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084] 새 영화 시작(3)
투자를 받고 스케줄이 확정되면서 언론에 유은하가 10억을 직접 투자하고 영화에도 출연한다고 대대적으로 홍보를 때렸다.
네티즌들의 반응은 반신반의하는 게 대부분이었다. 아무리 충무로 최고의 티켓파워를 가진 유은하라고 해도 우리나라에서 극히 드문 클래식음악 영화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유은하가 직접 투자한다는 것만으로도 하루 종일 ‘피아니스트’가 실검 1위를 기록했다.
그렇기에 대본 리딩 현장에는 제작사측에서 미리 섭외한 기자가 분주히 오가는 스태프들과 배우들을 향해 연신 셔터를 눌러대고 있었다. 관심을 많이 받는 영화니 당연한 일이다.
물론 기자의 주목표는 당연히 유은하였지만 말이다. 그리고 은하가 우현에게 건넨 비닐봉지 역시 그 기자의 카메라에 포착되었다.
“저, 저기요! 안녕하세요. 연예 핫 클립의 김주민 기자입니다. 방금 유은하씨가 주고 간 게 뭔가요?”
20대 중반으로 보이는 젊은 여기자는 상큼한 단발머리를 휘날리며 호기심 어린 눈으로 다가왔다.
우현은 내심 당황했지만 너털웃음을 터뜨리면서 봉지를 흔들었다.
“아, 이거 샌드위치입니다. 제가 유은하씨 전 매니저거든요. 감사의 의미로 준 거죠.”
“아, 그렇군요. 역시 유은하씨는 마음도 참 예쁘네요. 그 샌드위치 사진 한번만 찍어도 될까요?”
괜히 숨기거나 당황한 티가 표정으로 드러나면 더 큰 오해를 부른다. 그리고 이곳에 온 기자는 제작진에서 부른 기자이기에 적당히만 상대해주면 이상한 기사를 쓰진 않을 거다.
“그럼요. 그런데 달랑 하나라…”
“그렇긴 하네요. 예쁘게 나오긴 힘들겠어요. 그럼 사진은 안 찍고 코멘트로만 살짝 나가도 될까요?”
달랑 샌드위치 하나밖에 안 나오자 그녀도 조금 실망한 듯했지만 그래도 기삿거리를 한 줄이라도 얻었다는 것에 만족하는 것 같다.
“아유, 그럼요. 상관없습니다. 그리고 우리 별이도 많이 좀 챙겨주세요.”
“아! 김별씨! 반갑습니다. 나중에 인터뷰 괜찮으시죠?”
“그럼요. 고사 끝나고 바로 할 수 있습니다.”
별이가 대답도 하기 전에 우현이 잽싸게 끼어들었다. 연습량이 부족하기 때문에 언제든지 편할 때 연락하라고 할 수는 없다. 이왕 인터뷰를 할 거면 한 번에 다 처리하는 게 좋다.
“아, 그래요? 혹시 이번 주 내에는 힘드세요?”
“아무래도 역할이 역할이다 보니까 평소에는 쉬지 않고 피아노 연습을 하고 있거든요. 인터뷰 때문에 연습을 중간에 멈추기 어려워서 그렇습니다. 이왕 나온 김에 오늘 하시죠?”
하기 싫다는 것도 아니고 서로간의 편의를 위해서 하자는 말에 기자도 승낙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요. 그럼 고사 때 술 너무 많이 드시면 안 돼요.”
기자와 헤어지고 얼마 있지 않아 본격적인 대본 리딩 시간이 다가왔다. 임 감독부터 시작된 자기소개 시간이 끝나고 본격적으로 대본 읽기에 들어가자 아까 그 여기자가 조심스럽게 셔터를 눌러대며 현장 분위기를 찍었다.
음악영화라고 생각지 못할 정도로 상당히 열정적이었던 대본 리딩이 끝나고 제작진이 미리 준비한 고사 현장으로 이동했다.
“우리 영화 대박 한번 터뜨리게 해 주십쇼!”
임 감독이 가장 먼저 절하고 돼지주둥이에 십만 원짜리 하나를 물려주었다. 그리고 바로 유은하가 하이힐을 벗고 홀로 나섰다.
“이번에도 대박 기원합니다.”
시원스레 외친 그녀가 돼지머리를 향해 절하고 나서 무려 십만 원짜리 수표 석 장을 입에 물려주었다.
“우와아!”
“역시 흥행퀸답다!”
“통이 커. 남자야 아주.”
다음은 중년 연기자인 백윤건과 김혜진이 같이 나서서 각기 돼지 콧구멍에 십만 원짜리 수표를 하나씩 꽂았다. 그 뒤를 이어 주인공 라이벌 역으로 나오는 별이가 홀로 나섰다.
“돼지님! 이번에 대박 안 나면 다음 고사는 없습니다!”
“와하하!”
미리 준비해 간 십만 원 수표 한 장을 콧구멍에 찔러 넣은 별이가 자리로 돌아오자 그 이후로 30여 분간 고사의식이 진행됐다. 끝나고 났을 때는 돼지 머리에 들어간 돈만 수백이었는데 제작사 대표가 이 돈으로는 촬영이 끝나고 좋은 곳에서 회식자리를 마련하겠노라고 해 스태프들의 호응을 받았다.
고사가 끝나고 김주민 기자와 인터뷰를 가졌다. 인터뷰는 그 건물 1층 커피숍이었는데 이제는 김별의 얼굴이 상당히 알려져서 그런지 인터뷰 하는 주위로 사람들이 꽤나 몰려들어 핸드폰 카메라로 동영상을 촬영하거나 사진을 찍었다.
“오늘 대본 리딩과 고사까지 한번에 치르셨는데요. 영화 촬영을 앞두고 어떤 기분이세요?”
“설레임 반, 두려움 반입니다. 아무래도 하늘같은 선배님과 함께 영화를 찍는다는 게 너무 영광스러운 일이지만 또 영화에 피해가 가지 않도록 정말 노력해야겠다는 생각에 부담이 되기도 해요.”
“이번에 피아니스트로 나오는데요. 제가 알기로 유은하씨는 피아노를 6년 정도 친 데다 어렸을 때 지역대회에도 나간 적이 있을 만큼 상당한 실력을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구요. 별이씨도 요즘 한창 연습에 매진한다는 이야기를 들었는데요. 연습 과정에 대해서 조금 들을 수 있을까요?”
“연습 과정이라고 하면 사실 별거 없어요. 밥 먹고 계속 피아노 연습하는 것뿐이죠. 음… 사실 이렇게 말하는 것도 조금 걱정되는 게 보시는 분들께서 너무 엄살 부리는 거 아니냐는 말을 할 것 같거든요.”
“아우, 아니에요. 밥 먹고 연습만 한다는 게 말이 쉽지 아무나 할 수 있는 게 아니잖아요?”
“연습을 아무리 많이 한다고 해도 중요한 건 촬영 때 얼마나 현실적으로 피아니스트의 연주장면을 표현할 수 있는가라고 생각해요. 그래서 연습보다 중요한 건 실전에 들어가서 잘 하는 것일 거구요. 아마 모든 촬영이 끝난 후에야 연습이 어땠는지 조금은 마음 편하게 말을 할 수 있지 않을까 싶어요.”
“말하는 걸 들어보니 나이에 비해 상당히 어른스러운 것 같아요. 이번에 유은하씨와 같이 영화를 하게 됐는데 라이벌 역으로 나오시잖아요? 어떤 기분인가요?”
“누구나 다 아시는 것처럼 유은하 선배님께서 영화를 찍었다 하면 전부 대박이 났잖아요? 하하. 사실 그래서 더 부담이 돼요. 만약 이번 영화가 잘 안 되면 제 잘못일 수 있으니까요. 그래서 더 열심히 준비하고 있습니다.”
이후로 30여 분간 별이에 대해 인터뷰가 진행됐다. 라라걸즈에 대한 이야기도 있었고 같은 소속사인 유니에 대한 이야기도 있었다. 분위기는 좋았고 별다른 문제가 될 만한 요소도 없었기에 지켜보던 우현은 아주 만족스러웠다.
“수고했어.”
돌아오는 차 안의 분위기도 훈훈할 수밖에 없다.
“아까 인터뷰 할 때 말실수 할까봐 얼마나 마음을 졸였는지 아세요?”
“잘했어. 이제 인터뷰도 능숙하게 잘하더라. 톱스타의 기본이 바로 인터뷰야. 그런 면에서 너는 확실히 기본이 됐어.”
“그런데 은하 언니가 샌드위치는 왜 준 거예요?”
난데없이 들어오는 날카로운 잽. 생각지도 못했다.
“어? 그냥 준거지.”
“헤헤… 그냥 준 게 아닌 것 같던데요? 뭔가 분위기가 조금 그랬어. 그쵸, 오빠?”
별이의 동조를 구하는 말에 운전하던 상준이 히죽 웃으며 말한다.
“그래, 내가 봐도 뭔가 분위기가 거시기 하더라니까?”
“뭐, 대단한 것도 아니고 샌드위치 하나에 너무 오버하는 거 아니냐?”
우현의 항변에도 별이의 재잘거림은 멈추지 않았다.
“그 대단할 거 없는 샌드위치를 하필 우리 대표님 혼자만 받았으니까 하는 말이죠.”
“그래서 그거 같이 나눠먹었어, 상준이랑.”
혼자 먹으려고 했었는데 김주민 기자에게 걸려서 어쩔 수 없이 상준이와 반씩 나눠먹었다.
“그리고 그 때 은하 언니의 눈에 흐르던 냉기는 저만 본 건가요?”
“그랬어?”
화들짝 놀라는 우현을 보고 별이의 눈이 더욱 가늘어졌다.
“오호라… 예민하게 반응하시는데요? 으흠… 좋지 않아요.”
“뭐, 뭐가 좋지 않아?”
“조금 기분이 그렇네요. 저보다 다른 소속사 여배우를 더 챙기는 느낌적인 느낌이라고 할까?”
“기분 탓이야. 난 공과 사는 아주 철저한 사람이라고.”
그렇게 농담을 주고받으며 오다가 헤어져 오피스텔로 돌아온 우현은 은하에게 문자를 하나 보냈다. 왠지 샌드위치를 얻어먹은 것에 대한 답을 해야 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아니, 사실은 연락할 핑곗거리를 찾았을 뿐이다.
[아까 샌드위치 고마웠어. 아주 맛있게 먹었어.]
[뭘 새삼스럽게… 늦었으니 얼른 자.]
누가 보면 남자와 여자가 뒤바뀐 줄 알거다. 어쩜 연애를 해도 저리 성격이 나오는지.
다음 날이 돼서 기사를 확인하니 영화 ‘피아니스트’의 대본 리딩과 고사 현장에 대한 기사가 포털 메인의 한 부분을 장식했다. 유은하가 차기작에 직접 투자했다는 점 때문인지 상당한 관심을 끌었다. 흐뭇한 마음으로 보는데 처음 보는 핸드폰 번호로 전화가 걸려왔다.
“김우현입니다.”
“안녕하세요. 민상욱입니다. 혹시 기억나시나요?”
반사적으로 의자에서 튕기듯이 일어났다.
“그럼요. 그런데 전에 번호를 받았었는데…”
“아, 번호 바뀌었거든요. 혹시 그 때 말씀하셨던 거 아직도 유효한가요?”
“그럼요. 오늘 점심 괜찮으세요?”
“네. 회사 주소 문자로 보내주시면 점심 전까지 찾아뵙겠습니다.”
민상욱은 그 때 이주희와의 식사 이후로 연락이 없었다. 아무래도 형이 걸렸던 것 같다.
다행스럽게도 민재원은 드라마 중간에 대타로 투입 됐지만 아주 잘 해내고 있었다. 캐릭터 분석할 시간도 없었을 텐데 누가 봐도 부족함을 느끼지 못할 만큼 훌륭한 연기를 보여주고 있어 역시 연기력 하나 만큼은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지 못할 클래스임을 입증했다.
그렇게 한 달 동안 8회까지 드라마가 진행되었을 때 시청률은 무려 8%를 찍으며 KMTC역사상 처음으로 10% 고지를 넘보게 되었다.
종편에서는 대박이나 다름없는 시청률을 기록한 ‘천방지축 그녀’ 덕분에 지금껏 예능이나 보도에 비해 찬밥 신세를 받던 드라마국은 신인이나 다름없는 이주희 작가를 기용한 것이 탁월한 선택이었다며 자찬했다.
그렇게 분위기 좋게 드라마가 진행되고 있으니 촬영 현장도 분위기가 좋을 수밖에 없을 터였고 그걸 봐왔을 민상욱은 그제야 마음이 놓였을 거다. 또한 언제까지 형 뒷바라지만 하기에는 그도 이제 곧 서른을 눈앞에 둔 나이가 된 것이다.
“전화 많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사무실로 찾아온 그는 짧게 머리를 깎고 아이보리색 면바지와 푸른색 티를 입고 있는데 마치 의류브랜드 모델처럼 보였다.
“미안합니다. 생각이 좀 많아서요.”
“이제 결심은 하신 건가요?”
“하… 저도 형처럼 좋은 연기자가 될 수 있을까요?”
떨리는 눈동자를 보니 지금 이 순간에도 자신의 선택에 확신이 없어 보였다. 무엇이 그의 자신감을 떨어뜨린 건지 궁금했다.
“전 상욱씨의 연기를 본 적이 없습니다. 그래서 당신이 어디까지 올라갈 수 있을지 확답을 할 수는 없죠. 제가 할 수 있는 말은 하나입니다. 당신의 외모는 스타가 되기에 부족함이 없어요. 이제 남은 건 당신의 노력뿐입니다. 그 정도는 할 수 있잖아요? 그죠?”
“대한민국에서 노력하라는 말 안 들어본 사람 있겠어요? 문제는 노력해도 안 되는 일 투성이니까…”
불안해하는 그와 시선을 맞췄다.
“그것만 하면 돼요. 노력만 해주면 나머지는 제가 만들어드립니다, 톱스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