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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2] 한 걸음 더 나아가다(3)
전화를 끊고 나서 예전 일을 떠올리며 쓴웃음을 지었다. 은하가 음악방송 MC를 맡았을 때 당시 떠오르던 아이돌 가수를 데리고 거만한 모습을 보이던 그였다.
그런 우 부장을 다시 봤을 때는 은하가 톱스타가 된 후였고 그런 그녀의 작품에 조연으로 아이돌을 들이밀 때는 처음과는 달리 거만한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그때 아무리 아이돌 가수가 잘 나가도 배우를 상대로는 결국 절대 갑이 될 수 없다는 것을 다시 한번 깨달았다.
“그 때나 지금이나 변한 게 없구만.”
우 부장이 자신을 오래 봐왔다고 하더라도 기본적으로 가수를 주력으로 키운 회사이기에 배우를 주력으로 키우는 회사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다.
배우는 한 번 톱스타로 키워내면 매니저와 독립하는 경우가 상당히 많다. 그것은 대형 매니지먼트사나 소형 매니지먼트사나 큰 차이가 없다는 것이고 자본에 대한 압박이 없다시피 하기 때문이다. 배우 자체가 하나의 컨텐츠이자 경쟁력이니 인위적으로 막을 수 없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최상급을 노리는 드라마 작가와 유망한 신인 작가를 보유한 회사로서는 SN이든 뭐든 무서워할 필요가 없다. 단지 SN이 대형 회사이고 적을 만들어봤자 좋을 것이 없다는 것을 알기에 웬만하면 적의를 드러내려 하지 않았는데 저런 짓까지 하는 걸 알면서 그냥 넘어간다면 스스로 바보 인증을 하는 거나 마찬가지다.
역시나 우 부장이 1분도 지나지 않아 다시 전화를 걸어온다.
“여보세요?”
“김 대표님, 저희가 실수한 것 같습니다.”
유니가 가수 활동을 하는데 곤란할 수도 있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을 할 수 있겠지만 두 회사가 싸우면 손해 보는 측은 웃기게도 SN쪽이다.
SN 소속 아이돌과 유니는 몸값은 물론이고 그들과 관련된 브랜드 가치와 팬덤, 부가가치는 비교할 수 없다. 맘먹고 서로 죽자고 달려들면 큰 회사인 그들이 손해다.
당장 소녀세상 아영이 이주희 작가의 ‘천방지축 그녀’에 출연한다. 우 부장이 다시금 전화해서 사죄하는 건 자칫 이주희 작가에게 밉보였다가 온갖 어려운 대사에 봉변을 당할 수도 있다고 생각한 것이 틀림없다. 안 그래도 얄미운 캐릭터로 나오는데 막말로 김치 싸대기라도 맞는다면 어찌 되겠는가?
“걱정하지 마세요. 이번 작품에 손해 보게 하는 일은 없을 테니까요.”
“흐음… 하여튼 이번에는 우리가 잘못한 것 같습니다.”
“일단 이 이야기는 그만하기로 하죠. 더는 이 이야기로 심력을 소비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사실 SN은 물론이고 대형 가수 기획사들과는 더는 엮이고 싶지 않았다. 도움은 되지 않으면서 바라는 건 많은 그들의 행태는 주변 사람들을 피곤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어쩔 수 없이 이후에도 그들과 일을 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지금 이 통화로 인해 그들은 앞으로 파인 엔터와 관련해서는 최소한 한 번 더 생각하고 행동할 것이 분명하다. 그리고 그거면 충분하다.
우 부장과의 전화 이후로 우현은 그들과의 관계에 신경을 끄고 별이의 차기작 고르기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이것도 아니고…”
몇 시간째 수십 개의 시놉을 뒤적이던 그는 결국 마음에 드는 것을 발견하지 못했다. 그 와중에 다행스러운 건 ‘채널’에서 별이에게 신상 향수 CF에 대해 정식으로 계약 요청이 들어왔다는 것.
“얼마라구요?”
전화기 너머로 경악에 찬 별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촬영 중에 못 잔 잠을 자느라 지금껏 누워있었을 텐데 지금의 통화로 잠이 확 달아났을 거다.
“2억. 6개월짜리 단기 계약이라서 조금 짠 감이 있긴 한데, 이미지에 도움이 될 거야.”
“2억인데 짜다뇨?”
“다른 것도 아니고 ‘채널’인데 짜지. 네가 미니 주연만 됐어도 최소 이것보다 두 배는 더 받을 수 있었는데 아쉽다. 어쩔 수 없지.”
“저는 충분히 만족해요.”
“일단 홍콩에서 화보 촬영 있을 거야. 이번 주말에 가야 하니까 미리 짐 챙겨 놓고, 이번에는 상준이 대신 나랑 같이 간다. 홍콩에서 화보촬영 끝나고 바로 CF 계약까지 마무리할 계획이야.”
“홍콩으로 결정됐대요? 전에 상해에서 촬영한다고 하지 않았어요?”
“바뀌었다네. 어쨌건 준비해 놓고 화보 촬영 갔다 와서는 당분간 체력단련 위주로 몸을 만들고 있어. 얼마 안 있어서 차기작 들어갈 거니까.”
대부분의 배우들은 드라마 끝나고 공백기에 체력을 다져놓는 것을 위주로 시간을 보낸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일단 드라마 촬영에 들어가면 약 석 달 가까이 잠도 못 자는 강행군을 이어가야 하기에 체력이 달리면 병원에 입원하는 일이 빈번하다.
“정해졌어요?”
“아직… 그래도 오래 걸리진 않을 거야.”
“옙! 알겠습니다.”
이주희 작가의 신작은 굳이 우현이 도와줘야 할 필요가 없다. 유지나야 자신보다 더 잘 챙겨주는 진명이 있으니 유니 하나만 마음에 걸리는데 당장 내일로 다가온 망치 앨범에 들어가는 피처링만 끝나면 음악방송과 행사 스케줄밖에 없다.
이후 회사로 들어온 시놉시스 말고 직접 찾기 시작했다. 편성이 확정난 것은 물론이고 캐스팅이 진행되는 드라마는 제작사에 직접 연락해 시놉을 받았다.
실력은 있지만 아직 빛을 보지 못한 사람이 분명 있을 거라는 생각에 충무로에 재미있다고 돌고 있는 시나리오는 물론이고 쉬면서 투자를 받아보려는 감독을 수소문했다. 수많은 작가와 감독에게 선물을 보내놓은 게 있음에도 아직 그가 모르는 작가와 감독은 넘쳐났다.
그렇게 별이의 차기작을 위해 시간을 보내니 하루가 훌쩍 지나버렸다.
다음 날, 사무실에 출근해서 얼마 안 있으니 새로 들어온 로드매니저인 진세동이 유니를 집에서 픽업해서 데리고 왔다.
“바로 출발하실 겁니까?”
“응, 가자.”
운전하는 세동과 뒤에 타고 있는 유니는 JGP에 간다는 것에 흥분했는지 연신 콧노래를 불러 젖혔다.
“그렇게 좋냐?”
“가서 민지 보는 거 아닙니까?”
한때 JGP를 먹여 살렸다는 소녀 가장의 이미지까지 갖고 있었던 최고의 아이돌이 바로 민지다. 이제는 JGP에서 다른 아이돌들을 연달아 히트시키며 스포트라이트가 조금 옮겨지긴 했지만 그래도 그 클래스가 어디 가는 건 아니다.
“그렇게 민지가 좋으면 JGP 가지 왜 우리 회사에 왔어?”
세동을 보며 괜히 퉁명스레 말하자 뒤에서 유니가 머리를 들이민다. 오늘은 카메라를 받는 일이 아니기 때문에 적당한 화장에 스냅백을 눌러쓰고 있었다.
“어머, 대표님 질투하시는 거예요?”
“질투는 무슨… 그냥 물어보는 거지. 너 세동이랑 같이 다닌 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 편드는 거냐?”
“이게 뭐가 편드는 거예요? 그냥 물어보는 거지.”
“보아하니 너도 신났구만. 너는 누가 그렇게 보고 싶은데?”
“저는 갓텐이요! 아, 물론 직접 보면 속으로만 좋아할게요. 사진 찍자고 안 할 테니까 너무 걱정하지 말아요. 참고로 저 표정관리는 진짜 잘해요.”
이미 우현이 할 말까지 미리 다 해버리니 할 말이 없어진다.
“크흠… 좋은 자세야.”
소속 아티스트의 사진이 외벽에 떡칠하듯이 붙어있는 건물에 들어서니 기다렸다는 듯 여직원이 그들을 이끌었다. 세동과 유니는 가는 동안 자신이 좋아하는 연예인과 마주칠까 기대하는 눈치였지만 누구와도 만나지 못해 아쉬워하는 것이 눈에 보였다.
방음 처리된 녹음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이미 망치와 엔지니어가 기다리고 있었다.
“와우, 오셨군요.”
힙합 하는 사람들은 다 그런 건지 인사 한 마디를 할 때도 묘한 음률감이 있다. 힙합 음악을 그리 좋아하진 않지만 개인의 취향일 뿐이고 그들의 음악이 시장에 먹힌다는 것은 충분히 인정하고 있다.
“안녕하세요. 유니 데리고 있는 김우현입니다.”
“아, 대표님 되시는 거예요? 그럼 우리 사장님 오셔야 하는 거 아닌가?”
“그럴 리가요. 그냥 궁금해서 와봤습니다. 유니가 피처링은 처음이거든요.”
“안녕하세요, 유니입니다. TV에서 많이 뵈었는데 화면에 나온 거랑 똑같으시네요. 모자도 그렇고…”
“어? 이 모자 몇 번 쓰고나왔었는데 보셨구나? 이야, 시작하기 전부터 마음에 드는데요?”
유니의 별것 아닌 말에도 호응해주는 것을 보니 협업에 대한 센스가 있는 사람이다. 이런 사람과 작업하니 오늘 녹음이 잘 될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우선 앉아서 이번 앨범의 컨셉과 느낌을 설명한 망치는 유니가 불러야 할 노래를 들려주었다.
피처링은 기본적으로 세션과 보컬 녹음이 모두 끝난 상태에서 가장 마지막에 부른다. 피처링을 해주는 아티스트가 돈을 받지 않는 것은 이런저런 이유가 있지만 별다르게 수고할 것이 없다는 것도 포함된다.
따라서 망치가 재생해 주는 음악에는 그가 부르는 랩과 화음까지도 모두 들어간 것이라 유니는 그와 엔지니어가 말해주는 대로 부르기만 하면 되는 거다.
“이해했어요?”
떠나간 사랑에 대한 남자의 독백을 랩으로 쏟아내면 유니가 여자의 입장에서 노래를 부르는 것이 컨셉이다. 확실히 음악을 들어보니 떠난 여자의 애절한 감성이 이 노래의 특징이었다. 유니를 꼭 집어 원했던 이유가 있었다.
“네, 이해했어요.”
“굿! 이런 모습 원했어요. 그럼 들어가서 불러 볼래요?”
유니는 무대가 아닌 곳이라서 그런지 별다른 긴장을 보이지 않았다. 불러야 할 파트도 몇 번 듣고 바로 고개를 끄덕이는 걸로 보아 자신감이 넘쳐 보였다.
“좋아요. 긴장하지 마시고… 중간에 실수해도 되니까 기억했던대로 불러 봐요.”
엔지니어의 말에 헤드폰을 쓴 유니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음악이 흘러나오자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좋은데?”
가만히 듣고 있던 엔지니어의 말에 망치가 고개를 끄덕였다.
“중간에 반 박자 빨라졌는데 다시 한번 해볼게요.”
원래 한 번 녹음을 시작하면 두세 시간은 기본이라 불렀던 노래를 수십, 수백 번을 다시 불러야 한다. 그렇게 계속 부르기를 한 시간쯤 지났을까? 어느 순간 유니의 음정이 이상한 곳에서 비틀리는 것이 느껴졌다.
가수들이 보통 음반을 발표하면 처음에는 앨범에 실린 노래 그대로 부르지만 시간이 흐르면 자기 마음대로 음정을 바꿔 부르는 경우가 있다. 이건 팬들마다 취향이 달라서 누구는 그런 것을 좋아하는 반면 누구는 그런 식으로 노래를 부르는 것을 싫어한다.
유니는 같은 음정으로 계속 노래를 부르다가 질린 나머지 자신도 모르게 자기 마음대로 음정을 바꾼 것이 분명했다.
“어?”
엔지니어도 그것을 느꼈는지 스톱하려고 하는데 망치가 그를 막았다. 그리고 노래가 끝난 후에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말했다.
“좋았어요. 이번에는 조금 더 감정을 넣고 불러 봐요. 중간에 안 끊을게요.”
보통 작곡가들은 가수가 자신의 악보에 맞게 노래를 불러주기를 원한다. 음정 하나하나를 정확히 때려주는 것을 무엇보다 중요하게 생각하는데 그냥 두는 것은 정말 흔치 않은 일이다.
[bye bye 애원해도, 울어 봐도 지워지지 않아…]
이번에는 악보에 있는 대로 그대로 불렀다. 그러자 반대로 망치의 안색이 찌푸려졌다.
“좋았는데… 전에 불렀을 때의 감정으로 한 번만 다시 불러 볼래요? 기억나요?”
“아… 해볼게요.”
유니는 잠시 눈을 감더니 감정을 잡고 다시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어?”
엔지니어와 망치가 서로 시선을 마주 보았다. 분명 아까 저음 구간에서 느꼈던 음정의 변화를 감지한 거다.
“어때?”
엔지니어의 물음에 망치는 입술을 깨물고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 노래가 끝났을 때 유니를 향해 물었다.
“음… 음이 조금 달랐는데…”
“어머, 죄송해요. 저도 모르게… 그런데 아까 그대로 해보라고 하셔서…”
“아니에요. 그게 아니라 왜 그렇게 불렀던 거예요? 그냥 궁금했어요.”
“그냥 이게 더 듣기 좋은 것 같아서… 왜요? 이상한가요?”
“아뇨. 내가 생각하지 못 했던 코드진행이었어요. 다시 생각해봐도… 와우, 좋았어요. 우리 이대로 다시 한 번 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