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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88] 두 번째 크랭크인(3)
혼자서 샌드위치를 먹을 때의 기분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짐짓 아무것도 아닌 양 차 한쪽에 두었다가 혼자 차안에서 몰래 먹으며 이것을 살 때 은하가 어떤 기분이었을 지를 상상했다. 절로 웃음이 실실 나왔다.
이날 촬영도 무난하게 흘러갔다. 영화 촬영은 드라마 촬영과 달라서 밤샘촬영이나 자정까지 배우를 붙들고 있는 경우는 많지 않다. 물론 밤씬이 많다면 다르겠지만 그럴 때는 낮에 시간 여유가 있는 편이다.
마음 같아서는 촬영 끝나고 은하를 만나 치맥이라도 하고 싶었지만 그녀도 촬영 중엔 체력과 체중관리가 필수이기에 자제해야 한다. 그래서 촬영 중간 중간에 서로 눈이 마주치는 것 정도로 만족하기로 했다.
촬영이 대략 끝나가자 약속이 있는 우현 혼자 사무실로 돌아왔다. 오늘 밤 방영되는 ‘천국 같은 지옥’을 유지나와 같이 모니터링 하기로 했기 때문이다.
원래 소속 배우의 드라마는 꾸준히 모니터링 해주는 게 맞다. 유지나 정도면 알아서 하긴 하지만 그래도 새로 둥지를 옮긴 만큼 관리를 해주는 게 맞는데 너무 소홀했다는 생각이 들어 일부러 약속까지 잡았다.
사무실에 도착하니 아직 9시도 안 됐는데도 불구하고 지나와 진명이 떡하니 회사 소파에 자리 잡고 있었다. 경리인 민주가 퇴근하고 없는 시간임에도 그들의 앞에 탄산수와 과일이 놓여있는 것을 보니 직접 싸가지고 왔나보다.
“촬영 벌써 끝난 거야?”
“네. 오늘 모처럼 대표님과 모니터링이 있다고 하니 지나가 NG 한 번 없이 단번에 촥촥촥! 해치워 버렸습니다. 하하하.”
진명의 자랑에 유지나의 입가에 가는 미소가 어린다.
“그래, 수고했다. 지나씨도 고생했어요.”
소파에 앉아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 보니 금방 시간이 흘러 10시가 되었다. 시청률이 꽤 나와서 그런지 광고가 상당히 붙은 걸 알 수 있었다.
“오늘 내용은 과거 얘기예요. 지방 촬영이라 새벽 3시부터 메이크업하고 내려갔어요. 나이 들어 보일까봐 메이크업이 더 신경 쓰였다니까요.”
지나가 볼을 부풀리며 위로 쓸어 올렸다.
“새벽부터 멀리 가느라 고생했어요. 진명이는 졸음운전 하지 않도록 조심하고.”
“네, 그럼요.”
여자 메이크업에 관해서는 1도 모르던 우현은 연예계에 들어서서야 알게 되었다. ‘살짝 비비크림만 바른 듯한 느낌을 주는 맑고 투명한 피부’를 만드는데도 1시간 이상의 메이크업 시간이 소요된다는 걸. 가끔 여자 연예인들이 ‘비비크림만 발랐어요, 쌩얼이에요, 민낯이에요’하는 사진을 올릴 때 ‘저거 다 메이크업한 것임’이라는 댓글은 맞는 말이다.
유지나와 남자 주인공인 배강석의 고등학생 시절 이야기가 펼쳐졌다. ‘나에게도 있었으면’하고 상상해봄직한 첫사랑 스토리를 연출하는 게 이 씬의 포인트다.
“이야… 이철순 피디가 그림 예쁘게 찍었네.”
감탄이 나올 만큼 아름다운 영상이었다. 고등학생인 두 주인공은 여름날 청포도밭 근처를 걸으며 데이트를 즐긴다. 10대의 풋사랑답게 능숙하지는 않지만 서로에 대한 호감을 느낄 수 있는 대화가 간간히 오간다. 대사는 많지 않다. 하지만 소년 소녀 사이의 어색한 침묵 또한 일종의 대화임을 시청자는 느낄 수 있다. 두 사람은 완벽한 연기력으로 침묵도 사랑의 대화임을 보여주고 있었다.
“나이 안 들어 보여요. 진짜 고등학생 같네.”
“그래요? 다행이다. 보톡스라도 맞아야하는 거 아닌가 고민했었네요, 후훗.”
“아유, 지금도 충분히 예쁘니까 그런 생각은 하지도 마요.”
화면을 꽉 채운 싱그러운 녹색의 청포도는 풋사랑에 제격인 배경이다. 민유리 작가도 그런 생각에 일부러 청포도밭을 배경으로 썼을 거다. 경남 함안의 한 과수원에서 촬영했다고 하는데 여름날 고생한 보람 있게 색감이 잘 나왔다.
청포도 앞에서 활짝 웃는 지나의 모습은 작가와 피디가 의도한 대로 ‘내 첫사랑 그녀’를 떠올리게 했다. 누구나 자신의 첫사랑은 아름답게 포장하는 법이니까. 아마도 지금 드라마를 보는 남성들의 기억 저편의 첫사랑 그녀는 유지나로 오버랩되고 있을 거다.
투둑… 투두둑…
갑작스런 소나기에 두 사람은 과수원 뒤쪽에 있는 원두막에서 비를 피하게 된다. 비를 맞자 입고 있던 교복의 하얀색 블라우스가 몸에 달라붙어 유지나의 글래머러스한 몸매가 드러났다. 얼마나 어색한 순간인가. 그 숨막히는 어색함을 담기 위해 이철순 감독은 두 사람을 클로즈업 한다.
비를 맞아 새초롬하게 말린 귀밑머리, 그리고 수줍어하며 살며시 미소 지을 때마다 입 양쪽으로 앙증맞게 들어가는 보조개까지 유지나의 매력이 폭발했다. 게다가 바스트샷이 계속 되면서 유지나의 글래머한 실루엣이 자꾸 스친다. 이 모습에 흔들리지 않을 남자는 없으리.
“정말 예쁘게 나왔네. 짤방으로도 많이 돌겠어요.”
“찍을 때는 비를 맞고 해서 못나게 나오면 어떡하나 걱정했는데 감독님께서 예쁘게 잘 찍어주셨네요, 호호”
본인도 만족스러운지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아무리 연기가 우선이라고는 해도 여배우인 이상 카메라에 예쁘게 담기는 건 아주 중요한 문제다. 특히 클로즈업이 많은 이철순 감독의 작품에서 연기와 외모 모두 잘 나왔다면 여배우로서 얼굴에 자부심을 가져도 된다.
그리고 이어지는 첫 뽀뽀. 카메라는 두 사람에게서 다시 멀어지며 비 오는 녹색의 청포도밭과 원두막, 뒤편의 산자락에 뽀얗게 퍼진 안개까지 담았다. 선명한 청포도 같기도, 뽀얀 안개 같기도 한 첫사랑이 한 화면에 모두 담겼다.
남자 주인공은 유학을 가게 된다. 이후 대학생활이 지나고 직장에서 두 사람은 재회한다. 앞으로 전개될 내용은 많이 변해버린 서로의 모습에 실망하지만 결국 새로운 모습에 대한 또 다른 사랑의 감정이 싹튼다는 내용일 것이다.
“걱정 안 해도 되겠어요. 이 감독이 찍은 거 보니까 민유리 작가가 의도한 거 이상으로 연출을 잘 하고 있어서 반응이 좋을 것 같네요.”
다음날, 우현의 예상대로 포털 메인에 유지나에 관한 기사들이 떴다.
[과즙미 팡팡! 청포도보다 싱그러운 유지나!]
[유블리, 몸매가 열일했다!]
‘역시… 유지나는 진즉 이런 역할을 했어야했어.’
자신의 선택이 맞았다는 확신이 들어 흡족했다. 또 열심히 해주는 지나도 고맙고.
아니나 다를까 며칠 후 지나에게 광고 제의가 들어왔다. 그것도 속옷 광고가. 우현도 속옷 광고 제의를 받아본 건 처음이다. 은하가 아주 볼륨감이 있는 몸매는 아니었으니. 그리고 별이도 늘씬하기는 하지만 글래머형 몸매라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
지나는 별이보다는 키가 조금 작다. 하지만 동양인 치고는 서구적인 몸매라고나 할까, 비율이 좋다. 볼륨감도 있고 허리가 짧은데 잘록 들어갔기에 다리는 더 길어 보이고 라인이 더 살아나는 몸이다.
속옷 광고에 적합한 몸매임을 우현도 인정한다. 연예인들이 일은 쉬어도 광고는 쉬지 않는다고 할 정도로 광고는 대환영이고 지금 지나도 돈이 필요한 사정이 있으니 광고 제의에 엎드려 절이라도 해야 할 판이다. 하지만 아무래도 속옷 광고인 것이 마음에 걸렸다.
“속옷이면 노출을 해야 하나요? 어느 정도입니까?”
“TV CF에는 몸매가 잘 드러나는 타이트한 원피스를 입을 겁니다.”
“그 정도야 뭐, 속옷 광고가 대부분 그렇기는 하니까요. 그럼 지면 광고는요?”
“음… 지면 광고에서는 조금 더 노출이 있을 텐데요. 상의를 완전히 다 벗지는 않을 겁니다. 예를 들면 이 정도…”
업체 측 광고 담당자가 가방에서 파일을 꺼내 테이블에 펼쳐 보였다. 한 장의 사진은 모델이 셔츠 단추를 거의 다 풀어 아래쪽만 남겨두고 셔츠를 내린 상태였다. 셔츠는 허리와 팔부분만 가릴 뿐이어서 상체가 다 드러난다고 보면 된다. 또 한 장은 티를 위로 벗듯이 손으로 티를 어깨까지 끌어올린 모습이다. 역시나다.
“하아… 이건 좀 과한데요.”
지나의 사정을 감안해서 가능하면 광고를 수락할 작정으로 미팅을 잡은 거다. 하지만 우현의 기준에는 과했다. 두고두고 이 사진이 인터넷상에서 떠돌아다닐 텐데, 그것도 싫고.
“하하, 요즘 이 정도는 과한 것도 아닙니다. 그리고 흑백으로 보정해서 외국 화보 같은 고급스런 느낌으로 갈 예정이기 때문에 절대 싼티나지 않을 겁니다. 그리고 하체는 전혀 노출이 없을 거구요.”
“아, 물론 요즘 이런 정도 가지고 ‘야하다, 싼티난다’라고 하지는 않죠. 하지만… 저희 배우한테는 과하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여기 이번 신상품을 한 번 보시죠.”
담당자가 페이지를 몇 장 넘겨 속옷 사진을 보여주며 말을 계속 이었다.
“이번 신상품라인의 컨셉이 ‘여성스러움과 스포티함의 믹스매치’입니다. 2~30대 젊은 여성층이 마케팅 타깃이죠. 아시다시피 요즘 젊은 층들은 옛날과 달라서 속옷을 ‘그저 숨겨야하는 것’으로 생각하지 않아요. 왜 시스루가 유행이겠습니까? 그리고 식습관 탓에 어린 친구들도 발육이 굉장히 좋다는 건 아실 겁니다. 볼륨감 넘치는 몸매가 여성들의 워너비지요, 유지나씨 같은… 젊은 층에게 굉장히 반응이 좋을 겁니다. 지나씨가 이 속옷을 입었다고 상상해보세요. 얼마나 잘 어울리겠습니까?”
“하하, 뭐 상상해보지 않아도 충분히 압니다.”
아… 상상하고 말았다. 괜히 얼굴이 화끈거리는 느낌이다.
“그렇죠? 제가 생각할 때는 굉장히 예쁜 광고가 될 겁니다.”
고민이 됐다. 해당 광고 업체가 저렴한 광고를 취급하는 곳이었다면 미팅도 하지 않았을 거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잘 나가는 업체이기에 믿을 만하고 지나의 사정을 생각한다면 거절하면 안 되는 거다. 지나의 의사가 중요했다. 하지만 그 전에 최대한 노출 수준을 보수적으로 끌어올려 봐야 한다. 지나가 광고를 수락해도 오점으로 남지 않을 수준으로.
“으음… 무슨 말씀인지는 알겠습니다. 이해가 됐어요. 그런데… 지금까지 A급 여배우 중에 이 정도의 노출을 한 여배우는 흔치 않습니다. 지금 보여주신 사진들도 전부 일반 모델들이죠. 우리 지나가 앞으로 광고만 찍을 거라면 이 정도 노출은 충분히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앞으로 어떤 역할이 들어올지도 모르는데 지면에서 이 정도로 노출해버리면 시청자들은 유지나가 나올 때마다 지면 광고에 나온 이미지가 오버랩될 수밖에 없어요. 한 마디로 이걸로 장사 접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일부러 가까운 느낌을 주고자 ‘우리 지나’라고 표현했다.
“아니, 뭘 또 그렇게 까지 말씀하십니까?”
“아뇨, 아뇨. 그렇지가 않은 게, 한번 노출을 감행한 여배우는 그 꼬리표가 계속해서 따라다닐 수밖에 없어요. 흠… 이렇게 하는 게 어떨까요? 바스트 포인트까지 합시다. 그 정도면 속옷도 웬만큼은 나올 테니까요. 솔직히 내 배우라서가 아니라 이 정도만 해도 상당한 광고효과를 볼 수 있을 겁니다.”
어차피 저쪽이 들이민 화보는 그들이 제안하려고 한 최대치의 노출일 것이다. 당연히 그보다 더 보수적인 수준의 노출에 대한 광고 컨셉을 이미 가지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하하. 이거 못 당하겠네요. 솔직히 엄살인 줄은 알지만 저희가 양보할 수밖에 없겠습니다.”
역시나 한번 던져본 것이다. 유지나의 사정이 더 좋지 않았다면 아마 저들의 밀고 당기기에 말려들었을지도 모른다. 이래서 한물간 여자 연예인이 화보나 야한영화를 찍게 되는 거다.
“저희가 노출수준을 조금 더 보수적으로 해서 컨셉 전달하도록 하겠습니다. 시간은 조금 걸리겠지만 3,4일 내로 가능합니다. 그 부분은 걱정하지 마시고 계약 진행하시죠.”
이 바닥에서 최고의 업체이니 노출 따위로 장난칠 회사가 아니다. 사실 저들 정도의 실력이면 꼭 노출이 아니더라도 충분히 광고주에게 어필할 수 있는 컨셉을 만들 능력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물론 노출이 많으면 저들이 편하겠지만.
“그럼 금액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1년 계약으로 5억입니다. 물론 TV와 지면 광고 포함이죠.”
충분히 만족할만한 금액이다.
“좋습니다. 그렇게 하죠.”
그렇게 기분 좋은 계약을 마치고 사무실로 돌아왔을 때 한 쪽 구석에 수북하게 쌓여있는 택배무더기가 눈에 들어왔다. 보통이라면 팬들의 선물이겠거니 하고 지나쳤을 테지만 유독 상자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