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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89] 광팬과 스토커(1)
그 상자가 유독 우현의 눈길을 잡아끈 이유는 상자 색깔이 검은색이기 때문이다. 이 바닥에 오래 있으면서 수많은 선물이나 화려한 포장의 상자들은 많이 봐왔지만 아무 무늬도 없는 온통 검은색 상자는 처음 봤다. 받는이는 유지나다.
“민주씨, 나 커터칼 좀 줄래요?”
“네, 안 그래도 제가 다 열어보고 확인하려고 했는데…”
보통 팬들에게 온 선물들은 사무실 사람들이 전부 확인한다. 그럼에도 우현이 먼저 손을 대는 건 딱히 할 일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선물을 하나씩 까보며 시간을 보내는 것도 받는 입장에서는 아주 즐거운 일이다.
“어? 이거 뭐야…”
“왜요? 뭔데요? 어? 이거 남자 속옷이죠? 미친 새끼 아니에요?”
놀란 민주가 자신도 모르게 욕설을 내뱉을 정도로 우현 역시 놀라고 말았다. 어떤 미친놈이 남자 속옷과 편지를 동봉해서 보냈는데 상자를 열자마나 나는 쾌쾌한 냄새는 불쾌하기 그지없었다.
“뭐라고 썼어요? 한번 읽어봐요.”
그냥 버릴까 하다가 한번 읽어나 보자는 생각에 그 조그맣고 깜찍한 토끼모양의 편지를 열어 보니 내용이 아주 가관이다.
[지나야, 왜 전화를 안 받아?
밤마다 나랑 통화하면서 좋아했잖아.
요즘 드라마 촬영하느라 바빠서 그래?
난 네 생각으로 매일 밤잠을 설쳐.
내가 얼마나 너를 그리워하고 사랑하는지 내 팬티를 보면 알겠지.
바빠서 전화는 못 받지만 너도 같은 마음이란 걸 난 다 알고 있어.
회사 옮겼던데 집은 그대로지?
조만간 보자 ]
내용을 읽어보니 왠지 이번이 처음이 아닐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바로 진명에게 전화를 걸었다.
“대표님, 무슨 일이세요?”
“너, 혹시 최완용이라고 알아?”
무슨 배짱인지 보낸 이에 떡하니 이름이 적혀있다. 분명 초등학생 정도의 정신연령이 어린 놈 아니면 제 정신이 아닌 놈일 터였다.
“최완용이요?”
“어, 오늘 사무실로 온 선물들 뜯고 있는데 이 새끼가 이상한 걸 보냈네?”
“아휴… 그 새끼 잠잠하다가 또 지랄이네.”
“그렇지? 한두 번이 아닌 것 같던데.”
“벌써 경찰서에 한번 고소까지 했어요. 그 때마다 지나가 불쌍하다고 선처를 해줘서 풀려나긴 했는데… 지나가 방송을 못하면서 눈에 안 보여서 그런지 잠잠하더라구요. 그래서 그 버릇 고쳤나 했는데 요즘 지나가 드라마에 출연하면서 다시 도졌나 봅니다. 역시 사람은 쉽게 변하지 않네요.”
“뭐 하는 인간인데?”
“겉으로 보기엔 멀쩡한 놈이에요. 그 때 경찰서에서 보니까 지방의 조그마한 중소기업 대리였나? 과장이었나? 하여튼 그런 직함인데 아직 결혼도 못했나 봐요. 하긴 그런 성격이니까 못했겠지. 그놈 할머니랑 둘이 산데요. 그런데 집은 좋아 보이던데…”
“어떻게 그걸 다 알아?”
“모를래야 모를 수가 있어야죠. 그 미친놈은 지나랑 자기가 얼마나 사랑했는데 이렇게 모른 척 하냐면서 적반하장으로 나왔지만 그놈 할머니가 원래는 우리 손자가 착한 아이인데 친구를 잘못만나서 이상해졌다는 말을 1시간 동안 했었죠.”
너무 어처구니가 없어서 웃기지도 않았다. 이런 놈을 선처해 줬다기에 이해가 가지 않았는데 들어보니 할머니에 대한 동정 때문인 것 같았다.
“지가 이상한 놈이지, 친구 탓은… 할머니가 불쌍해서라도 열심히 살아야할 놈이 아주 정신이 나갔구만.”
“그런데 무슨 일이에요? 그 새끼가 이상한 거 보내왔어요?”
“그래, 지가 입던 팬티랑 편지를 같이 보내왔는데 편지 내용이야 뭐 흔해빠진 소설 쓰는 것 같은데 저 팬티에서 나는 냄새는 진짜 구역질이 치민다.”
“어떻게 하시겠어요? 지나는 전에도 확 감방에 처넣으려다가 그 놈 할머니보고 참았는데… 사실 지나가 정에 약해서 또 봐줄 것 같긴 해요.”
“난 안 봐줘. 경찰에 보낼 거니까 지나씨한테도 그렇게 말해놔. 얼마나 만만하면 대놓고 이런 짓까지 하겠어? 하여튼 이래서 연예인들도 독해져야 하는 거야. 아무리 선처해도 못 고치는 놈들은 결국 못 고치거든.”
“알겠습니다. 지나에게 그렇게 말해 놓을게요.”
“아, 그리고… 혹시 옛날에 진짜 사귄 거는 아니지?”
“하하하, 아니에요.”
“어떻게 확신해?”
“아시잖아요. 지나 어려서부터 데뷔했던 거.”
“아, 그렇지. 만날 수도 없었겠구나.”
깜빡했다. 유지나가 어려서부터 이 바닥에 발을 들이고 있었다는 걸.
“네, 생긴 거랑 나이를 떠나서 만나고 싶어도 만날 수가 없었을 겁니다.”
어렸을 때부터 연예계에 발을 들이고 있으면 다른 직종의 남자를 만나고 싶어도 쉽지 않다. 그 만큼 바쁘고 만날 기회가 적기 때문이다.
“알았다. 수고해라.”
우현은 그 즉시 경찰서에 박스채로 들고 가서 정식으로 고소하고 혹시 지나가 또다시 선처할 것을 대비해 기사까지 터뜨려버렸다.
역시나 댓글 반응들은 모두 강력한 처벌을 원하는 것들이었다. 특히 속옷이 보내져왔다는 것 때문에 네티즌들의 신상털기에 의해 놈의 정체가 드러나버렸다. 아마 그가 다니던 회사에 소문이 날 거고 더 이상 직장생활도 힘들어질 거다.
며칠 뒤, 회사로 경찰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역시나 이번에도 그의 할머니가 직접 경찰에 나와 선처를 요구하고 있다는 것이다.
우현은 지나 몰래 혼자서 경찰서로 향했다. 도대체 그놈 얼굴이 어떻게 생겼는지 궁금했기 때문이다.
은하때도 극성팬들과 악플러들 때문에 고생을 많이 했었다. 특히 은하가 유명 정치인으로부터 스폰을 받고 있다는 찌라시 때문에 한동안 꽤나 많은 악플러들에게 시달리다가 결국 전부 고소했던 일이 있었는데 특이한 건 모두 잡고 보니 청소년들이나 어린아이들일 것이라는 예상과 달리 20대 이상의 멀쩡한 성인들이었다.
직장인도 있었고 주부나 학생, 백수도 있었다. 공통점은 전부 그들 나름대로 삶을 힘겹게 살아가는 사람들이라는 것 정도?
그 때 경찰에게 들은 말에 의하면 어린 아이들의 경우는 악플을 써도 단순한 욕설을 하는 게 보통이라고 했다. 정말 사람의 마음을 후벼 파는 댓글은 20대 이상의 성인만이 가능하다는 말에 공감했던 기억이 있다.
경찰서에 가보니 검은 뿔테안경에 위아래로 깔끔하게 갖춰 입은 양복과 단정하게 정돈된 머리를 하고 아무 일도 아닌 것처럼 앉아 있는 남자가 바로 범인이라고 했다. 처음 드는 생각은 ‘왜 저런 외모를 가지고 결혼도 못하고 이런 짓을 하며 살까?’하는 것이었다.
“최완용씨라구요?”
“네, 누구시죠?”
“지나 소속사 대표 맡고 있습니다.”
갑자기 후다닥 소리가 들리며 머리가 하얗게 센 노파가 우현의 앞에 무릎을 꿇으며 나타났다. 자글자글한 주름만 보더라도 얼마나 고생을 했을지 알 것 같다.
“잘못했습니다. 원래는 착한 아인데… 유지나가 너무 좋았나봅니다. 사장님, 그럴 수 있잖아요? 너무 좋으면 그럴 수도 있잖아요? 너무 좋아하다보니까 조금 심했던 것 같아요. 그러니까 우리 완용이 한번만 봐주세요. 착한 아이입니다.”
눈물을 뚝뚝 흘리며 애원하는 걸 보니 지나가 선처했던 마음이 이해가 간다. 하지만 최완용은 자신의 할머니가 무릎 꿇고 애원하는 건 눈에 들어오지도 않는지 대뜸 우현에게 물었다.
“유지나 어디 있습니까?”
“지나 안 나왔어요.”
“지나라고 하지 마!”
갑자기 버럭 소리를 지른다. 우현이 유지나와 친한 듯이 이름만 부르자 화가 치밀어 오른 것 같다. 그의 이런 난데없는 고함소리에 할머니가 그의 팔을 붙잡으며 ‘그러면 안 된다. 그러면 안 된다.’는 말을 반복했다.
“지나를 지나라고 하는데 뭐가 문젭니까? 그것보다 당신 이제 큰일 났어. 이거 회사에 알려지면 당신 이제 직장도 못 다니게 될 걸?”
“그까짓 회사 안 나가면 돼!”
“완용아, 안 된다. 회사 나가야 사람 구실한다.”
그의 할머니가 팔을 잡고 애원하지만 그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다. 오히려 눈을 번들거리며 계속 유지나만을 찾았다.
“유지나 어딨어! 유지나 데려와.”
이쯤 되니 정신병으로 처벌 수위도 높지 않을 것 같다. 자리에서 일어나 담당 경찰에게 다가가니 경찰이 한숨을 쉬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죄질이 안 좋긴 한데… 그렇다고 저 정도로 큰 형벌을 주기는 어렵습니다.”
“저러다가 갑자기 우리 지나에게 해코지라도 하면 어떡합니까?”
“저희로서는 방법이 없어요.”
그런데 그 와중에 경찰서 안으로 선글라스를 낀 유지나가 어떻게 알고 왔는지 안으로 들어섰다.
“유지나! 너 이리 와봐! 너 나 좋다고 했어? 안 했어? 나를 이렇게 배신 할거야?”
지나는 그런 그를 무시하고 그의 할머니 손을 잡으며 어디 아프시진 않냐고 묻는다. 그 모습이 너무 기가 막혀서 지나의 손목을 붙잡고 끌고 나가려는데 그녀가 움직이려 하지 않았다.
“이러지 마. 이런다고 이 사람 안 바뀌어.”
“한번만 봐줘요. 그 사람 때문이 아니라 할머님이 불쌍해서 그래요.”
우현의 성격으로는 이해가 안 되지만 본인이 봐주겠다고 하니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이 됐다.
“잡아!”
경찰의 고함소리가 들림과 동시에 얼떨결에 몸을 비튼 우현은 어께에 화끈한 통증을 느꼈다. 본능적인 반사신경이 아니었다면 어깨가 아니라 머리였을지도 몰랐다.
우당탕탕!
한바탕 소란에 집기와 책상이 뒤집어지고 최완용의 비명 같은 괴성이 울려 퍼졌다.
“놔! 놔, 이 xx새끼야!”
그의 손에 쥐어진 작은 스위치나이프. 아마 지나의 손목을 꼭 잡고 있던 우현을 보고 눈이 돌았던 것 같다. 그런데 정장에 스위치나이프?
“꺄아악! 대표님, 어떡해요?”
눈물을 글썽이는 지나를 보다 어깨를 만져보니 끈적한 피가 만져졌다.
“많이 다쳤어요?”
우현을 대피시킨 경찰이 상처를 이리저리 살피다 고개를 저었다.
“다행히 사람을 찔러본 적 없는 놈인지 상처가 깊지 않네요. 찌르면서도 겁났나 봐요. 보통 처음 사람을 찌를 때는 겁나서 이렇게 별다른 상처를 못 주죠.”
“사람 찌를 때 어떤 느낌인지는 별로 궁금하지 않지만 어쨌거나 상처가 깊지 않다니 다행이네요.”
“그래도 병원 가서 치료 받으셔야 합니다. 칼에 찔린 것치고 가볍다는 거지 대충 연고나 바르고 끝낼 수준은 아니에요.”
“휴… 어쨌거나 다행입니다.”
“이런 말씀 드리기는 뭐하지만 어쩌면 이걸로 끝난 게 다행일수도 있겠네요. 이걸로 최소 몇 년간은 감옥에서 썩어야 할 테니까요.”
최완용은 경찰들에게 현행범으로 체포되었다. 이건 지나에게 있어 굉장히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언제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몰라 가슴 졸였는데 몇 년간은 지나 근처에 얼씬도 못 할테니.
감히 경찰 앞에서 흉기를 휘둘러 상처를 입혔으니 그의 할머니는 넋이나가 아무 말도 못한 채 멍하니 허공만을 바라보았다.
급히 당도한 구급대원들에 의해 병원으로 후송되었다. 지나는 모든 게 자신의 탓이라며 괜히 경찰서에 왔다고 울먹였지만 경찰의 말대로 그녀가 오지 않았다면 더 큰 사고가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오히려 잘 된 거라며 그녀를 달랬다. 그녀는 진명이 말릴까봐 몰래 왔다고 하는데 경찰서를 나갈 때까지 할머니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처음에는 정신이 나가 있어서 통증이 크게 느껴지지 않았는데 경찰서를 나와 병원으로 후송되면서 점차 고통이 심해졌다. 최완용을 향해 속으로 쌍욕을 내뱉으며 저주를 퍼부었다.
“아우, 점점 많이 아파오는데요?”
구급대원을 향해 말을 하는데 지나가 많이 걱정 되는지 우현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