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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6] 끝난 줄 알았지?(1)
사무실에서 말쑥한 청년이 우현에게 인사하고 있었다.
“안녕하십니까? 진세동이라고 합니다.”
꾸미지 않은 단정한 옷차림에 선한 인상, 그리고 성실한 이력까지 모두 마음에 들었다.
“운전은 잘 해요?”
“군대에서 2년 동안 운전병 했었고 동대문에서 의류 사입하며 승합차 좀 몰았습니다.”
“매니저일 하려는 이유가 뭐예요?”
“오래전부터 이쪽 일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바닥부터 시작해 나중에는 큰 엔터사의 사장이 되는 게 목표입니다.”
“그럼 더 큰 회사로 지원하지, 왜 우리 회사에 지원했어요?”
“그게… 큰 회사는 월급이 너무 짜더라구요.”
“하하하, 그래요? 솔직해서 좋네요.”
돈 벌어서 혼자만 잘 먹고 잘 살겠다는 생각은 하지 않는 우현은 로드매니저가 최소 월 200만 원 이상 받아갈 수 있게끔 한다. 한 달에 200만 원은 벌어야 오래 다닐 수 있다는 게 그의 생각이기 때문이다.
“알았어요. 결과는 되든 안 되든 내가 전화로 직접 연락 줄게요.”
그에게 면접비까지 3만원 쥐어서 돌려보냈다. 적은 돈일지라도 일을 구하려는 사람에게는 3만원도 큰돈이기 때문이다.
이제 돈도 어느 정도 돌기 시작했으니 고시원 생활도 청산할 때가 왔다. 그래서 강남 주변에 작은 오피스텔을 알아보기 시작했다.
수십 군데의 발품을 판 끝에 주말에 회사 근처의 괜찮은 오피스텔을 계약하고 필요한 가재도구와 전자제품을 사느라 바쁘게 지냈다. 집들이 한 번 하라는 은하의 말을 애써 무시하며 주중에 쌓인 피로를 잠으로 풀고 나니 어느새 월요일이 다가왔다.
주말 동안 민유리 작가의 차기작에 지나와 계약하고 싶다는 제작사측의 연락을 받았다. 그래서 월요일 아침부터 강남에 위치한 제작사인 블루마운틴을 찾았다.
“전보다 얼굴이 더 좋아졌어요.”
“으흠… 그런가요? 미홍이 언니 미용실이 원래 메이크업을 잘 해서 그렇게 보이나 봐요.”
지나는 갈수록 얼굴에 생기가 돌았다. 다시 일을 시작한다는 기대와 설렘 때문인지 얼굴에 빛이 나는 것 같았다. 목소리와 말투에도 여유가 묻어나왔다.
“너는 왜 정장을 차려 입고 나왔냐?”
진명은 위아래로 검은색 정장을 차려입고 왔는데 평소 청바지에 티만 입고 다니다가 정장을 입으니 사람이 달라 보였다.
“저는 언제나 계약할 때는 정장을 입고 갑니다. 아무리 평소에 거지같이 하고 다녀도 계약할 때는 멀쩡한 모습을 보여줘야 하지 않겠습니까?”
“듣고 보니 네 말이 맞다. 잘 했네.”
우현의 칭찬에 진명이 어깨를 으쓱이는데 회의실로 일단의 무리가 들어섰다.
“반갑습니다. 블루마운틴 제작피디 강형수입니다.”
“이번에 감독을 맡게 된 이철순입니다.”
“나도 소개해야 돼?”
“아유 아닙니다, 민 작가님. 얼마 전에 같이 술 마셔놓고는…”
“그렇지? 지나씨는 얼굴이 더 좋아졌네.”
“어머, 작가님이 더 좋아 보이시는데요?”
그렇게 세부적인 계약사항을 확인하고 유지나는 회당 3천에 계약했다. 엄청난 계약까지는 아니지만 지금 지나의 상황으로써는 이것도 감지덕지인 만큼 열의를 불태우며 최선을 다짐했다.
제작사 근처에서 근사한 점심을 같이 하고 돌아오는 길에 지나가 문득 우현에게 말을 걸었다.
“아, 그런데 이철순 피디님 이야기는 왜 안 했어요?”
“왜요? 부담돼요?”
“부담까지는 아닌데… 그래도 말씀을 안 하신걸 보면 이유가 있나 해서요.”
“알고 있겠지만 이철순 피디 작품은 연기 못하는 사람들에게는 쥐약이죠. 나는 지나씨 연기를 보면서 못하다는 생각은 안 해 봤어요. 그런데 솔직히 ‘와! 대단한데?’ 라는 느낌도 못 받았거든요. 그래서 미리 말하면 거부감이 들 수도 있다고 생각해서 말 안 했어요.”
“흐음… 너무 솔직하신 거 아니에요?”
“내 배우니까 솔직하게 말하는 거예요. 더 잘 할 수 있다고 믿으니까 솔직할 수 있는 거구요. 그것보다 나아질 것 같지 않았다면 충분히 잘한다고 했겠죠. 그러니까 너무 미워하지 말아요, 후후. 그리고 이철순이기 때문에 더 좋은 기회일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확실히 양날의 검이긴 하죠.”
그녀도 우현의 말에 동의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철순 피디는 어떤 드라마든 바스트 위주로 찍는데 그러다보니 배우의 얼굴이 계속해서 클로즈업 된다.
문제는, 풀샷으로 찍을 때는 표정이나 감정 연기가 조금 떨어져도 크게 티가 나지 않지만 클로즈업으로 찍을 때는 배우의 연기 수준이 고스란히 드러난다는 것이다. 특히 민유리 작가의 작품처럼 감정연기가 많은 드라마일 때 계속해서 클로즈업을 당겨주면 찍는 배우 입장에서는 부담스럽지 않을 수 없다.
대신 좋은 점이라면 그만큼 여배우가 예쁘게 나올 수 있도록 조명을 잘 써준다는 점, 이거 하나다. 한 마디로 연기만 잘 하면 유지나의 매력이 극대화 될 수 있는 작품인 거다.
“대표님이 저에게 아주 큰 숙제를 연달아 주시네요. 뭐, 전에도 잘 해결했으니까 이번에도 잘 해봐야겠어요.”
“좋은 마음가짐입니다.”
사무실로 돌아오니 새로운 로드매니저로 뽑은 진세동이 와 있었다. 그와 유니를 인사시키고 앞으로 그녀의 로드매니저가 됐음을 알렸다. 유니는 갑작스러운 말에 조금 당황하긴 했지만 어차피 우현이 별다른 스케줄이 없을 때는 계속 같이 다닐 것이라는 말에 금방 수긍했다.
마침 저녁에 잡힌 유니의 행사를 시작으로 그와 함께 다니기 시작했는데 운전도 곧잘 하고 지리도 잘 알고 있어 마음을 놓을 수 있었다.
대기업 신입사원을 위한 수련회 마지막 날이 유니에게 잡힌 행사였는데 아직 몸값이 높지 않아 한 곡 부르는데 2백만 원을 받았다. 이것도 굉장히 많은 돈이지만 다른 잘나가는 가수들에 비하면 턱없이 적은 금액이다.
사실 가수를 키우는 기획사에게 있어 음원 수익은 큰 이익을 주지 못한다. 중소 기획사들에게 가장 큰 수입원은 행사이며, 대형 기획사에게 가장 큰 수입원은 콘서트다.
기분 좋게 행사를 마치고 오는데 지 피디에게 전화가 걸려왔다.
“지금 10시가 넘었는데 아직까지 일하고 계셨습니까?”
“김 대표님도 지금까지 일하고 계셨을 거잖아요?”
“에이… 그래도 저는 사장이잖아요? 야근 수당 톡톡히 챙겨 받으세요.”
“물론이죠. 이거 들어가게 되면 보너스 완전 많이 달라고 할 거예요.”
“벌써 결정 났어요?”
적어도 이번 주 금요일쯤은 돼야 결정 날 줄 알았는데 월요일 저녁이라니…
“우리가 바쁘게 한 게 아니라 KMTC쪽이 급해서요. 어쩔 수 없이 우리도 그쪽 스케줄에 맞춰야 했는데 마침 괜찮은 시놉이라 아침부터 들이밀었더니 오케이 떨어졌어요.”
“도대체 얼마나 바쁘기에 이렇게 빨리 결정 났답니까?”
“이번 주 안에 결정 못 지으면 한 주가 펑크날지도 모른다고 하더라구요. 한 주짜리 예능을 편성할까 고심하던 참이었데요. 담당자가 주말동안 시놉시스만 스무 개를 봤지만 마음에 드는 게 하나도 없었는데 마침 우리 시놉이 마음에 들었대요. 이거 엄청난 행운인 거 아시죠?”
“에이… 작품이 좋았다고 합시다.”
“푸하하! 그래요. 작품이 좋았어요. 이제 말해봐요. 이거 쓴 작가 누구예요? 방송국 담당자한테 작가 이름도 말 못 해줬단 말이에요. 쪽팔리게 우리도 모른다고 할 수도 없고, 둘러대느라 혼났어요.”
“신인 작가라 처음 들어보는 이름일 거예요. 이주희 작가라고, KBC 예능 작가였다가 얼마 전에 단막극 하나 찍었어요.”
“흠… 처음 듣는 이름이긴 하네요. 그런데 어떻게 이걸 구했어요? 설마 벌써 계약한 거예요?”
“네, 우리랑 계약했습니다.”
“빠르기도 해라. 이거 참, 원고료 깎을 수도 없겠네요.”
“하하하. 최대한 많이 받아낼 겁니다.”
“그래요, 급한 건 우리 쪽이니까요. 그런데 작가님은 배우 누구를 생각하신대요? KMTC 쪽에서는 이번 주 안에 캐스팅 마무리 하라고 하네요. 그러면 바로 편성 잡아준다고.”
“아직 캐스팅 관련해서는 이야기를 못 나눠봤습니다. 솔직히 원한다고 해서 바로 되는 것도 아니니 그냥 다 돌려 보시죠?”
“다 돌려보라구요? 정말 원하시는 분 없으세요?”
“물어보긴 하겠지만 솔직히 작가님이 원하시는 분 보다 작품에 맞는 사람을 꽂는 게 더 좋아 보이네요. 아무래도 신인 작가님이라서 자신의 작품에 누가 맞는지 감이 없을 수 있습니다. 이 부분은 제가 작가님과 상의할 테니까 다 돌려보시고 컨택 오는 곳 위주로 상의하도록 하시죠.”
“좋아요. 저희야 그렇게 되면 부담 없죠. 일이 좀 늘어나긴 하지만…”
“아이고 지 피디님, 제가 KMTC쪽 물어다 준거나 다름없지 않습니까? 잘 좀 봐주십쇼.”
“후후훗! 알겠어요. 그럼 일단 시놉 돌릴게요!”
“네, 그러세요.”
우현은 전화를 끊고 곧바로 이주희 작가에게 전화를 걸었다. 이 기쁜 소식을 바로 전해줘야 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역시나 소식을 들은 이 작가는 기쁨에 겨워 급기야 울음을 터뜨렸고 그 동안 마음고생이 심했는지 한참동안 전화기를 붙들고 목 놓아 울었다.
며칠 후, 기다리던 지 피디에게서 연락이 왔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누가 관심을 보이던가요?”
“여배우는 최슬기, 이효주가 관심을 보였고 남배우는 강민수와 박강후가 관심을 보였어요. 특히 최슬기 쪽에서는 당장 미팅을 잡고 싶다고 적극적으로 나왔구요.”
“최슬기가요?”
“네. 왜요? 싫으세요?”
지 피디의 목소리가 기어 들어갔다. 분명 싫어할 것을 아니까 저렇게 목소리가 기어 들어가는 거다.
“그 발연기를 여기다 붙이자구요? 그 혀 짧은 소리는 고쳤답니까?”
“그렇긴 하죠? 그런데 방송국에서 준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어요. KMTC 입장은 최슬기라도 붙으면 일단 편성 잡고 스케줄 잡자는 것 같던데요?”
“저는 반대입니다. 드라마 망칠 일 있어요?”
“그럼 이효주는 어때요?”
“최슬기보다야 낫지만 솔직히 이효주도 조금…”
발음이나 발성은 최슬기보다 이효주가 더 낫다고 생각하지만 그 어색한 표정연기는 정말 봐주기 힘들었다.
“이번에 이효주 쪽에서 절치부심해서 연기 연습했다고 강조하더라구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됐대요. 게다가 이제는 완전히 소녀티를 벗어서 더욱 성숙한 느낌을…”
“크흠… 지 피디님, 솔직히 최슬기가 미팅잡자고 하는 게 아니라 이효주 쪽에서 미팅 잡자고 했죠? 그렇죠?”
“어, 어? 아닌데요?”
“목소리가 떨리는데요?”
“아… 김 대표님 귀신이네요. 대표님, 우리 이효주로 한 번 가봐요. 진짜 연습 열심히 했다고 얼마나 강조했는데요.”
듣는 내내 기분이 이상했다. 뭔가 놓치고 있는 것 같다는 느낌.
“흐음… 조연은요?”
“정이슬, 윤사랑, 강태호, 김강운 정도가 연락 왔구요. 어른들 역으로는…”
“잠깐만요.”
“네? 왜요?”
“강태호가 혹시 SN 엔터 소속 ‘헤식스’의 멤버 강태호를 말하는 건가요?”
“어? 어떻게 알았어요?”
그제야 머릿속을 간질이던 기분 나쁜 느낌의 정체를 알아챘다.
“그러고 보니까 이효주도 SN 엔터 소속 아닌가요? 혹시 SN 쪽에서 투자 들어왔어요?”
“하하, 그렇게 됐네요. 김 대표님, 너무 안 좋게만 보지 마세요. 강태호가 조연으로 들어오면 시청률에 얼마나 도움이 된다구요. 게다가 강태호는 따로 연기 지도를 3년 동안이나 받았다고 하던데요?”
“SN에서 하면 안 합니다.”
“네? 그게 무슨…?”
“그쪽에다 ‘작가가 파인 엔터 소속이라 힘들 것 같다’라고만 말하세요. 그렇게 말하시면 그쪽에서 알아들을 겁니다.”
“대표님, 잠시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