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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9]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4)
“사전제작? 사전제작을 하자고?”
“왜요? 작가님도 사전제작이 편하지 않아요?”
“편하기야 한데…”
방송계에서 사전제작에 대한 논의가 시작된 지는 아주 오래되었다. 드라마를 찍는다 하면 밤샘 촬영과 쪽대본에 시달리는 열악한 환경이기에 연기자는 물론이고 스태프들 역시 사전제작을 열망했던 것이다.
그럼에도 사전제작을 하지 못한 이유가 몇 가지 있다면 첫 째로 편성을 확정하지 못한 상태이기에 제작하는 입장에서는 불안하기 짝이 없다는 것이다. 어지간히 돈 많은 제작사와 투자자의 협업 없이는 감히 생각하기 어렵다.
두 번째 이유는 누구나 짐작하겠지만 흥행을 짐작할 수 없고 시청자들의 실시간 피드백을 받아들일 수 없기 때문에 한 번 어긋나기 시작한 시청률을 되돌릴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전제작에 대한 이야기는 계속해서 나오고 있으며 얼마 전에 김은선 작가의 ‘태양의 후손’이 대박을 치기에 이르렀다.
그 인기에 탄력 받아 몇몇 드라마들이 사전제작을 시도했지만 결과적으로 모두 폭망하고 만다.
“그럼 한 번 시도해보는 게 어때요? 지금까지 사전제작 드라마들이 왜 실패했는지 알죠?”
“알지. 아니까 더 부담돼.”
소파에 등을 한껏 젖히고 팔짱을 끼는 그녀는 입술을 삐죽이며 생각에 잠겼다.
사전제작이든 아니든 드라마가 실패하는 이유는 하나다. 재미가 없기 때문. 실패한 사전제작 드라마들을 보면 하나같이 최상급 대우를 받는 작가들이 아니다.
윤해연 작가가 부담스러워 하는 이유가 그것이다. 만약 자신이 사전제작을 시도했는데 반응이 좋지 않으면 그 때는 방송계에서 지금보다 더욱 사전제작에 대한 부담을 느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선택은 작가님이 하세요. 솔직히 제 입장에서는 안전한 작품을 하는 게 좋지만 그래도 윤 작가님이 사전제작 드라마까지 훌륭하게 치러내면 한 단계 더 올라서는 계기가 될 수 있을 것 같아서요.”
“흐음… 생각지도 못했는데 김 대표 말을 듣고 보니 그럴 수도 있을 것 같네. 좋아. 까짓 거 어차피 드라마 쓰는 건데 이번에는 드라마 쓰면서 머리 좀 덜 빠져보자.”
그녀는 풍성해 보이는 그녀의 머리를 만지작거렸다. 퍼머로 한껏 말아 올려져있기에 겉으로는 티가 나지 않지만 꽤나 신경 쓰였나 보다.
“하하하. 작가님 탈모 때문이라도 이번에는 사전제작으로 해야겠네요. 제작사는 마음에 드는 곳 있으세요?”
윤해연 작가정도가 되면 원하는 제작사를 먼저 컨택 할 수도 있다. 또한 시놉시스와 대본을 쓰면서 제작사나 투자자한테 터치를 받지도 않는다. 이게 최고 수준 작가의 이점이다.
“다들 비슷하잖아? 그래도 오피스텔을 해주고 있는 도마뱀쪽에 먼저 말은 해줘야지. 그쪽에서 못하겠다고 하면 오피스텔 빼야겠네.”
“제가 좋은 곳으로 계약해드릴게요.”
“됐어. 돈도 별로 없으면서… 8:2 계약에서 오피스텔까지 달라고 하면 내가 도둑년이지. 내가 그 정도 개념은 있거든. 그나저나 이번에 김별은 작품 들어간 거 있어?”
“어? 우리 별이 먼저 신경 써주시는 겁니까?”
“그럼, 우리 식군데. 당연히 식구가 챙겨야지.”
“하하, 감사합니다. 그런데 얼마 전에 영화 들어가기로 했어요. 은하까지 같이요.”
“은하? 유은하? 은하랑 어떻게 같이 하기로 했어? 어머, 둘이 너무 친해진 거 아니야?”
소파에 한껏 묻혀있던 등이 용수철처럼 튀어 나왔다. 그 기대어린 눈빛이 부담스러워 슬쩍 눈을 돌렸다.
“무슨 그런 말씀을 하세요. 크흠… 시나리오 보더니 마음에 든다고 직접 투자까지 했어요. 그래서 같이 하게 됐네요.”
“감독이 누군데 투자를 해?”
“임찬규 감독이라고, 왜 예전에 ‘사슬’이라는 영화 찍은 감독 있잖아요.”
“이, 그래. 나도 그 영화 봤어. 그 감독 차기작이야? 내용은 뭔데?”
유은하가 직접 투자와 출연을 결정한 작품이라 그런지 윤 작가의 관심을 많이 끌었나 보다. 그래서 임 감독의 수정된 시놉을 그냥 가져다주었다.
“어때요?”
그녀는 시놉시스를 다 읽어본 다음에 눈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별이 차기작으로 선택할 만하네. 깊이 있는 연기가 필요하고 화제도 많이 생기겠어. 이런 영화가 없다 보니까 아마도 오랫동안 회자될 거야. 물론 평균 이상만 된다면 말이지. 대신 위험도 있어, 알지?”
“그럼요. 은하는 몰라도 별이에게는 양날의 검이죠.”
이미 상당한 연주 경력을 가진 은하이기에 큰 걱정은 하지 않고 있다.
“상당한 연기력이 필요할 거야. 드라마처럼 대충 흉내만 내다간 평론가들이나 관객들이 혹평을 쏟아낼 테니까. 최소한 30초에서 1분 정도는 실제로 연주하는 장면이 나와야겠지. 자신 있대?”
“별이가요? 하하. 지금 피아노 레슨 때문에 얼굴도 못 봅니다. 하루에 먹고 자는 시간 빼면 피아노만 치고 있어요. 그만큼 노력하고 있습니다.”
“노력만으로는 안 돼. 잘 해야지. 하긴, 김 대표 눈인데 그 정도 안 되려고…”
“하하하. 그럼요, 당연하죠. 어쨌거나 지여울 피디 해야 할 일이 하나 더 늘었네요.”
“같이 일을 해야 늘어난 거지.”
“지 피디가 돈 될 작품 놓치겠어요?”
윤 작가를 보내고 곧바로 도마뱀 미디어 사무실에 들른 우현은 피곤에 푹 찌든 지여울 피디에게 윤 작가의 차기작 이야기를 꺼냈다. 그의 말처럼 지 피디는 윤해연 작가의 차기작에 관심을 드러냈다.
“문제는 사전제작이네요.”
“그렇죠. 어때요? 어려운가요?”
다크서클이 턱까지 내려온 지여울 피디는 인스턴트커피를 숭늉처럼 들이키며 말했다.
“어렵죠. 어렵긴 한데… 윤해연 작가님이니까 해볼 만하네요. 문제는 투자인데… 사전 제작이면 회당 제작비만 최소 4억에서 5억은 들 거예요. 물론 가족드라마처럼 세트 지어놓고 하는 거면 훨씬 저렴해지겠지만 얼마 전에 했던 ‘태양의 후손’ 정도의 퀄리티면… 아휴…”
주연배우인 송해연과 송민기의 몸값을 차치하고서라도 무려 중동과 그리스를 로케했던 드라마다. 그에 걸맞게 PPL이 황당할 만큼 많이 나오기도 했다.
“아직 시놉이 나온 건 아니니까 미리부터 걱정하지 말자구요. 그리고 설사 그 정도의 스케일이 나오더라도 ‘태양의 후손’만큼 잘 될지 어떻게 압니까?”
“그 정도만 되면 엎드려 절 해야죠.”
“그럼 어떻게 할 겁니까? 여기서 제작 하겠다고 하면 기획 잡아야죠.”
작가가 시놉시스를 다 만들어서 들이밀 수도 있지만 제작사에서 기획 단계부터 참여하는 경우도 있다.
“아니에요. 괜히 윤 작가님 작품에 손대려다가 망치면 어떡해요? 그냥 시놉 가지고 오시면 진행하겠다고 말씀해주세요. 물론 확정은 회사 차원에서 결론을 낼 거지만 설마 위에서 윤해연 작가를 까겠다고 하겠어요? 이 바닥에서 장사 하루 이틀 할 것도 아니고…”
그렇다. 윤해연 작가 입장에서는 까짓 사전제작 안 하면 그만이긴 하다. 그 과정에서 괜히 밉보이기라도 했다간 윤 작가와의 끈이 희미해질 수 있기에 무조건 받겠다고 한 것이다.
“투자 받을 수 있겠어요?”
“남들이 하는 거 우리라고 못 하겠어요? 대신 외국 투자도 받아야 해요.”
“중국 투자자 말이죠?”
“네. 그러면 캐스팅에 저들이 원하는 사람을 넣어야 할 수도 있어요. 이건 감수해야 해요. 이 정도도 감수 못하면 중국 투자 못 받아요.”
“흠… 또 중국인 출신 아이돌이 하나 끼어들겠네요.”
“그래도 한국말을 잘 하는 아이돌이면 다행이죠. 말도 못 하는 아이돌을 무작정 끼워달라고나 하지 않으면 다행인데…”
“그건 그 때 가서 생각해봅시다. 그건 그렇고 ‘천방지축 그녀’는 어때요? 이제 다음 주가 첫 방이던데, 촬영은 잘 되고 있어요?”
“네, 순조롭게 잘 촬영되고 있어요. 현재 6회분까지 촬영 완료됐고 7회분 들어갔다고 알고 있거든요. 의외로 아영씨 연기도 괜찮다고 하네요. 피디님께서 걱정했는데 다행이라고 말할 정도면 화면에서도 괜찮게 나올 것 같아요.”
‘청방지축 그녀’ 육현기 피디의 말은 믿을 수 없다. 전작도 같이 촬영했던 아이돌의 연기가 천재적이라느니 천생 배우라느니 헛소리를 씨부리던 감독이니까.
“잘 한다니 다행이네요. 그럼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도마뱀 미디어 사무실을 나오며 윤 작가에게 오케이를 받았다고 문자를 보냈다. 기획단계에는 참여하지 않겠다고 선을 그었으니 이제 윤 작가 스타일로 재미있게 쓰기만 하면 된다.
해가 지고 노을이 비치자 오늘은 사무실이 아닌 오피스텔로 향했다. 몇 달간 12시 전에 퇴근해본 일이 없기에 마땅히 스케줄이 없는 오늘은 오피스텔에서 치킨에 맥주를 하며 쉬려는 생각이었다.
차에서 느긋하게 라디오를 들으며 운전하는데 황당한 소식이 그의 귀를 때렸다.
[이세준씨가 급성 간염으로 쓰러졌다는 소식인데요, 안타깝습니다. 다음 주가 ‘천방지축 그녀’ 첫 방이라 제작진들의 근심이 크겠어요. 그렇죠?]
[맞아요. 우리 잘생긴 세준씨가 쓰러졌다니… 전 믿을 수가 없어요.]
라디오 진행자와 게스트간의 대화에 우현은 일단 정지 신호에 차를 유턴시켰다. 다시 도마뱀 미디어 사무실로 향하기 위해서였는데 마침 지 피디에게 전화가 걸려왔다.
“네, 피디님. 방금 라디오에서 들었습니다.”
“아, 들으셨어요? 큰일이에요. 소속사에 물어봤는데 촬영 어려울 것 같아요.”
아까와는 다른 심각하게 굳은 그녀의 목소리는 사태가 그 만큼 심각하다는 뜻이다.
“하아…”
한 손으로 마른세수를 하며 고민에 빠졌다. 당장 다음 주에 첫 방인데 남주인공이 빠지게 생겼다. 6회까지 찍었던 내용 중 상당수는 날려야 하는 건 물론이고 재촬영에 앞으로 남은 일정을 생각하면 폭탄이 떨어진 거나 마찬가지다.
“현장에서는 뭐라고 합니까?”
“일단 남주 역 빼고 촬영하고 있어요. 하지만 당장 다음 주 첫 방 나가는 것 때문에 제정신들이 아니에요.”
“이 작가는요? 저는 아직 전화 못 해봤어요.”
“이주희 작가님도 지금 패닉 상태예요. 일단 대본은 8회까지 나와 있어서 여유가 있긴 하지만 당장 남자 주인공을 어디서 구하냐고 난리세요.”
“알겠습니다. 일단 선이 닿는 모든 회사에 대타 가능한 배우 물색해서 이주희 작가가 있는 오피스텔로 오세요. 저도 지금 바로 오피스텔로 가겠습니다.”
서둘러 이주희 작가가 있는 오피스텔에 도착하니 그녀와 20대 중반의 여성 보조작가가 우현을 맞았다.
“대표님, 소식 들으신 거예요?”
“네, 일단 앉아요. 지금 지 피디가 대타 가능한 남자 배우 찾아서 온다니까.”
“이세준급 남자 배우가 대타로 하려고 할까요?”
이 작가의 얼굴은 흙빛이 돼버렸다. 그녀로서는 첫 장편 입봉작인데 이렇게 일이 꼬이니 신을 원망하고 있을 거다.
“이세준급 남자 배우도 일 없으면 노는 거예요. 너무 걱정하지 말아요. 대한민국에서 드라마 하겠다는 배우는 남아도는 게 현실이니까요. 그보다 촬영이 빡빡해진 게 문제네요. 당장 내일부터 촬영해도 1,2회 방영이 힘들겠는데…”
밤 11시가 넘어갈 때쯤 지여울 피디가 배우 목록을 손에 들고 오피스텔에 찾아왔다. 아무리 힘들어도 먹고 힘내자며 치킨과 피자를 시켜서 먹고 있는 것을 본 지 피디는 씩씩거리며 자리에 앉아 피자 한 조각을 입에 물었다.
“저는 이렇게 힘들게 돌아다니는데 너무 맛있게들 드시는 거 아니에요?”
“그래서 지 피디 거까지 시켜놓은 거예요. 누구 골라 왔어요?”
티슈로 손에 묻은 기름을 벅벅 닦은 지 피디가 파일을 올려놓았다. 우현과 이 작가가 낼름 낚아채서 훑어보니 상당수가 이세준보다는 네임밸류가 조금 떨어지는 배우들이었다. 이 작가의 얼굴에 실망이 비쳐갔다.
“그런데 이 배우는 왜 소속사가 없어요?”
우현의 손가락이 한 남자배우의 얼굴을 찍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