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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2] 잘 할 수 있는 것(3)
귀밑머리가 귀엽게 말려들어간 갈색의 단발머리. 게다가 흰 티셔츠에 스키니 진, 그리고 스니커즈까지. 발랄한 고등학생 같기도, 대학생 같기도 한 모습이었다. 지금 술을 마시고 있는 가라오케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그래, 정말 사람이 바뀌었어. 내 작품이 하고 싶다고?”
“네, 혜주역 꼭 하고 싶어요.”
민유리 작가는 맥주와 양주가 섞인 폭탄주를 한 모금 들이키고는 한껏 어려진 지나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지나는 방금 전까지의 발랄한 모습은 어디가고 깊게 가라앉은 눈동자를 한 채 민 작가의 시선을 마주했다.
“유지나씨 사람 놀래키는 재주가 있었네?”
이번에는 우현이 민 작가의 말을 받았다.
“선생님, 보시다시피 우리 지나 마음 단단히 먹었습니다. 물론 이 작품 안 된다고 커트하신다면 순순히 물러날 마음 있습니다. 그런데 한 번만 생각해보십시오. 전에 한여름 데리고 어떻게 됐습니까? 그 좋은 작품, 솔직히 많이 아쉽지 않았습니까?”
“흐음… 난 만족했어.”
만족했다는 말과는 달리 그녀는 우현에게 집중하고 있었다.
“그렇습니까? 솔직히 이번 작품 누굴 생각하십니까? 유은하? 유은하 이번에 못 합니다. 영화 촬영할 계획이거든요.”
“그걸 어떻게…? 아, 맞다. 우현씨 은하 전 매니저였지. 아직 사이 좋은가보네.”
“그렇게 됐습니다. 어쨌거나 은하는 이 드라마 하고 싶어도 못 합니다. 그럼 전에 같이 작품했었던 송혜연? 송혜연 좋네요. 아니면 전지은?”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뭐야?”
“작가님 작품은 항상 톱 여배우로 만들어왔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작품이 끝나면 작가님 이름보다 여배우 이름이 먼저 나왔습니다. 민유리의 ‘폭풍의 언덕’이 아니라 송혜연의 ‘폭풍의 언덕’이었고 민유리의 ‘미련한 여자’가 아니라 한여름의 ‘미련한 여자’였죠. 연기력 논란이 있었는데도요.”
“그게 무슨 상관이야? 어쨌거나 내 작품을 하기위해 수많은 스타들이 날 만나려고 해. 우현씨도 마찬가지잖아?”
“맞습니다. 그런데 만약, 조금만 눈을 낮추었다면 여배우의 이름보다 작가님의 이름을 먼저 거론하지 않았을까요?”
우현의 말이 정곡을 찔렀는지 그녀는 말없이 폭탄주를 마셨다.
“이번 작품은 그래서 더욱 좋은 기회라고 생각합니다. 시놉시스를 보니 언제나 격정적인 멜로를 써 오셨던 작가님이 쓴 작품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였습니다. 저는 처음에 작가 이름을 잘못 쓴 줄 알았다니까요. 작가님 작품에 재벌이 안 나오는 것도 처음이지만 여주가 이렇게 발랄한 것도 처음이었습니다. 물론 그럼에도 작가님 특유의 무거운 분위기는 살아있지만, 예전의 처절하고 감정을 있는 힘껏 쏟아내던 여주에 비해서는 무게감이 덜한 게 사실입니다. 그렇기에 더 튀죠. 시청자들을 납득시킬 수 있는 연기가 아니면 이도저도 되지 않을 겁니다.”
“우현씨가 작품을 잘 보네. 고작 시놉시스만으로 그런 분위기를 읽어내고…”
“그걸 읽으면서 민 선생님이 왜 이런 작품을 썼을까 생각했습니다. 전과 비슷한 작품을 쓰셔도 항상 평타 이상을 치는 분이셨으니까요. 그리고 결론은 아직도 모르겠다입니다.”
“후후. 내가 우현씨를 처음 본 게 은하가 데뷔하고 얼마 되지 않았을 때였지? 그 때, 나는 솔직히 은하가 그렇게 뜰 줄 몰랐어. 그런데 우현씨가 은하를 데리고 작품 몇 개를 해치우면서 걔를 톱스타로 올려놓더라구. 그걸 보면서 ‘아… 내 눈이 배우 볼 줄을 모르는구나’ 생각했지.”
“과찬이세요.”
“과찬 아니야. 좋아, 우현씨가 솔직히 말했으니까 나도 솔직하게 물어볼게. 그 때, 왜 거부했어? 내가 알기로 은하는 내 작품 하고 싶어 했다고 들었는데…”
이건 우현도 생각하지 못했던 거다. 순간적으로 답을 하지 못하고 미적거리는데 민 작가가 우현에게 폭탄주를 내밀었다.
“이거 마시고 말해봐. 왜 내 작품 하지 않았어?”
유지나도 궁금했는지 우현을 돌아보았다. 결국 우현은 온더락잔에 담긴 폭탄주를 한 번에 다 마시고는 입을 열었다.
“선생님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은하 때문이었죠.”
“은하 때문에?”
“아이 참, 이 말 나온 거 은하 귀에 들어가면 절 죽이려고 들 텐데…”
“말해 봐. 뭔데 그래?”
“선생님 작품은 말했듯이 격정적이고 감정을 많이 소모해야 합니다. 우는 장면도 많죠. 그런데 우는 게 예쁜 여배우 흔치 않습니다. 울면서도 못나 보이지 않으려면 보통 연기로는 되지 않죠. 시청자들이 온전히 그 여배우의 감정과 동화돼야 우는 모습이 못나 보이지 않는 건데, 저는 솔직히 은하가 그 정도는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안 한 게 아니라 못 한 겁니다.”
그의 말에 민유리가 처음으로 호탕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 그랬던 거야? 난 몰랐지. 내 작품이 마음에 안 드는 줄 알았으니까.”
“그럴 수밖에 없지 않습니까? 내 배우가 연기력이 딸려서 못하겠다고 어떻게 말합니까?”
“그래, 알았어. 이번에 왜 작품 분위기가 바뀌었냐고 물었지? 솔직히 나도 내 작품 쓰다보면 우울해져. 그렇게 무겁고 감정이 듬뿍 들어간 작품을 쓰면 나도 거기에 빨려 들어가. 그러다보면 결국 작품이 끝나고 났을 때는 우울감에 한동안 정신을 못 차리거든. 그래서 분위기를 가볍게 가려고 한 거야. 이러다 진짜 우울증 걸릴 것 같았거든.”
“그렇군요.”
잠시 어색한 침묵의 시간이 지난 뒤 민 작가가 술 한 모금 마시더니 처음보다 한결 후련해진 표정으로 말했다.
“좋아. 그런데 알지? 미팅 한 번으로 캐스팅 결정지을 수 없다는 거.”
“알고 있어요, 선생님.”
유지나의 눈이 기대감으로 반짝거렸다.
“내일 오전에 제작사 사무실로 와. 그 때, 피디랑 같이 볼 테니까.”
드디어 그녀에게 오디션을 볼 수 있는 기회를 주었다. 피디와 같이 본다고 해도 결국 결정은 그녀가 내릴 거다. 오디션은 피디와 스태프들에게 보여주는 일종의 절차와 같은 것이다.
“감사합니다. 정말 잘 할게요.”
“아까처럼만 하면 돼.”
밝고 긍정적이며 적극적인 모습. 그것이 이번 작품에 드러난 혜주의 성격이다. 그런 그녀를 고스란히 보여주기만 하면 된다.
“오늘 너무 부담스럽지 않을까 했는데 생각보다는 유쾌했어, 우현씨.”
“아휴, 저는 오늘 이후로 선생님 얼굴 못 뵐까봐 걱정을 엄청나게 했습니다, 하하하. 다행이에요.”
그렇게 한 시간 더 술을 마시다가 자리를 파했다. 민 작가는 모범택시를 태워 집으로 보냈고 우현과 지나는 끝날 때까지 기다리고 있던 진명이 운전하는 차를 타고 집으로 향했다.
“오늘 자리에 못 껴서 서운하지?”
“아닙니다, 형님.”
“아니긴… 다음에는 네가 직접 작가들 컨트롤해야 돼. 그러니까 지금부터 피디, 작가들이랑 더 가까워지도록 노력해.”
“알겠습니다.”
“그래도 네가 했던 대답은 마음에 들었다. 민유리 작가에 대해서 어느 정도는 알고 있었다는 뜻이니까.”
“하하, 감사합니다.”
“그런데… 진짜 은하씨 연기 때문에 안 했던 거예요?”
술기운에 늘어져있던 지나가 아까 우현의 말을 듣고 어지간히 궁금했는지 고개를 들었다.
“하하. 사실 그렇진 않았어요. 그 때, 영화 ‘최종병기’와 민유리 작가 작품 중에 하나를 골랐을 뿐인 거죠. 다행스럽게도 ‘최종병기’가 천만을 넘어서 후회하지는 않았구요.”
“아… 그럼 아까 그 말은…?”
“민 작가님 작품이 까였다고, 진짜 그렇게 말할 수는 없잖아요? 설사 내 말이 거짓말인 것 같다고 하더라도 들으면 기분이 좋을 말은 아낌없이 날려줘야죠.”
“그렇구나. 고마워요, 특히 은하씨한테 미안하네요.”
“걱정하지 말아요. 설사 은하 귀에 들어간다고 해도 이해할 거예요. 제 영업방식 아니까. 그나저나 그 패션은 어떻게 생각한 거예요?”
“생각해보니까 지금까지 항상 긴 머리만을 했었더라구요. 천성적으로 머리가 잘 자라지 않는 편이어서 성인이 된 이후로 계속 긴 머리를 고수해왔고 극 중 역할을 맡을 때도 단발을 해본 적이 없었거든요. 물론 요즘 머리를 잘랐다가 붙이는 건 어려운 일도 아니지만 머리에 대한 애착이 강해서 머리를 자르는 일은 상상도 할 수 없었죠.”
그런 그녀가 머리를 단발로 자른 것이다. 그녀의 의지가 얼마나 강한지 엿볼 수 있었다.
“시놉시스 속의 혜주의 캐릭터는 ‘첫사랑’ 같은 느낌이었어요. 고등학생 때부터 성인 때까지의 모습을 연기해야 하니 고심을 많이 했죠. 그러다가 생각한 것이 머리를 자르고 대학생스럽게 의상을 보여주는 것이었어요.”
지나는 지금 봐도 어리고 발랄한 학생의 모습이었다. 작품에서 보여줘야 할 혜주의 모습이 딱 그녀의 모습처럼 보였다. 한껏 러블리한 지금의 모습에서 그 동안 무거운 연기를 해보인 그녀를 떠올릴 수 없을 만큼 달라진 모습이었다.
“고심한 흔적이 보이네요. 오늘 수고 많았어요. 내일 오전에 잘 갔다와요.”
“대표님은 같이 안 가시나요?”
“저는 내일 새벽부터 유니 음방 스케줄 소화해야 되거든요.”
“흐음… 대표님이 안 가신다니까 갑자기 마음이 무거워지네요. 아까 대표님이 민유리 선생님과 대화하실 때 얼마나 응원했는지 몰라요. 그런데 이제 도와줄 사람이 없네요.”
“진명이가 도와줄 거예요.”
“맞아. 내가 도와줄게!”
운전하고 있던 진명이 백미러로 그녀를 보며 주먹을 들어 올렸고 지나는 그의 모습에 피식 웃음을 지어 보였다.
“네네. 오빠가 있으니 든든하네요.”
다음 날, 새벽부터 유니를 꽃단장 시키고 MBS의 음악방송 리허설을 진행했다. 드라이 리허설을 마치고 점심을 먹을 때쯤에 민유리 작가에게서 전화가 왔다.
“오늘은 얼굴도 안 비추는 거야? 다 됐다고 생각한 거지?”
가벼운 목소리. 무조건 된 거다.
“그럴 리가 있습니까? 지나 잘 케어하는 진명이가 있어서 다른 스케줄 소화하러 왔지요. 음방 스케줄 아니었으면 당장 달려가서 스태프들에게 인사부터 드렸을 겁니다.”
“진짜? 그래, 믿어주지 뭐.”
“하하하, 감사합니다.”
“내가 유지나를 정말 오랜만에 봤거든. 지나가 신인 때 조연으로 같이 해본 적 있었어.”
“잘 알고 있습니다.”
“그 때는 뭔지 모르게 얼굴에 그늘이 있었거든. 사실 유지나는 이름값을 제외하고서도 그게 마음에 들지 않았어. 미팅 자리에 그렇게 어두운 얼굴을 하고 나타나니까 말이야. 그래서 주연급으로 성장했어도 걔는 내 작품 주연으로는 아예 배제한 뒤였지. 그런데 참, 사람이 바뀌기 쉬운 게 아닌데 말이야.”
아무리 돈을 벌어줘도 집에서 다 까먹으니 얼굴에 그늘이 없다면 그게 이상한 거다. 소년소녀 가장들이 캔디처럼 언제나 울지 않고 일어서는 건 드라마에서나 가능한 일이니까.
“좋은 쪽으로 바뀌는 건 쉬운 일이 아니죠.”
“난 그래. 아무리 연기를 잘해도 얼굴에 그늘진 사람이랑은 같이 일 안해. 나까지 어두워지거든. 그래서 좋더라. 이제는 얼굴에 그늘이 안 보여. 그래서 같이 하기로 했어.”
“감사합니다. 이번에 처음으로 같이 일 해보겠네요.”
“지금까지 선물 받느라 너무 민망했는데 이제야 선물값 하겠어. 다음 주에 정식으로 계약 맺자.”
“그 날, 손꼽아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사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