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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3] 한 걸음 더 나아가다(4)
유니가 가진 작곡 능력을 알고는 있었다. 하지만 노래를 부르면서 즉석으로 더 좋은 음정을 짚어내는 건 들어본 적도 없다.
그 괴이한 녹음 현장은 1시간 정도를 더 지속하다가 마무리됐다. 노래는 처음보다 고작 몇 소절 음정을 바꾼 것에 불과했지만 조금 더 애절하면서도 호소력이 짙어진 느낌이다.
자세한 내용까지 알아들을 수는 없으나 원래 단조로 진행되는 곡인데 유니가 일부분을 장조로 바꿔서 불렀다고 한다. 그렇다고 후렴구 전체가 장조로 전조된 건 아니고 몇 음절만 바꿨다는데, 그게 흔히 있는 일이 아니라는 거다.
소절 전체가 전조 되는 경우는 흔하다. 하지만 몇 음절만 바꿔서 그게 어색하지 않고 자연스러운 것, 게다가 슬픈 멜로디의 단조에 장조를 섞으면서 오히려 더 호소력 짙게 변한 것이 굉장히 쉽지 않은 일이라 했다.
“나 너무 놀랐어요. 그런 재능 처음이었어요.”
분명 토종 한국인이라고 알고 있는데 말하는 것만 들으면 꼭 외국에서 10년쯤 살고 온 것 같다.
“아니에요. 저 때문에 곡이 이상해진 것 같아서…”
“노노. 절대 그렇지 않아요. 너무 만족했어요. 완전 퍼펙트!”
망치는 녹음이 끝난 이후에 유니를 바라보는 눈이 하트로 변해있었다. 그만큼 마음에 들었다는 뜻일 거다.
“우리 계약 다시 해요. 이건 나 혼자 만든 노래 아니야.”
유니를 데리고 사무실로 가려고 하는 우현을 망치가 붙잡았다.
“괜찮습니다.”
발음을 떠나서 상당히 괜찮은 청년이다.
“노노, 이걸 내가 다 받으면 나 마음에 걸려요. 우리 사장님도 이런 건 철저하게 하라고 했어요. 나 돈에 환장한 놈 아니에요.”
“하하. 그럼 어떻게 할까요?”
굳이 주겠다는데 여기서 더 사양하는 것도 웃기다.
“작곡 50% 중에 20%를 유니씨에게 줄게요. 그 정도는 받아야 해요.”
고작 몇 개의 음정을 바꿔 부른 것치고는 상당히 후하다. 생각지도 않은 음원 수익이 들어오게 생기니 속으로 환호성을 지르고 싶은 기분이다.
“감사합니다. 그럼 법적인 부분은 회사 직원들과 의논하죠. 오늘 즐거운 시간이었습니다.”
“저야말로 좋은 시간이었어요. 유니씨? 우리 무대 같이 설 때를 기다릴게요. 그 때 열정적인 무대 꼭 하고 싶어요.”
피처링을 했으니 모든 무대는 아니겠지만 큰 무대에서는 같이 서는 게 당연했다. 유니로서는 그때를 대비해 조금 준비를 해야 할 거다. 의상이나 무대에서의 매너나 표정 등 신인으로서는 부담을 가질 수도 있을 거다.
“저도 기대하고 있을게요. 오늘 좋은 경험한 것 같아요. 불러주셔서 감사했습니다.”
기대했던 민지와 갓텐의 얼굴을 볼 수는 없었지만 유니의 놀라운 재능을 다시 한번 확인한 계기가 돼서 생각보다 훨씬 큰 수확을 얻었다.
기대도 하지 않았던 음원 수익을 얻을 수 있는 기회가 생긴 것도 좋지만 그것은 유니가 가진 재능을 확인한 것에 비하면 큰 가치가 없다고 느낄 정도다.
녹음을 끝내고 법무팀과 음원 분배에 대한 간단한 계약을 마친 그들은 근처에서 점심을 먹고 사무실로 향했다.
“진짜 노래를 부르는 중간에 이렇게 불러야겠다고 생각이 든 거야?”
도무지 그녀의 재능이 믿기지 않았기에 다시 한 번 물어보았다.
“음… 그냥 부르다보니까 저도 모르게 그렇게 부른 거예요. 막 어떻게 해야겠다고 생각하고 부른 건 아니에요.”
평소라면 다이어트 때문에 절대 안 된다고 했겠지만 기분이 너무 좋았기에 근처 빵집에 들러 유니의 입에 빵 하나를 물려주었는데 그게 그렇게 좋은지 연신 웃으며 입을 오물거린다.
“그래? 신기하네…”
“저는 대표님이 더 신기한데? 어떻게 뜰 작품을 그렇게 잘 골라요?”
“그건 그냥 감이야. 말로 설명할 수 없는… 너도 그런 건가?”
“저도 그래요.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그런 거… 이참에 작곡 몇 개 해볼까요? 지금까지 만들어 놨던 것도 손보고.”
“손본다고? 손을 대고 싶은 게 생긴 거야? 어느 부분을 더하고 빼야 할지 보여?”
진짜 재능을 타고났다고밖에 표현할 수 없다.
“음… 전에는 몰랐는데 녹음실에서 엔지니어분들하고 같이 작업하다보니까 세션들의 소리도 들리고 편곡을 다양하게 해보기도 하니까 조금 더 생각이 많아지긴 했어요.”
“좋아. 그럼 전에 나에게 들려줬던 곡들도 한번 손을 대봐. 전에도 괜찮았는데 뭐라고 할까? 임팩트가 부족하다고 해야 하나? 부족했던 부분이 조금만 채워지면 훨씬 좋은 곡이 될 것 같았거든.”
“넵! 히히. 이번에 망치님이랑 작업하면서 자신감도 더 생겼어요. 그분이 잘한다고 하니까 진짜 제가 엄청난 능력을 가진 것처럼 느껴지는 거 있죠?”
“내가 잘한다고 했을 때는 그러지 않았던 것 같은데?”
“에이… 대표님은 대표님이잖아요. 망치님은 남이고.”
“그런데 왜 ‘님’자를 붙이냐?”
“오빠라고 하기는 뭐해서요. ‘씨’라고 하는 것도 웃기잖아요? 히히. 아, 맞다. 이번에 망치님 타이틀을 제가 부른 곡으로 간다고 하던데 음원 수익 얼마나 나올까요?”
“기대돼?”
“그럼요! 당연하죠. 아까는 애써 표정관리 하고 있었지만 사실은 환호성을 지를 뻔했다니까요?”
“이야. 돈 준다니까 환호성을 지를 뻔하다니… 유니가 많이 급했구나?”
“돈이야 없는 것보단 있는 게 좋은 거죠. 그럼 힘들게 일하시는 우리 아빠도 쉬시라고 하고 내 동생도 좋은 학교 갈 수 있구요, 헤헤.”
“그래, 네가 효녀다. 걱정 마. 잘 될 거니까.”
그렇게 유니와 기분 좋게 돌아온 후, 다시 별이의 차기작을 찾기 위해 동분서주했다. 하루를 꼬박 매달리고 다음날도 꼬박 매달릴 즈음 생각지도 못한 사람을 만났다.
“임 감독님?”
충무로의 작은 영화사 사무실에 들른 우현은 한쪽 구석에서 커피를 호로록 마시는 중년의 남자를 발견했다. 한 때 충무로에서 떠오르는 신예이었던 임찬규 감독. 반쯤 벗겨진 머리와 낡은 구두, 다 헤진 청바지는 예전의 그를 전혀 떠올리게 할 수 없을 만큼 그는 변해있었다.
“어? 이게 누구야? 김우현 아냐?”
“여기에 어쩐 일이세요? 이탈리아로 가신 거 아니셨어요?”
“아, 응. 그랬지. 그런데 얼마 전에 돌아왔어.”
“그런데 이게 무슨 일이에요? 누구한테 사기당했어요?”
우현은 그에게 이렇게 대놓고 농담을 건넬 정도로 친한 사이였다. 그가 이탈리아로 영화 공부를 하러 떠난다고 했을 때 비행기 타기 전날까지 같이 술을 마시며 영화에 대해 토론을 할 정도로 가까웠다.
“아니야, 그런 거 아니야.”
“그런데 이게 뭐예요? 그리고 한국에 왔으면서 연락은 왜 안했어요?”
이제 막 돈을 벌기 시작하고 이름이 알려지고 있는 때에 느닷없이 영화 공부를 하러 이탈리아로 떠난다고 하자 모든 이들이 말렸다. 그리고 그중에는 우현도 포함되어 있었다.
“하려고 했지. 그런데 너는 전보다 얼굴이 더 좋아진 것 같아? 그사이에 연애라도 하는 거야?”
“연애는요, 무슨…”
뜻밖의 곳에서 만난 옛 인연과 이야기를 나누는데 우현이 만나려고 기다리던 제작사 대표가 걸어 나왔다. 영화 제작사 대표로 보기에는 나이가 젊어 보였는데 아직 세워진 지 얼마 안 되는 신생 영화사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김우현씨 되시죠?”
“네, 제가 김우현입니다.”
“기다리게 해서 죄송합니다. 급하게 처리해야 할 일이 있었거든요. 어쨌거나 시나리오를 구하신다구요?”
“어? 우현아 혹시 시나리오 구하니?”
“네, 감독님이 준비하는 거 있으신 거예요?”
“아이고 감독님, 요즘 누가 예술영화 찍어요?”
영화 제작사 대표가 우현과 임 감독과의 대화에 끼어들었다. 제작사 대표는 임 감독이 가진 시나리오를 본 것 같았다. 그런데 대놓고 면막을 줄 정도면 영 마음에 들지 않는 눈치다.
“예술영화 아니야! 끝까지 보기는 한 거야?”
둘 사이도 일반적인 제작사 대표와 감독의 관계가 아닌지 반말을 해도 기분 나빠하지 않는다.
“피아노 나오고 띵가띵가 하는 거면 예술영화죠. 대한민국에 동편제 이후로 그런 예술영화가 상업적으로 성공한 경우가 있어요? 이탈리아 가서 이상한 것만 배워오셨네.”
“어허! 그런 거 아니라니까! 우현아 저놈 말 듣지 말고 일단 이리 앉아봐. 시나리오 찾는다고? 혹시 유은하가 할 거야?”
“아유 감독님, 여기 계신 김우현씨랑 잘 아시나본데 잘못 짚었어요. 이 분 유은하씨랑 일 안 합니다.”
제작사 대표가 답답한지 임 감독에게 면박을 주자 임 감독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다가왔다.
“유은하랑 일 안 한다고? 뭐야? 쫓겨났어?”
“하하, 쫓겨나긴요.”
우현이 황당해 웃음을 터뜨리자 젊은 제작사 대표가 또다시 임 감독을 나무랐다.
“감독님, 여기 계신 분은 파인 엔터 대표님이세요. 감독님이 쫓겨나셨다고 다 쫓겨난 줄 아나?”
“쫓겨나요? 감독님이? 왜요?”
임 감독이 슬쩍 우현의 시선을 피한다. 그러자 제작사 대표가 한 마디 덧붙였다.
“그러게 내가 처자식 두고 떠나지 말라니까…”
그 한 문장으로 대충 감이 왔다. 졸지에 이혼당한 것 같은데…
“그래서 옷을 이렇게 입고 다니는 거예요? 형수님이 안 계셔서?”
“그렇게 됐어. 아 글쎄 그 여편네가 내가 이탈리아 간 사이에 바람이 나서는… 에휴… 다 내 탓이지 뭐.”
임 감독은 말을 하다 말고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러게, 그렇게 가지 말라는 걸 기어코 가서 이런 일을 만들어요? 내가 감독님한테 그렇게 가지 말라고 말렸잖아요. 감독님 그 때 그 작품 성공할 때까지 솔직히 형수님이 얼마나 힘들었어요? 이제 살만해지니까 또 돈은 안 벌고 외국으로 도망가 버리면 남은 가족은 안 힘들겠어요?”
제작사 대표의 눈에는 안타까움이 가득 담겨있었다. 그도 우현처럼 가지 말라고 말렸던 거다.
“내 평생의 꿈이었단 말이야. 더도 말고 딱 2년만 있고 싶었어. 솔직히 생활비도 충분히 줬단 말이야. 난 그거면 충분할 거라고 생각했지.”
“돈이야 줬겠지만 지금껏 고생했는데 조금 살만해졌다고 외국으로 가면 한창 아빠가 필요한 아이들은요? 왜 이렇게 형님 생각만 해요?”
형님이라고까지 하는 걸 보면 둘 사이가 상당히 각별함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그도 한 회사의 대표 자리에 있기 때문에 정만으로는 도움을 주는 게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그래서 난 이번 작품 꼭 성공할거야. 그래서 아이들한테 아빠가 외국 가서 공부한 게 헛되지 않았다는 걸 보여주고 싶어. 와이프는 몰라도 아이들한테만은 자랑스러운 아빠가 되고 싶단 말이야.”
“감독님, 말씀드렸다시피 한국에서는 그런 영화 안 먹혀요. 솔직히 말하면 저는 백 번이라도 이 영화 제작하고 싶어요. 알잖아요? 그런데 캐스팅은 어떻게 할 거며 투자는 어떻게 받을 거예요? 이거 투자 안 들어와요. 제작비만 최소 30억 넘게 들어갈 텐데… 얼마 전에 성악 영화 폭망한 거 보셨죠? 그 대단한 유지현이 테너로 출연했는데 극장에 딱 하루 걸렸다 내려갔어요. 심지어 VOD도 안 팔린대요. 운도 드럽게 없지. 하필 앞에서 그렇게 크게 터져버렸는데 어느 투자자가 이걸 투자하겠어요? 하여튼 저는 자신 없어요.”
“윤석아, 이거 진짜 잘 된다. 나 한번만 믿어봐.”
임 감독은 윤석이라는 제작사 대표의 손을 꼭 잡았다. 하지만 윤석은 고개를 저으며 손을 뺐다.
“감독님, 이번에 들어가는 영화까지 엎어지면 우리 회사도 휘청거려요. 망할지도 모른다구요. 제가 감독님께 받은 도움이 있으니까 개인적으로 도움은 드릴게요. 그런데 이번 영화는 정말 어려워요.”
임 감독은 허탈함에 고개를 하늘로 치켜들고 크게 숨을 골랐다.
“저기… 감독님.”
“응?”
“일단 그 시나리오 좀 한번 봐요.”
무조건 안 된다는 제작사 대표의 말. 그런데 우현은 이상하게 그 시나리오가 보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