영할 시간에 별이의 로드를 맡고 있는 상준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아니, 왜? 무슨 일 있어?”
특별한 일이 아니면 전화를 잘 하지 않는 상준에게서 연락이 오니 당장 머릿속에 무슨 일이 생긴 것 아닌가 하는 생각부터 든다. 특히 상준의 목소리에는 약간의 머뭇거림과 긴장감이 감돌고 있었다.
“지금 별이가 피아노 치는 씬을 찍고 있는데 분위기가 좀 그래서요. 임 감독님이 컷을 안 하니까… 지금 촬영 중인지 레슨 중인지 헷갈릴 정도예요.”
단순히 레슨처럼 진행된다면 상준이 굳이 전화까지 할 리가 없다. 분위기가 안 좋다는 느낌이 들었으니 전화했을 거다.
“알았어. 갈 테니까 눈치껏 시간 좀 끌어봐.”
전화를 끊고 곧바로 촬영장으로 향했다. 별이의 촬영 스케줄을 대부분 기억하고 있기에 오늘 촬영 씬이 어떤 장면을 촬영하는지는 알고 있다. 엄격한 스승으로부터 혹독한 지도를 받는 장면이라 촬영이 어려울 거란 생각은 들었다. 그런데 상준으로부터 전화까지 올 정도로 어려울지는 몰랐다.
촬영장인 음대 연습실에 도착하니 별이가 전용 대기실에 상준과 둘이서 쉬고 있었다. 슬쩍 현장 분위기를 훑으니 스태프들의 표정이 다들 조금씩 경직되어 있었다. 누구도 웃음을 보이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침통한 표정을 짓고 있는 이도 없다.
‘감독의 카리스마에 스태프들이 전부 눌려 있구나.’
촬영 상황을 보진 못했지만 왠지 임찬규 감독이 별이를 강하게 압박했기에 자연스레 분위기가 가라앉은 듯했다.
“어떻게 된 거야?”
대기실에 들어가서 상준에게 물으니 상준이 별이의 손을 가리켰다.
“진정이 안 되네요.”
가늘게 떨리는 별이의 손. 우현은 반사적으로 그녀의 손을 붙잡으며 물었다.
“왜 그래? 긴장한 건 아닌 것 같고… 임 감독이 너무 독하게 밀어붙이니?”
“그게 아니라… 손에 조금 무리가 가서 그래요.”
“손? 피아노 많이 치면 손에 무리가 가니?”
평생 피아노 한번 쳐본 적이 없으니 뭐가 문제가 되는지 알지 못했다. 그래서 손을 떠는 것을 봤을 때 반사적으로 임 감독의 컷 소리에 긴장해서 그렇다고 생각했는데… 부상이라고?
“네, 원래 피아노를 오래 치면 손에 무리가 오긴 하는데, 조금 쉬면 괜찮아져요.”
“진짜 쉬면 괜찮아지는 거야? 부상 생기면 촬영에 지장이 있을 수도 있어. 알고 있는 거지?”
“정말이에요. 어렸을 때 이렇게 손이 굳거나 아픈 적이 몇 번 있었어요. 잠깐만 쉬면 돼요.”
별이는 생각보다 태연한 표정으로 물을 마시며 손을 풀었다.
“그래, 그럼 잠깐 쉬고 있어.”
우현은 그녀를 두고 나가며 상준이를 눈짓으로 불렀다. 상준은 문을 닫고 나오자마자 우현에게 마치 초등학생이 선생님에게 이르는 것처럼 줄줄이 풀어놓았다. 물론 주변에 스태프들이 듣지 못하도록 소곤거리면서 말이다.
“임 감독님 좀 너무한 거 같아요. 제가 봤을 때는 충분히 잘했는데 계속 컷을 날리면서 한 번 더 하자고… 지금까지 똑같은 장면에서 다시 찍자고 한 게 스무 번이 넘어요.”
“스무 번이나?”
“네, 한번 슛 들어가면 최소 1분 이상 정신없이 피아노를 치는데 계속 컷을 날리니까 별이도 나중에는 지쳐서 피아노를 치는데 제가 봐도 손이 덜덜 떨리고 있더라니까요? 그런데도 임 감독은 아무것도 못 본 것처럼 다시 하자고만 하고…”
“그래?”
현장을 보지 못했으니 지금 가서 왜 그랬냐고 따질 수도 없다.
“그런데 은하씨도 너무해요. 임 감독 옆에 있으면서 그만하면 괜찮은 것 같다고 말 한번 해주면 될 것 같은데, 그런 말 한 번 안 해주고…”
“됐다, 인마. 일단 다시 한번 지켜보자. 별이 쉴 수 있는 시간 얼마나 줬어?”
“글쎄요. 은하씨 촬영 먼저 하고 다음 씬을 바로 연결해서 들어간다고 했으니까요. 한… 30분 정도는 찍겠죠?”
“은하도 별이처럼 계속 까일 것 같아?”
“그렇지 않을까요?”
“그거야 모르지.”
은하가 촬영하는 장면도 피아노 치는 씬인데 그녀는 만면에 미소를 띤 채 즐겁게 건반을 두드렸다. 피아노 치는 것이 세상에서 제일 즐거운 일처럼 보여 잘 모르는 우현이 봐도 그녀가 진정으로 행복해하는 것처럼 보였다.
상준의 기대와는 반대로 은하의 촬영은 얼마 지나지 않아 오케이를 받았고 곧바로 조감독의 고함소리가 별이의 대기실 문을 두드렸다.
“김별씨 스탠바이 하세요!”
“에이 씨… 시간 조금만 더 주지.”
상준의 볼멘 목소리와는 다르게 대기실 문을 열고 나온 별이의 얼굴은 상당히 평온했다. 마치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 피아노 앞에 앉는데 얼굴로만 봐서는 긴장하는 티가 나지 않았다. 단지 그녀의 손이 가늘게 떨리고 있는 것만은 여전했다.
임찬규 감독이 피아노 앞에 앉아 있는 별이에게 다가가 몇 가지 디렉션을 주는 모습이 보였다. 열심히 고개를 끄덕이며 집중하는 그녀의 모습을 보니 자신이 맡은 배역에 대한 열의가 느껴졌다.
“김별씨 너무 얼굴이 굳었다! 그래, 좀 펴고… 자, 하이! 큐!”
임 감독의 큐 싸인이 떨어지자 별이의 스승역을 맡고 있는 중년 배우 김혜진이 별이의 어깨를 작은 나무 막대로 톡톡 찔러대며 힐난했다.
“너 그래가지고 이번에 우승할 수 있겠니? 너희 엄마가 참 좋아하시겠다.”
“죄송합니다.”
별이의 얼굴은 무참히 일그러졌다. 낭패감, 무력감이 고스란히 묻어 나왔다.
“다시 해 봐. 너 오늘 될 때까지 안 끝나. 알았니?”
“네.”
곧바로 별이의 손이 미끄러지듯 피아노 위를 오갔다. 인상을 잔뜩 찌푸린 채 노동을 하는 것처럼 기계적으로 손가락이 춤을 췄지만 그녀의 그런 태도와는 달리 슈만의 피아노소나타 2번 곡 특유의 격정적이고 빠른 리듬은 귀를 즐겁게 했다.
“아까도 이 정도로 쳤어?”
혹여 마이크에 목소리가 들어갈까 봐 상준만 들을 수 있도록 소리를 죽여 물었다. 상준은 고개를 갸웃하며 애매한 표정을 지었다.
“글쎄요. 저는 잘…”
“에휴… 됐다.”
무려 1분간 이어진 연주. 더 이상 피아노를 연주한다는 건 아마추어인 별이의 입장에서 무리다.
“컷! 1분만 쉬고 다시 가자! 김혜진씨 조금 더… 감정을 넣을 수는 없을까요?”
“짜증스럽게?”
아무래도 임 감독보다 김혜진의 나이가 더 많았기에 현장에서도 그녀는 말을 놓았다. 그녀가 워낙 대배우기에 스태프나 배우들 누구도 어색하게 생각하지도 않았다.
“조금 더 짜증스럽고 귀찮은 듯이. 히스테리처럼 보여도 괜찮을 것 같아요.”
김혜진은 임 감독의 말에 조금 고민하다가 입을 열었다.
“너무 미친년처럼 보이지는 않을까? 제정신 아닌 것 같잖아.”
“그 정도는 아니니까 걱정하지 마시구요. 그리고 예술 쪽에 발 얹은 사람치고 미친놈 안 본 사람 있습니까? 저 대학 다닐 때도 그 미친 교수새끼… 하여튼 아시죠?”
임 감독은 누군가를 머릿속에 떠올리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호호호. 맞아 맞아. 연예계에도 미친놈들, 제 정신 아닌 것들이 많으니까 어쩌면 조금 더 히스테리를 부려도 괜찮겠다. 그런데 난 너무 이런 역만 맡는 것 같아. 속상해.”
“하하하. 다음에 아주 여성스러운 역할 하시면 되겠네요.”
“임 감독, 내 나이 알면서 지금 약 올리는 거지?”
“그럴 리가요. 전 진심입니다. 그럼 준비하시고요. 김별씨 조금 쉬었어?”
“네, 할 수 있어요.”
“그래, 지금 손 떠는 거 너무 감추려고 하지 마. 그대로 한번 가보자. 자, 감정 잡으시고… 하이! 큐!”
메인 카메라가 김혜진의 표독스러운 표정을 클로즈업한다.
“너 그래가지고 이번에 우승할 수 있겠니? 너희 엄마가 참 좋아하시겠다.”
확실히 아까보다 더 냉정하고 싸늘해졌다.
“죄송합니다.”
“다시 해 봐. 너 오늘 될 때까지 안 끝나. 알았니?”
다시 시작된 별이의 연주. 임 감독은 또 뭐가 마음에 안 들었는지 오케이 싸인을 주지 않았다. 은하나 별이는 모두 아마추어이기에 연주 실력이 문제가 된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편집 과정을 통해서 적당히 손을 볼 수도 있을 테니까.
“별이씨 연주만 다시 갈게요. 한번만 더 해보자. 괜찮지?”
“네.”
힘 빠진 목소리, 우현은 자신도 모르게 별이에게 걸어갔다.
“잠시만요.”
그 때까지만 해도 의연하게 연기를 펼치던 별이는 우현의 목소리가 들리자 갑자기 감정이 복받쳤는지 눈물을 터뜨렸다. 이에 힘내라고 응원하려고 다가간 우현은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왜 그래? 응? 진정하고 말해 봐.”
“흑흑… 전 안 되나 봐요… 은하언니처럼 할 수가 없어요, 흑흑”
볼을 타고 내리는 그녀의 눈물을 보니 괜히 어려운 작품을 하게 한 게 아닌가 후회가 되기도 했다. 쉽게 갈 수도 있었는데 너무 욕심을 부린 건지도 모른다.
“그게 무슨 말이야. 아무도 은하처럼 하라고 하지 않아.”
“말은 안 하지만 다들 알고 있고 그렇게 생각하잖아요. 죄송해요, 대표님. 은하언니랑 비교하지 않으려고 했는데… 제가 못 할수록 자꾸만 비교가 돼요. 제가 재능이 부족한 건지 아니면 노력이 부족한 건지, 대체 뭐가 부족한 건지도 모르겠어요. 뭘 어떻게 해야 하는지 도저히 모르겠어요. 흑흑흑”
강한 멘탈로 타고 났다고 하더라도 아직 어린 그녀가 감당하기엔 너무 무거울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언제 다가왔는지 임찬규 감독의 목소리가 우현의 등 뒤에서 벼락 치듯 터져 나왔다.
“바로 그거야! 별이씨. 나보다 뛰어난 누군가와 자꾸만 비교되면서 자괴감에 빠져드는 거. 아무리 노력해도 상대를 이길 수 없을 것만 같아 스스로 무너지는 그 감정. 하연은 지금 그런 감정 상태인 거야.”
잔뜩 일그러진 표정으로 양 손으로 무언가를 쥐어짜듯이 제스처를 취하며 소리 지르는 임 감독의 모습은 일견 우스꽝스럽기도 했다.
어안이 벙벙해 눈만 껌뻑이는 별이를 두고 우현이 임 감독의 팔을 붙잡아 조용한 곳으로 이끌고 갔다.
“그럼 처음부터 그렇게 디렉션을 주지 그랬어요?”
임 감독만 들을 수 있도록 최대한 목소리를 죽였지만 그 음성에 담긴 사나움을 알기에 임 감독은 민망한 얼굴로 슬쩍 시선을 피했다.
“미리부터 그렇게 말하면 인위적이 되니까 그랬어. 저렇게 밀어붙여야 진짜 얼굴이 나온다니까? 지금은 화가 나겠지만 막상 편집본 나오면 나더러 잘했다고 할 걸?”
“그럼 저한테만이라도 얘기할 수 있었잖아요?”
“촬영 1년 할 거 아니잖아? 언제 하나하나 다 설명하고 앉아 있어? 일단 비켜봐, 이 감정 그대로 찍어야 하니까.”
임 감독은 우현을 지나쳐 그대로 모니터 앞에 헤드셋을 끼고 앉았다. 눈치 빠른 메이크업 아티스트가 그새 퍼프로 눈물자국을 전부 닦아낸 후라 벌겋게 충혈된 눈가만 제외하면 상태는 나쁘지 않았다.
“아까 그 감정 그대로 가자고. 감정 그대로 잡고 연주 하는 거야. 대사부터 연주까지 한 번에 가자. 오케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