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087] 두 번째 크랭크인(2)
그녀를 붙잡고 진정시킨다고 더 이상 나아질게 없을 것 같아 그대로 따라 나갔다. 별이는 임찬규 감독에게 다가가 말 몇 마디를 주고받고는 피아노 앞에 앉았다.
여느 대학생과는 다른 옷차림이 그녀를 돈 많은 금수저처럼 보이게 했지만 어딘지 모르게 딱딱하고 가라앉은 분위기는 무언가 사연이 있는 것처럼 보였다.
임찬규 감독은 그 분위기가 마음에 들었나보다. 모니터를 보며 연신 고개를 끄덕이고 미소 짓는 것을 보니 말이다. 이윽고 임 감독의 찢어질 듯한 고함소리가 촬영장을 울렸다.
“하이! 큐!”
연주곡은 쇼팽의 ‘에튀드’로 은하가 연주한 곡과 같다. 하지만 자세히 들어보니 같으면서도 달랐다. 유려하고 막힘없이 건반을 두드리던 은하에 비해 어딘가 모르게 딱딱하고 건조했다. 연습할 때 실수했던 기억이 그녀의 연주를 방해하는 것이 틀림없다.
‘어?’
그런데 임 감독이 컷을 외치지 않는다. 컷을 외치려고 손을 반쯤 들었다가 더 이상 올리지 않고 반쯤 들어 올린 상태로 머뭇거렸다. 그리고 그 옆에서 헤드셋에 집중하는 세바스찬 비욜트 음악감독 역시 미간을 잔뜩 찌푸리고 음악에 집중하고 있었다.
결국 별이에게 해당된 30초 정도의 연주를 모두 마무리할 수 있었고 컷 싸인을 낸 임 감독은 음악감독과 긴 시간동안 통역을 거처 대화를 나누었다.
“한 번 더, 오케이?”
“네.”
임찬규 감독의 외침에 별이가 입술을 지그시 깨물며 대답했다. 자신의 연기가 부족하다는 것을 알기에 더 잘해야 한다고 압박감을 느끼는 것이다.
“하이, 큐!”
한번 쳐봤기 때문인지 방금 전보다는 훨씬 부드러워졌다. 표정도 전보다 더 나아졌다. 그런데 임 감독과 세바스찬 감독은 무언가 마음에 들지 않는 표정이다.
“자, 한번만 더 갑시다!”
세 번째는 더 나아졌고 네 번째에는 또 더 나아졌다. 보통은 감독이 디렉션도 주지 않고 계속 다시 한 번을 외치면 배우는 멘탈이 흔들릴 수밖에 없는데, 더 나아지는 별이를 보면서 그녀의 멘탈에 찬사를 올리고 싶을 정도로 대단하다 생각했다. 하지만 임 감독과 세바스찬 감독의 얼굴은 더욱 어두워져갔고 급기야 고개를 흔들며 헤드셋을 벗어버렸다.
“잠깐만 쉬었다 가겠습니다.”
급격히 어두워진 표정을 하고 있는 별이에게 달려가 비타민 드링크제를 따 건네며 그녀를 이끌고 모니터를 하는 감독 자리로 왔다.
“아, 김별씨, 잘했어. 잘 했는데… 우리 처음 느낌으로 다시 어려울까?”
그제야 우현은 어째서 점점 연주가 좋아지는데도 갈수록 감독의 마음에는 들지 않았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별이가 연기하는 하연이라는 인물 자체가 천재적인 재능을 가진 주인공을 질투하면서 자신도 더 노력해가는 역할이다. 그런데 별이의 딱딱하고 감정 없는 연주에서 부모에 의해 억지로 피아노를 쳐야했던 하연의 삭막한 내면을 캐치한 것 같다. 확실히 센스 있는 건 알아주어야 한다.
“처음이요?”
별이가 당황스러울 만하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만약 별이가 연습량이 부족했다면 그녀의 연주가 딱딱하고 감정 없는 것이 아니라 그냥 형편없는 연주가 됐을 거다. 하지만 수많은 연습으로 하기 싫은 연주를 억지로 하는 모습으로 자연스레 비쳐진 것이 다행이자 행운이다.
“그래, 조금 어려울까? 아까 그렇게 연주를 하니까 확실히 은하씨랑 캐릭터가 다르게 두드러져 보였거든. 여기 계신 세바스찬 음악감독도 같은 생각이고 말이야. 세바스찬 감독은 너의 툭툭 끊기는 그 연주가 마치 마음이 죽은 사람이 기계적으로 치는 그런 느낌이라고 했어. 아까 이렇게 쳤잖아. 당! 다당! 다다단당! 이렇게 말이야. 아, 물론 마지막에 가서는 방금 쳤던 것처럼 완숙한 연주를 해보여야지. 그래야 우희와 선의의 경쟁을 하며 성숙해진 내면을 보여줄 수 있을 테니까. 무슨 말인지 이해 돼?”
임 감독은 마치 자신이 피아노를 치는 것처럼 손가락을 움직이며 표현했는데 그 모습이 꽤나 우스꽝스러워보였다. 입술을 깨물고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던 별이는 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희미한 미소를 보였다. 자신의 부족함이 연기에 도움이 됐다는 게 신기하기도 하고 안심이 되기도 했을 거다.
“네, 이해될 것 같아요.”
“그럼 한 번 더 해보자. 처음에는 연주 느낌은 아주 좋았는데 표정이 너무 어색했어. 조금 더 하연에게 빠져들어 봐. 그… 왜, 있잖아? 막 하기 싫어, 그런데 연습은 해야 되니까 치긴 하는데 모든 게 다 짜증스러운 거야. 하다못해 지금 치고 있는 피아노의 생김새까지 마음에 안 드는… 뭔지 느낌이 가니?”
“알 것 같아요.”
“그래, 다시 한 번 해보자. 조명 다시 대고! 음향 스탠바이 해!”
스태프들이 부산스럽게 움직이고 별이는 다시 피아노 앞에 앉았다.
“자, 감정 잡고 준비되면 싸인 보내!”
임찬규 감독의 외침에 별이가 눈을 감고 생각에 잠겼다. 임 감독의 디렉팅을 완전히 이해하고 하연이라는 인물에 빠져들기 위한 시간인 거다. 대략 5분 정도가 지나고 스태프들의 얼굴에 슬슬 짜증스런 표정이 나올 때쯤 별이가 눈을 뜨고 고개를 까딱였다.
“야 인마! 마이크 제대로 들어! 모니터에 나오잖아! 정신 차리고! 자, 하이! 큐!”
별이 머리 위로 커다란 마이크를 들고 있던 스태프를 혼쭐낸 임 감독의 큐싸인이 떨어지고 별이의 손이 피아노 건반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오호…’
진심으로 감탄했다. 별이의 얼굴은 하기 싫은 숙제를 억지로 하는 학생이 되어 기계적으로 건반을 두드리고 있었는데 그 연주 실력이 상당해 별다른 상황 설명 없이도 그녀의 캐릭터를 직관적으로 설명해주었다.
“컷! 오케이!”
이후로도 세 번의 재촬영 끝에 오케이 싸인이 떨어졌다. 임찬규 감독과 세바스찬 음악감독이 동시에 미소 짓는 걸 보니 충분히 만족할 만한 장면이 나온 것 같다.
얼른 별이를 그녀의 이름이 써진 간이의자에 앉히고 물을 건넸다. 오케이 싸인이 떨어졌기에 한 고비 넘겼다고 생각했는지 상기된 그녀의 얼굴에는 처음과 같은 불안함은 보이지 않았다.
“잘했어. 아주 잘했어.”
“진짜요? 헤헤, 다행이다. 처음에 연주하는데 중간에 틀린 거예요. 혹시 알아챘어요?”
긴장이 풀려서 그런지 말이 많아졌다. 컨디션이 정상으로 돌아온다는 뜻이니 좋은 현상이다.
“아니, 난 전혀 몰랐어. 난 완전 잘 친다고 생각했는데?”
“정말요? 저는 속으로 ‘망했다!’, ‘망했다!’ 계속 외쳤다니까요? 그런데 감독님이 컷을 안 하니까 저는 또 저대로 손이 굳어가지고… 하… 너무 힘들었어요.”
“고생했어. 그래도 그 어색했던 연기가 완전히 전화위복이 돼서 오히려 더 잘 됐잖아. 아까 마지막 연주 하는 걸 보니까 진짜 연기자 같더라.”
“헤헤헤, 진짜요? 하아… 이제 좀 살 것 같아요. 아까 은하 언니 연기하는 거 괜히 본 것 같아요.”
“안 돼. 그래도 봐야 해. 상대 연기도 안 보고 어떻게 같이 대사를 치겠어? 더 부담을 받게 되고 기가 죽어도 무조건 보고 조금이라도 더 배워.”
“농담이었어요. 걱정하지 마세요.”
그녀가 환하게 웃으며 다음 연기할 씬의 대사와 동선을 다시 체크했다. 이후 촬영은 어렵지 않게 진행됐다. 피아노 치는 씬이 끝났기에 부담 없었기 때문이다.
유은하와 붙는 씬 역시, 전에 그렇게 기가 쎄다는 강소연과도 붙어봤을 만큼 배짱이 두둑하기에, NG 한번 없이 해치워버렸다. 단지 조금이라도 더 좋은 장면을 찍고 싶은 임 감독의 요청에 몇 번 다른 감정으로 연기를 했던 것들은 있었다.
그렇게 촬영을 마치고 다음날이 되니 별이의 얼굴에 한결 여유가 생겼다. 우현과 상준에게 농담도 하는데 억지로 하는 농담이 아니라 진짜 기분이 좋아 보였다.
“이제 배우 티가 나네.”
“지금까지는 영 아니었다는 거네요?”
“그럼, 당연하지. 이제 신입 티를 벗은 것 같아. 하지만 이제부터가 시작인 거 알지? 몸가짐 조심하고 나 없는 곳에서 함부로 문제될 수 있는 말 하지 말고. 최대한 말수를 줄여야 해.”
“알겠어요. 근데 좀 갑갑해요.”
“갑갑하긴… 너 걸그룹 할 때 핸드폰도 못가지게 했지? 나는 안 그러잖아.”
“그래도 SNS는 못하게 하잖아요.”
“SNS는 많이 배우고 상당한 위치에 있는 사람들도 간혹 실수해. 자칫 말 한번 실수하면 지금까지 얻은 이미지가 모두 날아가 버릴 거야. 자중해야 해.”
“치, 알았어요.”
그 때 조용히 운전하고 있던 상준이 정면을 주시하면서도 한 마디 했다.
“대표님, 혹시 들으셨습니까? 유지나씨 촬영장 지금 뒤집어졌다는데요?”
“뒤집어져? 왜?”
“배강석이가 피디랑 한바탕 한 것 같습니다. 뭐, 안 봐도 또 촬영장 늦게 가고 그러다가 빡친 피디가 뭐라고 했겠죠. 지금 배강석 소속사에서 촬영 하네, 못 하네 하면서 촬영장에 안 보낸다고…”
상준은 요죠체를 쓰라고 해도 아직도 저 다나까체를 완전히 버리지 못했다.
“미친것들… 넌 어떻게 알았어?”
“아는 놈이 거기 스태프로 있거든요. 그런데 대표님은 모르셨어요? 진명이 형한테서 연락 없었습니까?”
“응, 나 걱정할까봐 안 알렸나 보네.”
유지나와 직접적인 관계가 없었기에 연락을 안 한 것 같다. 사실 우현이 알아봤자 해결할 수도 없고 끼어들 이유도 없다. 저번에 이소은 같은 경우는 말은 하지 않았어도 별이가 의도치 않게 그녀의 신경을 건드렸던 것을 누구나 다 알고 있었기에 그가 나섰지만 지금은 상황이 다르다.
우현은 즉시 진명에게 전화를 걸었다.
“촬영장 뒤집어졌다며?”
“네? 네. 신경쓰실까봐 나중에 말 하려고 했는데요.”
“신경 쓰라고 대표 자리에 앉아 있는 거지. 지나씨 촬영은?”
“단독샷 위주로 촬영할 거긴 한데… 아마 오늘 저녁쯤 돼서는 그것도 끝날 것 같아요. 민유리 작가가 원체 대화를 많이 집어넣잖아요. 혼자서 몰아 찍을만한 씬이 몇 개 없네요.”
“그래, 지나씨한테 너무 신경 쓰지 말라고 하고, 오히려 촬영 몰아서 하고 쉴 수 있는 시간 생겨서 좋을 수도 있다고 얘기 좀 해줘. 이럴 때는 배우한테 부정적인 말하면 안 된다. 같이 스트레스 쌓이고 그 화가 다 너한테 와, 알지?”
“그럼요. 그리고 우리 지나는 저한테 화풀이 안 해요.”
“크흠… 알았다.”
괜히 은하 생각이 났다. 마치 은하 성격이 더럽다는 것을 광고한 것 같아서 살짝 죄책감이 들었지만 그렇다고 없는 말을 한 것도 아니기에 조금 억울하기도 했다.
“아, 그리고 오늘 저녁 촬영 끝나고 모니터링이나 같이 하자고 해. 어차피 끝나고 스케줄 없을 거잖아?”
“그럼요. 지나도 좋아할 겁니다. 말은 안 해도 대표님이 신경써주시면 배우 입장에서는 힘이 되잖아요.”
“그래, 알았어. 이따가 보자.”
끊고 나서 생각해보니 꼭 나쁜 일도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 기회로 유지나에게 신경 써줄 수 있게 됐기 때문이다.
어차피 배강석은 고작해야 하루, 이틀 신경전을 벌이다 못이기는 척 나올 거다. 제작진과 소속사간의 줄다리기가 끝나면 그도 전처럼 대놓고 늦게 오지는 못할 것이고 대신 제작진은 배강석의 스케줄을 다른 배우들에 비해 조금 더 유리하게 배정해줄 것이다.
이소은 때와 같이.
“오늘도 아침 안 먹었어?”
촬영장에 도착하니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은하가 또 다시 샌드위치를 건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