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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6]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1)
“한다고 이걸?”
“응, 나도 이거 할래.”
이건 전혀 생각지도 않았던 전개다. 아무리 10억이 큰돈이라고 해도 이미 수십억을 번 그녀이기에 10억까지는 아니더라도 절반만큼은 투자를 받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자신이 투자하는 영화에 자신이 출연하겠다니…
“왜? 너 지금 촬영 중이잖아?”
“이명선 감독이 얼마나 빨리 찍는지 알면서 그래? 영화 한편 1달 이상 찍어본 적 없는 감독이야. 지금 찍은 지 보름도 넘었고… 나 이거 끝나고 아직 스케줄도 없어.”
우현은 그녀의 눈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아무리 봐도 거짓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네가 참여하면 주연이 되겠네?”
“당연하지. 김별을 주인공 라이벌 역으로 하면 되잖아.”
만약 하겠다고 하면 그게 맞다. 김별을 주인공으로 하고 유은하가 조연을 하겠다고 하면 일단 투자자부터 가만두고 보지 않는다. 그리고 은하 소속사에서도 가만히 있을 수 없는 문제다. 조연 몸값이 주연 몸값의 열 배가 넘는 웃긴 상황이 연출 될 수 있기에, 한다고 하면 은하가 주인공을 하는 게 맞다.
“손해 본다고 생각하지 마. 오빠도 알다시피 영화가 잘 되면 주연만 빛 보는 것도 아니잖아. 그리고 이 시나리오 자체가 주인공과 라이벌 학생의 대결 구도가 아주 명확하게 잡혀 있어서 분량이 적게 나오는 것도 아니네.”
“그건 그렇지.”
“마지막에 연주 장면도 주인공만큼 잡아주면 오빠가 노리고자 하는 건 다 이룰 수 있을 거야.”
“그럼 왜 하려고 하는 건데?”
“10억이나 투자하잖아. 물론 내가 그것보다는 돈을 많이 벌었고 그게 오빠 덕분인 것도 알아. 그래서 마냥 아깝다고 생각하지는 않고 투자하는 거야. 하지만 10억이라는 돈은 분명 큰돈이고 나도 사람이라 만약 그걸 날렸을 때 오빠를 원망하게 될 것 같아. 그래서 출연하려고. 적어도 내가 출연해서 망하면 내 탓이려니 할 테니까.”
생각지도 못했던 대답. 우현은 순간 할 말을 잃고 말았다.
“하여튼 이거 내가 출연할 거니까 제작사측에 그렇게 얘기해줘. 분명 좋아할 거야.”
좋아하겠지. 아마 윤석은 달려들어 뽀뽀하려고 할지도 모른다. 은하가 주연으로 캐스팅 확정됐다면 아무리 음악영화가 잘 된 작품이 없다고 하더라도 투자자는 붙을 수밖에 없으니까.
“소속사에 얘기해봐야 하는 거 아니야?”
“흥! 다 알면서 의뭉 떨기는… 내가 하겠다는 걸 소속사가 막을까 봐?”
피식 웃음을 짓는 그녀는 우현의 마음을 꿰뚫어 보고 있다는 듯 시선을 마주했다. 그 시선에 괜히 더 쑥스러워졌다.
“그럼 출연료는?”
“내가 투자하는데 출연료까지 많이 받는 것도 웃기잖아? 김별 수준으로 받을 테니까 걱정하지 마.”
“그래, 알았다. 그리고 고마워.”
“고마워는 해도 되는데 내가 오빠한테 받았던 거 돌려주는 거니까 그렇게까지 감동한 얼굴은 하지 않아도 돼. 밥이나 먹으러 가자.”
“뭐 먹고 싶어? 비싼 거 사줄게.”
“10억이나 투자하는데 밥 정도야 비싼 거 사는 게 당연하지. 난 초밥, 아주 비싼 거로.”
“오케이. 이 동네에서 가장 비싼 집으로 가자.”
은하는 막상 초밥집에 가서는 많이 먹지 않았다. 체중관리 때문에 어쩔 수 없는 거다. 돈을 더 쓰게 해야 했다며 귀엽게 투덜거린 그녀를 보낸 우현은 다시 충무로에 있는 ‘타이거 스튜디오’ 사무실로 향했다.
“어? 왜 다시 오셨어요?”
윤석은 어딜 급하게 나가려고 하는지 검은 서류가방을 들고 나갈 채비를 한 상태였다.
“어디 가세요?”
“네, 투자 좀 받아 보려구요. 무슨 일이세요?”
그는 설마 그사이에 투자를 받아오지는 못했을 거라고 생각했는지 다른 이유가 있을 거라 생각한 듯했다.
“투자받을 수 있을 것 같아요.”
“네? 확정 난 겁니까?”
“일단 앉으시죠.”
흥분하는 윤석을 진정시키고 회의실에 앉혔다. 경리가 내어준 인스턴트커피를 한 모금 홀짝거리자 그가 못 참겠다는 듯 목소리를 높였다.
“김 대표님, 투자 받아오신 거예요?”
“네, 그런데… 아무래도 주인공이 바뀌어야 할 것 같아요.”
“혹시 투자자가 압박을 넣은 겁니까? 그런 부당한 것까지…”
“유은하요.”
“네? 누구라구요?”
어디서 듣도 보도 못 한 여배우 이름이 나올 거라 생각한 윤석은 유은하의 이름이 나오자 눈이 동그래졌다.
“유은하가 주인공을 하고 싶어하네요. 투자도 유은하가 직접 할 겁니다.”
“맙소사! 유은하가 이걸 하고 싶어 한다구요? 하하하.”
윤석은 옆에 고이 모셔두었던 검은 서류가방을 멀리 던져버렸다.
“대표님이 5분만 늦게 오셨어도 그 재수 없는 것들한테 허리를 굽신거렸을 텐데, 아주 고맙습니다. 이제 허리 꼿꼿이 세우고 투자받을 수 있겠네요. 그나저나 은하씨와 좋은 관계를 유지하셨나 봅니다? 영화 시나리오를 가지고 투자까지 받아내기 힘드셨을 텐데요. 그럼 투자금은 얼마나…?”
“10억입니다.”
“10억이요? 하하하. 이거 뭐 제가 할 일을 김 대표님께서 다 해주셨네요. 고맙습니다. 대신 이번 작품 진행하면서 김별씨에게 해드릴 수 있는 모든 편의를 전부 제공하도록 하죠.”
“저야 고맙죠.”
“그런데 은하씨에게는 어느 정도의 수익률을 말씀하셨습니까? 아무리 친하다고 해도 10억이라는 돈은 쉽게 투자할 수 있는 돈이 아닌데요.”
“두 배요.”
“두 배요? 흠… 그러려면 관객이 얼마나 들어야 할지… 그럼 최소 250만 이상을 바라보시는 건가요?"
“그 정도는 나오지 않겠습니까?”
“250만이라… 30억 제작비도 넉넉잡아 계산한 거라 250만 관객이면 투자자 입장에서 100% 이상 수익률이 나올 수도 있겠네요.”
작품성과 상업성을 동시에 생각하고 있지만 그렇다고 500만 이상의 대박까지는 바라지 않는다. 공포영화가 아무리 마이너한 장르라고는 해도 음악영화보다는 훨씬 메이저에 가깝기에 기꺼이 ‘밀실’에 별이를 참여시킨 거였다.
그래도 이 정도로 시나리오가 좋고 은하까지 참여하게 된다면 못해도 250만 이상은 바라볼 수 있다고 생각했다. 물론 은하 입장에서는 가장 스코어가 안 좋은 작품이 되겠지만 직접 투자하고 출연했다는 것만으로도 그녀의 필모에 상당히 긍정적인 영향을 끼칠 거다.
“그리고 출연료는 김별 수준으로 받는다고 하는데 걔 성격상 그렇게 말했으면 거의 받지 않을 겁니다. 받아야 할 때는 최고 수준을 맞춰주지 않으면 안 되는 애지만 그렇지 않을 때는 거의 안 받거든요. 그게 자신의 자존심이라면서…”
“좋네요. 솔직히 은하씨가 한다고 했을 때 출연료 걱정을 조금 했었는데 제작에 여유가 생기겠습니다.”
“작곡가 섭외할 금액이 워낙 비싸다고 알고 있는데 여유가 없지 않겠어요?”
“그게 확정이 안 나네요. 다른 건 어느 정도 비용 산출이 되는데… 현재 우리나라에서는 클래식 작곡가를 구할 수 없어서 외국 작곡가를 구해야 하는데 연결도 아직 못하고 있어서 섭외 비용이 예상이 안 됩니다.”
“알겠습니다. 일단 제가 전해드릴 말은 다 했으니 그럼 전 이만 일어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피아니스트는 저희 쪽에서 최대한 빨리 구해드리겠습니다.”
윤석은 우현에게 구명지은을 입은 것처럼 몇 번이나 허리를 숙이고 손을 잡으며 감사를 표했다. 예전에 임 감독 작품과 다른 몇 개의 작품을 성공시킨 제작사이긴 하지만 근래 큰돈을 들인 작품이 망하는 바람에 은행에 이자도 내기 버겁다는 말은 들었다. 그래서 이번 작품으로 재기의 기회를 노려야 하는데 우현이 이렇게 톱스타와 투자자를 동시에 물어다 주니 죽다 살아난 기분일 터였다.
마지막으로 별이에게 은하가 주연으로 할 것이고 투자도 정상적으로 진행 중이라고 전했다. 실망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의외로 별이는 더욱 후련해진 표정이다.
“사실 주연이라고 하니까 부담이 있었거든요. 은하 언니랑 같이하니까 이제 제 연기에만 집중할 수 있어서 좋아요.”
어차피 조연이라고 해도 라이벌 역이라 비중이 상당해서 부담감은 줄이고 연기력은 어필할 수 있는 최적의 조건이긴 했다.
이제 우현이 할 수 있는 모든 건 마무리 되었다. 은하의 투자와 출연은 제작사와 은하의 소속사가 알아서 처리할 문제니 그가 중간에 끼어들 여지가 없다. 그래서 느긋하게 기다리면서 이후의 진행 상황을 보고받으며 착실히 준비하기만 하면 된다.
그날 자정이 지난 새벽에 우현과 별이는 홀가분한 마음으로 북경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웹드라마 ‘미녀는 괴롭냐?’의 팬사인회 일정 때문이다. 원래 며칠 더 빨리 갔어야 했는데 현지 이벤트 업체 측에서 장소 대여 문제로 마찰이 있었다고 했다.
중국에서 하는 행사는 언제 어디서 문제가 생길지 알 수 없기에 CS 엔터테인먼트측은 별로 놀라지도 않았다. 의례 있는 일이었다는 듯 비행기 시간을 조정해줄 뿐이었다.
별이는 이제 어딜 가나 동영상으로 클래식 연주회를 보며 감상에 빠져들었다.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는 것이 예전 기억을 떠올리는 듯했다. 일종의 마인드 트레이닝인데 아직 본격적인 연습도 하지 않았는데도 저것을 하고 있는 걸 보니 이번 작품에 대한 그녀의 열의를 느낄 수 있었다.
“오시느라 고생하셨습니다.”
공항에는 이미 CS측 직원이 나와 있었다. 그는 우현과 별이를 데리고 북경의 한 쇼핑센터로 안내하며 일련의 상황에 대해서 늘어놓았다.
“지금 ‘미녀는 괴롭냐?’가 상당히 좋은 반응을 얻고 있습니다. 웹드라마라 TV로 방영된 것이 아니기에 선풍적인 인기를 얻고 있는 건 아니지만 10대와 20대에서 상당히 긍정적인 반응입니다.”
“그래요?”
“네, 얼마 전에는 현지 전자업체에서 K보이즈의 유시훈을 광고모델로 선정하기도 했으니까요. 아무래도 남자배우보다는 여자배우의 파급력이 떨어져서 그런 것이니 이해해주세요. 그래도 이 정도 반응이면 조만간 다른 중국 업체에서 광고모델로 제의를 해올지도 모릅니다.”
여자 연예인보다 남자 연예인이 훨씬 큰 파급력을 가지는 게 당연하다. 어쩔 수 없는 것이 여자 연예인의 팬들에는 남자가 많고 남자 연예인의 팬들에는 여자가 많은데 여성의 구매력이 남성보다 월등히 높기 때문이다. 그래서 TV에서 하는 오디션 프로도 결정적인 순간에는 여성보다 남성이 이길 확률이 훨씬 높다.
“그랬으면 좋겠네요. 지금 가는 쇼핑몰은 어딥니까?”
“이번에 새로 개장한 프리미엄 아울렛 개념의 복합 쇼핑몰입니다. 그곳에서 팬사인회 겸 방송사 인터뷰가 예정돼있습니다.”
“인터뷰요? 그런 말씀은…”
“아, 어려운 건 아닙니다. 사실 저희도 예정에 없었는데 바로 어제 잡힌 스케줄입니다. 한류 드라마 인기에 관한 취재 목적인데 굉장히 큰 방송사다 보니 거절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렇겠죠. 현지 방송국과는 무조건적으로 친해져야 하니까요.”
“덕분에 방송사 측에서 원래 생각했던 곳보다 더 좋은 장소를 잡아줬습니다. 지금 가보시면 알겠지만 상당한 인파가 미리부터 기다리고 있으니까 놀라지 마세요.”
“그리고 그 중의 상당수가 유시훈을 보러온 거겠죠?”
별이가 너무 기대할까 봐 괜히 퉁명스레 초를 쳤다. 하지만 그는 우현의 반응에도 웃음을 잃지 않았다.
“하하하. 그렇다고 김별씨에 대한 인기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닙니다. 저도 보면서 놀랐습니다. 그 정도로 많은 남자들이 올 줄은 몰랐거든요.”
“그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