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060] 잘 할 수 있는 것(1)
“어머, 그게 무슨 작품인데요?”
눈빛이 초롱초롱해진 걸 보니 여간 궁금한 게 아닌 듯했다.
“그건 이야기가 길어지니 내일 사무실에서 이야기합시다. 이제 곧 올 사람도 있으니까요.”
그의 말처럼 얼마 지나지 않아 별이와 상준이 도착했다.
“안녕하세요. 반갑습니다.”
“어머나, 엄청 예쁘세요. 김별이라고 합니다.”
반갑게 인사하며 들어왔지만 둘의 얼굴에는 피곤이 잔뜩 내려앉아 있었다.
“지금까지 촬영하셨죠? 너무 힘드셨겠다.”
“말씀 놓으세요. 한참 선배님이신데요. 제가 언니라고 불러도 될까요?”
“호호호. 그럼 그럴까? 나야 언니라고 불러주면 좋지. 그런데 술은 할 줄 알아?”
“그럼요, 당연하죠. 그런데 안주빨 좀 세워요, 후후.”
별이와 지나도 친해지는 것을 보니 마음이 놓인다. 상준과 진명도 술을 주거니 받거니 하며 인사를 나눴다.
“둘 다 팀장급이긴 해도 진명이가 상준이보다 나이가 많고 이쪽 일에 선배니까 그냥 존댓말만 해. 너보다 선배니까 그래도 배울게 많을 거야. 같은 직급이지만 깍듯하게 대해. 알겠지?”
엄밀히 말하면 상준이 하는 일이 로드매니저이긴 하지만 그 외의 일도 조금씩 가르치고 있기에 팀장 명함을 파줬다.
서열까지 정리해준 이후로는 의식적으로 작품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그저 친분이나 다지고 잡다한 이야기만 나누며 술자리를 마무리 지었다.
아침에 깨질 듯한 머리를 부여잡고 출근해서 업무를 하고 있는데 CS엔터테인먼트 윤민석 제작피디에게서 연락이 왔다.
“안녕하십니까? 오랜만입니다.”
“네. 오랜만에 연락을 드렸죠? 요즘 김별씨가 출연하는 ‘그 양반 같은 자식’ 잘 보고 있습니다. 김별씨의 매력이 더 돋보이는 배역을 맡으셨더라구요. 드라마 끝나면 몸값이 더 올라가겠습니다.”
“하하, 감사합니다. 그나저나 어쩐 일로 연락을 다 주셨습니까?”
윤민석 제작피디의 목소리가 좋은 것을 보니 분명 좋은 소식일 거라는 예상은 들었다. 하지만 짐짓 모른 척했다.
“전에 찍었던 웹드라마 ‘미녀가 괴롭냐?’가 중국 쪽에서 상당히 반응이 좋습니다. 지금 절반도 안 되게 방영했는데 벌써부터 상당한 팬덤이 형성됐습니다.”
“그런가요?”
확실히 중국 쪽 소식은 포털에 기사화되는 것이 조금 늦는 것 같다. 아니면 기사화되기 전에 CS쪽에서 연락을 준 것일 수도 있고.
“그래서 K보이즈의 유시훈과 김별씨가 중국으로 팬미팅을 해주실 수 있는가 해서 연락 드렸습니다.”
“그거야 좋죠. 하지만 지금은 드라마 촬영이 한창이라 다음 달까지는 정신없을 것 같습니다.”
“그건 알고 있습니다. 드라마 촬영이 우선이죠. 아마 지금 찍고 있는 촬영이 끝날 때쯤이면 웹드라마가 끝났을 겁니다. 저희는 그것을 바탕으로 여러 가지 행사를 진행할 거구요.”
반응이 좋으니 저런 행사를 하는 거지 만약 반응이 좋지 않았다면 유야무야 넘어갔을 거다. 그래서 드라마 시작 전에 행사를 하지 않고 반응을 본 뒤에 행사 계획을 잡는 것이다.
“그렇군요. 그럼 저희 쪽 촬영이 끝나고 중국으로 바로 넘어가기를 바라신다는 거군요.”
“맞습니다. 최대한 빠르게 가셔서 일정을 소화해주기를 원하는 거죠.”
“며칠간 진행할 예정입니까?”
“북경에서 이틀, 상해에서 이틀간 진행할 겁니다.”
“호텔은요?”
“호텔이요?”
그것까지는 생각 못했는지 멈칫한다. 그의 입장에서는 당장 갈 것도 아니기에 호텔을 잡아놓을 생각을 못했을 수는 있다.
하지만 그의 반응에 우현은 쓴웃음을 지었다. 그의 입장이 이해가 가지만 우현의 입장에서는 호텔을 비롯한 제반 경비에 대해 정확히 알아둬야 할 필요가 있다.
이것을 먼저 분명히 이야기해두는 건 그가 예전에 은하를 데리고 처음 중국에 갔을 때 당했던 일이 항상 기억에 남아있기 때문이다.
그 때 호텔을 잡아놓지 않아 고생했던 것만 생각하면 아직도 이가 갈리는 기억이기에 어딜 가나 호텔 먼저 확인하는 것이 버릇처럼 됐다.
“네. 그리고 항공료는 어디까지 제공해주시는 겁니까? 김별 혼자만인가요? 아니면 매니저와 코디까지 인가요?”
“아, 그건 저희 쪽에서 다시 확인하고 연락드리겠습니다.”
“그럼 부탁드립니다. 그리고 한 가지만 더 부탁드리겠습니다. 호텔은 꼭 좋은 걸 잡아달라고 원하는 건 아닙니다. 가장 중요한 건 안전입니다. 수준이 조금 떨어지는 걸 잡더라도 반드시 안전한 호텔을 잡아주셨으면 합니다. 무슨 사고가 생길지 모르니까요.”
곁가지가 많이 붙어 있지만 핵심만 보면 그냥 좋은 방 잡아달라고 하는 말이다. 솔직히 대놓고 좋은 방 잡아달라고 하면 좋게 볼 리가 없지 않은가? 더구나 아직 데뷔한지도 얼마 안 된 신인 주제에 말이다.
그래서 우현이 철판 깔고 안전을 위한다는 명목으로 신경 좀 써달라는 말을 한 거고 안전한 방을 찾다보면 결국 좋은 호텔을 잡을 수밖에 없다.
“알겠습니다. 최대한 고려해보라고 하겠습니다. 그럼 다시 연락드리겠습니다.”
“네, 감사합니다.”
아마 그도 느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대놓고 뭐라고 할 수는 없는 일. 이런 요구가 한두 번도 아니었을 테니 말이다. 그리고 중국은 진짜 어떤 일이 일어나도 이상하지 않은 동네다. 만약 경찰 수십 명이 별이를 지켜준다고 하면 싸구려 호텔에 재운다고 해도 수락할 용의가 있다.
전화를 끊고 포털을 살펴보니 유지나의 계약해지 기사가 눈에 들어왔다. 혹시나 해서 키웨스트의 주가를 확인하니 큰 변동은 보이지 않았다. 역시 그녀가 근 1년 동안 작품을 쉬었던 것과 어차피 계약기간이 1년도 채 남지 않았던 것이 이미 주가에 반영되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기사 말미에는 파인 엔터테인먼트로 둥지를 옮기는 유지나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는 기자의 코멘트가 보였다.
[키웨스트라는 크고 단단한 울타리를 떠나는 그녀는 도대체 무슨 생각인 것일까?]
기자로서 충분히 가질 수 있는 물음이지만 기분이 과히 좋지는 않았다.
‘유은하나 강소연이 왔으면 미쳤냐고 했겠구만.’
그 밑에 달린 댓글들을 보면 기자와 크게 다를 것이 없는 내용들이었다. 다만 다른 점이 있다면 키웨스트가 워낙 관리를 못 해줬기에 작은 회사로 가면 뭔가 달라지지 않을까 하는 바람이 섞여 있는 정도다.
점심을 먹고 한 시간 정도가 흘렀을 때, 유지나와 진명이 도착했다.
“너무 기대하는 거 아니에요?”
그녀의 초롱초롱한 눈을 보고 있자니 일에 대한 열정이 보이는 듯 했다.
“눈치 채셨어요? 저 어제 한숨도 못 잤어요.”
“한숨도 못 잔거 치고는 피부가 좋네요.”
“피부 관리야 여배우의 기본이니까요.”
우현은 자신의 책상 위에 있던 종이뭉치를 들어 그녀에게 건넸다.
“한 번 읽어봐요. 두 개니까 너도 읽어 봐.”
“시놉시스인가요?”
“네. 앞장을 빼버려서 작가와 피디는 알 수 없을 거예요. 편견 없이 보라는 거니까 일단 읽어봐요.”
지나와 상준은 영문도 모른 채 시놉시스를 읽었다. 한참을 읽어 내려가던 지나가 먼저 시놉시스를 내려놓았다.
“여기에 나온 혜주가 제가 맡을 배역인가요?”
“맞아요. 읽어 보니까 어때요?”
그녀는 조금 곤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조금… 당황스럽긴 해요. 뭐라고 할까, 너무 가볍다고 할까요?”
“그렇죠? 맞아요. 여기에 나오는 혜주라는 역할은 가볍고 발랄하며 긍정적이에요. 진명이에게 듣기로는 애교 같은 거 잘 부리지도 못하고 싫어한다고 들었어요. 맞아요?”
“네, 맞아요. 그래서 오해를 받을 때도 있긴 해요.”
“그럴 거라고 생각했어요. 지나씨의 필모를 보면 멜로 위주였어요. 로맨틱 코미디를 해도 주로 무거운 성격을 맡았구요. 작가가 그렇게 썼을 수도 있지만 내 생각에는 지나씨가 캐릭터를 본인이 원하는 쪽으로 해석했다고 하는 편이 더 설득력이 있는 것 같아요. 본인이 생각했을 때는 어때요?”
“하아… 진명 오빠가 그렇게 칭송하는 이유가 있었네요. 맞아요. 제가 그런 면이 있긴 했어요. 그래서 작가님과 약간의 트러블이 생기기도 했었구요.”
“지나씨가 생각했을 때 본인의 매력이 뭐라고 생각해요?”
신인이라면 ‘그냥 이거 해’라고 하면 된다. 하지만 유지나 정도 되면 그럴 수 없다는 걸 안다. 은하를 통해서 얻은 교훈이다.
“으음… 베이글? 푸하하!”
자신이 말해놓고도 민망한지 웃음을 터뜨렸다.
“맞아요. 베이비 페이스에 글래머러스한 몸매. 그런데 지금까지 드라마를 통해서는 그 매력이 단 한 번도 드러나지 않았다는 거 알아요?”
“그렇다고 제가 벗을 수도 없고…”
“하하하. 아뇨. 글래머러스한 몸매를 드러내지 않았다는 게 아니에요. 그거 꽁꽁 감춰둬야죠. 중요한 건 베이글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너무 무거운 연기만 했어요. 시청자들은 드라마를 통해 유지나씨의 매력을 보고 싶은데 지나씨는 자꾸 시청자들한테 다른 걸 보라고 강요해요. 베이글에 감춰진 나의 숨겨진 매력, 나도 이런 진지하고 무거운 내면연기를 할 수 있다고 주장하죠.”
“할 말이 없네요.”
씁쓸한 표정의 그녀는 우현의 말을 전부 인정하고 있었다.
“지나씨 생각이 틀렸다는 거 아니에요. 그런데 아직 시청자들은 보고 싶어 하는 것도 보지 못했는데 관심도 없는 걸 보라고 주장하니까 채널을 돌릴 수밖에 없었던 거죠. 여기 혜주라는 인물은 시청자들이 보고 싶어 하는 유지나씨의 매력을 가장 완벽하고 확실하게 보여줄 수 있는 캐릭터라고 나는 생각해요.”
“그런가요? 생각해보면 그런 것 같네요. 잘 할 수 있는 일과 하고 싶은 일 중에 저는 하고 싶은 일만 했던 것 같아요.”
“하고 싶은 거 얼마든지 해도 돼요. 최소한 보여줄 수 있는 건 다 보여준 다음에 말이에요. 어때요?”
“고마워요. 그냥 하라고 하면 했을 텐데 이렇게 불편하지 않게 말씀해주셔서…”
“이렇게 말 안하면 분명 저 배역 맡아도 본인의 해석대로 연기했을 거니까요. 내 말 틀려요?”
“후훗! 맞아요. 아, 큰일 났네. 나 이제 애교수업이라도 받아야 하나?”
“가르쳐주는 데가 꼭 있었으면 좋겠네요. 자, 이제 지나씨는 넘어갔고, 네가 남았다.”
“네? 저요?”
진명이 깜짝 놀라서 우현을 바라보았다. 그저 지나의 매니저로서 자리에 앉았을 뿐인데 갑자기 자신을 거론하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래. 이거 누가 썼을 것 같아?”
“이 시놉시스를 쓴 작가님이요?”
“맞아. 꼭 답을 맞혀야 하는 건 아닌데, 그냥 네 감이 어느 정도인지 알고 싶으니까 물어보는 거야.”
한참을 고심하던 진명이 우현의 눈치를 보며 힘겹게 입을 열었다.
“예진희?”
“아니야.”
“아, 그럼 김은선!”
“틀렸어. 됐어, 어차피 정답을 꼭 맞혀야 하는 건 아니었어. 이거 쓴 작가는 민유리야.”
“어? 민유리 작가가 쓴 거 같지 않은데?”
“그렇지? 항상 무거운 멜로만 썼으니까. 자, 내가 왜 네 차례라고 했는지 알겠어?”
진명이 무거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민유리 작가는 꼭 최고의 톱스타만을 캐스팅하길 원하니까요. 이래서 작가 이름을 가리셨네요. 알았으면 대본 읽어보지도 않았을 테니까요.”
“지나씨를 데리고 오려고 마음먹었을 때 민유리 차기작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어렵사리 이 시놉 구한 거야. 민유리는 지금 여주인공 누구로 생각하고 있겠어?”
“유은하, 송혜연…”
“맞아. 이거, 따 올 수 있겠어?”
“이걸요? 제가요?”
“그럼 너지. 필요하다면 지나씨를 이용해서라도 따 와봐. 너 알지? ‘도깨비 전설’의 저승사자역을 맡은 남자배우, 김은선이 안 쓰려고 했던 거. 그 배우가 그 배역 맡으려고 김은선이 타고 가는 비행기까지 같이 타서 꼭 그 역할 자기가 하고 싶다고, 잘 할 수 있다고 피력했어. 유지나 매니저로 대답해봐. 자, 너라면 어떻게 하겠어?”