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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3] 아이돌에게 연애란?(1)
“유니씨! 스탠바이 하세요!”
오늘 음악방송 리허설에는 약간의 긴장감이 돌았다. MBS에서의 첫 음악방송인데 유니가 1위 후보가 됐다는 말이 들렸기 때문이다. 드라마의 인기를 등에 입고 음원차트를 휩쓰는 유니의 기세에, 상당한 팬덤을 가진 아이돌 노래가 추풍낙엽처럼 흩어져 날아간 것이다.
“지금 갑니다!”
편한 복장의 유니가 자신의 배 전체를 가릴만한 이름표를 목에 메고 무대에 올랐다. 편한 얼굴로 카메라를 바라보는 유니를 보며 손에 땀이 맺혔다. 1위 후보가 됐다는 말은 일부러 하지 않았다. 괜히 그것 때문에 긴장할까 염려 됐기 때문이다.
“유니씨 매니저 되신다고 하셨죠?”
고개를 돌려보니 소대윤 피디였다. 메인피디인 그가 자신을 찾는 이유가 무엇인지 빠르게 머리를 굴려봤지만 딱히 떠오르는 것은 없었다.
“네, 맞습니다. 유니 소속사 대표 김우현입니다.”
“아, 대표님이셨군요.”
전에 ‘복면노래왕’이 끝나고 회식 자리에서 왕기춘 피디를 비롯한 스태프들에게 인사한 적이 있었는데 소대윤 피디도 그 때 같이 인사했던 사람 중의 하나였다. 그 때도 지금처럼 분명히 대표라고 인사했었는데 건성으로 흘려듣더니 지금에 와서 언제 그랬냐는 듯이 말한다.
“네, 무슨 일로…?”
“다름 아니라 제가 이번 추석 특집 ‘아이돌 올림픽’을 진행하게 됐습니다. 참가 가능하시죠?”
작가가 물어보는 게 아니라 피디가 직접 물어보는 게 당황스러웠다.
“저희 유니가 할 줄 아는 게 없어서…”
“출연 못 한다는 말씀이세요?”
대놓고 인상을 팍 찌푸리는 게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 일단 승낙하고 봐야 한다.
“아닙니다. 출연이야 할 수 있는데 할 줄 아는 게 없어서요. 달리기도 영 아니고.”
그제야 그의 표정이 다시 풀린다.
“아, 걱정하지 마세요. 저희가 지정해 드릴게요. 그리고 아시죠? 팬들 오게 되면 저희는 따로 점심 제공하지 않는다는 거. 각 소속사에서 팬들한테 고마움을 표시하고 싶으면 따로 준비하시면 됩니다.”
“알고 있습니다.”
“알고 계시다니 다행이네요. 녹화는 미리 해야 되기 때문에 이달 말에 진행할 겁니다. 그 때 스케줄 비워 두시구요. 정확한 날짜 정해지면 연락드리겠습니다.”
그는 자신의 말만 한 후 대충 인사하고는 휑하니 몸을 돌렸다. 그리고 또 다른 매니저를 붙잡고 대화를 시작했다. 이 자리에서 했던 말을 똑같이 반복하는 것이 틀림없다.
“아… 큰일이네.”
개인적으로 망가지는 예능만 아니면 뭐가 됐든 괜찮지만 ‘아이돌 올림픽’은 정말 하고 싶지 않은 예능이다. 무엇보다 일단 다칠 가능성이 크다는 게 가장 문제이긴 하지만 팬들까지 신경 써야 하는 것도 골치 아프다.
팬들은 자신이 응원하는 아이돌의 기가 죽을까봐 새벽부터 나와서 응원하는데 그런 팬들에게 점심과 저녁이라도 먹여야 하지 않겠는가? 이걸 방송사에서 지원해주지 않는다.
그러다보니 각 소속사마다 나름대로 도시락을 준비하는데 이게 소속사마다 차이가 날 수밖에 없다. ‘누구는 뭘 받았네, 누구는 얼마짜리네’ 하는 이야기가 안 돌 수가 없다.
웃긴 건 유니는 아직 팬덤도 생기지 않은 상태라서 만약 기껏 도시락이니 뭐니 준비했는데 팬들이 오지 않는 상황이 벌어진다면 그건 진짜 최악이다. 우현 자신조차도 유니가 기가 죽지나 않을까 염려하는 상황이니 말이다.
거기에다 만약 다치기라도 한다면? 생각하고 싶지도 않다. 다른 스케줄을 빼고 참가했다가 다친다고 해도 방송사에서는 보상도 제대로 해주지 않기 때문이다. 문제는 도저히 거부할 수 없다는 것.
만약 ‘아이돌 올림픽’을 거부한다면 음악방송을 포함한 MBS에서 하는 모든 예능프로에 나갈 수 없는 것이 암묵적인 관례나 마찬가지다. 그런 것 따위는 개나 주라는 모 소속사를 제외하면 거의 모든 소속사에서 매년마다 아이돌을 내보내는 이유가 이것이다.
팬들은 주구장창 해당 예능을 폐지하라며 목소리를 높이지만 막상 설날이나 추석이 되면 가장 높은 시청률을 기록하는 예능이니, 폐지는커녕 해가 갈수록 종목도 늘어나는 추세다.
물론 몇몇 아이돌은 ‘아이돌 올림픽’을 통해 스타가 되기도 하지만 그건 백여 명의 아이돌 중 고작 몇몇일 뿐이고 유니를 그런 식으로 띄우고 싶은 마음도 없다.
“저 어땠어요?”
“굿! 좋았어.”
조금 상기된 얼굴로 내려오는 유니를 데리고 매점으로 내려온 우현은 슬쩍 물어보았다.
“혹시 체육 쪽으로 잘 하는 거 있어?”
“운동이요? 왜요?”
유니는 입에 한가득 빵을 물고 눈을 껌뻑였다. 체중관리를 위해서 말리고 싶었지만 한창 배고플 것을 알기에 차마 그러지 못했다.
“이번에 추석 특집 ‘아이돌 올림픽’에서 섭외 들어왔거든. 이건 깔 수가 없는 거라 네가 꼭 나가야 해.”
“진짜요? 우와! 대박! 저희 예전에 라라걸즈 활동하면서 한 번 해봤거든요? 그런데 아무도 카메라에 얼굴도 비추지 못했어요. 달리기 할 때 스치듯 지나가는 한 컷이 전부였거든요. 진짜 아쉬웠는데… 그 다음에는 아예 부르지도 않더라구요. 완전 짜증났어요. 우리보다 인기 없는 애들도 나갔던데.”
유니는 우현과는 반대로 ‘아이돌 올림픽’ 섭외 요청이 들어온 것에 좋아하는 것 같다.
“다칠지도 모르는데 괜찮아?”
“괜찮아요. 저 이래봬도 꽤 튼튼해서 어지간하면 크게 다치지도 않아요. 그런데 제가 하고 싶은 거 할 수 있어요?”
유니는 소풍가는 아이들처럼 들떠 보였다. 전에는 아무도 주목하지 않는 무명 아이돌로 참가했지만 이번에는 솔로로 화려하게 데뷔한 뒤에 참가하는 것이기에 감회가 남다른 듯했다. 이건 우현도 생각하지 못했던 부분이다.
“뭐, 잘 하는 거 있어?”
“저 어릴 때부터 집중력이 좋다는 말을 많이 들었어요. 그래서 양궁 하면 잘 할 수 있지 않을까요?”
“양궁?”
집중력이 좋다고 양궁을 잘 할 수 있는지는 모르지만 하여튼 유니가 원하는 종목이니 말은 해둬야 할 것 같다.
“알았어. 내가 피디에게 말해놓을게. 잘 하면 카메라는 많이 받겠다.”
“그렇죠? 히히.”
“네가 좋다니 다행이긴 하네. 네 팬카페가 만들어지면 그쪽에다 올림픽 일정 공지해줘야겠다. 얼마나 올지는 모르겠지만.”
“많이 오면 좋겠죠?”
“그럼. 많이 올수록 좋지.”
이게 가수들끼리 은근히 자존심 싸움이 된다. 많은 팬들이 온 아이돌은 괜히 어깨가 올라가고 얼굴에 미소가 그려지기 마련이며 팬이 없는 아이돌은 부러움과 질투, 무력감을 느낄 수밖에 없다.
모든 리허설이 마무리되고 생방송에 들어갔다. 노란색의 짧은 스커트를 기본 컨셉으로 제작한 무대의상은 유니의 사랑스럽고 깜찍한 외모를 더욱 돋보이게 만들었다. 그 동안 연습해왔던 표정 연기와 약간의 손짓 연기도 잘 나왔다.
이제 모든 출연자들이 무대에 올라가고 1위를 발표할 시간. 왼쪽 화면엔 유니가, 오른쪽 화면엔 상대 1위 후보인 ‘헤식스’가 크게 잡혔다. 누가 1위로 결정될지 모를 긴장감에도 계속해서 웃는 표정을 유지해야 함은 당연하다. 그리고 1위로 선정되지 않더라도 아쉬운 표정이 나와서도 안 될 것이다.
역시나 결과는 강력한 팬덤을 자랑하는 보이그룹인 ‘헤식스’에게 돌아갔다. 살짝 기대하기도 했지만 역시 지상파 1위는 팬덤 없이 음원 성적만으로는 힘들다는 걸 다시금 깨달았다.
유니는 미소를 머금은 채 환호하는 ‘헤식스’ 멤버들에게 축하인사를 건넸다. 무대 뒤에 있던 다른 출연자들과도 연신 고개를 숙이며 수고했다는 인사를 주고받으며 무대를 내려왔다.
“괜찮아. 1위 그거, 아무것도 아니야.”
“힝… 저 솔직히 조금 기대했단 말이에요. 그것 때문에 노래 부를 때도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니까요?”
미리 듣지 못했기에 생방송에 들어가면서 1위 후보가 됐다는 걸 안 유니는 기대감을 잔뜩 가지고 있었던 것 같다.
“그랬어? 그럴 줄 알았으면 미리 알려줄 걸 그랬네. 나는 네가 미리부터 긴장할 것 같아서 안 알려 줬더니… 어쨌거나 너무 실망하지는 마. 1위 후보가 됐다는 것만으로도 굉장한 거잖아.”
“그렇긴 한데… 아까 뜬 점수표 보니까 음원 성적만 가지고는 죽었다 깨어나도 1위는 안 될 것 같아요.”
“그렇겠더라. 어쨌거나 수고했고, 집으로 가자.”
방송 잘하고 와서 유니를 집에 데려다주고 사무실로 올 때까지만 해도 기분이 좋았던 그였지만 인터넷에 뜬 기사를 보고 화들짝 놀라고 말았다.
[‘헤식스’의 현민과 다정한 눈빛을 주고받는 유니]
이딴 수준 낮은 타이틀을 달고 있는 기사가 포털 메인에 올라와 있던 것이다. 기사를 클릭해보니 이미 댓글은 천개 가까이 달려있었고 내용은 유니에 대한 욕이 대부분이었다.
“이런 미친 새끼!”
1위를 축하해주는 유니와 인사를 받는 현민과의 시선이 마주치는 찰나의 순간을 포착해서 절묘하게 찍은 사진은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 본다면 둘의 사이를 오해하기에 충분했다.
이런 쓰레기같은 기사를 누가 썼는지 궁금해서 하단을 보니 눈에 익은 이름이 있었다.
‘연예패치의 장성동 기자’
전에 호되게 당한 적 있는 장성동 기자가 앙심을 품고 있다가 이번에 다시 한 번 논란을 일으키려는 것 같다.
내려달라고 해도 이제는 의미 없다. 퍼질 만큼 퍼진데다가 고의적으로 내리면 둘의 사이는 더욱 의심받는다. 그렇다고 열애설도 아닌데 해명기사를 내는 것도 웃기다. 그냥 둘의 사이가 좋아보여서 기사를 냈다고 하면 그만이니까.
이럴 때 가장 좋은 방법은 남자 쪽에서 아무 일도 아니라고 먼저 말해주는 것이다. 어차피 유니의 팬들은 기자가 일부러 저렇게 찍었거니 하겠지만 ‘헤식스’의 팬덤은 그렇게 받아들이지 않는다.
설사 알고 있다고 하더라도 괜히 미운 것은 어쩔 수 없다. 남자 쪽에서 제대로 된 해명을 해야 ‘우리 오빠에게 꼬리친 나쁜 년’이 된 유니의 이미지를 복구시킬 수 있다.
“안녕하세요. 파인 엔터의 대표 김우현입니다.”
즉시 ‘헤식스’의 소속사인 SN 엔터테인먼트에 전화를 걸었다.
“아, 네. 무슨 일이시죠?”
“오늘 '헤식스‘ 현민과 관련된 기사 뜬 거 보이시죠? 그 현민과 같이 기사 나게 된 유니의 매니지먼트사입니다.”
“아, 그러시군요. 잠시만 기다려주시겠습니까?”
여직원이 누군가에게 물어보려 하는 것 같았는데 전화 너머에서 한참 동안 아무 말도 들려오지 않았다. 그러다 다시 남자 목소리가 들렸다.
“전화 바꿨습니다. ‘헤식스’ 맡고 있는 이정묵 실장입니다.”
“안녕하세요. 파인 엔터 대표 김우현입니다. 지금 기사 확인하셨나요?”
“네, 봤습니다. 그런데 무슨 일로…?”
‘시팔!’
속으로 욕이 나왔다. 뻔히 알면서 저런 식으로 되묻는 건 쓸데없이 해명하고 싶지 않다는 뜻이다.
“기사 밑에 댓글 보셨습니까? 지금 우리 유니가 아주 못된 년이 됐는데요.”
“아, 잠깐 그러는 것이고 시간 지나면 금방 가라앉을 겁니다. 아시잖습니까? 하하하.”
그는 애써 이 사건이 대충 지나가기를 원하는 것 같았다. 이해되지 않았다. 그 정도 해명은 소속 연예인의 피해를 줄여주고 이미지를 더 좋게 만들어주기 때문에 상대 쪽에서 거부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금방 지나가기를 기다리기엔 우리 쪽 피해가 큽니다.”
“그럼 저희 쪽에서 해명이라도 하길 원하십니까?”
“그리 어려운 일 아니잖습니까? ‘그냥 사진이 그렇게 찍힌 것일 뿐이다’라고 하면 될 일이니까요.”
“후… 김 대표님. 아시다시피 소속사에서 해명한다고 팬덤이 가라앉기를 바랄 수는 없는 거 아시죠? 당사자가 해명하는 게 가장 좋은 방법인데…”
“그런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