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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5] 한 걸음 더 나아가다(6)
“왜? 뭐 문제 있어?”
별이는 긴 머리를 쓸어 올렸다가 머리카락 한 가닥을 잡고는 손가락으로 돌돌 감았다 풀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굉장히 고민이 되는 듯했다. 이런 모습도 이제는 영락없이 여배우다. 막 씻고 나온 쌩얼인데도 얼굴에서 빛이 나는 듯했다. 운동 탓인지 얼굴에 남아있는 홍조는 귀여움까지 더해주었다. 별이는 잠시 입술을 깨물었다가 머뭇거리며 입을 열었다.
“저 초등학교 4,5학년 때 2년 정도 피아노를 친 적이 있긴 하지만… 보통 콩쿨에 나갈 수 있을 정도면 엄청난 실력을 가져야 하는데요?”
“정말? 2년 정도 치긴 했어?”
사실 전혀 피아노를 쳐본 적 없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까지 했다. 그런데 2년이나 쳐봤다고 하니 그나마 다행이다.
“대표님, 고작 2년이에요. 여기 시나리오에 있는 쇼팽이나 리스트 같은 곡을 쳐야 하는데 치기는커녕 악보도 못 따라갈 거예요.”
별이의 표정은 어두워진 것을 넘어서 절망적으로 보이기까지 했다. 사실 우현은 단 한 번도 피아노라는 것을 쳐본 적이 없다. 단지 배우들이 간혹 피아노 연주를 연기하는 건 종종 봐왔기에 그녀가 그토록 암울한 표정을 하는 것에 대해 어렵다는 건 알지만 완전히 이해하지는 못했다.
“그래? 그럼 안 한다고 하지 뭐.”
“네? 안 한다구요?”
너무 쿨하게 작품을 포기한다고 하자 별이가 당황했다.
“응. 아직 확정된 건 아니야. 그런데 네가 못 하겠다고 하니 어쩔 수 없지.”
“흐응… 아까운데…”
별이는 입을 삐죽이며 몇 번씩이나 머리를 쓸어 올렸다.
“아까워도 별 수 있나? 다른 여배우 줘야지.”
그제야 별이는 우현이 자신을 시험한다고 생각했는지 입술을 깨물고 시나리오를 다시 집어 들었다.
“시간이 얼마나 있는 거예요?”
별이의 입이 다시 열렸을 때 그녀의 눈빛이 변해 있었다.
“하려고? 정말?”
“석달, 더도 말고 석달만 주세요. 그리고 피아니스트도 구해주세요.”
“제대로 해보려고 하는 거야?”
“네, 재미있어요. 꼭 하고 싶어요. 이번엔 작품성 있는 걸 하기로 해서 너무 무겁기만 한 영화를 하지 않을까 했는데… 너무 좋아요.”
그녀의 진지한 모습을 보니 이번에는 우현이 난감함을 느꼈다. 어쩌면 이것을 보여주며 그녀가 하지 않겠다고 해주길 바랐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그녀가 이렇게 허리를 바짝 조이고 달려들듯이 자세를 취하고 나니 물러서기 어렵게 됐다.
“그래? 한 번 시작하면 되돌리기 힘들어. 정말 할 수 있겠어?”
“원래 작품 전에는 이렇게 연기해야 할 캐릭터를 분석해보고 전문적인 훈련도 받고 그러는 거잖아요? 이런 거 사실 꼭 해보고 싶었어요. 그런데 막상 피아노를 다시 쳐야한다고 생각하니까 두려워졌던 것 같아요. 얼마나 힘든지 조금이라도 알고 있으니까요. 이번에 제가 성공적으로 이 작품을 해내게 되면 제 자신을 뿌듯하게 여길 수 있을 것 같아요.”
“좋아. 피아니스트 구해줄게. 그리고 석달, 무조건 벌어줄게. 그 때까지 준비해보자. 당분간 지금처럼 체력관리에 집중하고 있어.”
“네. 그리고 고맙습니다.”
별이는 일어나서 우현을 향해 90도로 허리를 숙였다.
“됐다, 그런 인사는 잘 되고 나서 해.”
“지금도 충분히 잘 되고 있어요. 가끔 그런 생각을 해요. 그 때, 대표님이 저를 찾아주지 않았다면 지금쯤 무엇을 하고 있을까 하고 말이에요.”
평소 슬픈 드라마나 영화를 봐도 눈물 한 방울 흘려본 적 없지만 괜스레 울컥하게 만드는 별이의 말이었다.
“지금 그 마음 꼭 오래 간직하길 바란다.”
“은하 언니 때문에 그런 거예요? 가끔 제가 언젠가는 떠날 사람이라고 생각하시는 것 같아서요.”
“글쎄다. 사람 일이라는 게 항상 예측을 벗어나서 말이야. 자, 그만 일어날까?”
쑥스러운 상황을 견디지 못하는 우현이 얼른 자리에서 일어나 별이를 집에 데려다주었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오며 은하에게 전화를 걸었다. 시각이 12시가 넘었지만 한창 영화촬영 중이기에 아직 잘 시간은 아니었다.
“무슨 일 있어? 갑자기 웬 전화야?”
은하는 해가 서쪽에서 뜰 일이라며 핀잔을 준다.
“그래, 일이 좀 있어. 내일 시간 되니?”
“내일? 흠… 나 촬영 중인 거 알면서 시간을 물어본다는 건 꼭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는 거네? 무슨 이야긴데? 설마 고백이라도 하려는 건 아니지?”
“쓸데없는 소리 말고 시간 돼?”
“칫! 하여튼… 내일 콜타임 2시부터야. 오전에는 시간 돼. 청담동에 있는 이명신헤어비스로 12시까지 오면 돼.”
“점심은 먹고 촬영할 거야?”
“당연히 오빠랑 먹어야지. 살 거지? 지금은 돈 좀 돌잖아?”
“그래, 너무 비싼 거는 안 된다.”
“짠돌이 티내긴… 알았어.”
은하의 목소리에 담긴 기대를 읽어낸 우현은 쓴웃음을 지었다. 내일 만나면 얼마나 황당해 할까?
다음 날, 아침부터 충무로의 낡은 건물을 다시 찾았다. 이름은 ‘타이거 스튜디오’로 건물의 허름함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
“아, 김 대표님 오셨어요?”
윤석은 기다렸다는 듯이 우현을 회의실로 안내했다. 인스턴트커피 향이 아직 회의실에 남아있어 방금 전까지도 누군가와 회의를 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었다.
“잘 진행되고 있습니까?”
“아휴, 정신없습니다. 일단 클래식 쪽으로 상당히 명망 있는 작곡가를 섭외하는 중입니다. 그런데 얼핏 들어보니 기본이 억 단위네요. 비용이 만만치 않을 것 같습니다.”
“그럴 거예요. 드라마에 참여하는 메인 작곡가도 몇 천을 받는데 하물며 이런 음악영화에 들어가는 클래식 음악의 작곡가면 억 단위는 당연한 거죠.”
“그리고 몇몇 개인적인 친분이 있는 투자자에게 얼핏 이야기를 흘렸는데 역시나 반응이 좋지 않아요. 다들 누가 폭탄을 껴안겠냐며 우려를 표하고 있어요.”
“흐음… 하필 얼마 전에 성악 영화가 그렇게 망해가지고…”
“진짜 그것만 아니었다면 그래도 시도해볼 만했을 것 같은데, 그 영화 때문에 투자자가 몇 억을 통째로 날렸다느니 하는 말이 돌아서…”
“제가 그 영화를 보진 못 했는데 그렇게 안 좋았습니까?”
“아니요. 그게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라서 시나리오는 충분히 괜찮았습니다. 이 바닥에서도 그 영화를 시나리오로 깐 사람은 없었으니까요. 그리고 유지현은 그 영화에 출연하게 되면서 1년 동안 하루 4시간은 꼬박 오페라를 연습했다고 해요. 평단은 물론이고 네티즌 평점도 그렇게 나쁘지는 않았는데 관객이 그것밖에 안 들었으니… 투자자는 물론이고 배우 입장에서도 피를 토하는 심정일 겁니다.”
“캐스팅 쪽 상황은 어때요?”
“수정된 시나리오가 괜찮긴 해서 여러 매니지먼트사로 보내고 반응을 보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쪽도 반응들이 시큰둥해요. 시나리오는 좋은데 투자 못 받아서 엎어지는 거 아니냐는 말이 들립니다.”
배우가 영화에 캐스팅 되면 스케줄에 맞춰 영화촬영 기간 동안 다른 작품을 시작할 수 없다. 그런데 투자가 지연되기 시작하면 제작사뿐만 아니라 캐스팅 된 배우도 난감해진다.
결국 1년을 진행 하네, 못 하네 하다가 엎어지고 나면 캐스팅 됐던 배우는 1년 동안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새로 작품을 시작해야 되는데 그런 일이 너무나 많다. 그래서 한동안 얼굴을 비추지 못했던 배우의 사정을 알아보면 어느 작품에 메어 있었다든지 하는 이야기가 나오는 것이다.
“만약 투자 받아오면 어떻게 되는 겁니까?”
“네? 투자 받을 곳이 있어요?”
윤석은 너무 놀라서 얼굴을 우현의 코앞까지 들이밀었다.
“아뇨, 아직 확정된 것은 아닙니다. 그냥 물어보는 거죠. 만약 단돈 10억이라도 돈이 들어온다면 어떨까요?”
“10억이 아니라 5억만 들어와도 지금보다 사정은 훨씬 나아질 겁니다. 일단 누군가가 투자했다는 것만으로도 이 작품을 다시 볼 수밖에 없으니까요. 100억짜리 대작은 오히려 투자받기 쉽습니다. 엄청난 캐스팅에 대작이라고 하면 주로 대형투자자가 붙으니까요. 그런데 2,30억짜리 영화는 애매하죠. 5억이라고 쉽게 볼 수 있는 돈 아닙니다.”
대출도 마찬가지다. 기업 차원에서 2,30억은 대출받기 쉽지만 오히려 몇 백, 몇 천 대출은 서민들이 빌리는 것이기에 더 까다롭고 벽이 높다.
“알겠습니다. 일단 저도 알아볼게요.”
“만약 진짜로 단 1억이라도 김 대표님께서 투자 받아오시면 저 이 작품 무조건 끝까지 만들어보겠습니다. 저도 임 감독님이 분명 재능 있고 좋은 작품 만들어낼 능력이 있다는 건 믿고 있으니까요. 그리고 제작자 입장에서 이런 영화로 대박 치는 건 언제나 꿈꿔왔던 일입니다.”
윤석의 기대어린 눈빛은 부담스러울 정도였다.
“아이고, 아직 확정된 거 아니라니까요. 안 될 확률이 더 큽니다. 제발 너무 기대하지 마세요. 네? 알겠죠? 너무 기대하지 않기입니다!”
“그럼요. 기대하지 않습니다. 정말이에요. 전혀 기대되지 않아요.”
말과는 달리 그의 얼굴은 신부님을 바라보는 신도처럼 강한 믿음을 품고 있었다.
“크흠… 어쨌거나 알겠습니다. 그리고 우리 별이 개인 교습할 피아니스트를 구해야 할 것 같은데요. 제작사측에서 작곡가를 구하는 김에 부탁 좀 드리겠습니다. 당연히 비용은 저희가 댈 겁니다.”
“아, 물론이죠. 연락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제작사 사무실을 나와 곧바로 청담동으로 향했다. 오랜만에 은하를 만나러 가니 무슨 말부터 꺼내야 할까 생각했지만 결국 헤어샵 VIP룸에 앉아 있는 그녀를 보는 순간 다 잊어버리고 말았다.
예전에는 항상 봐왔던 모습인데 너무 오랜만에 봐서 그런가?
이미 볼일이 다 끝났는지 풀 메이크업 상태인 데다 미용실 조명을 받고 있으니 눈부실 만큼 아름다웠다.
“오래 기다렸어?”
“아니, 끝난 지 얼마 안 됐어. 오면서 장태현 못 봤어? 오빠 온다고 하니까 또 씩씩대면서 내려가던데.”
“내 얼굴 보기 싫어서 어디 편의점이라도 가있나 보네. 그나저나 잘 지냈어? 영화는?”
“나야 잘 지냈지. 영화도 잘 촬영하고 있고.”
웬일로 퉁명스레 받아치지 않는다.
“다행이네. 시나리오 보니까 너랑 잘 어울렸어. 분명 의미 있는 결과가 있을 거야. 그렇다고 칸이나 베를린에 간다는 말은 아니니까 오해하지 마.”
“알았어. 오버하기는… 그나저나 진짜 나를 만나자고 한 이유가 뭐야? 오빠 성격에 그냥 나 잘 지내는지 보러 올 사람은 아니고… 날 데려가겠다는 이유가 아니면 딱히 떠오르는 게 없네?”
“널 데려올 때는 아직 안 됐고, 너한테 좀 무리한 부탁일 수도 있는 거야.”
“부탁? 오빠가 나한테? 뭔데?”
그녀는 우현이 부탁한다는 말에 오히려 반색하는 것 같다.
“크흠… 일단 이거부터 한 번 볼래?”
우현이 건넨 종이뭉치를 보던 은하가 고개를 들어올렸다.
“뭐야? 시나리오잖아?”
“일단 한번 읽어봐.”
막무가내인 우현의 말에 은하도 더 이상 묻지 않고 시나리오를 읽기 시작했다. 찬찬히 읽어보던 그녀가 시나리오를 덮었을 때는 한참의 시간이 흐른 후였다.
“재밌네. 독특하기도 하고. 이런 류의 영화는 우리나라에는 없던 건데…”
“그렇지? 재밌지?”
“그래서, 이거 읽어 보라고 한 이유가 뭐야?”
은하의 재촉에 잠시 뜸을 들이던 우현이 그녀의 눈치를 보며 말했다.
“너 투자 한번 해볼래?”
“투자? 이거? 이걸 투자해보라고?”
은하는 황당한 표정으로 시나리오를 가리켰다.
“응, 너도 알겠지만 나 절대 실패할 시나리오는 하지 않아. 이거 투자만 제대로 되면 무조건 성공해.”
“주연이 김별이야?”
“뭐, 아직 정해지지 않았지만 그렇게 되겠지?”
“그러니까 오빠가 기를 쓰고 투자받으려고 하겠지. 그래서 얼마 투자하라는 얘긴데?”
“10억.”
“10억? 10억이라고? 하…”
“알아. 황당하지? 그런데 생각해봐. 이거 성공하면 무조건 투자한 돈의 배는 가지고 간다. 너 나 알잖아?”
은하는 우현의 말에 아무 대답 없이 팔짱을 끼고 생각에 잠겼다. 그런 그녀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기 위해 말없이 기다렸다. 그리고 다시 그녀의 입이 열렸을 때는 무려 20분 정도가 지난 후였다.
“좋아. 대신 조건이 있어.”
“조건? 뭔데?”
“이거 나도 할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