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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81]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6)
“그 친구는…? 어감이 묘하네요.”
“묘하다뇨? 어디 가요?”
“‘그 친구는’이라고 하면 다른 친구가 마음에 있다는 말이잖아요.”
“글쎄요. 시간이 늦었으니까 이만 일어날까요? 이 작가님도 이제 들어가서 쉬셔야 내일 글을 쓰지 않겠습니까?”
굳이 이야기 하고 싶지 않았던 우현은 서둘러 자리를 파하고 집으로 향했다. 헤어지면서 민상욱의 전화번호를 받았던 우현은 씻고 나서 침대에 누워 그의 번호를 핸드폰에 저장했다.
둘이 같이 서 있으면 누가 봐도 형인 민재원이 잘 생겼다고 할 테지만 우현의 생각은 달랐다. 조각같이 잘생긴 얼굴만이 스타의 조건이라면 지금 톱스타들 중에 상당수의 인물들은 그 자리에 있어서는 안 되는 사람들이다.
잘생긴 것도 궁극적으로는 사람의 매력을 더 진하게 풍기게 하는 요소 중 하나일 뿐이다. 아직 그의 연기를 보지는 못했기에 섣불리 달려들 수 없지만 만약 민상욱이 평균 이상의 연기력만 보여준다면 단언하건대 형을 뛰어넘는 톱스타의 자리에 오를 거라는 느낌이 왔다.
밤이 지나고 새벽부터 자리에서 일어난 우현은 정성스레 단장하고 바로 도마뱀 미디어 사무실로 향했다. 이주희 작가와 연락해서 언제 계약서를 작성하는지 미리 알아뒀기에 늦지 않게 도착할 수 있었다.
원래 제작사와 타소속 배우간의 계약에 그가 참여할 이유는 없다. 그래서 그가 아침부터 도마뱀 미디어 사무실에 얼굴을 비쳤을 때 모든 이들이 영문을 모르고 놀랐다.
“아침부터 여긴 웬일이세요? 무슨 일 있어요?”
“이주희 작가가 요새 너무 힘든 것 같아서 점심 좀 사주려구요.”
“점심요?”
지 피디가 쏘아내는 의심의 눈초리를 피해 슬쩍 아무도 없는 회의실로 들어간 우현은 어딘가에 있을 이 작가에게 문자를 보냈다.
[계약할 때 민재원 형제랑 다 같이 저녁이라도 하자고 해요, 둘 다. 촬영 때문에 안 된다고 하면 동생만이라도 먹자고 해요.]
어차피 민재원은 계약서 쓰고 나면 똥 쌀 시간도 없을 정도로 바쁠 거다. 그래서 민상욱과 자연스럽게 자리를 마련하고 싶어서 머리를 굴린 거다. 대놓고 밥 한번 먹자고 하기엔 주변의 눈이 신경이 쓰이는 데다가 쓸데없는 오해를 불러올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 가장 문제가 되는 건 막상 만나봤는데 연기에 대한 소질이나 열망이 전혀 없고 오로지 형의 뒷바라지나 하는 데서 보람을 찾는 사람이라면 괜히 가벼운 사람 취급받기 때문에 소문이 나는 건 좋지 않다.
30분 쯤 지났을 때 민씨 형제와 이주희 작가가 문 닫힌 회의실에서 나오는 것이 보였다. 우현이 슬쩍 나가서 얼굴을 비치니 이주희 작가가 기묘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어머, 대표님. 안 그래도 민상욱씨랑 점심하기로 했는데… 같이 해도 괜찮죠?”
“그럼, 당연하죠. 원래는 이 작가님 밥 한번 사주려고 왔는데 잘됐네요. 먼저 연락해준 게 고마워서 밥 한번 사려고 했어요.”
스스로 말하면서도 되지도 않는 변명이라고 생각했다. 그래도 우현이 그렇게 주장하니 어쩔 것인가? 민상욱도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수긍할 수밖에.
“하하, 그래요. 저야 공짜로 점심 얻어먹고 좋죠.”
“대표님, 섭섭하네요. 저희랑은 언제 밥 한번 먹자고 말도 안하면서?”
지여울 피디가 한 마디 톡 쏘았다. 내심 뜨끔했지만 모른 척 표정관리하며
“아이고 지 피디님, 제가 다음에 비싼 거로 한번 쏘겠습니다. 기대하세요.”
“호호호, 좋아요. 참고로 저 소고기 좋아해요.”
“저도 소고기 사랑합니다. 언제 같이 등심에 애정을 듬뿍 쏟아봅시다.”
지 피디가 민재원을 데리고 촬영장으로 떠나고 나자 우현은 곧장 민상욱과 이 작가를 데리고 근처 비싼 고깃집으로 향했다.
“이거 점심부터 고기 먹어도 되려나 모르겠네요. 형은 한창 정신없을 텐데…”
“괜찮아요. 지금 현장에서 민재원씨를 서포트하기 위해서 수십 명이 대기하고 있을 테니까요.”
굳이 현장에 가보지 않아도 알 수 있는 내용이다. 당장 다음 주에 나갈 1,2회를 마무리하기 위해서는 모든 인력이 민재원을 위해 총력을 다해 서포트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이기 때문이다.
괜히 그가 딴 생각하기 전에 고기부터 주문했다. 이주희 작가는 상욱과 방송생활과 관련된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능숙하게 이야기를 이끌었다. 글도 잘 쓰지만 센스가 좋다. 아무래도 예능 작가 출신이라 그런 것 같다.
“형을 서포트 하게 된 건 언제부터였어요?”
“얼마 안 됐어요. 원래는 현대무용을 배워서 학원에서 아이들 가르치다가 형이 조금… 안 좋은 일 때문에 어려움을 겪고 있어서 제가 도와주게 된 거죠. 그래도 형이 그 쪽에서 계속 일했기 때문에 그쪽 업계 일하는 거에 대해서는 일반인들보다는 많이 알게 된 거구요.”
호리호리하면서도 탄탄한 몸을 보니 딱 여성들이 좋아할 스타일인데 그게 무용으로 만들어진 것인 듯하다. 남자든 여자든 무용한 사람의 몸은 매력적일 수밖에 없다.
“아… 그럼 앞으로도 형 계속 도와줄 생각이에요?”
“아무래도 형이 적당한 소속사를 구하게 되면 저도 제 길로 다시 돌아가야겠죠.”
무용이든 음악이든 학원 선생님이면 보통 원했던 진로가 아닌 경우가 많다. 국립현대무용단이나 다른 좋은 곳에 합격했다면 굳이 학원선생님을 할 이유는 없으니까.
“형이 연기자인데 동생분은 연예계 쪽으로 생각 안 해보셨어요?”
고기를 뒤집으며 슬쩍 던져보자 한입 크게 쌈을 싸먹던 이주희 작가가 우현을 향해 의미심장한 시선을 보냈다. 본인이 말을 하는 것도 아닌데 괜히 긴장하는 것 같다.
“하하. 그런 건 재주 있는 사람이 하는 거죠. 저는 무용밖에 안 해서 연기 같은 거 잘 몰라요.”
“그래요? 그런데 무용 배우신 분들도 종종 연예계로 오는 것 같던데…”
“그렇긴 한데, 형처럼 잘 될 자신도 없고 괜히 형한테 피해가 갈 수도 있어서 그냥 의식적으로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욕심이 없는 게 아니었다. 단지 배려심과 부족한 자신감이 욕심을 일부러 자제시켰던 것 같다. 그렇다면 우현에게 기회가 있다.
“솔직히 말하면 오늘 자리는 내가 이 작가한테 부탁했어요. 민재원씨가 아니라 당신과 따로 자리를 하고 싶었거든요.”
“저를요?”
스스로를 검지로 가리키며 황당해 하는 그의 앞에 고기를 몇 점 올려주었다.
“네, 어제 둘이서 커피숍으로 들어왔을 때 저는 민재원씨 보다 당신이 더 눈에 들어왔어요. 좀 웃길지도 모르겠지만 일종의 길거리 캐스팅? 이런 식으로 생각해도 돼요.”
“글쎄요. 형이 이제 막 일을 시작했는데 제가 이런 일을 해도 되는지…”
하기 싫다는 말은 안 한다. 누군가 말을 꺼내지 않아서 그렇지 그도 내심 연예계를 꿈꿔 왔을 거다.
“당연히 재원씨가 일하는데 있어 문제가 있으면 안 되죠. 어차피 상욱씨가 우리 회사와 계약한다고 해도 당장 뭘 할 수는 없어요. 연기 연습도 해야 하고 발음과 발성도 전문가에게 도움을 받아야 하니까요. 재원씨가 ‘천방지축 그녀’를 끝낼 때까지는 크게 문제 될 게 없을 겁니다. 그리고 드라마가 끝나고 나면 재원씨도 소속사를 구하게 되겠죠.”
“그렇다면…”
“오늘 당장 계약하자는 건 아니니까 고민해보다가 언제든지 연락주세요. 물론 너무 늦으면 안 됩니다. 상욱씨도 나이가 있을 거 아닙니까? 지금 당장 시작한다고 해도 결코 빠른 건 아니니까요.”
“그건 저도 알고 있습니다.”
연예계에서 나이가 얼마나 중요한지는 그도 충분히 알고 있을 거라 생각하기에 더 이상 언급하지 않았다.
“그런데 드라마가 끝나면 형이 소속사를 구할 수 있을까요? 아니, 혹시 여기에서 우리 형이랑 계약하면 안 되나요?”
“하하하. 이렇게 대놓고 물어볼 줄은 몰랐네요. 일단 저희는 아직 작은 회사이기에 재원씨에게 계약금을 줄 형편이 되지 않습니다. 물론 계약금 없이 재원씨에게 조금 불리하다고 생각할 수 있는 조건에도 들어오겠다고 하면 받을 수 있죠. 하지만 재원씨가 받아들일지는 모르겠습니다. 아무리 그런 소란이 있었다고 해도 지금까지 중소 매니지먼트사에서 재원씨에게 컨택 해보지 않았다고는 생각하지 못하겠네요. 분명 이 드라마가 끝나고 자신이 원하는 곳과 계약하려고 하겠죠? 그래서 굳이 묻지 않은 겁니다.”
다 알고 있다는 듯 말하자 상욱은 멋쩍은 듯이 시선을 내리깔았다.
“알고 계셨네요. 사실 다른 곳에서 연락이 오긴 했는데 형이 일부러 미팅을 피했거든요. 지금 계약하면 불리한 계약 하게 된다고… 알겠습니다. 그럼 오늘 사주신 고기 잘 먹고 잘 생각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체중조절을 안 하는 편인지 혼자서 소고기 5인분을 해치운 상욱을 먼저 보낸 우현은 이주희 작가를 오피스텔에 데려다주었다.
“오늘 껄끄러웠을 텐데 고마워요.”
“고맙긴요. 회사를 위한 일인데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죠. 그런데 상욱씨가 그렇게 괜찮아 보이던가요?”
“음… 제가 이주희 작가님 글을 처음 봤을 때 느낌 정도?”
“어머! 우하핫! 역시 대표님은 참 사람을 기분 좋게 해요. 어쨌든 상욱씨랑 잘 되길 빌게요.”
사무실로 돌아온 우현은 잠도 제대로 자지 못하고 정신없이 돌아다닌 것 때문인지 급격하게 피곤이 밀려오는 것을 느꼈다. 의자를 한껏 뒤로 젖히고 눈을 붙였는데 어느 순간 눈을 떠 보니 은하와 약속한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후다닥 달려나가며 연락하니 비싸고 맛난 걸 사주려고 했는데 뜬금없이 자기 동네에 있는 포장마차로 오란다. 편하게 소주 한잔하고 싶다나.
“오빠, 여기!”
파란색 접이식 간이테이블 4개가 있는 포장마차다. 한 커플이 한 테이블을 차지하고 있고 구석 자리에 앉아있는 은하가 손을 흔들었다.
“먼저 마시고 있었어? 같이 마시지…”
이미 혼자서 반병 넘게 비운 상태였다. 술이 들어가서인지 편안한 표정에 기분도 꽤 좋아 보인다.
“바빴어? 피곤해 보이네?”
“웬일로 내 걱정을?”
“후훗, 촬영도 끝나고 기분 좋아서 립서비스 한번 해줬다.”
“황송해라. 이모, 여기 소주 한 병 더 주세요!”
영화 촬영 얘기부터 이사한 얘기 등등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며 소주 두 병을 비웠다. 이상하게 은하의 이러쿵저러쿵하는 불평에도 피곤하지 않았다. 오히려 투덜대는 모습이 나름 귀엽기도 하고.
은하는 동네 마실답게 노메이크업에 핑크색 트레이닝복을 입고 있었다. 오랜만에 보는 은하의 쌩얼이다. 잡티하나 없는 희고 깨끗한 피부, 웃으면 반달이 되는 눈, 오똑한 콧날, 그리고 입술은…
‘나 뭘 보고 있냐? 취했나…’
은하는 성깔과는 다르게 청순 미인이다. 툭 건드리면 눈물이 뚝 떨어질 것 같은 순하고 청초한 얼굴에 어떻게 그런 성격이 나오는 건지, 하늘은 나름 공평했다.
오늘따라 은하의 맨 얼굴이 자꾸 우현의 시선을 끌었다. 그런 쌩얼의 은하가 소주잔을 들어 입으로 가져가는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앞에 놓인 소주병으로 시선을 옮겼다. 그 소주병에도 은하가 있다. 소주 광고모델이 은하니까. 소주병의 은하는 예쁘게 꾸미고 우현을 향해 미소 짓고 있다. 하지만 우현의 눈에는 쌩얼의 은하가 훨씬 더 예뻤다.
문득 주변이 고요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돌아보니 한 자리 차지하고 있던 커플이 자리를 뜨고 없었다. 이모도 화장실에 갔는지 보이질 않고. 방금 전까지 스피커에서 김종률의 ‘취중진담’이 흘러나오고 있었던 것 같은데 언제부터인지 노래도 끊겨있었다. 그 순간이었다.
쪽…
우현의 볼에 보드랍고 촉촉한 것이 닿았다. 차마 고개를 돌리지 못했다. 볼에 닿은 것이 무엇인지는 생각이란 것을 할 필요도 없으니. 심장이 멎은 듯도 하고 미친 듯이 뛰는 듯도 하다. 그리고 살갗을 간질이는 얕은 숨소리와 함께 귓가에 속삭이는 은하의 목소리.
“입술은 오빠가 해줘. 기다릴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