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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85] 새 영화 시작(4)
드디어 민상욱과 전속계약을 체결했다. 근처에서 함께 점심을 먹고 그를 별이가 연기공부를 했던 학원으로 보냈다. 당분간 가족을 제외한 모든 사적인 연락은 차단하고 연기에만 매진하는 게 어떻겠냐고 물었는데, 애초부터 핸드폰 번호를 바꾼 이유도 이번에 직종을 옮기면서 다른 곳에 정신을 분산시키기 싫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 마음가짐이 아주 마음에 들었다.
주말에 ‘피아니스트’가 크랭크인에 들어가기 때문에 그 전까지는 별이에게 가급적으로 연락조차 하지 않으려 한다. 부족한 연습시간과 자기 자신만의 캐릭터 연구가 필요한 시점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유니에게 신경을 써주려 했건만 이미 유니는 전국을 돌며 망치와의 무대에 오르거나 행사를 뛰고 있었다.
전화해서 응원이라도 해주고 싶었지만 쉬는 시간엔 피곤에 절어 곯아떨어질 게 분명하기에 그만 두기로 했다. 한창 자고 있을 때 전화가 오면 그것만큼 짜증나는 일도 없을 테니.
어찌할까 생각하다가 처음으로 유지나가 찍는 드라마 촬영현장에 방문하기로 하고 아침에 미리 밥차 업체에 연락해두었다.
민유리 작가는 작품 ‘천국 같은 지옥’으로 역시나 이번에도 평타 이상의 시청률을 이끌어내 초가을 진한 멜로 감성을 보여주고 있는데 유지나의 섬세한 연기가 맞아 들어가며 월화극 강자로 떠올랐다.
KMTC의 ‘천방지축 그녀’는 KBC ‘천국 같은 지옥’이 끝난 다음에 하기 때문에 시간대가 달라 민망한 상황을 피할 수 있어서 아주 다행이었다.
“어머! 여기는 웬일이세요?”
마침 본인 씬이 끝나고 잠시 휴식을 하던 유지나가 우현을 보며 반색했다. 자신의 촬영장을 방문한 적이 없었기에 무슨 일이라도 있는 건가 하는 눈빛이기도 했다.
“그냥 한번 와봤어요. 내가 너무 무신경 했던 것 같기도 하고.”
“알긴 아셨네요? 전 ‘내가 유령회사랑 계약했나’ 했었죠.”
“하하하, 미안해요. 내가 정신이 없었네요.”
“솔직히 섭섭했습니다. 너무 남 취급하시는 것 같았다구요.”
지나의 곁을 떠나지 않는 진명도 농담반 진담반으로 투정을 부렸다.
“그래, 미안해.”
“그렇게 서 있지 말고 앉아요. 아직 날씨 덥잖아요.”
유지나 전용 테이블과 차양이 있기에 우현도 그녀의 맞은편에 편히 앉았다. 9월 중순을 넘어가는데도 불구하고 날씨는 아직 무더웠다.
“점심때 밥차 보내줘서 잘 먹었어요. 덕분에 어깨에 힘 좀 들어갔지 뭐예요?”
“잘 먹었다니 다행입니다. 사실 생각해보니까 유지나씨 촬영장에 밥차도 안 보내줬더라구요. 소속사 사장으로서 무신경 했던 거 반성하고 있습니다.”
“너무 반성하시니까 갑자기 무서워지네요. 적당히 하세요.”
“하하. 네, 그러죠. 그나저나 시청률 잘 나오더라구요. 기사에도 유지나씨 연기에 대한 호평이 가득하구요. 이번 작품 선택하길 잘 했습니다.”
“역시나 민유리 선생님답죠.”
그렇게 오랜만에 만나 화기애애하게 대화하고 있는데 촬영장의 분위기가 부산스러워졌다.
“아이고, 또 늦으시나보네.”
진명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투덜거리는 걸 보니 뭔가 일이 있는 모양이다.
“무슨 일인데 그래?”
“배강석씨요. 오늘 또 늦네요. 지금 저기 조감독이 얼굴이 시뻘게져가지고 고함을 지르는 게 벌써 한두 번이 아니에요.”
“아, 배강석? 그 친구야 뭐… 원래 배강석한테는 콜타임을 2시간 일찍 알려줘야 하는데, 조연출이 그걸 몰랐나?”
다른 주연급 남자배우에 비해 큰 키는 아니지만 정감 있는 마스크와 젠틀한 이미지 때문에 상당한 인기를 구가하고 있는 톱 배우다. 문제는 촬영장에 결코 제 시간에 온 적이 없다는 것이다. 지각으로는 이미 업계에서 유명하다.
아무리 사정하고 달래도 결코 제 시간에 촬영장에 온 적이 없는 배우였기에 조감독이 눈치껏 콜타임을 당기는 게 일반적인 대응이다. 물론 걸리면 얼굴 붉히는 일이 생길 수도 있지만 거기서 기죽고 들어가면 작품 끝날 때까지 스태프들과 다른 배우들이 죽어나갈 수밖에 없다.
그리고 이 바닥에서 좀 떴다 하는 이들 중에 콜타임 제 시간에 따박따박 나타나는 친구들 별로 없다. 나이가 많고 적음을 떠나 거기서 인성이 드러나는 법인데 말이다. 지각을 자존심으로 안다.
“글쎄요. 저도 이번 피디랑 조연출과는 처음으로 같이 일해서 거기까지는 잘 모르겠네요.”
진명이 머리를 긁적이며 시선을 피한다. 본인이 잘못한 것을 아는 모양이다.
“너, 내가 피디와 조연출에게 관심을 가지고 관계를 쌓아가라고 말했냐? 안 했냐? 돈 필요하면 회사에서 준다고 했잖아.”
“죄송합니다. 요새 정신이 없어서…”
“정신은 지나씨가 없지, 왜 네가 없어?”
지나가 보다 못해 정색하고 혼내는 우현을 말렸다.
“저 때문이에요. 사람들도 볼 수 있는데 그만 해요.”
“알겠어요. 저 배강석 문제는 제가 도와드리고 싶어도 도와드릴 수가 없는 문제네요. 저기 제작진이 치고 박고 싸우든지 해서 풀어야 할 문제니까요.”
“저도 알고 있어요. 그냥 포기하고 있죠. 그런데… 저 배강석씨 하고는 다시는 같이 하고 싶지 않네요. 연기하다가 불쑥불쑥 짜증이 치밀어 오른다니까요?”
그러고 보면 신기한 게 유지나가 촬영장에 늦게 왔다는 말은 들어본 적이 없다. 보통 촬영장에 지각하는 쪽은 남자배우보다 여자배우가 더 많은데 이유는 아무래도 메이크업과 헤어를 만지는데 남자보다 오래 걸리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그녀가 항상 제 시간에 나타나는 것은 그만큼 성실하다는 방증일 것이다.
“하하, 알겠습니다. 다음 작품부터는 꼭 배강석 만큼은 무조건 커트하도록 할게요. 혹시 촬영하는데 더 필요한 거 있으신가요?”
“이제 와서 괜히 미안해지신 거예요?”
“네, 유지나씨 얼굴 보기가 미안해져요.”
“아하하. 그럴 필요까진 없는데… 뭐, 좋아요. 주신다니까 받도록 하죠. 물건 같은 건 필요 없고요, 다른 게 떠오르는데…”
“다른 거요? 뭔데요? 편하게 말씀하세요.”
“저 다음에는 영화 한번 찍고 싶어요.”
“영화요? 전에 영화 찍어본 적 있잖아요? 그것도 몇 개나.”
그녀는 영화를 몇 개 찍기는 했다. 하나는 조폭물로, 무려 그녀가 킬러가 되는 역할이었는데 망했다. 그리고 나머지는 세 명의 젊은 여성이 나와 한국판 ‘섹스 앤 더 시티’와 비슷한 풍의 분위기로 만들었는데 역시나 망했다.
“아시면서 그러세요? 제 흑역사나 마찬가진데요. 설마 지금 또 들출 건 아니죠?”
새침하게 말하는 그녀. 아무래도 은하와 별이가 같이 들어가는 영화 ‘피아니스트’의 기사를 보고 저러는 것 같다.
“해보고 싶었던 시나리오가 있었던 거예요?”
“꼭 그런 건 아닌데… 그냥 작품 끝나고 쉬기 싫어서 그래요.”
“대단한데요? 체력이 되겠어요?”
보통 드라마 한편 하고나면 최소 한 달은 쉬는 게 일반적일 정도로 많은 체력을 소모한다. 지금껏 작품을 못했기 때문에 그러는지, 아니면 욕심이 많은 건지 모르겠지만 뭐가 됐든 배우에게 있어 나쁘지 않다.
특히 배우는 욕심이 많아야 한다. 남 잘 되는 거 보고 배도 아파야 하고 내가 남들보다 못한 연기를 보일 때는 분할 줄도 알아야 한다. 그래야 성장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제가 다른 건 몰라도 체력 하나는 타고났어요. 어디 가서 잘 다치지도 않는 다니까요? 후훗!”
남자처럼 알통을 보여주는 포즈를 취하는 걸 보니 웃음이 터져 나왔다.
“좋아요. 지금 드라마 다음 달이면 마무리 될 테니 슬슬 시나리오 보고 있을게요.”
“그래도 저 지각쟁이 덕분에 편하게 이야기 할 수 있었네요.”
“에휴… 드라마 끝나고 누가 던져버렸으면 좋겠네요.”
“하하하.”
촬영장을 떠나오면서 다시 한 번 유지나에게 너무 무심했음을 느꼈다. 아무리 다른 친구들과 달리 어느 정도 위치에서 들어왔다고는 해도 분명 소속사 대표로 그녀 옆에서 도와줘야 하는 것들이 있었을 것이니 말이다.
다음 영화 시나리오를 고를 때는 별이의 영화를 고른 것만큼이나 신경을 써줘야겠다는 생각이 들 때쯤 언뜻 검은 그림자가 모습을 보였다.
쾅!
끼이이익!
머릿속에 어떻게 움직여야 한다는 것도 생각나지 않았다. 그저 본능적으로 핸들을 틀며 브레이크를 밟으니 팽이처럼 몇 바퀴를 회전한 차가 기적적으로 온전히 멈춰 섰다.
너무 놀라서 한동안 멍하니 정면을 바라보다가 몸 여기저기를 만져보았다. 놀란 상태이긴 했지만 특별히 다친 곳은 없는 것 같았다.
“x팔! 누구야!”
한 순간에 천당과 지옥을 오간 것 같은 느낌에 차문을 박차고 나와 차량 상태를 확인하니 차 오른쪽 엉덩이 부분이 박살난 것이 보였다. 조금만 타이밍이 빨랐다면 진짜 큰일 날 뻔했다는 생각에 화가 끝까지 치밀었다.
반사적으로 뒷목을 잡고 사방을 둘러보니 사고를 낸 것으로 추측되는 검은색 스타크래프트 밴이 깜빡이를 켜고 도로 갓길에 사선으로 세워져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그런데 운전석에서 엉거주춤하게 내리는 이를 본 순간 우현은 두 눈을 의심했다.
“경수?”
우현이 눈을 가늘게 뜨고 걸어가는데 차 옆문에서 건장한 체격의 청년이 비틀거리며 나오더니 곧바로 운전자의 머리를 후려쳤다.
“야, 이 미친 새끼야! 죽으려고 환장했어?”
이후로 차마 듣기도 거북한 쌍욕을 퍼부어대는 이는 톱배우인 배강석이다. 시뻘게진 얼굴로 쏘아붙이더니 다시 한 번 운전자의 머리를 후려치는데 보다 못한 우현이 가서 그의 손을 잡아챘다.
“그만하시구요. 일단 보험이나 부르세요.”
“아 씨…”
화를 내려던 그는 우현이 걸어온 방향을 봤는지 팔을 내렸다.
“아, 피해자시죠? 죄송합니다. 어쨌거나 우리 잘못인 것 같네요. 다친 곳은 없으세요? 그리고 일단 알겠으니까 이것 좀 놓으시죠?”
“놓을 테니까 사람 그만 때리고 보험이나 부르세요.”
“알겠습니다, 불러 드릴게요. 넌 뭐해, 이 새끼야! 보험 부르라잖아!”
또 다시 성질부리려는 것 같기에 아예 그 운전자 앞을 막아선 우현은 고개를 푹 숙인 그의 얼굴을 보기 위해 허리를 90도로 구부려 위를 올려다봤다. 얼굴 가득한 여드름 때문에 놀림을 많이 받았던 경수가 맞았다.
“경수 맞지?”
“어?”
경수는 우현이 고등학생일 때 같은 동네에 살던 동생이다. 당시에 경수는 중학생이었는데 사춘기의 꽃인 여드름이 얼굴에 만개했었다. 그래서 놀림을 많이 받았고 스스로도 자신의 얼굴에 자신이 없었는지 항상 고개를 숙이고 다녔다. 성격도 그에 걸맞게 소극적이었는데 그 땐 사춘기라서 더 했던 것 같다. 지금이라고 크게 달라진 건 없어 보이긴 하지만…
그 많던 여드름은 이제는 여드름 자국으로 얼굴에 자리하고 있었다. 습관이 되었는지 고개를 숙이고 있는 건 여전하고.
“나 우현이 형이야, 김우현. 기억나지?”
“아, 네… 오랜만이에요. 그런데 우리 차랑 부딪힌 게 형 차예요? 몸은 어때요? 많이 안 다쳤어요?”
“응. 괜찮아? 너는 어때? 괜찮니?”
“네, 저는 괜찮은것 같아요. 그런데 진짜 괜찮아요? 아까 아주 크게 부딪쳐가지고…”
“진짜 괜찮은 거 같아. 일단 보험회사 오면 거기랑 얘기하면 되니까 걱정하지 마. 그런데 네가 배강석씨 로드야?”
“네, 네.”
“새끼… 그 때나 지금이나 소심한 건 여전하네. 어쩌다 그렇게 운전 한 거야?”
“그, 그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