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너 내가 스타로 띄어줄게-83화 (83/301)

=======================================

[083] 새 영화 시작(2)

“파인 엔터에 투자하지 않는다면 ‘피아니스트’ 투자에도 손을 떼겠다는 이야기군요.”

우현의 물음에 둘의 입이 열리지 않고 애매한 미소만을 보였다. 하지만 그 미소가 보여주는 뜻은 분명했다. 거부한다면 영화 투자를 철회하겠다는 것.

“그럼 그렇게 하시죠.”

웃으며 쿨하게 말하는 우현을 보는 그들의 얼굴이 삽시간에 굳어졌다. 한석민 사장은 우현이 돌려주려 내민 파일철을 펼쳐 보이며 다급하게 말했다.

“금액이 부족하다고 생각한다면 지분비율을 고정한 상태로 더 투자할 의향까지 있습니다. 게다가 30%의 지분이라면 경영권에도 문제되지 않을 비율입니다. 게다가 다시 한 번 자세히 살펴보시죠. 지금 FA로 나온 톱스타급 배우를 영입할 수도 있는 자금입니다. 이들만 영입하면 회사는 당장 지금보다 최소 몇 배는 더 커질 수 있습니다.”

비상장 상태일 때야 경영권에 문제가 없겠지만 만약 나중에 상장할 만큼 회사가 커지게 된다면 이야기는 달라질 거다. 게다가 현 시장에 나온 FA들은 이미 톱스타 자리에 올라간 사람들이라 흥미도 없었다.

“제가 온라인 게임을 참 좋아하는데요, 1레벨부터 차근차근 스킬도 배우고 스탯을 늘려가는 재미가 있거든요. 회사도 마찬가지로 키워가는 재미가 있는 거 아니겠습니까? 지금도 충분히 만족하고 있습니다. 말씀은 감사하지만 받아들이기 어려울 것 같네요.”

강진벽 사장이 도대체 뭐라고 이야기 했기에 저들이 이렇게까지 달려드는지 모르겠지만 어찌됐든 투자는 사양하고 싶다.

“알겠습니다. 잘 알아들었습니다. 이거 참 아쉽군요. 좋은 파트너가 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말이죠.”

한석민 사장이 다시금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지만 그 눈빛에 담긴 감정은 아쉬움 이상의 것이라고 느꼈다.

호텔에서 나와 그들과 헤어지며 미리 자리를 빠져나갔던 윤석에게 전화를 걸었다. 자신 때문에 투자가 철회되게 생겨 미안했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어떻게, 이야기는 잘 하셨습니까?”

“흠… 이거 뭐라고 말씀을 드려야 할지 모르겠네요. 그 쪽에서 우리 회사에 투자를 하겠다고 했습니다. 그게 목적이었던 것 같아요.”

“투자요? 잘 됐네요. 축하합니다, 대표님.”

“아니요. 거절했습니다.”

“네? 아니 왜…?”

“의도가 불순하더라구요. 하여튼 길게 설명하기는 그런데, 그리 기분 좋은 자리는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그것보다 영화 투자에도 문제가 생겼습니다.”

“설마…?”

“네, 우리 회사에 투자하지 않으면 ‘피아니스트’에 대한 투자도 취소하겠다고 하더라구요.”

“그렇다면 진짜 의도가 의심스럽네요.”

“그렇죠? 그래서 어쩔 수 없이 다른 투자자를 구해야 할 것 같습니다. 미안해서 어떻게 합니까?”

“아니에요, 괜찮습니다. 그 사람들이 문제가 있는 거죠. 그리고 이번에 우주 창투가 투자를 마무리 지으면서 돈이 있으면서도 투자를 못한 개인 투자자들이 꽤 많았습니다. 그들을 끌어 모으면 크랭크인이 될 때까지 자금이 부족하지는 않을 겁니다.”

“이거 저 때문에 일이 복잡하게 됐네요.”

“김 대표님 때문이라니요, 전혀 아닙니다. 김 대표님 아니었으면 유은하씨와 10억 투자는 언감생심 생각이라도 할 수 있었겠습니까? 이제 또 뛰어봐야겠네요. 오늘 고생하셨습니다.”

다행히 그가 잘 이해해주니 마음이 한시름 놓였다. 오피스텔로 돌아와 침대에 누워 생각하니 아무래도 강진벽 사장이 자꾸 마음에 걸렸다.

그 때 이후로 한 번도 연락해본 적이 없었다. 나중에 회사가 잘 되고 여유가 생기면 연락하려던 마음이었으나 은하의 그 이야기 이후로는 연락하려던 생각을 접었다.

솔직히 사장이 자신에게 잘못한 것은 없다. 그 사람 나름대로의 경영방법일 수 있고 우현에게 해가 된 일은 한 적이 없었으니까. 사장 입장에서는 우현과 은하가 그토록 정이 들었다는 것을 몰랐을 수도 있었고. 그럼에도 자꾸 강 사장의 얼굴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이대로 끝이 아닐 것만 같은 예감이 들었다.

애써 그의 얼굴을 머릿속에서 지워버리고 핸드폰을 들어 은하 전화번호를 화면에 띄웠다. 전화를 걸까말까 몇 번을 망설이다 결국 통화버튼을 눌렀다.

“여보세요.”

“나야. 연습은 잘 했어?”

“응.”

“…”

“무슨 일이야?”

“저기… 어… 아니, 손가락 안 다치게 조심하라구. 악기 연주하는 사람은 손가락이 생명줄이나 마찬가지니까.”

“응, 알았어.”

“그래, 잘 자구…”

“응. 오빠도 잘 자.”

전화를 끊고 민망함에 이불킥을 날려줬다.

“아휴… 등신! 이럴 거면 전화는 왜 했냐?”

한 달이 더 흘러 드디어 망치의 신규 앨범이 공개됐다. 아이돌과 같은 강력한 팬덤을 보유한 게 아니어서 시간이 걸리지 않겠나 생각했지만 금세 음원차트 상위권에 앨범 수록곡들을 연달아 줄 세우는 기염을 토하며 대박을 쳤다.

특히 이번 메인타이틀이 바로 유니가 피처링으로 참여했던 곡인데 그로 인해 아침부터 유니와의 피처링을 원하는 아티스트들의 연락이 조금씩 들어오고 있었다. 대부분이 힙합을 베이스로 한 보컬을 원하는 것이었지만 종종 커플송을 부탁하는 경우도 있었다.

“하하, 그럼요. 당연히 참여해야죠.”

JGP에서 바로 망치의 홍대 공연에 유니의 참여를 확인하는 전화가 걸려왔다. 지금까지 한 번도 공중파나 케이블 음악방송에 나가본 적 없는 망치는 이번에도 공연장을 도는 것으로 자신의 앨범을 홍보할 생각인 것 같았다.

“우와! 진짜 공연장에 서는 거예요? 앗싸! 앗싸!”

유니는 망치와 함께 공연장에 선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흥분한 것 같다. 기타를 들며 뛰는 걸 보니 아직 어린애다.

“그래, 이번뿐만 아니라 앞으로도 몇 차례 같이 공연을 서야 할 일이 있을 거야. 그때 같이 공연해주면 돼. 물론 행사에도 몇 번 정도는 같이 다녀야겠지.”

“그럼 그 이후에는요?”

“언제까지 계속 붙어 다닐 수는 없지. 너도 너만의 스케줄이 있잖아. 앞으로 행사 스케줄도 더 잡힐 거구. 10월에 축제도 많아서 그거 다 돌려면 잘 시간도 부족해.”

“행사가 그렇게나 많이 잡혔어요?”

“그럼. 축제만 해도 디자인페스티벌에 빛 축제, 푸드페스티벌, 시간여행, 인삼, 북소리 등등 장난 아니야.”

“후아… 우리나라에 그렇게나 많은 축제들이 있어요? 하나도 못 가봤는데…”

“뭐, 축제도 여유 있는 사람들이나 가는 거지. 사실 나도 이 일하면서 안 거야. 연예계에서 일하기 전에는 한 번도 가본 적이 없어.”

“어쨌거나 엄청 바쁘겠네요.”

“응. 그리고 이제 다음 앨범 준비도 천천히 생각해야지.”

“벌써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바라보는 유니가 귀여워 한차례 머리를 쓰다듬어 줬다.

“그래, 너 작곡 실력이 상당히 좋은 것 같아서 이번에는 네가 직접 만든 곡 위주로 가보려고 해. 이번에는 디지털 싱글이 아니라 정규 앨범으로 갈 거니까 뮤직비디오도 만들 거구.”

‘하… 돈 많이 들겠네.’

댄스곡은 아닐 테니 의상과 안무제작, 안무팀에 들어가는 경비를 제외한다고 해도 최소 3억 이상은 필요할 것이다. 뒷골이 당길 만큼 어마어마한 돈이 나갈 거라고 생각하니 조금이라도 더 많은 행사를 돌리려 하는 기획사들이 이해가 된다.

“우앗! 정규 앨범이라니… 말도 안 돼!”

“그렇지? 그러니까 열심히 행사 뛰어라. 그래야 너 정규앨범 만들어 주지.”

“당연하죠. 어제 엄마가 보약 지어줘서 이동할 때마다 차 안에서 보약 먹고 다녀요. 그거 먹으면서 돈 많이 벌어올게요.”

“하하. 너무 무리하지 말고.”

보약이라는 말에 점심시간 때 한의원이나 한번 들러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안 그래도 요즘 몸이 축축 처지는 게 많이 피곤한 것 같다. 아, 물론 피곤과 별개로 핸드폰만 봐도 웃음이 실실 나지만…

사람 마음이라는 게 참 종잡을 수가 없는 것이라는 걸 새삼 느낀다. 내심 은하를 마음에 담아두긴 했으나 스스로도 그 크기를 알 수 없는 마음이었다. 그런데 한 번 터진 감정의 물꼬에 우현도 놀라고 있었다.

혼자 있을 때면 그녀가 SNS에 올린 사진을 몰래 훔쳐보곤 한다. 그것만으로도 피곤이 풀리는 기분이지만 역시 기분만일 뿐이다.

우주창투와의 불미스러운 일 이후로 윤석의 투자 유치는 다시 시작되었고 의외로 빠른 시간에 30억을 모두 확보할 수 있었다.

“10억은 기관에서 받았고 나머지 10억은 개인투자자들에게 받았습니다. 유은하씨의 티켓파워가 어느 정도인지 다시금 느끼게 되네요. 이런 마이너한 장르의 시나리오로도 투자금이 모인다는 건 놀라운 일입니다.”

“다행입니다. 그럼 앞으로 스케줄이 어떻게 됩니까?”

“캐스팅을 모두 마무리했으니 바로 들어갈 겁니다. 다음 주 초에 대본 리딩 겸 사진촬영이 있고, 바로 고사까지 치를 계획입니다. 그리고 그 주에 크랭크인 들어갈 거구요.”

별이의 스승역은 전에 ‘그 양반 같은 자식’에서 별이의 연기를 지도해줬던 김혜진씨가 맡기로 했다. 그때 김혜진의 도움을 많이 받았었는데 이번에도 같이 연기를 하게 됐다.

“고사까지 하시려구요? 와… 초스피드네요.”

“요즘 고사 안하고 찍는 영화도 많지만 임 감독님이 그런 면에서 조금 구식이긴 합니다. 그래도 영화는 구식으로 찍지 않는 거 아시죠? 하하. 그리고 50억 이하의 애매한 제작비로 진행하는 영화는 순식간에 해치워야 합니다. 조금만 시간이 미뤄지고 어영부영하면 언제 어떤 문제로 엎어지게 될지 모르거든요. 임 감독님도 제 생각에 동의하고 있구요. 그리고 임 감독님 대본 나온 거 보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한번 보시고 임 감독님께 피드백 해주세요. 뭐, 피드백을 받을지는 모르겠지만 말이에요. 하하”

“알겠습니다. 저도 빨라서 좋네요. 대신 연습할 시간이 조금 줄어들긴 할 텐데요.”

별이에게 석 달의 시간을 주기로 했는데 조금 당겨지게 됐다. 그래도 충분할 만큼 시간을 줬으니 이제는 그녀의 노력과 재능에 달렸다.

“다음 주 초에 대본 리딩이라구요?”

역시나 아직 부족하다고 생각했는지 별이의 목소리에 당황함이 느껴졌다.

“대본 리딩은 다음 주 초지만 크랭크인은 주말쯤에나 들어갈 거야. 아직 시간 있어.”

“석 달은 주신다고 했잖아요?”

“미안… 큰 자본이 들어간 영화가 아니라서 일정을 빡빡하게 잡아서 간다네. 많이 부족하니?”

“후… 시간을 많이 주면 좋기는 하지만… 어쩔 수 없겠죠?”

“그렇지. 축구선수나 야구선수도 몸이 완전한 상태에서만 경기에 임할 수는 없어. 목이 안 좋은 상태에서도 무대에 올라야만 하는 가수도 있지. 어떻게 완벽한 상태에서만 모든 일을 할 수 있겠어? 그리고 대부분 실패를 두려워해서 완벽해지려고만 하다가 기회를 놓치고 말지. 너는 돈을 받고 연기를 하는 프로잖아? 프로라면 이 정도 시련은 이겨내야지, 안 그래?”

잠시 말이 없던 별이는 이윽고 한결 후련해진 목소리로 답했다.

“죄송해요. 생각해보니 너무 어린애 같았네요. 걱정 마세요, 잘 할 테니까요.”

“그래, 믿고 있을게.”

그리고 순식간에 시간이 흘러 대본 리딩을 하는 날이 다가왔다. 새벽부터 분주하게 준비한 별이가 ‘타이거 스튜디오’에서 제공한 대본 리딩 현장인 상암동의 한 빌딩에 도착하니 벌써 수많은 스태프들이 부산스럽게 움직이고 있었다.

“어? 은하 언니다.”

별이가 가리키는 손가락으로 시선을 돌리니 청바지에 흰 티셔츠 하나만을 걸친 은하가 하이힐을 또각거리며 다가왔다.

“아침은?”

“어? 그럴 시간이 있나…”

“자, 안 먹고 왔을 것 같더라.”

무심하게 툭 비닐봉지를 건네는데 받아서 안을 살펴보니 언제 준비했는지 샌드위치 하나가 들어있었다. 그것도 그가 좋아하는 죠스 샌드위치. 그녀는 다시 시크하게 몸을 돌리고 가버렸다. 그리고 그 모습을 별이와 상준이 기묘하게 바라보았다.

“크흠… 들어가자. 늦었다.”

민망함에 그들의 시선을 피하며 후다닥 앞서 걸어갔다. 그리고 손에 쥔 봉지를 꼭 쥐며 다짐했다.

‘혼자 먹어야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