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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8]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3)
유니는 화약총 소리가 들리자마자 발을 박차고 앞으로 뛰어나갔다. 자신의 팬들이 저렇게 많이 와서 응원하는데 그래도 최선을 다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던 것이다.
다다다다!
운동신경이 있는지 유니는 폴짝거리면서 허들을 한 번도 쓰러뜨리지 않고 달려 나갔고 곧바로 가장 먼저 결승점을 앞두게 됐다.
철푸덕!
“아악!”
뒤에서 절구통에 인절미를 메치는 소리가 들려옴과 동시에 비명소리가 나자 유니는 뒤를 돌아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자신도 모르게 뜀박질을 멈추고 말았다.
유니 뒤에서 달려오던 여아이돌 하나가 땅에 엎어져 있었는데 어찌나 세게 넘어졌던지 얼굴과 팔꿈치에서 언뜻 피가 보이는 것 같았다. 놀란 유니는 곧바로 그녀에게 달려가 부축하니 예전 라라걸즈처럼 아직 빛을 보지 못한 슈가베이비의 멤버 레니다.
“언니, 괜찮아요?”
오다가다 인사정도만 하는 사이지만 그래도 레니가 자신보다 나이가 많은 것을 아는 유니는 이마와 코가 찢어진 그녀를 부축하며 눈물을 뚝뚝 흘렸다. 이 정도면 의학지식이 없는 그녀도 마데카솔 정도 발라서 나을 상처가 아님을 알기 때문이다.
“누가 좀 와 봐요!”
미리부터 대기하고 있던 의료진이 서둘러 달려와 쓰러진 레니의 상처를 살폈다. 우현도 놀라서 일단 달려갔다. 스태프들과 매니저들이 달려들어 금방 수십 명의 사람들이 그녀들을 둘러쌌다.
레니는 자신이 넘어진 것이 창피한지 처음에는 눈을 내리깔고 카메라를 의식적으로 피했지만 자신의 얼굴에서 피가 나는 것을 알고는 사색이 되고 말았다.
“아저씨, 저 수술해야 해요? 수술하면 안 되는데…”
“무슨 소리예요. 이마가 많이 찢어져서 꿰매야 합니다. 코도 깨졌어요. 아아, 손으로 건드리면 안 됩니다. 그냥 가만히 계세요.”
의료진의 말에 급기야 레니는 울음을 터뜨렸다. 상처가 완벽히 가라앉을 때쯤이면 자신의 걸그룹은 활동을 제대로 못하게 될 것이고 안 그래도 무명 생활을 거듭하던 자신은 이제 끝났다고 여긴 것이다.
아프기도 하고 서럽기도 한 그녀의 얼굴은 눈물 콧물 핏물로 범벅이 되었다.
“안 되는데… 아저씨, 저 수술하면 안 돼요. 지금 잘 치료해주세요.”
“일단 병원 가자.”
슈가베이비의 매니저로 보이는 남자가 레니를 일으켜 세웠다. 레니는 그 와중에도 의료진과 눈을 맞추며 잘 치료해달라고 울먹이고 있었다. 그녀를 둘러싼 사람들은 생각보다 심해보이는 상처에 웅성거리며 우려 섞인 말들을 주고받았다. 그런데 현장을 지휘하는 소 피디가 인상을 잔뜩 찌푸리며 나직이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아 X팔… 시간 없는데…”
제 딴에는 그냥 작게 말한다고 했겠지만 문제는 그의 목소리가 너무 컸다. 순간 화가 치솟은 슈가베이비의 매니저가 그대로 소 피디의 얼굴에 주먹을 날렸다.
빡!
학창시절에 좀 놀아본 아이들의 싸움을 봤다면 금방 알아차릴 수 있을 만큼 찰진 소리가 울려 퍼졌다. 우현은 그 소리를 듣자마자 직감적으로 ‘제대로 들어갔다’라고 느낄 정도였다.
소 피디의 입에서 피가 안개처럼 뿜어져 나가며 뒤로 나가떨어졌고 슈가베이비의 매니저는 그것으로는 성에 차지 않는다는 듯 다시 한 번 주먹을 날리려고 달려들었다.
“막아! 막아!”
건장한 체격의 스태프들이 꼬리에 불이 붙은 소처럼 날뛰는 슈가베이비의 매니저를 잡고 있는 사이 다른 스태프들이 소 피디를 안전한 곳으로 이동시켰다.
자신이 한 대 크게 얻어맞은 것에 충격을 받았는지 처음에는 두려움 반, 황당함 반이던 소 피디의 얼굴은 슈가베이비 매니져와 거리가 멀어지자 정신을 차리고 욕설을 내뱉었다.
“야, 이런 XX끼가, 너 이제 죽을 줄 알아! 내가 그냥 넘어갈 것 같아? 너 이 새끼, 바로 감방에 보내버릴 거야!”
그 소리에 다시 한 번 슈가베이비의 매니저가 달려들었지만 스태프들의 완력에 뜻대로 안 됐다. 항상 무거운 장비를 들고 다니는 스태프들은 다들 한 덩치 하기 때문이다.
소 피디는 경찰까지는 차마 부르지 못하고 씩씩거리며 계속해서 욕설을 퍼부어댔다. 녹화현장에 경찰이 출동했다간 기자들이 벌떼처럼 모여들 것이고 온갖 비난은 결국 자신을 향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아는 것이다. 그래서 가슴 속의 화를 욕설로 풀고 있는 건데 문제는 그들을 지켜보는 많은 팬들이 있다는 사실을 망각했다는 거다.
본래 아이돌 올림픽에서는 팬들에게 사진을 찍는 것도 못하게 한다. 그런데 이미 레니가 엎어진 순간부터 팬들은 핸드폰으로 동영상 촬영을 시작했다.
슈가베이비의 매니저가 소 피디의 얼굴을 주먹으로 후려친 순간부터 일제히 SNS에 불이 붙기 시작했다. 특히 욕설을 내뱉는 모습도 모조리 카메라에 담겼기 때문에 파급은 일파만파 커져만 갔다.
이 사실을 모르는 제작진들은 어떻게든 수습하려고 레니를 구급차에 태워 보냈다. 어쩔 수 없이 슈가베이비의 매니저도 같이 그 구급차를 타고 자리를 떠났고 소 피디는 쪽팔림에 자리를 비웠다.
제작진은 다시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녹화를 시작했지만 남자아이돌은 몰라도 여자아이돌은 한차례 벌어진 싸움에 표정관리가 제대로 되지 않았다. 놀란 가슴이 진정되지 않는 까닭일 것이다.
결국 녹화를 중단하고 1시간 정도의 쉬는 시간을 가진 후 다시 녹화를 재개했다. 유니는 눈앞에서 피범벅이 된 레니의 얼굴을 봐서인지 1시간의 쉬는 시간 이후에도 계속 어두운 표정이었다. 긴장상태가 풀리지 않은 모양이다.
“그냥 포기하자. 그러다 다치면 어떡해?”
“괜찮아요. 그냥 뛰다 오는 건데요. 대표님 말씀대로 무리하지 않을게요.”
유니는 처음과는 달이 이번에는 힘을 빼고 달렸다. 기록도 무려 3초나 차이 날 정도였는데 그래서 그런지 이번에는 1등을 놓쳤다. 그래도 끝나고 왔을 때는 팬들을 향해 손을 흔들어 줄만큼 여유를 되찾은 상태였다.
그날 녹화는 밤이 돼서야 끝이 났고 유니는 백여 명의 팬들에게 일일이 악수로 감사를 표하며 돌려보냈다. 감수성이 풍부한 팬 몇은 아까 놀라지 않았냐며 눈물을 보여 다시 한 번 유니를 울게 만들기도 했다.
이때만 해도 우현과 유니는 녹화를 잘 마쳐 다행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집으로 가는 도중 핸드폰으로 기사를 검색하던 유니가 고성을 터뜨렸다.
“대표님, 큰일났어요!”
“뭐? 뭔데?”
조수석에 앉아 있던 우현이 뒤를 돌아보자 유니가 조막만한 손으로 핸드폰 화면을 그가 볼 수 있도록 돌려주었다. 우현이 자세히 보니 기사 제목이 가관이다.
[아이돌 올림픽에서 주먹싸움, 슈가베이비 레니 구급이송]
“이게 뭐야?”
“그러게요. 분명 맞은 사람은 피디님인데…”
“기자들이 누가 얻어터졌다는 말에 레니가 맞은 걸로 알았나보다. 큰일인데?”
역시나 시간이 얼마 지나지 않아 정정기사가 올라오고 사건의 전말에 대한 기사가 포털을 잠식하기 시작했다.
“이제 큰일 났네요. 레니 언니가 걱정이에요. 방송사에서 치료비는 줄까요?”
“안 줘. 다쳐도 본인이 알아서 치료해야 되고, 스케줄 펑크난 것도 책임 안 져. 그나저나 이번에 녹화한 거 제대로 방송이 나갈 수 있을지 모르겠네.”
“대표님, 아무리 다른 회사 사람이라고는 하지만 사람이 다쳤는데 너무 무신경하신 거 아니에요?”
유니의 지적에 순간 가슴이 뜨끔해왔다.
“미안… 너무 우리만 생각했다, 그치? 그런데 어쩔 수 없는 게, 나는 네가 안 다쳤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만족하고 있어. 더군다나 슈가베이비 매니저가 소 피디 얼굴을 그 지경으로 만들어 놨으니 이제 MBS쪽은 출입금지겠지.”
“그렇겠죠? 보니까 슈가베이비 음악방송 녹화도 몇 번 못해봤을 텐데 너무 안타까워요.”
본인도 무명의 생활을 느껴봐서 그런지 그런 쪽으로 공감대 형성이 잘 되는 것 같았다.
“얼굴 상태 보니까 치료 마치려면 최소 반년 정도는 필요하겠더라. 슈가베이비 매니저가 화날 만했어.”
“그렇죠? 어쩜 그 상황에서 그런 말을 할 수 있을까요? 못 돼가지고…”
“그러니까 얻어터진 거지. 아무리 녹화시간이 촉박하다고 해도 그런 말을 하면 안 되지.”
그것으로 끝날 줄 알았는데 뒤늦게 유니가 레니를 안고 눈물을 글썽이는 사진이 뜨면서 유니의 이름이 실검 1위에 다시 한 번 등극하기도 했다.
노래도 잘 부르고 예쁜데다가 마음씨 착한 것까지 인증 됐다며 팬카페에 신규 가입 회원수가 급증했다.
다음날이 되자 사태는 가라앉지 않고 더 크게 부풀려져 갔고 아이돌 올림픽에 대한 부정적인 기사가 우후죽순으로 쏟아져 나왔다. 그 자리에 있었던 관계자와 매니저들에 의해 소 피디의 망언이 드러났기 때문이다.
결국 유니의 실검 1위는 아직도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고 실검 2위를 소대윤 피디가 장식하고 말았다. 예능 피디가 실검에 오를 만큼 크게 이슈가 부각되자 급기야 방송사측에서 사과발표까지 하기에 이르렀다.
[MBS 슈가베이비 레니의 치료비 전액 지원 결정]
슈가베이비 입장에서는 전화위복이 됐다. 단지 다친 레니만 안타까울 뿐. 치료 후에 전의 얼굴을 완전하게 회복하기를 바랄 뿐이다.
어쨌거나 아이돌 올림픽이 방송도 되기 전에 화제가 되자 온갖 지상파 대표 예능에서 유니를 찾기 시작했다. 그렇게 작가들과 스케줄을 의논하다보니 소대윤 피디가 지방 방송사로 발령을 받게 됐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앞으로 자연다큐를 맡게 될 거라나? 언젠가 아프리카나 남극으로 떠날지도 모르는데 그 성격에 잘 버틸지는 모르겠다.
“촬영 끝났다고? 벌써?”
은하가 이명선 감독의 ‘그녀의 일기’ 촬영이 모두 끝났다고 알렸다. 영화 하나 찍는데 시간이 오래 걸리지 않는 것을 알고는 있었지만 한 달도 안 돼서 해치워버릴지는 몰랐다.
“응. 계약은 이미 해놨고 모레부터 피아노레슨 시작할 거야.”
“넌 피아노 꽤 오래 쳐서 해볼 만하겠다.”
우현이 알고 있기론 은하는 무려 6년 넘게 피아노를 쳤다. 어렸을 때는 지방에서 진행하는 대회에도 몇 군데 나가서 상도 받았었다고…
“아주 오래전이야. 물론 아무것도 모르는 일반인들보다야 낫겠지. 어쨌거나 나 내일이 마지막 쉬는 날이니까 밥이나 사.”
은하와의 전화를 끝내고 피식 웃음을 짓고 있는데 사무실 문이 열리며 누군가가 모습을 드러냈다. 실루엣을 보니 여자다.
“여기 왜 있어요?”
“하하하. 놀랐어?”
윤해연 작가가 그새 조금 거뭇해진 얼굴로 호탕하게 웃었다.
“유럽 한 바퀴 돌고 온다면서요?”
“나도 나이가 있어서 그런지 일단 몰디브에 며칠 있었어. 그러다가 유럽으로 가려고 했는데 왜지 모르게 여행이 하기 싫어지더라구. 시청률 30%를 찍어서 그런가? 이상하게 놀고 있어도 그 때 그 짜릿했던 느낌이 계속해서 나를 자극하더라니까.”
“그럼 혹시…?”
“그래, 작품 하나 구상했어. 사실 내용은 별다를 거 없어. 로맨틱 코미디 시놉시스야 다 거기서 거기지. 알잖아?”
“그렇죠. 중요한 건 풀어나가는 능력이죠.”
“그래서 아직 시놉을 만들지는 않았어. 그냥 머릿속이 뒤죽박죽 상태야. 그런데 비행기를 8시간동안 타고 오는데 잠이 안 오더라. 처음이야. 이렇게 글을 쓰고 싶어진 건. 그래서 작품이 엉망으로 나올 수도 있을 것 같아서 걱정이야.”
“걱정 되지만 쓰고 싶다 이거죠?”
“그렇지. 어때? 나 해볼까?”
“당연하죠. 언제 시작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전에는 힘들게 했으니까 이번에는 여유롭게 사전제작으로 가봅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