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090] 광팬과 스토커(2)
구급차에서 지나의 간호를 받으며 병원 응급실에 도착해 치료를 받고 병상에 누워 있으니 카메라와 수첩을 든 기자들이 하나 둘 모습을 보였다.
혹시나 해서 핸드폰으로 포털을 검색하니 속보로 유지나 스토커가 경찰서에서 조사를 받던 중 유지나 소속 사장에게 자상을 입혔다고 떠 있었다. 경찰서에 상주하던 기자들이 재빨리 기사를 쓴 것 같았다.
지나는 응급실에 도착하자마자 집으로 보내버렸다. 계속 간호하겠다는 걸 기자들이 곧 올 테니 이곳에 있으면 자신만 더 힘들어진다고 했다. 그제야 그녀가 수긍하고 집으로 돌아갔다.
진명이 뒤늦게 알고 병원에 오겠다고 하는 걸 전화로 막느라 한동안 진을 빼야 했다. 사람이 많고 북적거리면 아무래도 주변 시선을 모으기 때문에 그냥 조용히 마무리하기를 원했다.
재빨리 차양을 치고 기사와 댓글을 보는데 은하로부터 문자가 왔다. 그녀도 기사를 봤나보다.
[괜찮은 거지?]
짧은 말이었지만 마음이 한결 푸근해져왔다.
[당연하지. 상처 조금 났는데 꿰매고 누워있어. 바로 퇴원 할 거야. 걱정하지 마.]
[걱정 안 해]
말은 저렇게 해도 분명 걱정하고 있을 거라고 생각하니 절로 웃음이 지어진다. 곧바로 상준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대표님, 괜찮으세요?”
“괜찮아. 별로 안 다쳤어.”
“그러게 같이 가시지 그러셨어요?”
“같이 가긴… 너 별이 봐야지, 어딜 따라온다고 그래?”
“진명이 형은 같이 간 거예요?”
“아니야. 원래는 나 혼자 갔는데 지나가 경찰에 진행상황을 물어보다가 내가 경찰서에 온 걸 알고 진명이 두고 혼자 온 것 같아. 너는 신경 쓰지 말고 별이나 잘 관리해. 나 금방 퇴원할 정도로 가벼운 상처니까 별이가 괜히 신경 쓰지 않도록 하고. 이번 영화 중요해. 배우가 연기 중에 정신 딴 곳에 팔면 아무것도 못하는 거 알고 있지?”
“그럼요, 알고 있습니다. 안 그래도 지금 별이가 바로 옆에서 괜찮은 거냐고 계속 묻고 있어요.”
“왜 또, 아이고… 얼른 촬영하라고 해. 나 거의 안 다쳤다고, 알았어?”
“알겠습니다. 그럼 쉬십쇼.”
“쉬긴 뭘 쉬어.”
전화를 끊고 혼자서 투덜거리는데 차양이 슬쩍 열리더니 낯선 남자의 얼굴이 보였다.
“혹시 김우현 대표님 되십니까?”
다 알고 있다는 듯이 묻는데 아닌 척 할 수가 없었다.
“네, 무슨 일이시죠?”
“반갑습니다. ‘연예주간’의 양승모 기자입니다. 오늘 경찰서에서 유지나씨 스토커의 칼에 맞으셨다고 들었는데…”
“칼을 맞았다고 하면 너무 느낌이 세네요. 그냥 조금 다쳤다고 하죠.”
아무리 피해자라고 해도 칼에 맞았다는 표현이 등장하면 뭔가 흉악한 일에 휘말린 것 같은 인상을 주기 때문에 그런 식의 노골적인 표현은 꺼려졌다.
“아, 그런가요? 알겠습니다. 기사에는 상해를 입었다는 수준으로 내죠. 그 정도는 괜찮으시죠?”
구렁이 담 넘어 가듯이 은근슬쩍 인터뷰를 시작하는 그의 언변에 쓴웃음을 지었다. 어차피 써야 할 기사라면 그냥 기자 한명과 기사를 내는 것이 낫겠다는 생각에 그를 내보내지 않고 침대 한 쪽을 내줬다.
“좋네요, 앉으세요. 커튼은 닫으시구요.”
“아이고 그럼요. 아무래도 둘만 이야기 하는 게 편하실 테니까요.”
“물어보고 싶은 게 뭡니까?”
“그거야 사람들이 궁금해 하는 것이죠. 그 스토커와는 도대체 무슨 관계였는지, 왜 그가 경찰서에서 그렇게… 그랬는지 말이죠.”
“그게 말이죠…”
우선 지나와 그 스토커 간에는 어떠한 관계도 없음을 가장 강하게 피력했다. 지나가 한창 바쁘게 일할 때에는 그 스토커가 아니라 누구도 만나기 어려울 때임을 강조하고 나서 경찰서에서의 그 이상한 정신 상태를 거론하며 다행히 크게 다치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나마 크게 안 다친 게 다행이네요. 그리고 지나씨는 왜 처음부터 그를 고소하지 않고 봐줬던 겁니까?”
“그 스토커가 할머니와 둘이서 산다고 하더라구요. 할머니가 애지중지 하고 키웠는데 그 손자가 회사에서도 쫓겨나고 구속도 되고 그러면 얼마나 슬퍼하겠습니까? 지나가 봐주게 된 건 그가 아니라 그의 할머니를 보고 선처하게 된 겁니다.”
“흠… 그래도 그 때 확실하게 고소했으면 이런 일이 안 생길 수도 있었을 텐데요. 아쉽네요.”
“맞아요. 저도 아쉽습니다. 그런데 살다보면 어떻게 냉정하게만 판단할 수 있겠어요? 전에 배우 박현진씨가 악플러들을 용서하며 그들과 함께 연탄봉사를 했다고 하죠? 그런데 나중에 시간이 지나 또 다시 악플러를 잡고 보니 그 때 같이 봉사활동을 하며 기념사진까지 찍었던 친구가 또 있더라는 겁니다. 그 때 박현진씨가 봉사활동을 같이 하려했던 이유는 좋은 마음이었지만 결과는 그리 좋지 못했다고 평가합니다. 하지만 그 때 봉사활동을 같이 했던 친구들 중에는 분명 마음을 다르게 먹고 다른 사람이 된 친구도 있겠죠. 지나도 그런 마음이었을 겁니다.”
“그렇겠네요. 사실 고작 몇 년 전만 해도 팬들 눈치 보느라 악플을 단 팬들을 고소하는 건 정말 힘든 일이었었죠. 특히 소속사에서 꺼리는 일이었기도 하고…”
“맞습니다. 아무래도 누군가를 고소한다는 게 이미지가 중요한 연예인 입장에서는 꺼려질 수밖에 없으니까요. 지금에 와서야 그 정도 고소는 오히려 당연한 분위기가 형성됐지만요. 그리고 솔직히 지금도 정말 심한 경우 아니면 고소를 꺼립니다. 아무것도 아닌 이슈를 괜히 한 번 더 들추어낼 수도 있는 일이라…”
“그렇군요. 알겠습니다.”
“부디 기사 잘 써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지금 한창 드라마 방영 중인데다가 이런 일까지 겪어서 마음이 많이 무거울 텐데 기사까지 지나의 의도와는 다른 식으로 나가면 많이 힘들지 않겠습니까?”
“물론입니다. 저희도 이런 상황에서까지 자극적인 기사는 안 씁니다. 정도가 있죠. 걱정하지 마시고 몸조리 잘 하십시오. 기사는 잘 내보내도록 하겠습니다.”
호탕하게 웃음을 보이는 그 기자를 보니 믿을 만해 보였다. 역시나 저녁 무렵에 단독 기사로 우현과의 인터뷰 기사가 포털을 장식했다.
기사는 피의자 할머니의 안타까운 사연도 공개하며 유지나의 착한 심성을 부각했다. 역시나 네티즌들의 댓글은 유지나에 대한 찬양으로 들끓어 올랐다.
[그냥 글래머 여신인줄 알았는데 진짜 천사였네.]
[지나님 안 다쳐서 다행입니다. ㅜㅜ 사장님도 얼른 나으셨으면 좋겠어요.]
[오늘부터 유지나 팬한다.]
확실히 최완용이 흥분해서 우현을 공격한 것은 전화위복이 됐다. 그것으로 최완용이 감방에 갈 확실한 증거가 생겼고 유지나의 팬덤이 확장되는 긍정적인 효과까지 얻었다. 단점이라고는 어깨가 계속 욱신거린다는 정도.
퇴원하고 집에 와서 누우니 그대로 곯아 떨어졌다. 그리고 그 다음날이 돼서는 평생 해본 적 없는 지각까지 했다. 비록 상처는 얕았지만 정신적 충격이 알게 모르게 있었던 것 같다.
“어머, 대표님, 상처는 괜찮으세요?”
아마 민주는 오늘 우현이 출근을 안 할 거라고 생각했는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놀란 표정이다.
“괜찮아요. 멀쩡합니다, 하하. 그나저나 유니는요?”
“새벽부터 창원에서 행사 있다고 사무실도 안 들리고 바로 출발했어요. 그리고 오늘 저녁은 일산에서 망치씨와 함께 무대있구요.”
우현이 없는 사이에 유니의 로드매니저인 세동이 민주에게 자세하게 알려주었다. 그도 혹여 우현이 회사에 못 나올 수도 있다고 생각했나보다.
“알겠어요. 고마워요.”
오전에는 회사에서 발생한 비용을 처리하느라 시간을 보내고 민주와 같이 점심을 먹은 후 곧바로 별이의 영화 촬영장으로 향했다.
사실 안가도 상관없기는 한데 모습을 보이지 않으면 괜히 걱정할까봐서다. 우현을 보자마자 눈물이 그렁그렁해지는 별이의 모습을 보니 오기를 잘한 것 같다고 생각했다.
“뭘 울어? 별로 다치지도 않았구만.”
“그래도 막 칼로 찔렸다고…”
“그냥 살짝 긁힌 거야. 별거 아니야. 얼른 가서 대사나 더 맞춰 봐.”
별이에게 한 것처럼 은하에게도 강한 척하려 마음먹었다.
“어깨 다쳤다며? 어디 봐봐.”
우현의 어깨를 다짜고짜 뒤집어 까려는 은하에게서 한 걸음 물러서며 황급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별거 아니야. 그리고 말 돌아. 조심해.”
“그냥 궁금해서 그랬다고 하면 돼. 겁은 많아 가지고… 그 성격에 많이 놀란 거 아냐?”
눈치 하나는 정말 기가 막히다.
“아니거든. 나 아무렇지도 않았어. 경찰도 칼에 찔린 사람이 이렇게 태연한 거 처음 본대. 누가 보면 칼 몇 번 맞아본 거 같다고 하던데?”
“허풍은…”
“허풍 아닌데? 진짠데? 크흠… 어쨌거나 얼른 가봐. 걱정할까봐 온 거니까 나 이제 가봐야 해.”
“걱정 안 했는데?”
표정하나 안 바뀌는 은하의 대꾸에 괜히 얼굴이 빨개져 왔다.
“크흠… 알았다. 상준아! 가서 별이 좀 잘 챙겨줘라. 여기 은하는 신경 쓰지 말고.”
“은하씨를 제가 왜 신경 씁니까?”
눈치 없는 상준의 옆구리를 한 대 먹여준 우현은 곧바로 유지나의 ‘천국 같은 지옥’ 촬영장으로 향했다. 이것 역시 유지나의 마음을 안심시켜주며 응원을 해주기 위함이다.
“죄송해요. 저 때문에… 몸은 괜찮으신 거예요?”
“아휴, 괜찮습니다. 그나저나 촬영에는 문제없죠? 배강석이가 촬영 며칠 안하는 바람에 좀 빡빡할 텐데…”
“아니에요. 오히려 그 때 제가 미리 촬영해 놓은 부분이 있어서 여유가 있거든요.”
“배강석 분위기는 어때요?”
난데없이 배강석을 물어오는 우현의 질문 의도를 이해하지 못한 지나가 잠시 머뭇거리다 말했다.
“촬영 잘 하고 있어요. 지각 때문에 한번 크게 부딪혀서 그런지 지각도 안하구요.”
“으흠… 그래요? 알겠어요. 그럼 촬영 잘 하세요. 전 이만 가볼게요.”
사실 배강석이 한번 드러누우면서 경수에게서 연락이 오지 않을까 하는 기대가 있었다. 하지만 아직까지 연락이 없으니 일단 기다려봐야 할 듯하다.
시간이 훌쩍 지나 무려 한 달이 흘러가버렸다. 유지나의 드라마는 다음 주 막방을 눈앞에 두고 있었고 이주희 작가의 ‘천방지축 그녀’는 한창 절정에 이르고 있었다.
별이가 촬영하는 ‘피아니스트’ 역시 전체 촬영분의 절반을 소화하며 반환점을 돌았고 유니는 아직도 전국을 돌며 행사를 뛰고 있었다. 이렇게 되니 유니가 사실상 회사 매출의 절반을 책임질 정도로 큰 기둥이 되어버렸다.
좋은 현상이다. 배우만 전적으로 키워서는 회사 성장에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으니 말이다.
모든 일이 순조롭게 풀려가고 있을 때 제작사 ‘도마뱀 미디어’ 측에서 연락이 왔다. 물론 지여울 제작피디다.
“오랜만에 연락드리는 거죠?”
“언제 연락이 오나 목이 빠지게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윤해연 작가님은 저한테 연락도 안하시고 산에서 은둔하는 것처럼 소식을 끊으시구 말이죠.”
“아하하! 그렇긴 했죠? 이번에 저희 쪽이랑 이틀이 멀다하고 회의를 거듭했거든요. 사실 윤 작가님이 그냥 시놉 주시면 저희는 그냥 따라갈 수 있는데 이번에는 사전제작이라 그런지 윤 작가님께서 혼자 작업하기 싫다고 하셔서요. 꼭 우리와 상의해가면서 기획을 하고 싶다고 하셨어요.”
“하긴… 그렇게 가는 게 더 좋을 수도 있겠죠.”
“그렇긴 하지만 윤 작가님처럼 필력이 확실하신 분이면 괜히 저희랑 이야기를 나누다가 이상한 작품이 나올까봐 저희는 거부했는데 작가님이 우리를 설득하셨어요. 그래서 이번에 저희도 기획팀 전부 윤해연 작가님 차기작에 매달렸네요.”
“꼭 잘 돼서 보너스 타시길 바랍니다.”
“아하하! 맞아요. 이런 노력은 돈으로밖에 치유가 안 되는 걸 아시네요.”
“그래서 어떤 작품이 나왔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