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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1] 잘 할 수 있는 것(2)
진명은 시놉시스를 바라보면서 장고에 들어갔고 우현은 그런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쉽지 않을 거다. 그냥 작가를 찾아가서 애원할 거라는 대답을 할 수도 없을 테니까. 그렇게 10분여를 고심하던 진명이 찬찬히 입을 열었다.
“민유리 작가는 자존심이 세고 남의 말을 안 듣기로 유명합니다. 그래서 배우들을 캐스팅할 때 조연 하나까지도 민유리 작가가 직접 선정한다고 들었습니다.”
“맞아. 그 고집불통 아줌마가 그런 면이 있어서 항상 제작진과 마찰을 일으키지. 그런데 시청률이 항상 괜찮게 나오니까 결국은 민유리 작가가 이겨. 시청률이 깡팬데 어쩌겠어?”
“그런 성격인데 일개 매니저가 민유리 작가에게 일방적으로 다가가서 아무리 어필한다고 한들 통하지 않을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제가 아닌 지나가 이 캐릭터를 완벽하게 빙의한 모습을 보여준다면 가능성이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그렇게 생각한 이유가 뭐야?”
“전작인 ‘미련한 여자’에서 한여름이 타이틀롤을 맡았었는데 연기력에 대한 논란이 있었습니다. 제작진들은 아무 문제가 없다고 했지만…”
타이틀롤은 단순히 주연을 말하는 게 아니라 제목에 등장하는 배역을 말한다. 예를 들어 햄릿이라는 연극의 주인공인 햄릿역이나 수사반장이라는 드라마의 반장역을 타이틀롤이라고 하는 것이다. 당연히 극을 이끌어가는 원톱 주연이며 그만큼 부담이 클 수밖에 없다.
“까탈스러운 민유리가 그걸 못 느꼈을 리 없지. 티를 내지는 않았지만 짜증은 났을 거야. 자신의 작품에 대해 자신감이 대단한 그녀이기에 아마 내 작품을 망쳤다고 화를 냈을지도 모르지.”
진명은 우현이 장단을 맞춰주자 자신감이 붙어서 점점 목소리를 높였다.
“그래서 만약 우리 지나가 여기 혜주역에 완전히 빙의한 모습을 보여준다면 충분히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어떻게 보여 줄 건데?”
“네?”
그것까지는 생각하지 못했는지 머리를 긁적이며 다시 장고에 빠져들었다. 우현은 그 모습에 피식 웃으며 입을 열었다.
“내가 민유리 작가랑 자리를 마련해볼게.”
“진짜입니까? 민 작가는 작품 들어갈 때 마음에 들지 않는 배우랑은 자리에 앉지 않는다고…”
“그냥 밥이나 같이 하자고 불러 낼 거야.”
물론 민 작가는 우현이 저녁식사 한 번 하자는 뜻이 순수하지만은 않다는 것을 알 거다. 그래도 우현이 그녀가 나올 거라고 확신하는 건 그 동안 작가와 피디들에게 공들인 게 있기 때문이다. 문제는 그 기회가 처음이자 마지막일 거라는 것.
보통 깐깐한 게 아닌 그녀는 더 이상 기회를 주지 않을 것이고 우현과는 부담스럽다는 핑계로 더는 자리를 같이 하지 않을 것이다.
“알지? 단 한 번이야. 두 번 기회는 없어. 지나씨, 이거 하기 싫으면 내가 다른 거 찾아 줄게요. 오늘 하루 동안 생각해보고 꼭 하고 싶다고 생각이 들면 나에게 말해요. 그럼 약속 잡을 테니까.”
“대표님은 제가 이걸 하길 바라시잖아요?”
“이게 가장 좋은 선택이라고 생각할 뿐이에요. 단지 제대로 하지 못할 거면 그냥 다른 걸 하는 게 낫다고 생각해요. 어설픈 모습 보이면 나도 실없는 사람 되는 거니까.”
“만약 한다고 하면 시간은 얼마나 있어요?”
캐릭터를 연구할 시간은 있어야 하니 물어보는 거다.
“나도 확신하지 못해요. 민 작가도 스케줄이 있을 테니까. 최대한… 늦어도 삼일. 그 이상은 나도 힘들어요. 본격적인 캐스팅이 이루어질 시간이라 그 이후는 결정 났다고 봐야 하니까.”
“그럼 그냥 할게요. 하루를 허비할 수는 없잖아요.”
“진짜 제대로 할 수 있어요?”
“제가 말했던 적 있죠? 저 두 말하는 여자 아니에요.”
지나는 독기가 가득 찬 눈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먼저 일어날게요. 약속 잡히면 연락 주세요.”
“알겠어요. 그리고 헤어 메이크업 받아야 할 일 있으면 청담동에 있는 ‘한미홍 뷰티페이스’로 가요. 내가 말 해놓을 테니까.”
“어머, 덕분에 미홍언니 다시 만나게 생겼네요.”
그녀가 대표실을 나가자 진명이 따라 일어났다.
“진명아.”
“네?”
“잘 해보자.”
짧지만 그 안에 담긴 수많은 뜻을 느낀 진명이 환하게 미소를 보였다.
“네, 기대하세요.”
진명은 지나에 대한 믿음이 대단한 것 같았다. 자신처럼 배우를 직관적으로 볼 수 있는 능력이 있는 게 아닌데도 저런 믿음을 보이는 걸 보면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들이 사무실을 나가자 우현은 핸드폰에 저장된 민유리의 전화번호를 찾아 전화를 걸었다.
“안녕하십니까, 선생님.”
“우현씨! 며칠 전에 선물 잘 받았어. 자꾸 이렇게 받기만 해서 미안하네.”
“미안하긴요. 맛있게 드시고 좋은 작품 많이 써주십쇼.”
“빈말이겠지만 고마워.”
“하하, 빈말 아닙니다. 그나저나 언제 한 번 식사 하셔야죠? 제가 그렇게 한번만 식사 하자고 말씀드렸는데 너무 바쁘셨던 거 아닙니까?”
“그 식사하자는 말이 어째 항상 내가 작품 할 때 만이었던 것 같지?”
“아닙니다. 오해세요. 아시잖습니까? 저 얼마 전에 회사 새로 세웠다는 거.”
“그래, 폐인처럼 지냈다고는 들었어. 저녁 한 번 먹자고?”
“네. 제가 괜찮은 식당 하나 섭외해 놓겠습니다.”
“아이 참, 부담스럽네…”
부담스럽다는 말은 곧 자신과 만나는 자리에 배우 들이밀지 말라는 말이다. 그녀도 자신과 저녁을 먹자는 말이 순수하게 같이 밥이나 먹자는 말이 아님을 아는 것이다. 그럼에도 수락한 것은 그동안 우현의 정성을 무시하기 힘들었기 때문이리라.
“부담가지지 마시구요. 모레 저녁에 시간 괜찮으시죠?”
“그래, 그럼. 그 때 보자구. 나, 너무 부담스럽게 하지 마. 알겠지?”
“네네. 그럼 문자로 식당 위치 보내드리겠습니다. 들어가십쇼.”
서울 시내에서 가장 괜찮은 한식당을 섭외한 후 문자를 보내놓고 진명에게도 이틀 뒤로 약속을 잡았다는 문자를 보냈다.
이후에는 유니에 대한 섭외 전화를 상대하며 시간을 보냈다. ‘그 양반 같은 자식’의 OST가 갈수록 인기를 얻기 시작해 결국 다시 한 번 음원차트 1위를 찍은 것이다.
특히 음악방송에 나온 유니 모습이 동영상 재생 사이트에서 조회수 50만을 넘기며 인기에 더더욱 탄력을 받기 시작했다.
마침내 SBC가 아닌 타 방송사 음악방송 스케줄을 연달아 잡아 본격적인 가수 생활 시작을 예고했다. 한 가지 다행스러운 점은 모레 예정된 민유리 작가와의 약속과 겹치지 않는다는 것.
“이제 로드도 또 하나 뽑아야겠네.”
별이도 그렇고 유니도 커가기 시작하니 이제 혼자서는 회사일과 로드를 병행하기 힘들어진다. 늦어도 다음 주 내에 로드를 하나 더 뽑아야 회사가 돌아갈 듯싶었다.
이제 유지나까지 영입하게 된 회사의 대표가 됐으니 계속 택시만 타고 다닐 수 없어 장기렌트를 신청했다. 그리고 마침 오후가 돼서 한가해진 김에 ‘그 양반 같은 자식’ 촬영장으로 향했다.
중간에 마트에 들러 음료수와 간식을 잔뜩 사들고 가서 가장 먼저 스태프들에게 돌리며 인사했다. 갑자기 촬영장에 나타난 우현을 보고 놀란 상준이 얼떨결에 간식을 돌렸고 마침 잠시 쉬는 시간이었던 별이는 대사를 외우다말고 다가왔다.
“왜 왔어? 가서 대본 더 보고 있어.”
“외우기는 다 외웠어요. 그런데 갑자기 촬영장에는 어쩐 일로 오셨어요?”
“그냥 연기하는 거 보러 왔지. 신경 쓰지 말고 연기에 집중해.”
별이는 우현의 말에 슬며시 미소 지었다. 그날 촬영은 자정이 돼서야 끝이 났고 우현은 별이 집 근처에서 상준과 별이와 함께 간단하게 치맥 한 잔 하기로 했다.
“갑자기 웬 치맥입니까?”
“그냥. 유지나 때문에 사기가 떨어진 건 아닐까 해서.”
“하하. 그렇지 않습니다. 당연히 더 좋죠.”
상준은 무슨 말이냐며 너털웃음을 터뜨렸지만 우현은 별이의 어색한 웃음을 놓치지 않았다.
“내 시선이 분산되는 것 같아서 불안해?”
“아니에요.”
말은 아니라고 해도 그게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걱정하지 마. 어차피 내가 처음 이 회사를 세울 수 있었던 건, 네가 있었기 때문이야. 유지나는 우리 회사가 크기 위해 필요한 발판이 되어 줄 거고. 너는 그 발판을 딛고 더 높이 날아오르면 돼.”
“알겠어요.”
“지금 드라마 반응 좋은 거 알지? 영화 ‘밀실’도 흥행 잘 됐는 데다가 이번 ‘그 양반 같은 자식’ 때문에 포털사이트에 네 팬클럽도 생길 것 같은 분위기더라. 그리고 드라마 촬영 끝나자마자 중국 스케줄 잡힌 것 알지?”
“네, 들었어요. ‘미녀는 괴롭냐?’ 팬미팅 잡혔다고…”
“아직 정확한 스케줄이 나온 건 아니지만 확정이나 다름없어. 중국에서 인지도만 잘 쌓으면 미니시리즈 주연으로 발탁되는 건 굉장히 쉬워져. 중국에서 들어오는 투자금이 어마어마하거든. 그러니까 이제 얼마 안 남았다는 뜻이야.”
“네. 열심히 할게요.”
별이는 그제야 입가에 환한 미소를 머금었다. 그걸 보니 우현도 마음이 놓였다.
시간이 흘러 민유리 작가와의 식사를 약속한 날이 다가왔다. 우현은 30분 전부터 도착해서 민 작가를 기다렸는데 그녀는 약속시간 10분 전에 도착했다.
“우현씨, 미리 나와 있었던 거야?”
“선생님과 식사하는 자리인데 늦으면 안 되잖습니까?”
“하여튼 말은 잘 해.”
이후 미리 시켜놓은 음식을 들여놓으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런데 민 작가는 시간이 지날수록 의아함을 느꼈다.
분명 이번에 들어가는 작품 캐스팅을 위해 만나자고 한 것 같은데 캐스팅 관련 이야기를 하지 않으니 의아하지 않을 수 없었던 거다.
“우현씨, 오늘 진짜 만나자고 한 목적이 뭐야?”
식사가 다 끝나갈 때까지도 입을 열지 않는 우현의 모습에 결국 궁금함을 참지 못한 그녀가 먼저 백기를 들었다. 그에 우현이 웃으며 들고 있던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이번에 차기작 들어가는 거 혜주역 캐스팅 확정됐습니까?”
“아직 안 됐어. 그것 때문이야? 흐음… 우현씨 배우들 중에 나는 그렇게 마음에 드는 사람 없는데?”
그녀는 빈말을 하지 않는다. 그걸 알고 있기에 우현은 기분 나쁘지 않았다.
“그런가요? 잠시만 기다려 주시겠습니까?”
민 작가의 황당한 얼굴을 뒤로 하고 우현은 자리에서 일어나 방을 나갔다. 그리고 잠시 후 우현은 밝은 갈색머리를 한 젊은 여자와 함께 방에 들어섰다.
“선생님, 안녕하세요?”
“유지나씨? 지나씨가 우현씨 회사 사람이었어? 몰랐네?”
“옮긴지 며칠 안 됐어요. 식사는 다 하셨죠?”
“으응.”
“그럼 우리 나가요. 술이나 한 잔 하면서 얘기해요.”
“그럴까?”
대뜸 치고 들어오는 그녀의 기세에 민유리 작가는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2차는 가라오케. 지나는 술이 들어오자마자 능숙하게 술을 말았다.
“선생님, 저 캐스팅 안 하셔도 되니까, 제 잔 한잔 받으세요.”
“뭘 그런 말을 하고 그래.”
“사실인데요, 뭘… 그런데 전에 뵀을 때보다 피부가 더 좋아지셨어요. 요즘 비싼데 다니시나 봐요?”
“자기 무슨 일 있었어? 사람이 바뀐 것 같아.”
“어머, 정말요? 정말 그렇게 보이세요?”
민 작가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그제야 자신을 바라보는 지나를 유심히 훑어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