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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7] 끝난 줄 알았지?(2)
지 피디도 유례없는 단호함을 보이는 우현의 태도에 무언가 사연이 있음을 알아챘다. 그렇다면 그녀의 입장에서는 빠른 입장 선회를 하거나 이대로 밀어붙이거나 둘 중 하나를 취해야 한다.
“김 대표님, 알았어요. 일단 이효주는 스톱시킬게요. 좀 급이 낮아지긴 하지만 임윤지는 어때요?”
20대 후반의 임윤지는 걸그룹 출신이지만 조연부터 시작해서 꾸준히 경력을 쌓아온 여배우다. 더군다나 예쁜 역할만 고집한 게 아니라 얻어터지는 역부터 구르고 망가지는 역까지 가리지 않고 다양한 역을 맡아왔기에 연기력만큼은 우현도 인정하는 배우인데 아직 주연급이라고 하기에는 조금 아쉬운 부분이 있었다.
“좋아요. 임윤지로 하죠.”
“좋다구요?”
“네. 잘 맞을 것 같네요.”
솔직히 이효주를 깐 것은 반은 진심이고 반은 튕기는 것이었다. 물론 대상은 지 피디가 아니라 SN 엔터를 향한 것이고 그 버르장머리 없고 개념 없는 실장을 한 방 먹이기 위한 것이었는데 임윤지가 이 작품을 원했다면 상황은 달라진다.
임윤지는 우현이 다시 회사를 세우려고 했을 때 김별과 계약이 안 되면 그 다음으로 생각했던 배우였다. 다행히 김별과 계약이 돼서 그녀가 다른 회사와 계약하는 것을 지켜만 보았지만, 누구보다 그녀가 잘될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다.
“작품에 나온 여주의 나이를 생각한다면 스물아홉이라는 나이는 조금 많은 것 같지 않아요?”
“임윤지씨가 동안이라서 충분히 커버될 겁니다. 게다가 워낙 연기력이 좋아서 여주의 뜰쭉날쭉한 감정을 누구보다 잘 표현할 수 있을 거구요. 잘됐네요.”
“아이 참… 큰일 난 거 아시죠? SN이 꽤나 큰 투자자인데…”
“지 피디님, 이 드라마 잘 될 겁니다. PPL 엄청 붙을 테니 걱정하지 마시고 이대로 진행해도 될 겁니다. 저 운 좋은 거 아시죠? 그 운, 이번 이주희 작가 장편 입봉작에 떡하니 달라붙었습니다.”
“후훗! 좋아요. 이대로 진행해볼게요. 이 작가님한테 대본 기가 막히게 뽑아달라고 해주세요. 그리고… SN쪽은 대표님 이름 좀 팔게요, 괜찮죠?”
그녀도 SN에 변명거리가 필요할 거다. 어차피 자신이 싫어서 깐 것이니 그 쪽에게 알려주는 것은 당연하다.
“그럼요. 그렇게 하세요.”
“역시 대표님은 언제나 시원하시네요. 그럼 믿고 토스 하겠습니다!”
그녀가 토스한다며 전화를 끊은 지 한 시간도 안 돼서 전화가 걸려왔다. 02로 시작하는 번호인데 직감적으로 SN쪽에서 연락 왔음을 알았다.
“김우현입니다.”
“안녕하십니까? SN 엔터테인먼트 우필용 부장입니다. 먼저 이렇게 불쑥 연락드려서 죄송합니다.”
목소리부터 숙이고 들어오는 것이 이미 모든 상황을 보고받은 듯했다. 그리고 우필용 부장은 우현도 예전에 얼굴을 봤던 사람이다.
“죄송은요. 무슨 일로 연락 주셨습니까?”
“다름 아니라 저희 직원이 김 대표님께 큰 실례를 저지른 것 같습니다. 그것도 모르고 이제야 연락 드렸네요.”
“아닙니다. 이제 지난 일이고 다 해결됐는데요, 뭘…”
“해결됐다고 해도 저희가 실수한 게 많았더라구요. 만나서 사죄의 의미로 식사라도 대접하고 싶은데 어떻습니까?”
“죄송하지만 식사까지 하기에는 제가 너무 부담스럽구요. 어쨌거나 다 지난 일이니 저는 마음에 담아두지 않고 있습니다. 걱정하지 마시죠.”
“그렇군요. 알겠습니다. 그럼 조만간 다시 한번 연락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네. 들어가십시오.”
전화를 끊고 나서 한동안 입가에 웃음이 떠나지 않았다. 아마 그 이정묵 실장은 지금쯤 떡이 되어 있을 거다. 만약 그게 아니라면? 사장 아들인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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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묵아, 지금 이 새끼가 식사고 나발이고 필요 없다고 그냥 전화 끊었다. 네 생각은 어때?”
40대 중반에 머리가 벗겨진 중후한 인상을 가진 우필용 부장은 그의 앞에서 땀을 뻘뻘 흘리고 있는 이정묵 실장을 노려보았다.
“그냥 확! 회사 자빠뜨리면 안 될까요?”
“어떻게?”
“네?”
“어떻게 자빠뜨리냐고? 방법을 내놔봐. 그럼 내가 그렇게 해줄게.”
이 실장은 입만 삐죽였지 답을 내놓지는 못했다. 우 부장은 그런 이 실장을 향해 혀를 끌끌 차며 나무랐다.
“야 이 새끼야. 협박을 해도 때와 장소를 가려야지. 네가 깡패야? 가서 사무실 뒤집어엎게?”
“아, 아닙니다.”
“아니면? 돈으로 출연을 다 막아버려? 그 김별이라는 애랑 유니라는 애, 둘 다? 무슨 명분으로?”
“죄송합니다.”
결국 이 실장이 고개를 떨구고 무조건 자신의 잘못을 빌었다. 우 부장은 뭐라 소리치려다가 그냥 손을 휘저었다.
“나가, 나가서 내 눈에 띄지 마.”
기가 팍 죽은 그는 고개를 숙이며 나갔고 우 부장은 곧바로 다른 누군가를 불러올렸다. 새로 들어온 이는 30대 중반의 훤칠한 남자인데 상당히 잘 생겨서 여자들에게 인기가 많을 것 같은 인상이다.
“부르셨습니까?”
“어, 영준아. 정묵이가 사고 친 거 들었지?”
“네, 지금 효주는 미팅 깨진 것도 모르고 열심히 대본 파고 있을 텐데… 곤란하게 됐습니다.”
“하여튼 사장님 조카라서 저걸 자르지도 못하고… 아이고 내 팔자야…”
“그래도 생긴 것과는 다르게 순하지 않습니까?”
“소 키우냐? 순하기만 하면 뭐해? 일을 잘해야지, 일을! 아니, 딱 보면 고개를 숙일 놈인지 아니면 대가리 뻣뻣하게 들고 있을 놈일지 감이 안 오나? 그리고 하필 윤해연 작가를 데리고 있는 회사를 왜 들쑤셔 놔? 배우 앞길은 조질 수 있어도 작가 앞길은 지 스스로 엎어지지 않는 한 못 건드는 것도 모르나? 하여튼 열 뻗치니까 그놈 이야기는 그만하자. 네가 생각할 때 어떻게 처리하면 좋겠어?”
“지금 상황에서 그쪽을 자극해 봐야 남는 게 있겠습니까? 보아하니 이제는 능력 있는 신인 작가까지 데리고 와서 단박에 편성까지 눈앞에 뒀던데요.”
“그렇지? 자존심 한 번 세우자고 아티스트 앞길을 막을 수도 없잖아.”
“부장님은 어떻게 해서든 효주를 붙이고 싶으신 겁니까?”
“아니야. 이미 끝발 죽었어. 더 붙잡고 늘어져 봐야 우리 체면만 깎이는 거야. 이번에는 그냥 놔줘. 효주는 잘 달래봐. 다음에 좋은 거 해준다고.”
“효주도 문제지만 지금 소녀세상 애들, 올해 안에만 드라마 주연으로 최소 세 개는 들어가야 합니다. 그 애들 나이를 생각하면 지금도 빠른 거 아닙니다.”
“알고 있어. 일단 우리도 시장에 나온 시놉시스들 중에 괜찮은 것 좀 찾아보자. 우리가 투자하고 피디랑 배우도 우리가 붙이면 되잖아. 그게 안 되면 이런 일 자꾸 생긴다, 알지? 그리고 그 파인 엔터 김우현이라는 친구, 보통 아니야. 신인 작가를 영입해서 바로 편성을 붙였단 말이지. 너라면 그렇게 할 수 있겠어?”
“힘들 것 같습니다. 배우나 가수는 몰라도 시청률을 뽑아낼 수 있는 작가를 정확히 가려낸다는 게…”
“맞아. 보통 판단력으로는 할 수 없는 일이거든. 미니도 써보지 못한 작가를 계약했다는 이야기는 들어보지도 못했어. 또 무슨 일을 하는지 잘 살펴봐.”
“알겠습니다.”
영준이라는 친구가 나가자 우 부장은 한숨을 쉬며 전화기를 노려보았다.
“건방진 새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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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7%. ‘그 양반 같은 자식’의 6회 시청률이다. 이제는 누구도 대박을 의심하지 않는다. 우현은 일단 촬영장에 밥차를 쏘는 것으로 배우들과 스태프들에게 감사를 표하고 따로 윤 작가에게는 티라미스 케이크를 보냈다.
윤 작가의 마음에 딱 드는 것이었는지 바로 전화가 걸려왔다.
“호호호. 김 대표가 은근히 센스 있어. 글 쓰다보면 단 게 당기는 걸 어떻게 알았대? 잘 먹을게.”
“더 필요한 거 있으시면 말씀해주세요.”
“참 웃기게도 시청률이 안 나오면 막 먹고 싶은 것도 많고 하고 싶은 것도 많거든? 그런데 시청률이 잘 나오면 그냥 좋아. 행복해. 우하하. 나 드라마 이대로 잘 끝나면 그때 말할게. 듣고 흉이나 보지 말어.”
“흉은요. 이 미친 시청률 보고 흉볼 사람이 어딨습니까? 아, 그리고 저희 신인 작가 계약했습니다.”
“신인? 누구?”
“KBC에서 예능 하다가 얼마 전에 별이랑 단막극 찍었던 친군데 아주 센스 있고 기발해요. 언제 한 번 소개시켜 드릴게요.”
“오오… 김 대표가 그렇게 말하니까 기대가 되면서도 질투 나는걸?”
“하하하. 아이고 윤 작가님, 저는 윤 작가님밖에 모르는 윤바라기입니다.”
“어디서 대사 치고 있어? 하여튼 드라마 끝나고 회포나 풀자고.”
그녀와의 통화가 끝났을 때 사무실 문이 열리며 날씬한 여성의 실루엣이 보였다. 궁금해서 직접 나가보니 놀랍게도 지여울 제작 피디다.
“여기까지 어쩐 일이세요?”
“그냥 회사에서 도망친 김에 몇 가지 알려주러 왔어요. 지금 SN쪽에서 사람이 왔는데 이래저래 힘들게 하네요. 일단 말씀하셨던 대로 임윤지 측하고 미팅 잡았어요.”
그녀는 한 차례 전투를 치르고 온 것처럼 녹초가 되어있었다.
“잘됐네요. 그런데 SN쪽에서 왔다구요? 이상하다? 벌써 SN쪽이랑 얘기 끝냈는데?”
“다행스럽게도 이효주 관련해서는 수긍하고 넘어갔어요. 대신에 지금 우리더러 올해 후반기에 들어갈 드라마 하나 내놓으라는 분위기예요. 꼭 맡겨놓은 거 찾으러 온 것처럼.”
“이효주가 할 거요?”
“아뇨. 소녀세상의 멤버 수현이 여주로 할 드라마요.”
“소녀세상의 수현이요? 얼마 전에 연기 보니까…”
“아, 보셨어요? 그럼 우리가 얼마나 난감한지 짐작하시겠네요.”
충분히 짐작하고도 남는다. 그녀를 여주로 하고 드라마를 만든다고 생각하니 숨이 턱턱 막혀온다.
“네, 고생하시네요.”
“저렇게 나와도 돈은 다 저쪽에서 안정적으로 받쳐주니 우리도 이익이긴 한데, 자꾸 망하기만 하니까 힘이 나지를 않아요.”
지금껏 SN 엔터의 배우들을 주연으로 해서 성공한 드라마와 영화는 손에 꼽기도 힘들 정도다. 그러니 아무리 이익이 난다고 해도 만드는 것조차 고역을 느끼는 것 같다.
“저희 쪽에 이렇게 압박하는 걸 보면 자체적으로도 이미 진행하는 게 있을 것 같은데, 아예 올해가 가기 전에 소녀세상 멤버로 드라마 하나 만들 기세예요.”
“허허. 급하긴 급한가 보네.”
“그런데 SN쪽이랑 별다른 마찰은 없었어요?”
“아,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잘 마무리했어요.”
“하긴… 윤 작가님을 데리고 있는데 감히 그러지는 못했겠죠. 어쨌거나 내일 점심때 미팅 잡아놨으니까 이 작가님께 말씀해주세요. 그리고 잘하면 오후에도 약속 잡을 수 있어요. 오늘 저녁까지 추려서 말씀드릴게요.”
“급하게 진행되네요.”
“내일까지 캐스팅 마무리해야 편성이 제대로 잡힐 것 같아서요. 우리보다 그쪽에서 자꾸 재촉하네요.”
“알겠습니다. 수고하셨어요.”
그녀가 돌아가고 나서 우현은 이 작가를 사무실로 불렀다. 임윤지를 캐스팅하게 된 것과 관련해 이야기를 나눠야 할 것이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기다리는 이주희 작가보다 먼저 사무실 문을 열고 들어오는 사람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