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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4] 한 걸음 더 나아가다(5)
“김 대표님, 보셔도 별 거 없으실 텐데요?”
윤석은 회의적인 표정으로 인상을 찌푸렸고 임 감독은 들고 왔던 다 해진 갈색 가죽 가방에서 시나리오를 꺼내 우현에게 건넸다.
“한번 읽어봐, 어서.”
“감독님, 읽고 포기해도 너무 실망하기 없습니다.”
“그럼 그럼. 일단 읽어보기나 해.”
그는 우현의 말을 건성으로 들으며 재촉했다. 그 성화에 앉은 자리에서 바로 시나리오를 읽어나갔다.
내용은 고등학생인 남자주인공이 어느 순간 피아노에 눈을 뜨며 대한민국 최고 음대에 진학하게 되는 과정을 그린 영화인데 그 과정이 생각보다 흥미롭다.
보통 예고에 다니는 아이들이 음대에 진학하게 된다. 일반고에 다니는 주인공은 아는 교수도 없고 개인교습도 받지 못해 어려운 상황인데 스스로의 힘으로 몇 개의 콩쿨을 석권하며 당당히 음대에 합격한다는 내용이다.
이대로는 많이 부실하긴 한데 여기에 몇 개의 양념을 가미하고 주인공을 남자가 아닌 여자로 바꾼다면 해볼만하다고 생각했다.
“나쁘지는 않네요.”
“그렇지? 그래, 우현이 네가 시나리오를 볼 줄 안다니까!”
호들갑을 떠는 임 감독과는 달리 윤석은 시큰둥한 표정으로 시나리오를 가리켰다.
“저도 시나리오가 나쁘다는 게 아닙니다. 그런데 한번 보세요. 우리나라 음악영화, 그것도 클래식을 중심으로 한 영화는 성공한 예가 없어요. 그리고 아까도 말했지만 시나리오만 좋다고 투자가 붙는 건 아닙니다. 캐스팅은 어떻게 하려구요? 아니, 설마 이거 주인공을 여자로 바꾸고 김별씨를…”
“네, 여자 주인공으로 바꾸고 별이가 한번 해보는 걸로 가보는 게 어떨까 하는데요? 임 감독님 생각은요?”
“여자 주인공으로 하자고? 흐음… 로맨스를 넣을 게 아니라면 괜찮긴 한데? 우현이 너도 알겠지만 난 로맨스는 자신 없거든.”
임찬규 감독이 무명을 전전하다가 처음으로 이름을 알리고 충무로의 떠오르는 신성으로 불리게 된 작품은 평범한 샐러리맨이 잘못된 선택으로 사금융 대출을 받게 되고 그로부터 파생되는 일련의 과정을 드라마틱하게 엮은 것이었다. 결과는 350만 관객이 들며 제작비 대비 상당한 수익을 냈었다.
반면 그가 만들었던 작품 중에서 남녀 간의 로맨스가 나왔던 것은 전부 망했다. 이 결과만으로 그가 로맨스를 그려내는데 소질이 없다고 확언할 수는 없지만 그 작품들을 봤던 우현은 임 감독이 그런 쪽으로는 재주가 없다고 확신했다.
“로맨스 없어도 충분해요. 혹시 헐리우드 영화 중에 리플래쉬 본 적 있으세요?”
“리플래쉬? 당연히 알지.”
임 감독 뿐만 아니라 제작사 대표도 단박에 아는 척 한다.
“리플래쉬? 아! 그 남자 주인공이 드럼 치는 영화? 알죠. 혹시 그럼…”
“리플래쉬가 한국에서 대박까지는 아니지만 상당히 호평을 받았습니다. 그 이유는 몇 가지가 있겠지만 주요 요인 중 하나가 동양의 정서가 가미된 사제 간의 관계 때문이었죠. 그래서 이 작품에 주인공을 이끌어주는 강한 카리스마를 가진 스승이 등장하면 어떨까요?”
“강한 카리스마를 가진 스승이라…”
임 감독은 영화를 보지 못해서 그런지 확답을 하지 못하고 고심했다.
“전에 건달인 고등학생이 선생님 잘 만나서 성악 하는 영화 있었잖아요? 그런데 그것도 망하지 않았나요?”
윤석이 충분히 제기할 수 있는 의문이다.
“맞아요. 그런데 그 영화는 잘 생각해보면 음악영화라기보다 건달이 성악하게 된다는 것에 이야기가 집중돼 있었잖아요? 반면에 이번 작품은 온전히 피아노와 클래식에 집중하는 영화가 된다면 전혀 다른 식의 접근이 될 것 같아요.”
“그건 그렇지. 그게 내가 원하던 것이기도 하고.”
임 감독이 우현의 생각에 동의했다.
“그리고 지금까지 성공했던 외국산 음악영화는 전부 한 가지 공통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바로 영화를 이끌어가는 메인 음악이 굉장히 좋았다는 거죠. 영화가 상영된지 몇 년이 지나도 차트 상위권에 남아 있을 정도로 좋은 음악. 그게 원동력이었습니다.”
“그건 동의합니다. 하지만 그게 쉬운 일은 아닌데요.”
“그렇죠. 아주 뛰어난 작곡가를 섭외해야 하며 돈이 무척 많이 드는 일일 테니까요. 그래도 만약 그런 작곡가를 섭외해서 영화에 참여시킬 수 있다면…”
“굉장히 풍성한 청각적 효과를 누릴 수 있겠지. 영화가 끝났을 때 계속해서 영화에 나왔던 클래식 음악이 귀에 맴돌 거야. 혹은 음원사이트에서 찾아서 들을 수도 있을 거고.”
임 감독은 자신의 영화에 비전을 제시해주는 우현이 고마웠는지 희망에 가득 찬 눈으로 바라보았다.
“하지만 결국 클래식 영화라는 고리타분한 이미지를 부숴야 합니다. 그러지 못하면 관객은 물론이고 투자자를 설득시킬 수 없어요.”
역시나 윤석은 냉정하게 바라보았다.
“그래서 아름다운 여배우가 필요하지 않을까요? 피아노와 하나가 되어 혼신의 연기를 펼치는 여배우와 그런 그녀를 혹독하게 밀어붙이는 스승. 비록 뻔하디 뻔한 클리셰이기는 하지만 처음에는 강압적인 스승 때문에 그를 싫어하다가 마지막에 한계를 뛰어넘는 연주를 하며 극적인 화해를 하게 되는…”
“굿! 아주 굿이야. 라이벌 학생과 교수까지 집어넣으면 이야기가 더 재미있어지겠어. 고집스런 스승과 여제자. 그리고 한계를 뛰어넘는 극한의 연주. 마지막으로 그 모든 것을 아우르는 환상적인 클래식 음악. 윤석아, 우리 이거 한번 해보자.”
임 감독은 이미 머릿속으로 시나리오를 수정한 듯 보였다. 하지만 우현은 희망에 들뜬 그와는 달리 내심 회의적인 생각을 하고 있었다.
아무리 좋은 시나리오를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일단 음악영화는 지금까지의 스코어가 너무 좋지 않다. 또한 30억 정도의 투자를 받으려면 투자자가 좋아하는 스토리 라인을 가지고 있어야 하는데 투자자들에게 어필할 수 있는 극적인 요소가 부족하다. 음악은 보고 들으며 그 자체로 극적인 요소를 품고 있는데 그것을 투자자에게 어필하기에는 부족한 부분이 있다.
그 걸 CS감성이라고 부르는데 이는 CS엔터테인먼트가 영화에 투자할 때 그들이 세워놓은 스토리의 기준이 있고 그 기준에 합당해야 투자와 제작을 시작하기 때문이다. 이건 비단 CS뿐만 아니라 대형 투자자들은 그들만의 영화를 보는 기준이 있는데 이 영화는 그 기준 너머에 있는 영화다.
“휴우… 좋은 건 알겠는데요. 이거 힘든데…”
윤석의 말처럼 별이가 차기작으로 연기력을 인정받을 수 있고 그녀 자신의 연기력을 한층 끌어올릴 수 있으며 흥행성까지 보여줄 수 있는 영화를 찾는 게 아니라면 우현 자신도 그냥 넘겨 버렸을 정도로 어려운 작품이다.
누가 봐도 좋은 시나리오에 훌륭한 캐스팅까지 갖춰도 무수하게 엎어지는 것이 영화판인데 이 작품으로 끝까지 완주하며 좋은 결과까지 바란다는 것은 극히 희박한 확률이다.
“그럼 김별씨가 주연이겠네요, 그쵸? 흠… 그럼 누가 스승 역을 했으면 좋겠어요?”
슬쩍 우현을 쳐다보는 대표의 얼굴에 내심 곤혹스러운 것이 느껴진다. 아무래도 김별이 못마땅한 것 같은데, 이건 김별을 싫어해서가 아니라 주연으로는 급이 떨어지기 때문이다. 주연으로 급이 떨어지면 당연히 투자자는 투자를 꺼려하게 된다. 결국 김별이 주연이라는 것 자체가 또 하나의 리스크를 안게 되는 거다.
“백윤건씨 어때요?”
우현은 그의 곤혹스러운 표정을 못 본 것처럼 자신 있게 내뱉었다.
“백윤건 좋네. 대한민국에서 전문가 역은 그 사람처럼 그럴듯하게 하는 사람이 없지.”
임 감독이 다시 끼어들었다. 금방이라도 제작에 들어갈 것처럼 희망에 부풀어 있는 모습을 보면 안쓰러워서라도 같이 하고 싶은 생각이 든다.
“그럼 라이벌 교수와 학생은요?”
“저기… 그것보다 작곡가를 먼저 섭외해야 하지 않겠어요?”
“작곡가를 먼저 섭외하자구요? 그러다 엎어지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그러십니까?”
윤석은 단박에 거부의사를 표했지만 우현은 이 작품이 성공하고 실패하는 요인은 첫째가 어떤 작곡가를 섭외하느냐고 두 번째가 과연 성공적으로 투자를 받을 수 있느냐라고 생각했다.
“어설픈 작곡가 섭외하면 안 하느니만 못합니다. 더군다나 투자자를 설득시키기 위해서는 미리 좋은 작곡가를 섭외해놓는 게 더 나을 겁니다.”
“흐음… 좋아요.”
결국 윤석의 입에서 오케이 사인이 떨어졌다. 임 감독은 기다렸다는 듯 윤석의 손을 붙잡았다.
“고맙다. 이거 분명히 성공한다. 두고 봐, 내가 반드시 성공시켜. 너, 나랑 같이 작품 하나 성공시킨 적 있잖아. 이번에도 성공할 거야.”
“알겠어요. 일단 작곡가 먼저 섭외해볼게요. 대신 그 작곡가 몸값이 너무 높으면 투자자들이 싫어할 텐데요?”
“미리부터 걱정할 필요 있겠습니까? 일단 이대로 작곡가 섭외하시다가 진행 상황 봐서 한번 더 만나기로 하죠.”
“알겠습니다. 그리고 감독님은 일단 고시원이라도 잡고 좀 씻으세요. 그 상태로 투자자 만나기라도 하면 그냥 아웃입니다. 알죠?”
“그럼. 내가 영화 한두 번 하냐? 걱정 마.”
임 감독은 쑥스러운 듯 웃었지만 그 표정 한켠에 드러난 그늘은 숨길 수 없었다. 윤석은 한 마디를 더 하려 하다 그냥 입을 다물었다. 이제는 자신의 잘못을 알았을 터인데 더 이상 잔소리 해봐야 무용지물이라 생각한 것 같았다.
“그럼 시나리오 수정 작업 바로 돼요? 우리 애한테 보여줘야죠. 여기 계신 대표님도 그걸 가지고 작업해야 하지 않겠어요?”
“아, 그렇지? 여기 컴퓨터 좀 빌려 쓰자.”
금방이라도 휙 써 젖힐 것 같던 임 감독은 몇 줄 쓰다 고심하고 다시 몇 줄 쓰다 생각하는 지루한 과정을 이어갔고 결국 세 시간 정도가 걸려 시나리오 수정을 마쳤다. 창문 밖으로는 이미 해가 저물어 어두컴컴해진 뒤였다.
사실 이것도 늦은 건 아니다. 앉은 자리에서 바로 수정을 해달라고 바란 것이 더 무리한 요구이긴 했으니까.
그들과 헤어진 후 우현은 곧바로 강남의 한 헬스장으로 향했다. 별이가 한창 체력 단련에 힘을 쏟는 시간이기 때문이다.
“이 시간에 무슨 일이세요?”
목덜미에 흐르는 땀을 수건으로 닦아 내는 그녀는 묘하게 섹시했다.
“네 차기작을 찾다가 괜찮은 물건 하나 발견했거든. 그래서 이야기 좀 하려고.”
“어머, 진짜요? 잠깐 이야기할 내용은 아니죠?”
“응. 가서 씻고 나와. 사무실가서 이야기 좀 하자.”
“네, 금방 나올게요.”
별이는 반색하며 샤워실로 뛰어 들어갔다. 30여 분이 지나 옷을 갈아입고 나온 그녀를 태워 사무실로 간 우현은 임 감독이 수정한 시나리오를 건넸다.
“한때 충무로의 떠오르던 신성이라고 불리던 감독이야. 작품 하나 크게 띄우고 이탈리아로 넘어가서 영화 공부하다가 다시 들어온 지 얼마 안 됐어. 겉보기에는 마초들이 날뛰는 액션영화나 만들 것 같이 생겼지만 의외로 인물 간의 섬세한 감정표현이나 대사가 장점인 감독이야. 띄웠다던 영화도 그랬고.”
“제가 주연이에요?”
“그럴 것 같은데 사실 그게 중요하지는 않잖아? 큰 영화도 아니니까. 제작비는 대략 30억 정도로 생각하고 있는데 요즘 영화판에서 30억이면 큰 축에 들어가는 건 아니야. 저 중에 홍보비가 상당 부분을 차지한다고 생각하면 말이지. 중요한 건 상당한 연기력이 필요하다는 거야.”
거짓말이다. 당연히 주연이 중요하다. 그런데도 이렇게 밑밥을 깔아놓은 이유는 혹시나 영화가 엎어지게 됐을 때 별이가 실망하게 될까봐서이다.
“어느 정도나요?”
“그건 네가 읽어보고 판단해 봐.”
별이는 찬찬히 시나리오를 읽어나갔다. 처음 몇 줄 만에 인상이 살짝 찌푸려지긴 했지만 점차 시나리오에 빨려들어 순식간에 다 읽어버리고 말았다.
“재미있어요. 그런데…”
난감한 그녀의 얼굴. 역시나 그것이 문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