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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80]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5)
“네? 이 친구요?”
우현이 찍은 남자배우는 은하가 신인에서 스타로 떠오를 때 이미 지상파 주연까지 맡고 있었던 민재원이다. 남자팬들도 많을 만큼 남성적이면서 수수한 마스크에 상당한 연기력까지 갖추고 있어 소속사가 없는 것이 이해되지 않았다.
“네, 이 친구 플라워엠 소속 아니었어요? 왜 소속사 란에 아무것도 없이 나와요?”
지 피디는 콜라를 한 모금 마시며 민재원의 얼굴을 톡톡 두드렸다.
“김 대표님, 모르셨구나. 민재원 이 친구 사고쳤잖아요. 소속사 사장이랑 한판 붙어서 결국 소송까지 걸었어요. 피차 피 볼 것 같으니까 소송 취하하는 조건으로 놔줬는데 성격이 더러워서 아무데서도 받아주지 않더라구요.”
우현은 아무리 연기가 좋고 스타 자질이 있어도 인성이 그른 친구와는 같이 일하려고 하지 않는다. 그렇기에 의아한 생각이 들었다.
“이 친구 성격이 더럽다구요? 이상하다, 전에 한번 봤을 때는 그렇지 않았는데?”
“언제… 아, 대표님 유은하씨랑 같이 일할 때 보셨던 거죠? 저도 이상한데 어느 순간부터 사고뭉치가 됐어요.”
“사고뭉치요?”
우현이 봤을 때만 해도 상당히 젠틀한 모습을 보였기에 이해할 수 없었다.
“드라마 찍다가 감독을 때렸거든요. 거기다가 술 마시고 일반인들하고 시비가 붙어서 폭행사건에 휘말리기도 했죠. 이 모든 게 고작 1년 안에 벌어진 일이라 대표님도 모르셨을 수 있겠네요.”
“아무리 그래도 내가 모를 수가…”
“소속사에서 나갈 때까지 이 사실들은 저 조차도 몰랐어요. 폭행사건도 전부 기사화되기 전에 돈으로 막았구요. 그래서 아는 사람만 아는 그런 상황이죠.”
“그럼 이 친구가 이 드라마를 할 수 있다는 건 무슨…”
지 피디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우리 쪽에서 연락한 게 아니라 상대방에서 연락해온 거예요. 그것도 민재원 동생이 방송보고 전화 했더라구요. 남자배우 필요하지 않냐고…”
“하하하, 대단하네. 그래서 추가한 거예요?”
“네, 그래서 막판에 사진 이미지 하나 추가했어요. 그런데 혹시 이 친구가 땡기는 거예요? 아니죠?”
“솔직히 이 중에 민재원 만큼 가장 네임밸류 있고 연기력 되는 친구 없잖아요? 문제는 사고를 치나 그게 중요한 거네요?”
“그렇죠.”
지 피디는 우현의 말에 수긍하면서도 미심쩍어 하는 눈치다.
“그럼 연락 한번 해봅시다.”
“지금요?”
“지금 일분일초가 바쁜데 시간 따지게 생겼습니까? 전화 해봐요.”
우현의 재촉에 지여울 피디가 스피커폰으로 설정을 바꾼 채 전화를 걸었다. 잠시 신호음이 가고 전화를 받는데 들어본 적 없는 목소리다. 저음의 중후한 목소리가 무척이나 매력적이다.
“민상욱입니다.”
“아, 네. 안녕하세요. 도마뱀 미디어의 지여울 제작피디라고 하는데요.”
“아, 안녕하세요. 저희 형 찾으시는 건가요?”
“네, 저희 쪽에 연락 주셨더라구요. 그래서 연락 드려봤어요.”
“하하, 잘 하셨네요. 안 그래도 저희 형이 이번에 드라마를 하나 하려고 하는데 마침 뉴스를 보고 제가 도마뱀 쪽에 제의를 했던 겁니다. 미팅은 언제 잡을까요?”
우현이 지 피디를 향해 소리 없이 입모양으로 강조했다. 누가 봐도 ‘지금 당장’이라는 단어였다.
“지금 가능할까요?”
“지금요? 지금 밤 12시인데요?”
“네, 지금 당장 보고 싶은데요.”
어차피 지금 본다고 해도 결정은 내일 될 것이기 때문에 상대방을 배려한다면 내일 오전에 보는 게 맞다. 그럼에도 일부러 지금 당장이라고 한 이유는 민재원의 반응을 보기 위함이다. 그렇게 성격이 나쁘고 개차반이라면 화부터 내거나 미팅에 나와서도 불만을 가득 내비칠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자, 잠시만요.”
몇 차례 투닥거리는 소리가 들리다 살짝 숨이 찬 민상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죄송한데 제가 조금 있다가 연락드리면 안 될까요?”
“아뇨, 전화 끊지 않고 있을게요. 지금 자는 중이면 한번 깨워볼래요?”
이번에는 지 피디가 알아서 우현과 장단을 맞춘다. 대충 무슨 이유로 이러는지 알 것 같았기 때문이리라.
“아, 네. 그럼 조금만 기다려주시겠어요?”
또 다시 몇 차례 투닥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약 30초 정도의 시간이 흘렀을 무렵 전에 들어본 적 있는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전화 바꿨습니다.”
“안녕하세요. 도마뱀 미디어 지여울 제작 피디입니다. 이번에 ‘천방지축 그녀’에 대신 출연가능하다는 말을 들었어요, 맞나요?”
“네, 맞습니다.”
“그럼 지금 볼 수 있을까요?”
“꼭 지금 봐야 합니까? 지금 12시도 지났고… 사실 이렇게 될 줄 모르고 술도 한잔 했는데요.”
목소리가 잠기고 혀가 살짝 꼬인 것이 술 마시고 자다 억지로 일어난 것 같다. 지 피디가 우현을 슬쩍 바라보았다. 그리고 우현이 엄지를 치켜드는 것을 보고 나직이 한숨을 쉬며 말했다.
“괜찮아요. 지금 어디시죠? 저희가 갈게요.”
“아닙니다. 저희가 가야죠. 택시 타고 가겠습니다. 강남에 계신가요?”
“네. 주소는 문자로 찍어드릴게요.”
전화를 끊은 지 피디가 우현을 바라보았다. 설명을 요구하는 거다.
“술까지 마셨으면 더 좋죠. 옛말에 사윗감 성격을 알아보려면 술 먹이고 화투 쳐보라는 말이 있잖아요?”
“미팅할 때는 정신 차리고 멀쩡한 사람인 척 하다가 카메라 돌고나서 또 성격 나오면 어떡해요?”
“그럼 어쩔 수 없죠. 취소하고 다른 사람으로 할까요?”
우현의 말에 지 피디는 꿀 먹은 벙어리처럼 아무 말도 못했다. 이주희 작가에게 시선을 돌리니 그녀도 입술만을 깨물 뿐 카달로그에서 마땅한 인물을 정하지 못했다.
“한번 만나 봅시다. 솔직히 사연 같은 건 궁금하지도 않고 알고 싶지도 않아요. 그냥 사고 안치고 연기력만 제대로 보여줄 수 있으면 되는 거 아닌가요?”
“후… 좋아요. 어차피 문자까지 보냈는데 물릴 수도 없고, 일단 만나보죠.”
강남 일대는 커피숍들도 24시간 영업하는 곳이 수두룩하다. 그래서 오피스텔 1층에 위치한 대형프랜차이즈 커피숍은 새벽 1시가 넘은 시각인데도 사람들이 상당히 많았다.
우현과 지 피디, 그리고 이 작가 이렇게 셋이 나란히 앉아 음료수를 빨고 있으니 문을 열고 훤칠하게 생긴 두 청년이 들어섰다. 민재원이야 워낙 유명한 스타였으니 한눈에 알아봤지만 우현은 이상하게 그가 아닌 그 옆의 청년에게 더 눈이 갔다.
“안녕하세요.”
“반갑습니다.”
밝게 인사하는 그 청년이 바로 민재원의 동생이라는 민상욱일 것이다. 하얀 피부에 뚜렷한 이목구비, 그리고 무엇보다 인상이 아주 선했다. 특히 그보다 더 조각같이 생긴 형의 무뚝뚝한 표정과 비교하니 그 인상이 더욱 두드러졌다.
“우리 본 적 있죠? 만나서 반가워요.”
우현의 인사에 민재원의 얼굴에 잠시 미소가 어렸다.
“네, 유은하씨 매니저였죠? 반갑습니다.”
“일단 앉으시죠.”
민재원은 세 명씩이나 나와 있으니 단순히 얼굴만 보자는 뜻이 아님을 알았는지 살짝 긴장한 듯했다. 반면 그의 동생은 어떻게든 이번에 형을 출연시켜야겠다고 다짐했는지 앞에 있는 세 명에게 90도로 허리를 숙이며 매니저 역할을 톡톡히 했다.
“늦은 시간인데 미안해요. 우리 사정이 조금 그래서요. 아시죠? 무슨 말인지.”
“알고 있습니다.”
“아이고 그럼요, 당연하죠. 촬영 밀렸을 텐데 바로 들어가야죠.”
지 피디의 말에 반응하는 것 역시 달랐다. 재미있는 형제라는 생각이 들었다.
“시간도 늦었는데 솔직히 말할게요. 민재원씨 이름값이나 연기력을 의심하는 제작진은 없어요. 그런데 아시다시피 우린 걱정이 돼요. 기사화 되지는 않았지만 이미 이 바닥에 소문 파다한 거 아시죠?”
“알고 있습니다.”
아직 술이 덜 깨서 술 냄새가 폴폴 풍기고 있음에도 눈빛에 흔들림이 없다. 스스로 떳떳하다고 생각하거나 아니라면 이 자리에서 연기를 하고 있는 거다. 어떤 것이든 대단하다.
“그래서 동생분께서 연락을 주셨음에도 불안해요. 안 그래도 남주가 병원에 입원하면서 한 차례 홍역을 치르는 중인데 이어받는 배우까지 문제가 생기면…”
뒤의 말은 듣지 않아도 알 수 있다.
“소문이 어떻게 퍼진지는 알고 있습니다. 뭐… 변명을 해봐야 믿지 못하실 테고 믿기 어려운 이야기이기도 해서 옛 이야기는 하지 않겠습니다. 제가 말씀드릴 수 있는 건 지금 소문에 돌고 있는 제 모습은 앞으로 촬영하면서, 또 그 이후로도 절대 볼 일이 없을 거예요. 저, 그렇게 바보 같은 놈 아닙니다.”
술에 취했으면서도 자신의 생각을 또박또박 말한다. 또한 정말 오해를 받고 있는 거라면 억울할 수도 있을 텐데 그리 흥분하지도 않는다. 생각보다 멘탈이 단단함을 엿볼 수 있었다.
“만약 하게 되면 촬영은 내일 당장 들어가야 할 거예요. 캐릭터 분석할 시간도 없을 텐데 괜찮겠어요?”
이번에는 지여울 피디 대신 이주희 작가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물었다. 항상 남에게 평가당하는 자리에 있다가 남을 평가하는 자리에 있는 것이 어색한지 조심스럽게 말하는 게 느껴진다.
“배우 생활만 10년이 넘었습니다. 어렵겠지만 그거 하라고 돈 주는 거 아니겠습니까? 열심히 해보겠습니다.”
짧지만 진중하면서도 진심이 느껴지는 말이다. 민상욱은 그런 형을 흐뭇하게 바라보는 것이 자신의 형을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것 같았다.
지여울 피디는 자신의 생각보다 민재원이 괜찮은 배우라고 느껴졌는지 입가에 미소를 달고 있었다. 물론 이렇게까지 해놓고 막상 촬영 들어가면 사람이 달라질 수도 있겠지만 그거야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럼 내일 아침까지 저희 사무실에서 뵙도록 하죠.”
지여울 피디의 말이 승낙이나 다름없다는 것을 안 민상욱이 환하게 미소 지었다. 민재원은 그저 고개를 숙이며 간단하게 감사를 표했다.
“실망할 일 없으실 겁니다.”
그들을 보내고 나서 남은 셋은 가슴을 쓸어내렸다. 내일 아침에 사무실에서 계약서 쓰고 바로 촬영 들어가면 1,2회 방송이 펑크 나는 일은 없을 것이기에 한시름 놓은 것이다.
“전에 민재원씨랑 같이 일해본 적이 있어요?”
우현의 확신이 아니었다면 이 야밤에 그를 만날 일이 없었을 테니 지 피디는 궁금했던 것 같다.
“같이 일해본 적은 없어요. 은하랑 같이 드라마를 할 뻔했는데 그쪽 소속사에 사정이 생겨서 못했거든요. 다른 작품을 하고 싶었나 봐요. 그 때 그 친구와 몇 번 이야기를 했었는데 그 작품을 꼭 하고 싶다고 꽤나 열심이었어요. 대본리딩까지 참석했었는데 그 긴 대사를 토씨하나 안 틀리고 다 외워 왔었죠. 그렇게 성실했던 친구가 갑자기 사람이 바뀌었다니 믿기지 않아서 한 번 불러봤던 거죠.”
“그렇구나…”
“지금 생각해보면 저 친구랑 소속사랑 잘 안 맞았을 수도 있었겠네요. 사실 실력도 좋고 마스크도 훌륭한데 아직까지 대표작이 없잖아요.”
“생각해보니 민재원이 지금까지 대표작이라고 할 만한 작품을 찍지는 못했네요. 그렇게 인기 많았던 ‘그 여름의 추억’도 주연으로 출연했던 게 아니었으니까.”
“그 때 은하랑 같이 작품을 했다면 그 작품이 대표작이 되었을 수 있었을 텐데, 그 때 그 작품을 까고 선택했던 드라마가 시청률이 5% 나왔었죠.”
“어머, 완전 망했네요.”
이주희 작가가 손으로 입을 가리며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다.
“그럼 이제 FA가 됐으니까 욕심이 생기겠네요?”
지여울 피디가 갈매기 같은 눈썹을 씰룩이며 미소 지었지만 우현은 피식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그 친구는 관심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