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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86] 두 번째 크랭크인(1)
“야! 시끄럽고 빨리 보험 부르라고.”
배강석의 위협적인 말에 경수가 다시 움츠러들며 운전석으로 들어가 보험회사 번호를 찾아 전화를 걸었다. 그 모습이 옛날 어릴 적 친구들에게 놀림 받던 모습과 비슷해 짠했다.
“배강석씨는 택시타고 촬영 현장에나 가시죠. 현장 정리는 보험사 직원 오면 이 친구랑 같이 할 테니까.”
우현의 말에 배강석의 표정이 미묘해졌다. 촬영 현장에 늦었다는 걸 언급한다는 것은 우현이 일반인이 아니라는 뜻이기 때문이다.
“누구신데 촬영장 얘기를 꺼내세요?”
“저 유지나 소속사 대표입니다. 지금 콜타임 2시간도 넘게 늦으셨다면서요? 이러고 있으면 되겠어요?”
“뭐, 뭐라구요?”
“현장에나 빨리 가시라구요. 지금 우리 지나가 2시간 넘게 기다리고 있는데 생각이란 게 있으면 지금 여기서 이러면 안 되죠.”
시뻘게진 얼굴로 씩씩거리며 노려보던 그는 말로는 어찌할 수 없다고 느꼈는지 바로 자리를 떴다. 그리고 이곳에서 멀리 떨어진 곳까지 걸어가 택시를 잡아타는 것이 어렴풋이 보였다.
“넌 왜 저런 놈 밑에서 일하냐?”
“형, 진짜 오랜만이에요. 그런데 진짜 안 다쳤어요?”
“괜찮아, 인마. 도대체 어떻게 운전했길래 그랬어?”
“그게… 늦었다고 빨리 밟으라고 막 그래서…”
안 봐도 비디오다. 본인이 늦게 준비해놓고 현장에서 미친 듯이 닦달하니까 그제야 로드에게 빨리 달리라고 채근한 것이겠지.
“그래도 앞은 보고 다녀야 할 거 아냐?”
“전날 잠도 제대로 못 자고 그래서… 깜빡 졸았지 뭐예요. 하여튼 미안해요, 형.”
“됐어. 안 다쳤으니까 너무 마음 쓰지 마. 도대체 몇 시간 잤기에 졸음운전을 해?”
“어제부터 지금까지 눈 한 번 붙이지 못했어요.”
“에휴…”
우현이 고모집에서 학창시절을 보낼 때 중, 고등학교 내내 친구를 사귀지 않았다. 누가 그를 따돌림 하거나 괴롭혀서가 아니다. 이상하게 친구들과의 이야기에 흥미가 없었고 유치함만을 느꼈기 때문에 스스로 아웃사이더를 자청했던 거다.
그런 그가 학창시절에 유일하게 말을 걸어준 이가 바로 경수다. 같은 동네에 살았던 경수는 항상 친구들에게 괴롭힘을 당하면서도 주말동안 동네 뒷산에 있는 고아원에서 봉사활동 하는 걸 빼먹지 않을 정도로 착했다. 그래서 종종 경수를 괴롭히는 친구들을 혼내주기도 했고 가끔은 분식집에서 떡볶이도 사줄 정도로 친근하게 대했었다.
“그런데 형 진짜 대표예요? 우와… 대단해요.”
“대단하긴. 그나저나 너는 얼굴이 옛날과 달라진 게 하나도 없네.”
어렸을 때도 겉늙어 보인다는 말을 자주 듣던 경수는 얼굴이 변한 게 전혀 없을 정도로 그대로였다. 아마 얼굴이 변했다면 한 번에 알아볼 수 없었을 거다.
“하하하. 형이 예전에 그랬잖아요. 어렸을 때 얼굴이 삭으면 나이 들어서는 그 얼굴 그대로 간다고. 그게 맞는 것 같아요.”
그와 이런저런 옛날이야기를 하는데 렉카차와 보험회사에서 나와서 사고현장을 빠르게 정리했다. 우현은 그를 근처 커피숍으로 데리고 가서 어떻게 이 바닥에 들어오게 된 건지 물어보았다.
“그냥 할 줄 아는 게 운전밖에 없었거든요. 군대에서도 운전병이었어요. 그래서 찾다보니까 이 회사까지 오게 됐죠. 이제 반년도 안 됐어요.”
“배강석 성격 거지같지?”
“네. 진짜 장난 아니에요.”
“그래도 어쩌겠냐. 잘 버텨야지. 혹시 오늘 사고로 회사에서 뭐라고 하면 그냥 나와. 안 그래도 우리 회사 로드 하나 필요하거든.”
“진짜요?”
“응. 월급은 최소 네가 그곳에서 받는 것보다는 많이 쳐줄 수 있으니까 잘 생각해봐.”
그 자리에서 진지하게 고민하는 걸 보면 배강석한테 얼마나 당했는지 견적이 나왔다. 배강석이 원래 코디와 매니저를 수시로 바꾸기로도 유명하다.
자리를 오래 비우면 혼난다는 경수의 말에 얼른 그를 배강석한테 보내고 사무실로 돌아왔다. 민상욱을 영입하면서 로드를 하나 더 뽑아야겠다고 생각했었는데 마침 경수를 만나게 되니 낮의 사고가 꼭 나쁜 일만은 아니었다는 생각이 든다. 물론 다시는 경험하고 싶지 않은 일이지만.
며칠이 지나 별이와 은하의 ‘피아니스트’가 크랭크인에 들어갔다. 이번 영화에 큰 기대를 걸고 있는 우현은 이번에도 별이와 아침부터 동행했다. 별이는 첫 촬영이라서 그런지 잔뜩 긴장한 모습이었다.
그들이 촬영장에 도착했을 때는 아직 보조연기자도 오지 않았을 정도로 이른 시간이었다. 첫날이라서 빨리 움직였는데 너무 빨리 왔나보다. 우현과 별이는 스태프들에게 돌아가며 인사하고 현장에서 지급해준 의상으로 갈아입었다.
원래 시나리오는 고등학생이 대학에 진학하는 내용이었지만 이번에 다시 수정하면서 대학생 신분으로 유명 콩쿨에서 입상하는 내용으로 바뀌었다. 그래서 별이의 신분은 바로 여대생. 은하와 같은 대학에 다니는 설정이다.
따라서 굳이 의상팀이 지급해주는 의상이 아니라 자체적으로 옷을 입고와도 상관없었지만 최대한 감독의 의도를 따라주기 위해 자체 의상을 생각하지는 않았다. 대학생 신분이지만 속칭 금수저에 퀸카 설정이라 그런지 꽤 비싼 옷이다.
“대표님 옛날 생각나는 거예요?”
우현이 지나가는 대학생들과 캠퍼스를 둘러보는 모습에 별이가 묻는다.
“어? 아니, 나 대학 안 나왔어. 그래서 대학은 나한테 일종의 동경과 낭만의 대상이거든. 부러워서 바라본 거야.”
“아… 죄송해요.”
“아니야, 그게 뭐라고. 얼른 감독님한테 가 봐. 기다리신다.”
이쪽을 힐끔 쳐다보는 임 감독을 보니 촬영 전부터 별이에게 할 말이 있는 것 같다. 영화 촬영에 들어가서는 감독과 최대한 많은 대화를 나누는 게 중요하다. 그래야 감독의 의도를 정확히 알고 많은 씬에 등장할 수 있기 때문이다.
임찬규 감독이 무언가를 열심히 설명하고 곁에서 진지하게 듣는 별이의 모습을 보다가 다시 시선을 돌려 캠퍼스를 구경하는데 누군가 그의 옆구리를 툭 쳤다.
“어?”
“뭘 그렇게 얼이 빠져서 봐?”
은하였다. 두 손에 탄산수를 하나씩 들고 있다가 그 중 하나를 우현에게 건넨다.
“얼이 빠지긴…”
“왜? 부러워서 그래?”
우현이 대학을 다니지 않은 걸 은하는 알고 있다. 그래서 예전에는 가방끈이 짧은 매니저라고 우현을 놀리기도 했었다.
“아니.”
“아니긴… 너무 부러워하지 마. 저렇게 좋아 보여도 고민을 한가득 안고 다닐 테니까.”
은하도 대학을 다니긴 했지만 중간에 배우를 하게 되면서 학업을 포기했다. 만약 집안 사정으로 돈이 급하지 않았더라면 그녀가 과연 배우를 했을까?
“안 부럽다니까… 오늘 그렇게 입으니 꼭 예전 대학생 때 같다?”
문득 처음 그녀를 만났을 때가 떠올랐다. 대학로에서 수업을 마치고 기다리던 그녀를 픽업했을 때, 마치 마음에 안 드는 직장상사를 대하듯이 억지로 웃어 보이던 그녀의 얼굴은 아직도 기억에 생생하다.
“후훗! 왜? 반하겠어?”
“크흠… 너도 얼른 가 봐라. 임 감독의 눈초리가 심상치 않다. 스태프한테 인사는 했어?”
“하여튼 잔소리는… 인사 할 거였어. 오빠가 하도 넋 놓고 있으니까 그냥 지나치지 못한 거지.”
눈을 흘기며 자리를 뜬 은하는 임 감독을 비롯해 스태프들에게 일일이 인사하며 기운을 북돋웠다. 촬영장에서 다시 그녀의 연기를 본다고 생각하니 감회가 새로웠지만 이내 그녀에게서 눈을 떼고 별이에게 집중했다.
은하는 알아서 잘 할 거다. 중요한 건 별이가 얼마나 이 영화에서 포텐을 터뜨리느냐다.
첫 씬은 별이가 피아노 치는 장면을 은하가 몰래 훔쳐보다가 아무도 없을 때 혼자 피아노를 쳐보는 장면이다. 둘 다 처음으로 자신의 피아노 실력을 드러내는 것이기에 촬영장에는 은근히 긴장감이 돌았다. 특히 이곳 촬영장에는 음악감독으로 계약 맺은 세바스찬 비욜트가 통역을 대동한 채로 참석해 임찬규 감독과 연신 말을 주고받고 있었다.
은하가 먼저 촬영하게 됐다. 햇빛이 들어오는 연습실 창문 아래에서 피아노에 차분히 앉아 있는 은하의 모습은 신비로운 느낌마저 들었다. 과연 어느 정도의 실력을 보여줄 것인가. 이윽고 슬레이트가 떨어지고 감독의 큐싸인이 울려 퍼졌다.
“하이, 큐!”
유려하게 건반을 두드리는 은하의 손가락은 쇼팽의 ‘에튀드’를 연주했다. 고급과정의 곡이라고 들었는데 과연 화려한 기교가 필요해보였다. 하지만 은하는 아주 어려워 보이는 부분까지도 잘 살리고 있어서 마치 진짜 피아니스트 같았다.
“컷!”
비록 완주를 하지 않은 30초 정도의 짧은 연주였지만 세바스찬 비욜트 음악감독과 임찬규 감독은 모니터에서 시선을 떼고 헤드셋을 벗으며 긍정적인 눈빛을 주고받았다. 마음에 들었다는 뜻이다.
조금 더 좋은 장면이 나올 수도 있다고 생각했는지 감독은 몇 차례나 ‘한 번 더’를 외치더니 결국 그 장면만 다섯 번을 더 찍으며 은하의 진을 빼놨다.
“김별씨, 스탠바이 해주세요!”
조감독의 외침에 긴장하고 있던 별이가 전용 의자에서 일어나는데 손끝이 파르르 떨리는 게 보였다. 한 시간 전까지만 해도 아무렇지도 않게 기다리던 그녀였는데 은하가 연기하는 모습을 보자 자신도 모르게 몸이 굳어버린 것 같았다.
“잠시만요.”
우현이 조감독에서 조금만 기다려달라는 신호를 보내고 별이의 손목을 붙잡아 아무도 없는 빈 강의실로 들어왔다.
“갑자기 긴장됐어?”
“모르겠어요. 그냥 막 떨리네요. 후웁… 후…”
한차례 심호흡을 하며 긴장을 풀어보려고 한다. 우현은 그런 그녀를 빤히 바라보았다.
“잘 할 수 있겠죠?”
우현에게 물어보는 것 같지만 스스로에게 물어보는 거다.
“이기려고 하지 마. 너 지금 이기려고 하는 것 같아.”
“제가요? 은하 언니를요?”
말도 안 된다는 듯이 말했지만 우현을 알고 있다.
“응.”
뭐라 대꾸하려던 별이는 잠시 고개를 숙이며 말이 없어졌다. 우현은 그녀의 어깨를 가볍게 잡으며 말했다.
“연기는 스포츠가 아니야. 답이 있는 것도 아니고. 잘하고 싶은 마음은 알지만 꼭 누구를 이기려고 하지 않아도 돼. 그냥 네가 지금까지 연습한 것들을 최선을 다해서 보여주기만 하면 돼.”
한번 긴장하기 시작하면 아무리 주위에서 편안한 마음을 가지라고 해도 쉽게 진정되지 않는다. 타고나기를 배포가 있게 타고난 사람이 아니라면 말이다.
“알고 있어요. 저만 잘하면 된다는 거. 그런데 자꾸 그런 생각이 들어요. 제가 못하면 실망하실 거죠? 아니, 실망하지는 않는다고 하더라도 분명 비교하실 거예요. 언니가 처음 데뷔했을 때부터 같이 지내왔잖아요. 대표님은 아니라고 해도 무의식중에 저랑 언니를 비교할 수밖에 없어요.”
실수였다. 별이 앞에서 은하와 잘 지내는 모습을 최대한 들키지 말았어야 했다. 은하가 샌드위치를 건네줬던 이후로 말은 하지 않았어도 속으로 별생각을 다 했을 거다. 하지만 이제는 늦었다.
“왜 그렇게 생각해? 너와 은하는 달라. 생긴 것도 다르고 감정, 발음과 발성 전부 달라. 애초에 비교할 게 없어.”
“대표님을 믿지 못하는 게 아니에요. 사람인 이상 비교하게 되는 건 어쩔 수 없는 거니까… 곡이 너무 어려워서 연습할 때도 자꾸 실수가 나왔는데 그것 때문에 너무 신경이 쓰여서 그랬어요. 죄송해요.”
“아니야. 네가 죄송할 게 아니지. 내가 미안해.”
별이가 불안한 눈빛으로 문을 열고 걸어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